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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 큰 스님 법문
부부는 전생에 악연이었기 때문에 현생에 만나 빚 받기 위해 서로 만난 것이다.
이 금생에 한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이 몸을 받았을 때 반드시 해탈의 길을 가야하는데 해탈의 길을 못가고
중생길인 탐, 진, 치에 빠져 있다.
물질을 추구하고 욕심을 가지는 순간
좋고 나쁨의 분별 심을 갖는 순간 업식이 생긴다.
욕심을 버려라.
스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버리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죽어야지요. 무슨 재미로 삽니까?
십륜경에 희노애락(4폭류) 속에서 한 폭류 속에 빠져도
네 가지 폭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 폭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네 가지 폭류를 즐기면서 환희가 없다면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그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있을까?
식자들이 갈구하고 추구하고 다닌다.
가진 자가 즐거움을 누리는 재미로 산다. 즐거움으로 착각한다.
그것을 버렸을 때 오는 즐거움은 상상도 못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희노애락 네 가지 중생의 기쁨을 버리면 법 맛의 즐거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즐거움, 환희가 열린다.
그 세계는 정말 자유롭다.
여러분들은 지금 자유를 잃어버렸고
항상 구속과 속박 억압이 나를 지배하고 괴롭히고 있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그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고 즐기면서 살고 있다.
이게 어리석음 이다. 진정 자유는 무엇이 자유이냐?
그러한 근심, 걱정이 없고 고통이 없어야 한다.
평정심으로 내자유가 있어야 한다.
속박에 묶여 끌여 다니고 있다.
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세상을 자유롭게 살다가 이 몸 벗고 가더라도
다음 생에 내가 원하는 곳 갈려서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몸을 받을 때는 내 뜻과는 관계없이 숙명으로 내 몸을 받아 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상적이고 훌륭한 몸을 받았다.
우리가 같은 몸을 받아 오더라도 불구의 몸으로 한생을 살러오는
중생에 비하면 전생에 덕을 쌓은 것이다.
금생에 와서 더 큰 덕을 쌓는다면 다음 생에 보장 받는다.
똑같이 부여받아오는데 제왕의 아들, 장자의 아들, 백정의 아들,
거지의 아들로 태어난다. 왜 이런 차등이 나오는 것인가?
바로 그 차등이 전생에서 닦아서 오고 공덕을 지어서 간다면
다음 생에도 보장을 받는다.
윤회(輪廻)라는 말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윤(輪)은 바퀴를 이르고 회(廻)는 돌 회로 바퀴가 돌아가듯이 인간,
만물의 생명체가 돌고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나’라는 사람이나 이‘컵’ 중생이나 똑같다.
내가 컵의 몸으로 가고 컵이 나의 몸으로 온다.
생물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태로 4생은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순으로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우리는 종이 한 장도 그냥 종이로만 보았다.
종이를 중생으로 이야기 하면 이해가 안 된다.
유정(有情)이라고 하면 이해 될 것이다.
유정과 무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유정(有情)은 형체가 있는 생명이고 무정(無情)이란 형체가 없는 생명이고
영가세계도 그것이다. 중생은 무리를 지어서 생존의 습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복사지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그 유정 세계 안에 이 몸을 받아서 돌고 돈다.
죽으면 이 지구 밖으로 떠나는 것으로 착각 하고 죽으면 별나라로 간다?
별나라는 우주 밖에 있다라고 망념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 지구를 떠날 수 없다.
지구를 떠날 수 있는 자리는 단 한자리 부처의 자리이다.
모든 집착이 끊어진 자라야만 지구를 벗어날 수도 있고
머물 수 도 있고 가거나 오거나 걸림이 없다.
이래서 방생이 되어야 한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자리를 방생이라고 한다.
한국의 불교가 언제 부터인가 약 4-50년 전부터 민속 문화를
불교에서 흡수하여 자기 것이 냥 사문들이 법복을 입고
죄인지 죄 아닌지도 모르고 불자들에게 유언비어아닌
유언비어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가르칠 때
우리가 성문독각이 되라고 가르친 게 아니다.
부처가 되라고 가르쳤다.
불법에는 오로지 대승 밖에 없다.
