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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는데 우선 고려가 송 연호를 안 썼고 이걸로 극한의 고려혐에 걸린 소동파가 지랄한건 맞음.
근데 여기까지만 사실이고 여기서 고려사신은 소동파의 항의를 듣고 송나라 연호를 써줬음
무엇보다 중요한건 애초부터 송 연호를 안쓰던 상황이었고 그냥 갑자를 쓰던게 고려 상황이었음 게다가 고려의 공식반응에 송이 떽떽거린다고 적어놨는데 딱히 그딴 기록은 없음
실제로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동파는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송(宋)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가 이거 관련 공식 기록
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금은을 모두 깨본건 맞음
하지만, 송 사신 면전에서 까본적은 없고 송 사신이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간적은 없음
실제로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 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가 공식기록임
라고 하는데
애초에 명주지주였던 증격은 고려의 조공품이 너무 많다고 상소를 올린적도 있고 당시 고려의 조공품이 하사품 못지않게 빠빵하다는 것은 송사와 고려사 모두에 교차검증되는 사실임
딱히 그럴일은 없겠다만 설사 3번이 맞다고 해도 송이 지들 맘대로 고려 사절단을 후하게 대접한것이니 이치에 맞게 오고간거지 딱히 깡패짓이라고 할게 없음 애초에 사신을 홀대하는거 자체가 당시로는 무례한짓인걸
“휘(고려 문종)가 이부(二府)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을 내려 시장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겸백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하였다.”
관련 기록만 봐도 아님
우선 책을 선물로 준건 사실이 맞음
근데 이것만 사실이고 그냥 적당히 서적을 골라서 고려에게 선물한거고 고려 역시 송에 없는 서적을 송에게 선물한 일반적인 선물교환식이었음
"철종이 즉위하자 고려에서 김상기를 봉위사로, 임기를 치하사로 보내왔다. 『형법서』, 『태평어람』, 『개보통예주』, 『문원영화』 등을 구입해 가겠다고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문원영화』 한 가지 책만 하사하게 하고, 명마, 금기, 금백 등을 주어 그 예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라고 한게 공식기록
라고 하는데 우선 이건 딱히 관련 기록이 없음
다만, 거란의 연호를 쓸 당시 고려는 거란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은 상태였고 북송하고는 맺지 않은 상태임을 볼때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음
라고 하는데
고려사신이 예법을 어긴것만 사실이고 나머진 전부 구라임 창고를 깨부수고 창고 물품 다 가져가겠다고 강짜를 부린적은 없음
“소동파가 항주 통판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의 관리를 능멸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가 관련 기록인데 오히려 양쪽 다 패악질하다가 고려가 먼저 상급자 일름보를 하겠다 하니 송쪽이 수그러든게 끝
라고 하는데
애초에 귀주대첩 이후에 처음으로 간 사신단은 1019년 10월이 처음 기록인데 이 기록이 맞다면 파티를 연 적도 없고 요나라 사신을 대놓고 능멸한 적이 없음
왜냐고? 이들은 배타고 가다가 풍랑에 휩쓸려서 공물이 다 날아가 버려서 거지꼴로 송에 도착했고 풍랑 때문에 사절단의 일용품마저 부족할 정도였다는데 이들이 파티광도 아니고 어떻게 파티를 여는건지 의심스러움
라고 하는데
애초에 거란과 송의 전쟁 중 고려사신이 거란 군막 찾아갔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특히 거란과 송이 '전쟁 중' 이라는 기록 역시 전혀 없고 즉 고려 사신이 양측이 다 있는 곳에서 큰소리로 '우리 송 더 좋아함' 이랬다는 기록 역시 없음
군막이라 하는것도 요,금,원 같은 유목민족 지도자들이 동날발(冬捺鉢) 하날발(夏捺鉢) 이라고하여서 여름 겨울마다 거처를 옮기면서 집무를 본걸 군막이라고 오해하였을 확률이 매우 높음 즉, 그냥 궁궐에 간거
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이건 사실임 실제 송사에도 있는 기록이고
하지만, 사실이라면 내가 이걸 적지 않았겠지
사실 저건 고려가 한게 아니라 거란이 한 행동임
“왕휘(고려 문종)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의 책봉을 받고 거란의 정삭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에 대해 한 해에 조공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거란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에서는)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인데 남조(송)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라고 하였다.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이나 공경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즉 고려가 그런적 없음 거란이 했을뿐
세줄요약
1.이렇듯이 오류가 많음
2.기록들만 보면 알수 있듯이 국가간의 상호 무역에서 패악질은 그 어떤곳도 쉽지 않음(정복한 쪽이 그러는게 아니고서야)
3.인터넷만 보고 곧이곧대로 믿지 말도록 하자
첫댓글 어렵다 어려워
이런걸 지어내는 의도가 뭐지
우씨 진짠줄 알았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