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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션인 복음 원문보기 글쓴이: 정성필
막7장 1-8절
손 씻는 문제와 그릇과 잔을 닦는 문제를 들어 예수는 이사야의 말을 빌려 유대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했다.
무엇이 외식인가?
그것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멀다는 뜻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로 들리지만
그러나 이천년 전으로 돌아가면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당시 예수께 비판을 받고있던 그들은 날마다 손을 닦고 성전에서 자신의 죄를 닦고 회개하고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그 말씀들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손도닦지 않는 율법의 파괴자 성전은 허물어져야 한다는 교회 파괴자,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율법을 다 허물어야 완성된다고 말하는 무 율법주의자
게다가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비판하던 바리새인들의 편을 들었을까?
아니면 예수의 편을 들었을까?
결론은 바리새인의 편을 들어 예수를 죽였다.
그게 결론이다.
지금 예수가 오시더라도 상황은 별 바뀔 게 없을 것같다.
만약 예수가 오셔서 지금의 교회와 목사들에게
십일조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게 아니다
십일조는 십의 대표 즉 예수를 바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숭배하지 마라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사탄을 믿고 있다
고 말하면
아마 지금의 교회는 다시 예수를 못박을 것이다.
율법 언급할 필요도 없다.
헌금하지마
마귀 섬기지마
그러면 그 예수그리스도를 당장 못박아 버릴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므로 말이다.
무슨이유로 죽여야만 하는지 생각해보시길 부탁드린다.
교회가 예수를 죽여야하는
첫번째 이유는
지금의 교회는
성경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게다가 복음이 무언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이신 그 예수를 죽여야만 한다.
죽이는 게 바로 진리다.
죽여야만 하는게 순종이고
죽여야만 하는게 하나님의 의다.
예수가
죽어야만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심판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그리고
죽여야 죄가 완성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교회들이 예수를 죽이는 자리까지
반드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아직도 스스로 의인이신 종교인들이신 바리새인들이 교회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어야 사는
그래야 교회가 살아나는 그 일이 일어나야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상관 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또 죽는다 하시더라도
보내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아 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사람들과 상관없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결단이요 계획이시며
하나님만의 방식이시기 때문이다.
7: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1. 대표적 종교인, 바리새, 서기관, 그리고 종교를 대표하는 예루살렘. 그들 종교인이 진리이신 예수께 모였다. 왜? 종교를 넘어선 진리를 찾으려고? 그 진리를 통해서 자신들을 넘어 아버지게로 가려고? 아니다.. 정죄하러 왔다. 이래서 종교는 위험하다. 종교를 통해 아버지께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자기들의 믿는 바를 강화하려고한다. 자기들이 믿는 게 무언가? 2절에 나온다. 그건 율법이다.
2. 몇/이라는 말은 티스 즉 어떤 사람이다.
3. 서기관은/그람마튜스 즉 성경에서는 모세의 율법과 성경을 배운 자, 해석자, 교사
4. 오사/ 엘코마이/ 1)오다는 뜻도 있지만
은유. 존재하다, 일어나다, 나타나다, 자신을 보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일을 했다.
그 분을 알면 돼. 그 분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말이지.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더구나 머리되신 그리고 성령(말씀)이신 그 분이 우리 속에서 그것을 가르쳐 주신대거든. 그래서 이것이 특권이고 복됨이고 구원이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롯된 문제들이겠지요?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악과를 품고 사는 게다가 피조물이란 한계를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인간이 신하긍로 혹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게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하늘을 찢으시고 막1:9, 예수에게 내려오듯 사람에게 오셔야만 이해되어지고 겨우 알 수 있는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게 바로 죄이고 그게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이용해서 지구의 평화를 지구의 안녕과 복지를 말하고 논하고 그걸 실행하는 게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악들이 결코 마귀나 사탄의 영역이 아니고 사람의 영역임을 아는 게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을 그저 머리와 몇 가지 배운 지식대로 믿고 섬기고 드리고 따르려고 하는게 바로 바리새인임을 아는게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될 겁니다
7: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7: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7: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1. 본문은 율법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건 겉과 속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2. 그릇/ 겉과 속을 가진 존재.
