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이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됩니다.
그분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를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봄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건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겪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신비롭게도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고,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기쁨'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무름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근심과 기쁨 그리고 신앙적인 근심>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기쁨은 우리 인간이 모두 가장 원하는 감정 상태입니다.
즐거움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금세 사라지는 데 비해 기쁨은 여운이 길기 때문이고, 쾌락이라는 말이 그리 좋은 뜻이 아닌 것처럼 즐거움은 퇴폐적으로 흘러 인생을 망치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는 허무감만 남기기 일수입니다.
그에 비해서 기쁨은 남는 것이 있지요.
감정에 여운이 있는 것은 물론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얻음의 만족감, 성취의 만족감, 성공의 만족감, 만남의 만족감입니다.
집을 얻거나 자식을 얻었을 때 기쁘고, 원하던 목표를 성취했을 때 기쁘며, 사업이 성공하고 번창할 때 기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대가가 즐거움 뒤의 허무감이나 피폐함이라면, 기쁨의 대가는 기쁨을 얻기 전에 치러야 하는 것으로서 고통이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 걱정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즐거움은 후 대가이고 기쁨은 전 대가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서 삶의 지혜, 기쁨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기쁨을 위한 근심과 걱정으로 바꾸고, 기쁨을 위해서 근심과 걱정을 마다하지 않는 지혜 말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과 비생산적인 근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것입니까?
예를 들어, 주님께서 예를 드신 바 있지만, 아기를 낳기 전의 근심, 아기를 낳기 위한 근심은 생산적인 근심이요 기쁨을 낳는 근심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우(杞憂) 같은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근심입니다.
기우란 하늘이 꺼질까 근심했다는 옛날 기 나라 사람의 근심에서 비롯된 말인데, 그의 근심대로 하늘이 꺼졌다면 근심했는데도 꺼졌으니 쓸데없이 근심한 것이요, 꺼지지 않았다면 꺼지지 않을 것을 근심했으니 이 또한 쓸데없이 근심한 거지요.
근심하여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의 병만 얻고 건강은 잃은 셈입니다.
이제 우환(憂患)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환이란 근심스러운 일을 말하고 그중에서도 병으로 인한 근심을 말하는데, 우환이 생기면 누구나 처음에는 근심하기 마련이지만 어떤 사람은 생산적인 근심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쓸데없이 근심만 합니다.
그제 우연히 '생로병사'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파킨슨씨 병을 앓는 사람들 얘기를 봤는데, 거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가 이내 극복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특히 춤을 추면서 마음을 밝게 가지려고 했더니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쁨과 행복을 되찾았답니다.
우리 신앙인의 경우는 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요.
하느님을 만나서 병이 치유되는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만 설혹 병이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만난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근심이 있다면 이런 생산적인 근심으로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근심을 바꾸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해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 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고... 나를 ‘보게’ 될 것이다.”에서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지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우리 앞에 놓인 힘든 일은 그만큼 큰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스승과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통이 끝난 뒤 반드시 새로운 기쁨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죽음의 공포가 꼭 간직하고 살아야 할 은총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받아 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성령 강림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바로 ‘근심’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9-20)
세상이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재(不在)를 근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이시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합니다.
이 근심이 있어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어머니는 근심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없다면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 기쁨을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피 흘리는 고통, 곧 죽음에 대한 근심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 불안 때문에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커지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이 불안을 없앱니다.
아니 없앴다고 착각합니다.
이때마다 주님은 다시 그 불안을 주시기 위해 그가 믿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광야’로 여기지만 사실은 주님을 찾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은 세 명밖에 없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사울은 ‘교만’의 상징입니다.
그는 힘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여겨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불안해하며 하느님께 자신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십니다.
