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8.6.화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7,9-10.13-14 루카9,28ㄴ-36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근심도 마라.
어려움 앞에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라.”(다산>
“곤궁에는 운명이 있음을 알고, 형통에는 때가 있음을 알고, 큰 어려움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인의 용기다.”<장자>
두 어른의 말씀이 흡사합니다.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 가면서 믿음이 굳건해 질 때 우리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을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다 시피 주님은 중요한 때는 최측근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대동하십니다.
오늘 복음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성서에서 산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시나이산, 엘리야의 갈멜산, 주님의 산상설교, 예루살렘 외곽의 갈보리(골고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고,
기도하시는데 모습이 변하셨다’고 말합니다.
기도중의 변모체험입니다.
기도는 믿는 이들의 모두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 중 하나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을 나중에 우리의 천국 통과시 얼굴을 검사하실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닮았는지 또 닮지 않았는지가 판단의 잣대가 될 것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한결같이,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해 왔다면 주님을 닮을 것이다.”
제가 피정지도때 마다 기도에 대해 자주 강조해온 말마디입니다.
기도를 통한 주님의 변모요 우리 또한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은 변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 애제자들에게 당신의 변모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참 절묘합니다.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에 흡족하신 주님이셨지만 그것도 순간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의 제1차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놀란 베드로는 극구 만류했으니 자기가 상상해온
영광의 메시아와는 너무나 실망스런 수난과 죽음의 메시아에 베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심한 꾸짖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말그대로 충격요법에 의해 베드로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함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했던 제자들도 큰 충격의 상처를 받았음에 분명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기소침한 침체된 분위기가 오늘 주님의 변모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침체된 어둔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제자들을 배려한 주님의 각별한 변모사건의 은총입니다.
흡사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특별 산상 피정 시간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복음의 은총으로 빛나는 절정의 장면에 제자들 내면의 어두움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며
저절로 치유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감사송의 주옥같은 말씀이 참 은혜롭고 적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모습이 온통 찬란히 빛나게 하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온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나이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율법을 대표한 모세요 예언자들을 대표한 엘리야 두분은 에녹과 더불어 구약의 승천한 분으로
하느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분들인데 이들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주님의 위상을 새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눈 대화는 루가복음에서 보다시피 필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새로운 엑스도스 사건에 이어 부활의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후대의 우리들은 이를 알고 있지만 제자들은 이를 깨달았을리 만무했고, 그리하여 복음 말미에서 보다시피
당신이 부활할 때까지는 일체 함구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활후에야 비로소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파스카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순박하기가 베드로답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또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호의가 이해는 됩니다만 주님의 뜻을 망각한 완전한 오해요 착각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은총을 독점할 수도 없거니와 신비체험에의 집착은 결코 도움이 못됩니다.
하느님 친히 베드로의 눈먼 열광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바로 베드로를 위시한 두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워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 복음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산상에서의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은 끝났고 주님을 따르는 단조롭고 무미한 일상의 삶만이,
십자가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의 추억은 제자들의 일상에서 샘솟는 내적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에서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미 제1독서 다니엘서에서 예언되고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지금도 살아 계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닮은 우리의 변모와 더불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고 믿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하루만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모두가 특히 이른 새벽 날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 집무실에서 강론 쓰는 시간이,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주님을 닮아 변모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우리가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기도은총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1요한3,2).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