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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입시고사장에
김 광 수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시험과 자전거뒷자리 짐칸에 매달리듯 얹히듯 앉아 시험치러간 난처 난감했던 사건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어진다. 그렇다.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 자전거는 늘 붙어 있었고 행동을 같이 했다. 흐릿하면서도 선명하게 무시무시하고도 편안하게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기억도 아버지의 목덜미와 어깨와 등과 등허리의 기억도 거기 있었다. 세월 가면 잊어지거나 사라질 법도 한데 잊어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선명해지다가 조금 흐릿해지다가 다시 선명해지다가를 반복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둘째인 나의 중학교 입학시험 날이었다. 전날 밤 나는 인생세간에서의 첫 번째 입시를 위한 기나긴 시험공부를 마쳤답시고 교재는 정리하여 싸두면서 필기도구를 정리하느라 갖가지 소란을 피우면서 시험받을 준비에 시험 칠 준비까지 확실하게 마무리했다. 적어도 내 깜냥에는 그랬다. 1교시 도덕 국어, 2교시 산수, 3교시 사회 4교시 자연 다섯 과목 네 시간 시험에서 도덕은 만만했고 국어와 사회는 자신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선행인가 악행인가 따지는 정도인 도덕시험까지도 만점 못 먹으면 일류학교 가기는 걸러먹은 것 아니겠는가.
무조건 만점이어야 했고 국어, 사회는 백점 가까이, 산수, 자연은 최선을 다하기였다. 입시에 대비한 작전이랄까 전략이란 것도 있었다. 담임선생 말에 의하면 입시든 뭐든 시험이란 총 대신 교과서와 자습서로, 칼 대신 필기도구로 치는 전쟁이고 전투니까. 오전 여덟시 반까지 입장 완료해야 한다니 일곱 시 정각에 출발, 씩씩하게 걸어서 학교까지 넉넉잡아 한 시간으로 전쟁준비 끝, 교실에 가서 전투에 대비하고 첫 시간 도덕 국어 자투리공부 시작, 촌음을 아껴야지.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 일! 오만 계획과 만반의 준비는 출발 직전, 아버지의 말 한 마디로 백지화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수포는 물거품의 우리말한자어라 했다. “둘째야, 애비가 시험장까지 모셔다 줄 것이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의기양양했다. 당신의 자랑거리 중 단연 일위인 자전거를 타고 시험장으로 가자는 말, 청유 아닌 명령이었다. 자가용승용차 가진 집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으나 자가용이란 말은 있었다. 자전거를 자가용으로 쓰는 집도 중산층으로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자가용에 짐차, 출퇴근용, 낡은 것 한 대는 여분으로 네 대나 되었다. 형님의 등하교용까지 도합 다섯 대나 되었던 우리 집은 동네가 알아주는 자전거부잣집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자가용자전거가 주인공이었다. 매일 두세 시간씩 닦아 윤이 반드르르 흐르는 자전거는 예쁘장한 앞쪽의자와 등받이 외에 짐칸 따위가 따로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타고 득의양양하게 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멋있었다. 자전거도 주인도 멋쟁이였다. 도목수가 생업의 1순위였던 아버지였다. 일하러 가면서 목수미장 연장을 한 짐 싣고 타는 굵고 투박한 자전거가 짐차였다. 등받이를 높게 해두었으므로 뒷자리 짐칸에 쌀 한 섬 정도는 너끈하게 싣는다고 했었다. 그 정도 큰 짐을 싣고 여유만만한 듯 힘겨운 듯 달리는 아버지를 나는 목격했었다. 출퇴근용자전거는 아버지가 전매청 급양대 등에서 공직생활을 할 때 타고 다니던 것이었다. 버리기에 익숙하지 못한 아버지가 탈 수도 없는 고물을 창고기둥에 묶어두고 있었다. 나와 막내에게는 아버지의 외출용자전거와 짐차의 중간쯤 되는 형님의 등하교용자전거가 선망의 적이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가르침 그대로 장형부모에 부모맞잡이 형님은 아버지가 물려준 좋은 것, 동생들이 침 흘리고 눈독 들이는 것은 어김없이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기실 예정되고 결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아버지의 지엄한 명 받잡고 나는 짐차 뒷자리로 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짐차의 짐칸이었으니 대단한 궁여지책에 난국타개였다. 어린애가 아니었으니 반질반질 날씬 빠꼼한 자가용자전거 앞쪽의자에 앉을 수는 없었다. 자전거운전을 배우지 못했으니 직접 자전거를 몰고 갈 수도 없었으니 그런 소망은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명색이 입학시험이었는데 시험 치러 시험장 가는 길, 내 행색이 그 모양이었다. 그때의 내 모습은 언제 생각하고 그려봐도 한심했다. 애고 추워, 추웠다. 운전대를 필두로 기형적으로 굵은 자전거의 뼈대, 뒷자리는 쌀 두 가마니를 실을 수 있는 널찍한 짐칸, 거기 달랑 얹힌 빼빼 마르고 조그마한 중학교 수험생. 몸집이 왜소하니 작은 머리가 오히려 커 보이는 말년의 초딩이 나였다.
