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랑 추억을 ,
과거를
회고한단 말이고..
내 인생의 4분지 1쪽이..
하늘로 날라가 버리고 말았다...
- 건강에 조심하고 살자..
11-6
혹시나 하고 인천의료원에 들어섰다..
영정사진에는 분명..
전보다 여윈.. 친구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그 앞엔.. 그의 부인도.. 엉성하게 앉아있었다..
벗의 죽음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학 1학년 때 처음..만나..
그가 우유배달할때 따라다녀도 보고..
그가.... 옥살이를 할땐..
옥바라지도 했다..
석방운동을 위해... 서명을 2000여명 받아..
변호사를 찾아가기도 했었다..
별로 장가갈 실력도 없는 놈이라..
내보다 늦을줄 알았는데.
어느날..
지 마무라랑 사고를 치더니.
만난지 한달만에 결혼을 해버렸다....
그래도 그의 삶은 그때 부턴.. 행복했다..
나름대로의 갈등도.. 있었지만..
아기랑.. 아내랑..
아웅다웅... 잘 살고 있었다..
그는 돈이나 부귀를 꿈꾸지도 않았고..
자기만의 완성ㅇ을 찾아 구했던것 같다..
지 아내 나 아기보다 자기 삶을 더 사랑하고..
자신의 길을 더 고민했던..
정돈되지 않은 이기주의를 끝내 갖고 있었던듯..
내가 이번 가을..
소식이라도 있었으면.. 너의 얼굴을 한번은 더 볼수 있었을 것을..
너의 밝은 축하라도 한번 받을수 있었을 것을..
난 아직 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너의 빈자리를 얼마나... 느껴야 할지..
아마도 두고 두고. 니눔을 원망하게 될게다....
다시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참... 희한한 일이다..
가버린 너보단.. 남겨진... 내가..... 더 처량하다....
옮긴글 11-9
내가 그를 처음 만난건....
내가 그를 처음 만난건..
88년 봄..
그애는 수원 남문에 살고 있었다..
처음 만나 나눈 대화는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애는 결손 가정의 아이였다.
엄마 도 아빠도 보지도 못했고.
불러도 못보았다..
지금은 그저 형님과 같이 살고 있을 뿐..
형은 남문시장에서 신발노점을 하고 있었고..
약간은 머리가 부족한(지체장애) 형수님도 계셨다..
나 처럼 재수를 한 상황이었고..
난 그애와 첫마디를 나누면서.
그의 모든(거의)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애인지..
무얼 위해 사는지.
그가 얼마나 외로운 상황인지..
나는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마치 내가 그안에 있는 것처럼..
당시 수원에는 월 4 만원 짜리 월세방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
난 그곳에 살았고..
그는 남문 시장에 살았다..
언제 왜 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난 한 때 그의 집에 얹혀 살았다..
그의 약간 부족해 보이는 형수 한테
밥도 얻어먹으면서..
물론 남의 폐를 싫어하는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밥상을 같이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집에서..
돈 한푼 내지 않고
한동안 얹혀 살았었다..
그애는 내가 차가운 성격이라 말했다..
똑 같이 어렵게 살았지만.
그 애는 차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똑 같이 물질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그애는 물질을 물질로 풀려고 하지 않았다...
똑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애는 정과 사랑으로 풀고자 했고.
난 이성과 산술로 풀고자 했다..
사실,,
그 애가 날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애가 날 품기에는 난 너무 차가운 성격이었다..
반면 난 그애를 완전히 품었다.
난 그애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평생의 벗이라 단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평생 그를 이해해주고 아껴줄 수 있음을 알았다..
반면 그는 나를 그리 속으로 반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난 그를 다 알수 있었으므로..
난 진정,ㅡ 그를 모두 이해할 수있었다..
그가 날 애틋이 대하진 않았지만
늘 일관적인 내 태도가 몇년 씩 해를 거듭해 가면서..
그의 마음속 빗장도 조금씩 풀려갔다..
그리고 몇년전부턴
우린 그래도 많이 정서를 공유 했었다..
처음 만난 그해 봄
우리학교 첫 기수 였던 우리는
청평 어느 민박집으로 MT를 갔다..
말로만 듣던 앰티 였다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 가본..
난 그 때 만해도 술을 별로 먹지 않았다..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밤이 깊던 그날..
그애는 술을 꽤 먹은 듯했다..
그리곤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무언가를
자꾸만 외치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한손에 소주병을 들고 조용히 일어나
모닥불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고 간절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무슨 메세지 였을까..
