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방향이 없어도 내달릴 수 있는 사랑, 이름도 얼굴도
잊어버리는 사랑, 바람의 질주를 꿈꾸는 자유로운 사랑,
국가와, 세계와, 이념과, 윤리에서조차 탈주하는 사랑, 그것들에게
총 들이대는 사랑, 세상 어디에도 부응하지 않는 사랑, 아니 결코
그러지 못할 사랑, 그럼에도 순수한, 맨 몸의, 사랑.
사랑 그 외에는 아무런 욕망도 저의도 없는 사랑, 단지
사랑 뿐인 사랑, 다음 生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랑, 너무도 간절한.
4월 5일에 마지막으로 심은 기억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사랑,
13월 13일처럼 어디에도 없는 사랑, 그러나 어딘가에는 있을
사랑,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사랑, 그 사람과의
13월 13일의 사랑/김승희
그런 사랑
13월 13일 같은 그런 사랑
토끼와 거북이가 뒤로 달리는 경주를 하고
싱그러운 초원 위에 뒹굴고 노는 그런 사랑
동서남북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방향을 지우고 놀다가
끝내는 이름도 얼굴도 잃어버리는
낙원 같은 그런 사랑
토마토 한복판을 가운데로 잘라내
똑똑 떨어지는 붉은 태양혈을 배꼽에 칠하고
응애 놀이를 하며 다시 태어나는 그런 사랑
우리는 세계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국가의 요구에 부응……
안하는 그런 사랑
인디언 추장을 만나 손을 잡고
바람의 질주를 그리며 달리는 그런 사랑
세상의 달력을 잊어버리는
총, 성경, 질병을 잊어버리는 그런 사랑
탈주하는 사랑
탈주를 웃는 사랑
탈주조차도 잊어버리는 사랑
눈보라처럼 부응할 방향 자체가 없는 그런 사랑
반대로 달려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즐거운 즐거워서 원기 왕성해지는
13월 13일만 같은 그런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