다윗은 ‘육욕’ 때문에 큰 곤란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남자의 아내를 탐한 그가 자기 아들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겪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다윗이 뛰어난 왕인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죄 때문에 겪게 된 광야의 삶에서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에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혼인하고 그도 이방신 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재물은 이렇게 그에게 또 다른 신이 되었고, 그 결과는 아들에게 온전한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고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먹고살 것이 충분할 때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부러라도 근심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죄를 짓는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로 죽음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이 불안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불안이 돈이 부족해서라 여기고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이기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부활하신 당신을 만남으로써만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불안함이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임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불안함을 주님만을 희망하게 하는 재료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탐욕-육욕-명예욕으로 이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 못하게 하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광야’의 불안에 속하게 해야 합니다.
광야는 당장 내일을 알 수가 없어 탐욕을 부릴 수도 없고 충분히 먹을 수도 없으며 성공하려는 욕망도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광야의 시기를 짧게 재연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이때 우리는 ‘단식’을 합니다.
단식하여 배가 고프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근심이 듭니다.
단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근심을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잎새』라는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화가 지망생 존시는 폐렴에 걸려 날로 병세가 악화하여 갑니다.
이 사람은 삶을 포기한 채 창밖에 있는 담쟁이넝쿨의 이파리만 세면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화가 지망생이 사는 집 아래층에는 가난한 노인 화가 베어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세계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꿈이 있지만 현실은 그저 싸구려 광고물이나 그리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화가 지망생이 어느 날 창문을 바라보니 담쟁이 잎새가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보니 그 마지막 잎새가 담벼락에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자 존시는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두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잎새도 저렇게 버티는데 자신이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의사가 존시의 완쾌를 알려주던 날, 그 마지막 잎새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진짜가 아니라 아래층에 사는 노인 화가가 담장에 그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그린 그 노인은 그림을 마친 그날 밤 폐렴을 얻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죽음 앞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에 의지해서 내가 생명의 주체가 되려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시는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쩌면 자신이 무시하던 술주정뱅이 할아버지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죽음 앞에 그렇게 머물지 못했다면 참 생명이 자기 집 아래 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죽음 때문에 근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와 부활이 참 생명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차도록 매일 죽음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오시는 분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 사람들은 나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 엄숙하고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와 사회 분위기 속에 참으로 유쾌하고 매력적인 사제가 활동했으니, 그 이름은 로마의 성자요 젊은이들의 친구 필립보 네리 신부님(1515~1595)이었습니다.
음악과 시와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로 순례를 오게 됩니다.
순례 효과는 200퍼센트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지들을 순례하면서 받은 큰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병원을 찾아가 병자들을 방문했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근무 강도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에게 다가섰습니다.
도시 광장이나 술집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다정한 말과 친절하고 소탈한 태도로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권고로 필립보 네리는 1551년 36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는 하루 15시간까지 고해를 듣곤 했습니다.
고해를 본 사람들 가운데 몇몇 신자들을 뽑아 따로 영적 지도를 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다들 내가 신부인데, 에헴 하고 한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 있던 시절, 필립보 네리 신부님께서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개구쟁이 아이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고 계셨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영성과 활동을 300년 세월이 흐른 뒤 돈보스코가 이어받게 됩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울적한 얼굴의 청소년들,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성당에만 앉아 있지 않고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기쁨 속에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다양한 단체들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이벤트들을 마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당신 자신 존재 그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신부님께서 길거리를 걸어가시는데 사람들이 다들 포복절도를 했습니다.
이유는?
신부님께서 아침에 면도를 하시면서,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러셨겠지요.
콧수염 한쪽은 그냥 더부룩하게 두고, 다른 쪽은 싹 밀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인간미 넘치고 유머 감각이 탁월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이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언제사 수많은 어린이들, 노약자들, 여인들, 정치인들, 교회 지도자들이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그 자체가 휴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라고 당당히 증언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을 찾아와 영적 지도를 청하곤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두 다리가 후덜덜 떨릴 지경입니다.
로욜로의 성 이냐시오 신부,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이쯤 해서 무척이나 부끄러워지는군요.
세상 사람들은 나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쁜지, 행복한지?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천국 체험인지?
나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는지?
나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인지?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당신의 수난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죽음’은 볼 수 있는 상태에서 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는 일입니다.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일”, 즉 영원한 이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잠깐 동안만’ 못 보는 일”, 즉 잠깐 동안의 이별로 생각합니다.