3. 이 구절은 누가복음과 병행구절이다. 누가의 도움을 받으면 이해가 더 빠르다.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 점심이 아니다. 식사는 두번이다. 아침 저녁이다. 아침은 시작하는 양식, 저녁은 완성하는 양식. 일부러 아침 즉 시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됨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 잔과 대접을 깨끗이 한다는 게 무엇이지요? 손을 씻으라는 율법, 손을 깨긋하라는 의도인가? 아니다. 그것은 속을 깨끗하게 하라는 의도다.
2. 종교생활은 겉을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 손 씻으라는 율법은 하나님이 하셨다. 그 의도는 속 때문에 그리 말슴하신 것이다. 겉을 깨끗하라 한 것은 안의 문제 때문이다. 밖의 문제는 안의 것의 문제다. 겉의 그것은 안의 것을 깨끗하게 못하면 그것은 악독이라 한다. 그배경으로 41절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한다. 구제, 엘레모쑤네, 긍휼이다. 엘레모쑤네는 긍휼 5장 7절은
2. 헬라어 첫 단어는? 플렌 다시말한다, 두번째로 말한다. 즉 40절까지는 안과 밖의 문제였다. 아가페 사랑이 무언지 몰랐을 때는 육체적 사랑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게 부탁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식사랑 아내 사랑 남편 사랑은 무슨 사랑? 그건 밖의 사랑, 그 수준으로 하나님 사랑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성경의 아내 사랑 남편 사랑은? 아내의 것으로 남편의 것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라는 말 디두미는, 넘겨주어라, 엘레모수네, 즉 안의 것으로 넘겨주어라는 뜻이다. 그렇게 넘겨주는 게 긍휼이다.
마태의 긍휼은 안과 밖의 싸움이다. 밖의 것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 가짜, 그게 악이된다. 밖의 것의 목적은 안이다. 그 밖은 반드시 안의 것이 되어야 한다.
희생제사는- 동물
간음- 불륜
거짓증거- 거짓말
사랑- 그저 사랑
전부 밖의 것으로 했다. 그 밖의 것으로 나를 아닌 것으로 만들어 주신 분, 나를 안의 것으로 만들어 주신분, 이게 긍휼이다.
그래서 긍휼하는 자는 복이라고 했다.
아래는 이태수목사님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사람의 심금을 감동시키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등의 설교를 들어 레마를 말했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레마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이를 하나씩 예를들어 알아보자.
하나님은 요1:1의 말씀과 같이 로고스이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가 로고스이다. 혹자는 선지자나 사도들의 글을 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어떻게 하나님이냐 하는 반문을 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질문은 무시하고 넘어간다. 여하튼 성경 자체는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를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정의 하였으니 성경을 믿는다면 또한 이 말씀도 믿어야 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믿음은 출발할 수가 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이 말씀을 무엇이라고 했을까? 로고스에 해당하는 말은 “아마르”이다. 그러니까 아마르 역시 하나님을 뜻한다. 즉 언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이를 입으로 들어내어 소리로 나타나면 이것을 “다바르” 라고 한다. 그러니가 아마르를 다바르 하셨다 하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바르하셨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들어내셨다는 뜻이 된다. 누구에게 들어내셨는가? 인간인 나에게 들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1:14에는 말씀이 육신을 입었다고 하신 것이다. 말씀을 입은 자 만이 아마르가 있고, 그 아마르를 통해 다바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광야에서 말씀하셨을 때에 그들이 한말이 바로 아마르를 아마르 했다고 증거한다. 이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했다는 말이다. 또 광야라는 말이 “미드바르” 인데 이 어원이 바로 “다바르”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미드바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곳이라는 말이 되므로 오늘날 광야를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교회는 아마르가 다바르 되는 미드바르가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아마르를 다바르 하지 않고 사람의 교훈이나, 또는 사람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이는 아마르로 다바르한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의 것을 다바르 한 것이다. ]
말라기에서 십일조를 도적질하였다는 뜻이 바로 아마르를
감추고 사람의 것을 들어냈다는 말이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즉 하나님을 도적질 했다고 한 것이다. 물질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이미 말한바가 있다. 십일조의 도적질은 아마르 즉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곳이 하나님의 아마르를 전하는 미드바르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盜賊)의 굴혈(窟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이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고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면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그 결국은 하나님의 영이 도적질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그 자체는 말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한 영혼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지 못한다면 그 벌과 죄가 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행한다. 악을 행한다 하시는 말씀이 인간의 죄와 악을 일컬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므로 일어나는 그 폐단을 두고 이르시는 말씀이다.