집에서 출발, 성내에서 제일 넓은 길이라는 깡통도로 지나고 팔고 사는 물건이 싸구려뿐이라서 염매시장인 남문시장 지나고 달디 단 동아양봉원 지나고 교육대학부속초등 사범대학부속고등 지나고 대구상고 지나 제일중학교까지 십리 남짓한 길이었다. 아버지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에 매달려 한겨울 한파에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1958년 1월 21일이었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시험시작까지는 한 시간 이상 남았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십리길 4킬로미터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서 오기, 학교 구경 샅샅이 하기,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나서 보무도 당당하게 입실하겠다는 게 나의 위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그 시간을 자전거 운전의 귀재, 대표선수 버금가는 아버지가 모는 짐차에 명운을 걸고 왔으니 남아도는 것이 시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운 중 행운 불행 중 다행도 있었다. 단단하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등이 널찍하고 푹신한 것을 안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교실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아버지를 교문 앞에서 따돌리고 나는 운동장과 교사 사이 구석진 곳을 찾았다. 거기서 꽥꽥 오리울음 소리를 내면서 왝왝 헛구역질을 하면서 멀미를 진정시켰다. 도덕 국어, 산수, 오전 두 시간 시험이 끝나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극심한 허기 속에서 맛 좋은 자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릴 터이니 지체없이 나오라는 다감한 말소리, 자장면 곱빼기에 만두 일인분 정도는 시켜주지 않을까, 희망사항이었다. 아버지의 계획이 어떤 것일까, 기상천외에 황당무계한 것은 아닐까가 걱정되면서도 그랬다.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졌다. 아둔한 기대, 착각, 환상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식솔을 중국집에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장면을 그리고 기대하고 희망까지 했으니 나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몽상가였다. “가자, 내가 짭짤한 집을 물색해 놓았다.”
시장골목을 돌고 돌아 아버지가 내 왼손을 끌고 들어간 곳은 술심부름으로 익숙해진 돼지식당과 흡사한 곳이었다. 국밥과 국수와 해장국, 술과 안주를 손님이 주문하는 대로 내주는 곳, 식당인지 술집인지 구별되지 않는 곳, 간판만 식당인 곳이었다. 쇠고기국밥의 맛은 일미일품이었다. 기름이 둥둥 뜨는 국물에 푸짐한 쇠고기, 하양 이밥, 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밥과 국과 밑반찬까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자장면곱빼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면서도. 아버지는 대폿잔으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진지 드셔야죠.” “됐다 마, 나는 이게 더 좋거든.” 부자지간 수작하는 장면을 듣고 보던 안주인인지 술어미인지 비교적 젊은 아줌마가 주전자술과 선짓국을 한 대접 들고 왔다. “옛수, 공짜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잡수셔! 자식이 뭔지, 자식이 원수지 별거라고.” 내가 수저를 놓자 무슨 마음이었는지 아버지가 내게 잔을 내밀었다. “아나, 너도 한모금만 마셔라.” 오전에 두 시간 국어 도덕, 산수를 치렀으니 사회, 자연 두 시간 시험이 남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가 내민 술잔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길 때문이었다. 곡진하고도 처연하게 다가오는 눈길이었다. 그보다는 아버지 말을 거역해본 적이 없는 내가 문제였다. 우여곡절까지는 아니고 온갖 해프닝 끝에 시험은 끝났다. 입학시험이었다. 오전에 치른 국어 도덕, 산수는 기억이 선명한데 오후에 치른 사회, 자연은 시험과목 외에는 기억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제를 풀었다는 기억뿐 그 밖의 기억은 없었다. 취한 듯싶었다. 입학시험 시작과 끝 사이, 시험장 안팎에서 세 가지 기억은 있었다. 하나는 시험장 밖의 기억이었다. 깍지 낀 열 손가락이 힘겹던 아버지의 넉넉한 등과 등을 통하여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시험 전 아침에도 시험 후 저녁에도 나는 짐차의 짐칸에 매달려 있었고 아버지는 페달을 밟았을 뿐이었는데도 그랬다. 둘은 시험장 안이었다. 오후 첫 시간 3교시 시험 도중 감독관의 말이었다. “괴상하네. 막걸리 내가 난단 말이야. 어느 놈이 점심시간에 반주라도 하셨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우물로 달려갔다.
머리와 뱃속이 마구잡이로 울렁거렸다. 일촉즉발의 순간, 먹은 것 마신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입 밖으로 쏟아졌다. 더러웠다. 역겹기까지 했다. 토사물 대 오물, 더러움 대 역겨움, 우물가 구정물 내려 보내는 수챗구멍에 제격이었다. 나는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음식물은 물론 내장 전부가 따라 올라올 정도로 토해댔다.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목구멍도 위장도 찢어지는 듯 따갑고 아팠다. 점심시간에 먹은 음식과 막걸리 한 잔, 똥창이라 불리는 대장의 오물까지를 토해내니 따갑고 아픈 가운데 다소나마 속이 풀렸다. 올리기에 이은 토해내기, 기억하기도 싫은 경험이었다. 계속 더럽고 역겨웠다. 경험 셋, 그해 겨울 내내 나는 위궤양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과식 과음 후에 올리기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평생에 걸쳐 그랬다.