부활 후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이별’은 없습니다.
부활할 수만 있다면.
따라서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더 이상’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아직 부활 신앙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이 짧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만 이틀’이 안 됩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성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 아침까지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겪게 되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처럼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슬픔과 고통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슬픔과 고통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그 슬픔과 고통을 극복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애통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울음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울며 애통해했다는 말이 없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 부활 후에 복음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적대자들과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뒤에 기뻐하고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기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뻐한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위험인물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나중에 자기들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고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묵시 11,10)
여기서 예언자들이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다는 말은 회개하라는 예언자들의 설교를 사람들이 듣기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땅의 주민들이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선물을 서로 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악에 물들어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앞의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겠지만’은 ‘슬퍼하겠지만’이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는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입니다.
제자들의 슬픔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생긴 슬픔이고,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엠마오를 향해서 갈 때에는 ‘침통한’ 모습이었습니다(루카 24,17).
그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는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큰 슬픔이 큰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죽음과 부활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우리 인생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베드 1,5-9)
이 세상은 슬픔과 고난의 연속인 ‘한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영원한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고, 그 기쁨을 얻어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지금 여기서도 기뻐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한결같은 삶 -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납니다.
사계절의 변화가 참 신비롭습니다.
봄꽃들 한창이었던 자리에는 초록빛 잎들로 가득합니다.
흰 버찌꽃 가득했던 자리에는 빨간 열매들 가득하더니 이젠 초록빛 잎들로 가득합니다.
가을 단풍들 때까지는 늘 푸른 잎들이겠습니다.
“꽃(花)도
열매(實)도 아닌
늘 푸른 배경의 희망의
잎(葉)들로 살고 싶다”
산책 중 되뇌인 말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늘 푸른 배경의 희망의 잎들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봄(觀)'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
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과 겨울의 적요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1998.11.4.
성인들의 특징이 한결같은 삶,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입니다.
늘 푸른 배경의 희망의 잎들로 살았던 성인입니다.
오늘은 ‘로마의 사도’로 불렸던, 기쁨중에 복음을 살았던 참으로 당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알고보니 정말 대단한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하여 ‘오직 애덕만을 규칙’으로 삼아 함께 동고동락하는 공동체를 지향했고, 고위 성직을 내리려는 교황의 뜻도 완곡히 사양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다가 1595년 5월 25일 만 80세, 모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십자가로 강복한 후 선종합니다.
선종 시 “성인이 돌아가셨다”고 사람들은 외쳤고, 사후 27년,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성인품에 오릅니다.
오라토리오회 회원이자 현대의 저명한 영성학자인 루이 부이에는 “그처럼 큰 자연적 은총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신비적 체험을 일상의 상식과 잘 결합시킨 성인은 거의 없다.” 말하며 성인을 기립니다.
성인이 남긴 어록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1. 기쁨 없는 덕은 참된 덕이 아니다.
2. 육신을 돌보는데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마라. 교만하지 마라. 자주 기도하라.
3. 기쁨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이르게 하지만 우울한 정신은 그렇지 못하다.
4. 인색한 사람은 덕성에 있어 결코 진보할 수 없다.
5.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아주 쉽게 육욕에 빠진다.
6. 자기를 내세우지 마라.
7. 지나치게 신심에 빠지지 마라. 조금씩 시작하여 꾸준히 하라.
8. 마치 페스트를 경계하듯이 거짓말하는 것을 경계하라.
9. 유혹을 받게 되면 곧바로 주님께 매달려라.
10. 게으름을 경계하라. 게으름은 악습의 온상이다.
11. 사람들이 너에게 거두어간 영광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되돌려 주신다.
성인의 체험이 녹아든 잠언과 같은 말씀들입니다.
얼마나 한결같이 충실했던 성인인지, 사제품도 애덕활동에 전념하다 주위의 강권에 의해 나이 40쯤에 받았던 참 본질적 삶에 충실했던 사목자이자 애덕의 사도이고, 사회사목의 선구자이자 깊은 영성가였던 필립보 네리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일희일비하지 마라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삶은 과정입니다.
