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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광 (control freak) 01
“누나.”
“응?”
원도는 남이를 향해 마냥 조심스러운 제스처로 그녀를 유인했고 그녀는 그 손짓을 잘 따라가 주었다. 둘만 남은 이 곳에서는 한동안 정적이 자리했다. 가슴을 꽉 조여올 만큼의 무거운 침묵이 그들에겐 오히려 편했다. 이들이 서로를 멸시하는 존재가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이것을 가리기엔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다. 사실상 그들에겐 이미 ‘내가 왜 쟤랑 사이가 나빠야만 하는 거지?’하는 생각도 몇 번씩 들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흐지부지 해져버린 마음을 드러내기엔 그 틈이 너무나 벌어져있어 건너가기가 힘들었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게 더 편할 정도로.
“지금 되게 신기한 거 알아냈는데.”
“….”
“한새? 그 이름을 말하는 네 태도, 그리고 아까,”
“뭐?”
“그만두라니…. 안 어울리게.”
둘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수성은 주머니 안에 있는 손을 펴서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손가락을 놀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지루했다. 겨울은 수성의 큰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이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보는 주위가 산만한 그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수성은 알지 모르겠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발로 박자라도 맞추는 듯이 -교복-바지가 흔들렸다.
“너 원래 이랬냐?”
“아, 존나 시끄럽네.”
“공유음 있을 땐 안이랬잖아?”
‘공유음’, 수성은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제 스스로 손, 발동작을 멈추었다-어쩌면 다리를 떠는 것은 의도되었거나, 의식적으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여전히 주머니 안에 숨겨져 있던 손을 꺼내어 등 뒤로 숨겼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는 손놀림을 알지 못하는 겨울은 등 뒤로 제 손을 숨기는 수성의 행동이 웃기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뭐하냐?”
“…다섯, 여섯…….”
“뭐하냐고.”
“궁금해?”
“어.”
씩 웃으며 묻는 수성의 얼굴에서 순간 살기가 느껴진 것은 기분 탓으로 돌린 채 얼른 대답을 해버린 겨울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망설임 없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버린 수성의 힘 덕분에 뒤로 밀려난 것이다. 겨울은 넘어진 채, 얼른 일어나지 않았다.
“웃기지? 시발. 때릴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겨울이 조심스레 조소를 흘렸다. 아무리 기분 나빠해야 할 사람이 겨울이라지만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것도 겨울이었다. 수성에게 ‘공유음’이란 단순한 금기어가 아니었고 그걸 잘 알고 있는 겨울이 먼저 수성에게 그 얘길 꺼냈다는 것은 그를 도발하는 것이다.
“…공,유,음.”
그에게 공유음이란 너무나 과분했다. 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딱딱 끊어지는 수성의 호흡이 오히려 겨울을 혼란스럽게 했다. 수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소문만큼 잔인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인 ‘공유음’에 대해서 지금 수성의 반응은 겨울에게 의외였다. 굉장히 화를 내면서 달려들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을 뻔했다. 왜 제 마음이 약해지는지, 그 이유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수성이던, 겨울이던 공유음이 그리운 것이다.
* * * * *
약간의 녹색을 띠고 있는 교복은 일대에서 유명했다. 아니, 그것을 입고 있는 그가 유명한 것이다. 왼쪽 가슴팍에는 명찰이 뒤집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공유음’. 약간의 긴 머리에도 전혀 지저분하게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저보다 왜소한 수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의 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의지하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수성의 모습이 어쩐지 빠르게 다가오는가 싶었더니 그는 뛰어오고 있었다. 오면서도 뭐라 하는 말이 있었지만 유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아니면 별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때 수성이 완전히 가까워졌고 그 모습에 유음이 뒤로 물러섰다.
“뭐야, 공유음.”
“뭐가?”
“어디 가는 건데.”
“…아, 글쎄.”
“…제대로 말해, 새끼야.”
“…새끼?”
그 순간 유음은 고소를 짓더니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수성의 어깨를 강하게 쳤다. 그 힘에 의해 수성은 그대로 넘어졌고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은 의문이 들었다. 이미 어느 정도 멀어진 유음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친구 맞냐?”
망설임 없이 뻗던 다리가 그 질문에 의해 멈췄다. 우뚝 선 유음을 보는 수성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만약 아니라고 할 경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수성은 고민하던 도중에 유음의 답을 듣지도 않고 급하게 질문을 바꿔버렸다.
“언제 다시 오는데?”
“…4월, 31일.”
“…기다려도 되냐?”
여전히 뒤돌아선 채로 있는 유음은 제 미소가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않는지 무언의 쓸쓸한 미소를 짓다가 가버렸다. 그 후 유음은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고 학교까지 나오지 않아 교내에서는 그가 –실상 같은 경우지만- ‘강제전학’, 또는 ‘퇴학’을 당했다는 소문과 그가 때린 학생이 심각한 상처를 얻은 채로 입원해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피해자가 한겨울, 이라는 것도. 유음의 공백으로 인해 웬만큼 3이라는 숫자로 유명했던 3명중에 감수성과 강원도는 애써 멀쩡한 채로 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춰버렸다. -마치, 공유음처럼-
며칠 뒤 그들이 다른 지역의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오고 난 후 둘이 같이 머물게 될 새 집에서 짐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달력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4월 31일은 없었다.