이를 그대로 신약으로 수평 이동한다면 아마르는 로고스가
되고, 다바르는 레마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들어내고자 하시는 그 최종 결과가 무엇인가? 이를 성경으로 찾아보자.
골 1:26
이 비밀(秘密)은 만세(萬世)와 만대(萬代)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聖徒)들에게 나타났고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秘密)의 영광(榮光)이 이방인(異邦人) 가운데
어떻게 풍성(豊盛)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秘密)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榮光)의 소망(所望)이니라
인용한 골로새서 말씀과 같이 만세 만대 즉 창세 때부터 감추어졌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를 통하여 레마를 말한다고 하는 뜻은 로고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것이 바로 레마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광야 즉 교회에서는 에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고 자랑 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들에서 전하여지는 설교들을 들어보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내어 전하는 다바르 즉 레마라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냐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하였다. 참으로 하나 외모로 하나 전파되고 증거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이다.(빌1:18) 그러므로 우리 말씀을 맡은 자들은 오로지 예수만 증거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조건 듣기 좋은 말들을 이 책 저책을 총 망라하여 사람을 미혹하고 현혹하는 말들이 레마가 아니라 로고스안에 만세와 만대전으로 감추어진 에수 그리스도를 캐내어 들어내는 말이 곧 레마이다.
오늘은 주일이다. 오늘도 수많은 인생들이 각 교회로 몰려 들 것이다. 과연 어떤 말씀을 들을 것인가? 나의 영혼을 살려줄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과 귀가 솔깃한 사람의 교훈과 살아가는 방책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가 무엇 하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질문하고 계시다. 선지자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광야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영혼을 위해서 말이다. 또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이는 로고스 속에 감추인 레마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찾아 말해야 할 것이다. 많은 책들을 접고 먼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 그 다음에 책들을 보라. 아마도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같이 말이다 –여기까지 이태수목사님의 글이었습니다.
밖의 것으로만 하는 것이 악이고 그게 독이고 그게 비진리다.
그런데 그 안의 것으로하면 그게 바로 긍휼이고 그게 선이고 그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것을 가지면 안의 것으로 말하라.
실패를 통해 하늘, 성공을 알아가는 것 이게 바로 보물을 쌓는다는 말이다.
위=긍휼= 안=속=하늘=성공=말씀
아래=성전=밖=겉=땅=실패=예수
위-------------진리, 생명-------------긍휼
아래-----------성전-----------------팔아서, 이득을 얻는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1. 전통/파라도시스는 파라디도미에서 온말이다.이 말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다. 위임하다, 맡기다.
2. 준행/페리파테오/ 걷다, 따라간다, 하지만 이 말은 페리와 파테오의 합성어인데, 페리는 전치사 무엇에 해아여이고, 파테오는 발다, 짓밟다의 뜻을 갖고 있다. 즉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당신들은 왜 우리들을 짓밟고 있냐는 심각한 뜻을 가지고 있다.
3. 부정한 손/ 코이노스 케일 즉 세속적인 손, 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세속적으로 낮추었냐는 말이다.
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 립서비스로는 나를 높이 평가하되 그 마음/카르디아/블랙홀과 같은 그 마음, 선악을 품은 그 마음이라 그 마음은
2. 멀도다//멀//폴흐로- 멀리있는 상태, 도다/아페코는 동사 현재 능동으로 전부 받다, 즉 이것을 다시 세분화 하면 떨어져서 붙잡다다. 즉 마음은 멀리 떨어져있으면서도 붙잡으려고 하는 그 상태이다.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1. 사람의 계명 하나님의 계명//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