삶은 흐름입니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의 리듬입니다.
커다란 위안은 모두가 주님 안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단면만 볼 것이 아니라 널리, 멀리, 높게, 깊이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현재의 고통이나 슬픔에 빠지지도 않고, 기쁨이나 행복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한결같이 늘 푸른 배경의 잎들로 잔잔한 기쁨과 평화중에 살 수 있습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이 그러했고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가 바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잡초같이 강한 생활력을 지닌 바오로에 견주면 제 수도생활은 때로 온실 속의 화초같은 삶같아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주님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바오로는 천막을 만드는 생업에 힘쓰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합니다.
사람들이 반대하여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자신의 옷의 먼지를 털고 다음 같은 말을 남기면 훌훌 떠나는 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얼마나 가볍고 홀가분해 보이는 모습인지요!
보통 갈수록 안팎으로 무거워지는 우리의 삶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어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고,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코린토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앞서 아테네에서의 실패와 코린토에서의 성공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전체를 볼 때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모범이, 지칠 줄 모른 선교열정의 모범이 사도 바오로입니다.
성 필립보 성인의 말씀이 또 생각납니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축복받은 자들이다.
인생이 그대들에게 미소짓고 있으며, 황홀한 미래가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축복받은 것은 앞으로 선행을 행할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쁘게 지내라.
그러나 죄를 짓지 마라.”
참으로 늘 푸른 배경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이런 희망찬 낙관적 인생관일 것입니다.
비단 젊은이만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말씀 같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늘 푸른 배경의 희망으로 빛나는 한결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런이런 경로로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예고하실 때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늘의 대목에서처럼 빗대어 말씀하셔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요한 16,18)
정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직면할 자신이 없어 모르는 척 무지를 선택한 것인지 그들 자신만 알 겁니다만, 사실 꽃길만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앞으로 닥쳐올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미리 대면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아, 이대로 계속 가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대개 뭔가 순조롭고 평탄하고 미래의 빛이 보일 때 그렇게 여깁니다.
터무니없이 큰 걸 바라지 않으면서 소소한 만족과 안정감이 일상으로 자리잡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뭔가 그 일상성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닥칠 때가 다가옵니다.
인간 삶에서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조금 있으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그런 불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곧 닥쳐올 어둠의 시간, 스승을 빼앗기고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져 목적과 의미의 혼란을 겪게 될 두려움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수수께끼같은 이 말씀에서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도 여느 인생길처럼 슬픔과 기쁨이, 고통과 평화가, 죽음과 생명이 항상 짝을 이루어 다닌다는 걸 알려주려 하십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좀 더 좋고 편한 쪽만 계속되면 좋겠건만, 인생은 그걸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조금 인생을 살아 본 제자들은(우리는) 제법 알고 있지요.
코헬렛 저자 역시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코헬 3,4)고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알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요.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겪어온 것처럼 여기서도 바오로는 성공과 실패를 두루 체험하게 됩니다.
서로 도우며 힘이 될 신앙의 동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를 만났고 또 기다리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까지 합류하여 온전히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게 되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을 텐데, 이대로 쭈욱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지요.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는"(사도 18,6) 이들에게서 또 한 번 거부 체험을 당해야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옷의 먼지를 털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체험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에게로 갑니다."
(사도 18,6)
이 선언은 진정으로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며 최선을 다한 이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그래도 유일신 사상과 종교적 체험의 뿌리를 공유하는 유다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 했지만 번번이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니까요.
그래도 오늘 제1독서의 마무리는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방금 겪은 어둠과 절망처럼 보이는 체험이 빛과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과연 예수님 말씀처럼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먼저 근심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먼저 실패가 있어야 성공을 느끼고, 먼저 상실을 체험해야 획득에 감사합니다.
먼저 없어 봐야 작은 것에도 만족하게 되고, 먼저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압니다.
일상의 삶에서처럼 영성생활에서도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빼앗길 때가 있으면 다시 얻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충만히 머무르며 진보하고 성장할 때가 있고, 주님이 안 계신 듯 공허하고 메마를 때가 있지요.