소승, 대승 삼승법이 왜 만들어졌나.
그것은 방편이었다.
부처님이 다시 노하였다.
하급중생은 보살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하급중생에게 보살로 가라고 하지 않았다.
중생의 근기에 맞춰 각자 그릇에 맞게끔 주다보니
그것을 두고 삼승법이라고 표현한다.
일승, 이승, 삼승이라는 구분을 지어 놓았을 뿐이다.
바로 받아 들이는 전생공덕이 있는 자라면 말할 수 없다.
전생공덕이 없더라도 닦지 못할 중생이라도 금생에 닦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모래공양을 부처님께 올려도 가사장삼 바느질 하는 것도 공덕이다.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공덕이다.
그 인연을 지어주기위해 일승, 이승, 삼승 지어준 것이다.
열반 드실 때 부처님이 번복하셨다. 삼승은 원래 없다.
모든 제불부처는 부처를 위해 설할 뿐이고 보살을 위해 줄 뿐이다.
성문독각에는 해당되지 않노라고 번복하였다.
법이 쇠퇴하고 법에 힘이 약해 질 때 중생을 다스릴 수 없다.
중생이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추었는데 누가 이 스님을 따르겠느냐?
뭔가 뛰어난 것이 있고 이 스님의 목소리가 여러분 귀에 파고
들어갈 수 있어야 받아들인다.
남을 가르칠 때 내일 먹을 양식을 비축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하루하루 그때마다 노력한다.
없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공덕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줘라.
없는 그 사람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조차 없지 않느냐.
그것이 30-40년 이후 그 부처님 뜻을 어긴 것이다.
앉아서 받아서 누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팔상록에 보면 잘나와 있다.
우리 중생이 마왕 파순이가 부처님을 찾아 다니면서
부처님을 40년간 섬기면서 부처님이 빨리 열반에 들기 바란 악 제자가 파순이다.
그놈은 매일 같이 부처님께 인사로 이제 내일은 모래는 어디로 가십니까?
부처님 경유한 자리를 둘러보고 열반에 드셔도 되지 않습니까?
이제 후 500년이 지나면 나의 자식은 부처종자로 만들어
이 불법을 휘저어 놓을 것이다.
그 때는 내 종자가 사문이 되어 법도 없고 술, 고기 먹고 ,
기집 질하는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놓을 것이다.
파순이가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려는 것을 부처님이 본 것이다.
보았지만 어쩔 수 없는, 파순이가 아니더라도
내 제자들이 다 훼손시킬 것임을 다 보았기 때문에
습쓸히 웃으면서 열반하셨다.
그때가 되면 다시 이법을 이양 받아 지옥중생을
구제하러 오는 이가 있다고 답변을 해놓았다.
그 후 500년 뒤에 오실 그 성인이 누구냐 바로 지장보살이다.
석가의 법이 2500년 동안 지장보살이 잠시 휴가 갔다.
2500년이 매우 긴 것 같지만 지장의 법에는 25시간도 안되는 기간이다.
석가에게 맡겨놓고 휴가 갔다 온 것이다.
그 잠시 맡겼다는 그 대목은...
부처님은 한 시대 임기가 있다.
대통령도, 왕도 임기가 끝나면 힘이 없어진다.
세월은 한없이 흘러간다.
지장보살은 이 세상에 언제 부터 나투어셨나?
아직도 목건련존자가 지장보살이라고 믿고 있다.
스님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처음 오신 분 그분도 화신이다.
목건련존자는 자기 업을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나 있을 뿐이다.
그 이전부터 지장보살이 존재했다.
지장은 조건이 없는데
조건이 있는 자들이 지장으로 알고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지구에 부처가 없는 시대 최초의 부처 지장보살이 경전이 만들어진 자리가
최초의 경전이 만들어진 자리이다.
이것을 읽으면서도 안 보인다.
내 눈이 까막눈이 되어서 안 보인다.
그기에 석가가 마야부인을 제도하기 위해
도리천궁에 불러 모은 지장이 제도하여 구제한 중생의 숫자를
부처도 셀 수 없노라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 할 수 있는 자는 지옥을 비켜갈 수 있는
성문의 자리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성인의 자리이다.
