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 남서호 박사의 상담심리 코너
[교회를 생명처럼 사랑했던 사람들]
전에 황해도 재령 읍에 정찬유 장로라고 있었는데 그는 주일 성수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는 분이고 또 돈도 잘 벌어서 2층 양옥집을 지으려고 설계사를 불러다 설계를 맡겼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데 "네 집은 그렇게 화려하게 지으면서 내 집은 어찌하여 양철집으로 내버려 두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깜짝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내일부터 곧 하나님이 계실 거룩한 집부터 건축하겠습니다." 그 이튿날 곧 설계사를 불러다 설계를 예배당으로 바꾸어 가지고 잘 지었는데 그것이 "재령 동부 예배당"으로 당시에는 한국 제일의 예배당이었다고 한다.
대구에 가면 서현 교회라고 있다. 그 교회가 그 당시에는 동양에서 제일가는 예배당이었다. 이 예배당을 짓게 된 동기가 그 교회에 정규만 장로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은 한의사가 아니고 한약사이었는데 그만 죽을 병에 걸려서 생명이 위험한데 그분 자신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온 교인이 장로님을 위해 기도했다.
그분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 병만 낫게 해주시면 멋있는 예배당 한번 짓고 죽겠습니다."하고 기도를 했는데 얼마 후 병 고침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예배당을 큰 화강암(전라도 익산에서 싣고옴)으로 다듬어서 짓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이상한 병이 나돌기 시작했는데 다른 약방에서 아무리 약을 지어 먹어도 낫지 않은데 꼭 정규만 장로님한테 약을 지어 먹으면 낫고는 했다.
그래서 다른 약방은 손님이 없어도 이 장로님한테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매일 저녁때가 되면 돈이 한 부대씩 들어왔는데 모두 예배당을 짓는데 털어 넣었다. 하여튼 예배당을 다 지을 때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성전을 다 짓고 나서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 이 예배당을 내가 지었다고 교만해지기 쉬우니까 생명을 불러가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몇 해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모두 순수한 신앙으로 신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오직 소원이 교회당을 건축하고 싶은 일념으로 헌신할 때 주님은 놀라운 은총을 주신 것이다.
교회당이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해도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허사다. 흑인 한 사람이 백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느 주일날 목욕을 깨끗이 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다음 성경과 찬송을 소중히 들고 백인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받아 줄 리가 없었다. 단 한번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고 흑인인 것을 뼈저리는 아픔으로 느끼면서 그 교회의 바깥들 계단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흰옷을 입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반가워서 부르짖었다.
"오! 주님,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님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나요."
주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셨다.
"이 사람아! 나도 그 교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네."
사랑이 없는 곳에 주님께서 계실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럼으로 성도는 주님의 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서 성스러운 헌신과 봉사를 다 했던 레위인처럼 열심히 섬겨야 한다.
오클라호마의 조그마한 도시에 한 목사가 새로이 부임을 했다. 목사는 목회를 시작하는 첫 며칠 동안은 교우들의 집을 찾아 심방도 하고 돌아오는 주일에 자신의 첫 설교를 들으러 오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정작 주일이 되니 교회를 찾아 온 교우는 손으로 셀 정도의 아주 작은 숫자였다. 그 다음 날 목사는 지방 신문의 광고란에 조그만 광고를 실었다. 그 광고의 내용은 자신이 부임한 교회가 죽었으니 담당목사로서 기독교 의식에 따라 엄숙하게 오는 주일 오후 장례식을 치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광고를 본 읍내 주민들은 신기해하며 장례식에 다 몰려왔다. 교회의 강대상 앞에는 관 위에 꽃이 놓여 있었고 목사는 의식에 따라 송덕문을 낭송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이 나와 차례차례 조의를 표하러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민망한 눈초리로 물러나곤 했다.
왜냐하면, 관 속에는 정확한 각도에 따라 크나큰 거울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서 각자가 자신의 얼굴을 본 것이다.
신앙에서 교회라는 뜻으로 사용된 희랍어 에클레시아는 모임, 회중을 가리키는 구약의 히브리어 카할 의 번역어이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앞에 섰던 이스라엘의 모임(신 4:10)이 카할이라고 불렸다. 에클레시아 곧 교회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 앞에는 하나님의 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님으로써 교회는 곧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예배와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으로서 그것의 최종적인 목표는 각 사람이 성령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이 깃들어 있는 전(Temple of Presence)이자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따라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곳에 속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 안에서 한 자녀가 된 자들이다. 교회의 사명은 내향적과 외향적 유명형이 있다.
1) 내향적 유형은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경배와 영광을 받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2. 교회는 구원의 피난처이며 구원의 방주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세속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물들지 않고 성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곳이다.
2) 외형적 유형은 교회는 심판 때까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선교의 장(場)이다.
3) 교회는 세상을 그리스도교 화하는 장치이며 도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 극도의 타락으로 인하여 교회자체가 구원이 요청되는 현실이다. 교회만이 신앙을 이르게 하는 유일한 통로도 아니며 교회는 말씀과 성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와 동시에 이웃를 향한 봉사의 의무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불신자도 올 수 있고 신앙이 약한 사람, 아직도 죄 된 행실을 끊을 수 없는 사람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자체가 구원받은 거룩한 모임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교회를 건물과 성직제도 등을 지칭하는 보이는 교회(visual church)와 참된 신자, 성도들의 모임 자체를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invisual church)로 나누기도 한다.
보이는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속해 있어서 이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실현하고 다른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죄인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도 여전히 죄인이지만 당시의 뜻 곧 인류구원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거룩하게 만드셨다.
교회는 악한 세력을 방임하거나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완전히 세우고 인간화가 실현되는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이미 믿는 자들을 교육하고 말씀선포와 불의에 대항하는 일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자신이 세운 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