한강 이남을 통틀어 강남이라 일컫던 시절이었다. 나는 강남 제일의 일류 중의 일류라는 중학교에 합격했다. 상식적으로 합격불가, 학칙상 합격되어도 곤란 술 취한 수험생, 내게 어이없는 경사였다. 구사일생이었다. 무섭고 두렵고 비밀스런 것, 지금도 숨이 막히는 일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의 세뇌였다. 입시에 이어 입학식 당일에도 나를 짐차의 짐칸에 태운 아버지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포기했으므로. 입학식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가 어깨 너머로 불쑥 던진 말, 그 말이 칼날이 되어 내 머리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둘째야, 법대는 서울대학이 최고지만 고려대학도 최고다. 서울법대 못가면 고대 가면 된다. 법대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생각지 마라 이 말이다.” 소곤소곤 나직나직 세 개의 문장! 아버지의 세뇌와 지상명령, 학창시절을 관통한 숙제는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할 바 아니었다. 주체 못할 자식사랑, 목소리만 크고 실속 없는 자식교육, 악에 받친 욕설, 스스로 진저리치던 법대타령과는 격이 달랐다.
4남3녀 생산하여 1남1녀 버리고 3남 2녀 건진 어머니에게는 당신만의 교육헌장이 있었다. 5남매를 향한 선언문이자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당시로는 좋은 성적이었던 7-2=5에 용기백배, 어머니는 친인척과 동네사람 앞에서 자식자랑과 교육헌장 발표를 수시로 마다하지 않았다. “일곱 생산해서 다섯 착실하게 건졌다. 애초에 자식교육은 어미 몫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 키우느냐? 간단하다. 맏이는 의사, 둘째는 판검사, 막내는 판검사든 은행장이든 부자, 딸아이인 둘은 무조건 선생이다. 목표 정해놓고 거기 맞추어 키우면 된다.” “……” “자식교육과 출세를 위해 시집고향의 문전옥답 임야 산판, 의식주 걱정 없는 중농의 안일, 동네어른 대접받기까지 포기하고 탈향 이농하고 대학교까지 있는 대구 성내로 나왔다. 고립무원에 혈혈단신에 진배없지만 괜찮다. 아들딸 건지는 족족 학교 보내고 대학까지 시켜서 저 잘살고 나라의 동량재 되면 그만이다, 아나?” 지독하다 못해 무자비한 교육열이었다.
자식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출세욕이었다. 도시생활을 지탱하게 만든 버팀목이었다. 어머니 안중과 의중에는 의대 법대 사대 외에는 들어갈 자리도 들어설 자리도 없었다. 직업 역시 의사 판검사 부자, 딸의 지분인 선생뿐이었다. 맞춤형 교육이 아닌 세뇌와 강요였다. 부자도 직업이고 부자도 의대 법대 나와야 될 수 있다는 어머니였다. 나는 판검사도 변호사도 되지 못했다. 어머니 말마따나 천생 딸아이 직업에 꼴란 師자, 事事, 士자로 끝나는 직업이 아닌 교사가 되었다. “사내 녀석이 선생이라니, 가문의 수치다.” 이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나를 포기했다. 마지막 보루인 모성본능까지 포기한 듯싶었다. 문리과대학 재학생의 고시공부 흉내, 교사자격증 획득을 위한 교직과목 이수 등속은 어머니 눈밖에 나버린 둘째인 나의 모정과 모성본능을 되찾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어머니의 자식교육 겸 세뇌의 후유증은 곱다시 내 몫이었다. 치명적이었다. 어머니의 뜻에 부응했거나 근사치에 접근한 막내와 누나와 누이, 형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판검사가 떼어 논 당상관이줄 알았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후유증이다. 평생을 교육현장에서 교단교사로 살면서도 교직을 선생질로 여겨 남우세스러운 직업이라 단정하고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만둔다는 소리를 구두선으로 내뱉어 가족을 불안에 떨게 한 무책임가장, 동료를 피곤하게 만든 무자격교사, 학교와 집 사이를 헤메고 다니면서 직업 감추기에 급급했던 수준미달 인간이 나였다. 그러면서도 학교를 평생직장으로 삼은 비겁한 인생, 열등감 자학 비굴 위선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난감하고 미안한 교단작가가 백수작가로서의 삶도 후유증이다. 문학은 달성공원에서 어어 이이 어어 이이, 44조 연장체로 악창 까듯 고래고함이나 질러대는 짓, 인생낙오자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한 어머니에게 확실하게 세뇌된 결과였다. 1971년 교단작가를 자임하며 소설과 시, 말글을 써왔으면서도 문학한다는 사실을 쑥스러워했으니 한심하다 못해 멍청한 인간이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문인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문학적 도반님께 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