대부분의 고통의 순간이 그렇듯, 영적 메마름이 오면 언제 좋았는지 언제 주님을 누리며 행복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혼은 슬픔에 빠져버립니다만, 그럴 때는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견디어야 합니다.
꿋꿋하게 나아가다보면 살짝 가리워졌던 은총이 다시 비칠 때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에는 일상 삶과 영성생활에서 주님의 현존과 부재의 리듬을 잘 타라는 예수님의 자상한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어머니의 날입니다.
어머니들에게 드릴 꽃을 준비하였습니다.
스페인 공동체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남은 꽃을 컵에 담아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책상에 꽃이 있으니 방에 화사해졌습니다.
화사해진 방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퇴근하던 길에 남편이 지하철역에서 꽃 한 다발을 샀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고, 예전에 아내와 데이트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남편에게 꽃다발을 받은 아내는 다음 날 꽃을 꽂으려 했는데 화병이 없었습니다.
예쁜 화병을 사서 꽃을 꽂았습니다.
그런데 식탁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식탁보를 새로 사서 깔았습니다.
식탁보는 마음에 들었는데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의자를 새로 사서 놓았습니다.
식탁과 의자 그리고 꽃은 예쁜데 방이 지저분해 보였습니다.
아내는 모처럼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려니 커튼이 누렇게 변색되었습니다.
큰 마음먹고 커튼까지 바꾸었습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은 작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꽃 한 다발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였고, 어디에 내 놓아도 부럽지 않은 아늑한 보금자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성인들의 놀라운 신앙을 칭송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추앙합니다.
요즘 우리가 독서로 읽고 있는 사도들의 생생한 복음 선포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신앙은 어쩌면 이웃에게 내미는 작은 손짓은 아닐까요?
10년 동안 아이티에서 선교하던 꽃동네 수사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 잠시 다녀왔는데 한국의 꽃동네 가족들이 모두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십년 동안 했으니 고생할 만큼 했다. 이제 돌아와도 된다. 건강이 최고다. 건강을 잘 챙겨라.’
신부님은 또다시 아이티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서 우쭐해하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니들이 내 마음을 아니!”
아이티로 돌아간 신부님은 똑같은 일상을 지내실 겁니다.
폭력, 가난, 무질서, 위험은 도처에 널려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굶주린 이들이 매일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신부님은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걱정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제라는 자리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사제에게 주어지는 특권에 연연하려고 한다면, 말로만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걱정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려는 결심으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도 기쁨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그분의 겸손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그분의 희생입니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지만 협조자를 보내시려는 그분의 책임감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그분의 열린 마음입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은 앞장서서 하시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는 그분의 양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 친구, 이웃, 직장, 성당에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웃음이 꽃핀다면, 그곳에서 사랑이 열매 맺는다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원망과 불신이 자라난다면,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면,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미는 작은 손짓은 꽃 한 다발일 수도 있고, 다정한 말 한 마디 일 수도 있고,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손짓을 내미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책에서 이런 질문을 보았습니다.
- 심각한 교통체증 속에서 당신은 끝까지 침착할 수 있는가?
- 이웃이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 주변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가?
- 지금 있는 곳에서 늘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가?
책에서는 이 네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 질문을 읽으면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이 질문들에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목적지가 아니라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방향을 잘 잡아야 내 변화의 모습을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에 쉽게 빠지고 사랑의 삶을 잘 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그 변화를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요구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드시고 십자가 죽음이 임박하셨을 때 하신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당신의 사랑을 더 많이 드러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평화를 주시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기쁨도 전해주십니다.
‘조금 더 있으면’ 주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세상 마칠 때까지 예수님의 현존이 믿음의 삶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굳게 믿는 사람은 악의 세력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죄의 그늘에 있는 사람과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기쁨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또 세상을 사는 것이 쉽고 편한 삶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지요.
그때 근심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믿음의 힘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은 어떨까요?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의지를 계속해서 내세워야 합니다.
완벽함은 가능하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로 향한 우리의 변화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