그렇게 보내버리면 지구에 중생이 없어야 되지 않느냐?
제도 안 된 자가 마왕 파순이의 종자는 끊임없이 내려 갈 것이니
그 마지막 종자 까지 제도시켜야만 지옥이 텅 빌 것이다.
지옥을 비우는 게 내 한자리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아야 지옥이 빈다.
이렇게 미혹을 헤메다 보니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 의심이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의심을 일으키는 그 자리가 미혹이다.
부처님이 와도 부처님을 못 알아 보는데 왜 그러냐?
의심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못 알아 본다.
내가 이법을 설한지가 10년이 되었다.
아직도 이 스님을 여느 스님과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대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이 스님이 사는 곳에 가면 보시를 받지 않고
물질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주겠노라고...
줘도 받아 들이 지 않는다.
전국으로 다니면서 경전을 만들어 수없이 뿌려서 만권의 경전을 뿌렸는데
9천명의 1/3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1/100이다.
단 한번이라도 회향한자는 삭제를 하지 않는다.
삭제한 자를 포함해 580명이 된다.
2/3는 끊어졌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겨 내지 못해서 괴로울 때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고 잡지만
받아드려서 하는 척하다보니 어느 날 고통이 사라지게 되어 편안함에 빠져
이정도면 욕심도 필요 없고 되었다라고 안주하는 자리이다.
안주에서 거의가 떨어져나간다. 5천명 이라면 스님이 못해나간다.
비구 비구니를 통털어 조계종, 군소종단 모든 스님을 포함해서
그 수가 얼마나 될 것 같나. 한 20만 명은 될 것이다.
스님은 1/20만이다.
직지사 주지스님을 만날 려면 줄을 서야 하는데 돈도 마련해야 한다.
스님을 24시간 열어놓고 있다.
스님도 이제 수행을 좀해야 겠다.
10년 동안 법을 설했다.
개인적으로 스님이 그물을 쳐놓았다.
안 되는 그 사람은 걸러내야 한다.
세 가지 지키라는 것을 100일을 못한다.
만원이 모여 오-육만원 돈이 모이면 돈 쓸일이 보이고 생긴다.
화를 내지마라, 깨워 줄때 일어나라(이것이 가장 어렵다) 그것을
이겨 냈을 때 불가사의 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나를 버릴 때 내가 얻을 것이 나오는 것이고
즐거움을 알게 되고 감사함도 오는 것이다.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고 감정이 지배한다. 감정은 욕심이다.
감정은 자기도 모르게 끊어지도록 하는 것이 삼구게이다.
30일을 못 봤다. 생각 많은 사람은 인터넷문의로 경전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택배비를 부담했으나 가면 강원도 포수이다.
책이 죽어지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책 1권에 8천원한다.
올해 표지를 일반 표지로 바꿀 것이다.
죽은 사람 가슴에 경전을 함께 보내 줘야한다.
표지 비닐을 벗기면 안 된다.
영원히 가야된다. 부처의 자리로 끊임없이 수행을 한다.
수행을 떠난 성인은 없다.
지구 최초의 부처님과 최초의 보살을 명확히 알아라.
지장 왕보살에서 보살중의 왕이란 의미이다.
김교각 스님이 지장보살화신이라고 알고 있다.
석가의 법이 살아 있을 때 오셨기 때문에 지장보살 화신이라고 한다.
석가의 법이 한창 성행할 때 그 교각스님이 지장보살로 잠시 등용했다.
교각스님이 왕손이다.
왕자로서 출가해서 중국 구와산에 들어갈 때만 해도 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첩첩산중에 수행 길을 삼을 때 뜻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법은 전수되지 않았다.
그 분이 법을 펼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석가의 상법이 성행될 시점(정법이 살아있는 기간)에 처음 출현하셔서
법이 만들어져 유지되어가는 기간 500년,
정법이 구성되어 쇠퇴해가는 기간 500년,
정법이 상법으로 쇠퇴해가는 기간 500년,
상법이 유지되는 기간 500년,
상법이 끝남과 동시에 말법이 시작 된다.
만들어지는 기간이 없다.
그냥 무너지는 기간이 석가의 유모가 비구니로 입문하면서 까먹어버렸다.