“시발, 공유음.”
“공유음이 왜?”
“처음부터 돌아올 생각 없었나 보네.”
처음엔 충격과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왔던 사실이 점차 익숙해지고 공유음이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 익숙해지면서 그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 칭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러기엔 함께 지낸 정과 함께 나눈 정이 너무나 컸고 넘쳤다. 결국 ‘공유음’은 수성과 원도에게 강박현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 * * * *
그리고 그런 채로 지내다가 정만 오랜만의 역겨운 재회. 유음이 모습을 감춰버린 근본적인 원인, 한겨울. 누군가를 쫓아 이곳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으로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인지.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수성과 다시 마주하게 될 확률이 너무 낮다. 고로, 그를 쫓아왔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아 떨어진다.
“기분 나쁘네, 이거.”
“그러냐?”
겨울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거슬리는 수성은 씩 웃으며 낮게 욕을 읊조렸고 주먹을 꽉 쥐었다가 멀리서 보이는 원도를 발견하고는 손에 힘을 뺐다. 겨울이 갸우뚱하며 의아해하는 모습이 원도에게도 보였다. 원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수성과 겨울 사이에 섰다. 수성을 향한 채로 싱긋 웃어 보이더니 자연스럽게 겨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성보다 키가 더 큰 원도였기에 넓게 벌어진 어깨로 인해 수성은 더 이상 겨울을 볼 수 없었다. 수성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순간에 원도의 음성이 그곳을 휘감았다.
“가라, 그냥.”
“…….”
“공유음이 너한테 한 행동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의 말에 겨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가운데손가락을 세워 원도를 놀리더니 재빠르게 돌아섰다. 뒤늦게 남이가 어디선가 나와 수성을 보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수성아, 왜 그래?”
수성은 남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겨울을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듯 얼른 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수성은 고갤 갸우뚱거리며 원도를 주시했다. 그러자 원도는 아무 말도 않은 수성에게 먼저 실토했다.
“말 안 했어.”
“왜?”
“…그냥.”
‘네가 더 힘들어할 까봐’, 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남이는 볼을 한 가득 부풀리더니 고개를 휙 돌려서는 가버렸다. 아무래도 겨울을 쫓아가는 것 같았지만 둘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차라리 ‘그 질문’의 답을 듣는 편이 나았을 텐데.”
“어?”
“공유음이랑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
“…응.”
뜨거운 열기가 비로 인해 겨우 달래지고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지금 이 시기에 정말 오랜만의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어쩌면 단지 그들의 마음이 시렸을 뿐일지도. 둘은 여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학교를 빠져나갔다.
* * * * *
“내가 왜,”
“한번만~ 같이 가기만 해줘, 제발!”
“시간 없어.”
“한새야아~, 부탁할게!”
말로는 단호했지만 이미 반쯤 끌려가고 있는 상태의 한새. 아예 다 젖은 채로 시내의 중심까지 와서 또 한새를 보게 된 둘은 거의 동시에 멈춰 섰다. 유난히 한새의 우산이 튄다고 느끼던 수성은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반강제로 끌려가던 한새가 옆의 친구와 같이 뛰는 바람에 그와 그를 따라가던 원도까지 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숨이 차오르고 힘들다고 느낄 때쯤 익숙한 카페가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한새와 그녀의 친구는 그 카페, ‘마돈나’로 들어갔다. 그들을 지켜보던 수성과 원도가 걸음을 멈췄고 몇 초 후 수성이 다시 뛰려는데 원도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들어갈 거냐?”
턱 끝으로 마돈나를 가리키며 수성에게 물었더니 그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뭐 그런 당연한걸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원도를 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의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았고 조용한 노랫소리가 그들의 귀를 자극했다. 잔뜩 젖은 모습으로 실내에 들어오니 종업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너무도 당당히 걸어와서는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옆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웃음을 강요당하며 억지웃음을 짓던 한새는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아이의 질문을 받고 곤란한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교복에서는 아직도 아까 맞은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수성과 원도를 발견했다.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가 다시 눈길을 돌렸고 그 때, 수성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다가 그것을 본 종업원이 얼른 달려와 그를 제지했다.
“손님, 지금 손님 옷이 너무 많이 젖어서 자리를 옮기시면 곤란한데요.”
제 손목을 잡고는 행동에 제한을 주는 종업원을 스윽 쳐다보더니 인상을 구기고는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종업원이 그를 다시 저지하려 하자 수성이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고 덕분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원도는 익숙한 듯 의자에 편안히 앉은 채로 여전히 한새가 있는 테이블을 관찰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수성 쪽을 보려고 고갤 돌린 세 명의 남학생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마지막 남학생에게 시선이 꽂혔다.
“수성아.”
“아, 싫다니까요!”
“야, 감수성.”
“아오, 왜.”
“쟤 원이 아니냐?”
“…어디.”
“걔랑 같이 있는 남자애 중에.”
수성이 원도의 말을 듣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갤 돌리는 순간 귀엽게 웃음 짓고 있던 그-원-의 표정이 싹 굳어버리더니 입을 떡 벌리고는 급하게 나온 말이라는 게 겨우, ‘헐’ 이었다.
“…오늘 할머니 생신이라고 약속 취소한 애네.”
“헐….”
“낙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