정 상 말은 3천년이다.
정법: 바른법이 존속되는 자리, 상법: 변형이되어서 법이 물러진 자리
석가가 10대 제자를 키웠는데 두 제자는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셨다.
목건련존자, 가련현존자가 앞서 열반했다. 10대 제자가 8대 제자가 되었다.
8대 제자에게 열반에 드시면서 8방으로 흩어져라. 동행하지마라.
그 이유는 흩어질 때 그 부처님의 유언을 전달했는데 8명 제자가
그 분야의 한가기 특이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징을 살려 전수가 되다보니 그 시대에서 변천되어가는
과정을 바라 볼 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육안을 못 본다.
그것은 혜안으로만 봐야 설명가능하다.
8명이 8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8가지 신통력을 다시 운집해서 모이는 지점이 있다.
하나가 되는 자리가 바로 지금이다. 그게 바로 말법이다. 자기법이 제일이다.
하늘, 땅 가련현존자와 목건련존자가 먼저 갔다.
시방세계-10대 제자가 각각 다스리고 제도시켜나가는
자리 시방에 뭉쳐지니까 서로 잘났다.
부처님 10대 제자가 사법 즉 육사외도법을 따랐다.
부처님도 육사외도법을 먼저 했으나 아니다라고 버렸다.
10대제자라는 사법을 버리라고 했지만 가훈, 유언 형태로 물려받아 내려갔다.
소림사 비법...비법 등이 그것이다.
버리지 않는데 부처제자가 깨달았다?
아니다. 자기 악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집착이다.
우리는 깨달음이 무엇이냐. 그 깨달음은 바로 내가 없는 자리이다.
내가 바보가 되는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는 남 보다 뛰어났지 만 내세우지 않고 져주는 것이 바보라고 한다.
져줌으로서 이긴다. 우리는 지고는 못 산다라고 배웠다.
내가 끌려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끌려갔다.
4-50년 전에는 무당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한집건너 무당깃발이 있다.
결국 우리 정신세계가 혼탁하니 그 영가가 그 정신을 뺏어 앉아 있다.
정신이 혼탁하니 영가인지 영가 아닌지 모르고 받아드린다.
불교가 기복신앙이 되었다.
달라 달라 복달라 전부들 달라고 부득 부득 부처님께 매달렸다.
내 죄가 두꺼운데 무슨 복을 받느냐?
여러분이 부처라도 복 주겠느냐?
지죄가 뭔지도 모르는데 지죄라도 알고 복달라면 왜 안주겠느냐.
지장법은 자기 근본 죄를 가르쳐준다.
일본은 뿌리가 한국의 1/5도 안되는데 천황을 옹립 하였다.
우리는 왕을 쫓아버렸다. 아부근성이 커고 늘 집안싸움을 한다.
분열 이다. 나라가 몇 개씩 만들어진다.
이것은 이기적인 감정에서 오는 것이다.
내분(內紛)으로 다툼이 그칠 날이 없다.
어떻게 잘되겠느냐?
종족이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이다.
땅이 가장 넓다. 자기 능력을 알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 욕심은 자기가 다스리는 부족의 우두머리는 자기 부족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내 생명 보다 부족의 생명을 아끼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
나 하자 져줌으로써 내 부족이 안녕이 유지된다. 화합정책이다.
우리나라는 국민이 다 죽어도 왕만은 내놓을 수 없다.
마지막 까지 싸우고 버텼다.
그 다툼속에 일본이 침략했다.
임진왜란도, 일제 시대도 스스로 불러 들였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버렸다.
내 이익 내 욕심을 버려라
내 욕심을 채우려는데 반드시 사람과 원결을 짓는다.
그럴 수 있나 하는 순간 열이 올라온다.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하면 화날 일이 없다.
악연은 겉만 보고 판단한다. 믿음직스럽다.
그는 자기를 철저하게 포장을 하고 인정 해준다.
선연은 나의 잘못을 꼬집어주는 사람이다.
나에게 달콤하게 다가오는 그자는 언젠가 크게 당할 자리이다.
양약으로 삼아야 한다.
내 나쁜 것을 지적해주고 강하게 질책해주는 자를 스승으로 삼아라.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왕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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