잘 알수는 없지만 대략 이런거 였다..
' 우리 하나가 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진정한 우애를 갖는 하나가 되자
머 이런 이야기들이었던것 같다..
그리곤 그는 불속으로 돌진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간절히...
그것이.. 그 사건이었다..
조춘원 불속 돌진사건이었다...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로맨티스트.. 정열의 남자
열정의 사나이
낙서 2
그런일이 있은 후로 그애는
좀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모두가 조춘원 이라면 나름대로의
특별한 정서를 갖고 그를 대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할 건 없지만
어쨌든 우리 들 속에선 그냥 그의 이름 석자가
남들과는 달랐다
그러던중
인근 대학에서 한 대학생 선배가 죽었다..
86학번 쯤 되었을까..
이철규 인지 이내창인지 하는 사람들 죽을 그 시점 이었는데
자세한 건 모르겟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서 사경을 헤매던 그 선배의 병원을 그애가
다녀 왔다 보다..
학교앞 포장마차에서 막걸리아 파전 같은 것을 먹으면서
그애가 또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우리가 이렇게 있어선 안된다고..
사실
우리 모두는 그 때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의 군사정부 -노태우 정권 1년이었다- 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건지
나가서 다른 사람들 처럼 돌을 던지고 싸워야 하는 지 아닌지...
그애는 종종
나가서 전투경찰과 데모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그 선배 학형의 죽음으로 많는 충격을 받았다..
...
그무렵 나는
초기의 학구열을 뒤로 하고
우연히 만난 책 '잠들지 않는남도'-제주 4.3항쟁에 대한 기록 - 에 의해
완전히 쇼크에 빠지게 되었다
도서관에 하루종일 쳐 박혀서 한국 현대사 ,, 분단사에 대한 책을
모조리 읽어 치우고 있었다..
전공책을 왼쪽에 한국 현대사 책을 오른쪽에 나란히 진열해 두고
어느걸 먼저 볼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난 언제나 오른쪽을 선택했다..
내가 20년 동안 배우지 않았던 기록들을 보면서
난 분노에 떨었고
그 분노와 흥분을 가라 않히지 못하고 도서관복도를 혼자서
식식거리며 가뿐 숨을 겨우 겨우 가라 않히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몸으로 싸우고 있었다.
매욱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
====================================
그렇게 열정같던 1학년이 끝났다
2학년이 되면서 난 학생회장이 되었고 연구를 밑바탕으로 통일연구 모임을
조직했다
그 이전에 우린 그와 또 또 하나와 선배를 초빙해서 소위 독서토론모임을 이어갔다
토론을 했고 공부를 했고 우리의 투쟁(?) 지침 같은 것을 정해나갔다
나도 숙고 끝에 데모 대열에 가담했고 학생회를 가장 잘나가는 운동모임이 되도록 만들었다
유난히 조직화에 뛰어난 우리 과는 전대협 출정식등 기타 모임에 사회대 전체 인원의
절반이상을 우리 과 애들로 채워나갔다
그는 선배와 역사문제 연구회라는 중앙동아리를 만들었고 난 과 에서 조직화가 가능한
소모임을 자꾸만 만들어 나갔다 ..
그러면서 그는 우유배달을 시작했던것 같다..
감빵에 가기 전인지 갔다온 이후인지는 모르겠다
형이 고시공부를 하던 나는 데모 에 가담을 해도
도망치는 일에 주력했다
그리고 폭력 투쟁에 대한 내 맘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쟁에 가담했다
남보다 용감했던 친구는 늘 맨앞에서 싸웠고 맨 늦게 도망쳤다
일부러 앞에 나서진 않았지만..
동지(?) 때문에 앞에 서게 된 때는 맨앞에서 싸워도 난 도망치는덴
남보다 좀 빨랐다 어려서 단거리 육상선수경력도 있었고..
또..
형의 앞길을 막지말라던 ... 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차별대우도..
존중해야했다..
어느해 설날엔... 차례상이 끝나던중..
학생운동을 하던 내게 형이
밥먹던 숟가락을 던지기도 했다..
서울대를 다니던 형은 똑 똑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실 싹수는 좀 없는 편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도..
몇차례의 훈방으로 석방이된 나는 결국 형의 앞길을 막지도 않았고
형은 고시를 포기한채..
증권계로 투신했다
친구는 투옥 두번 당했던것 같다..
두번째 투옥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첫번째는
내가 과 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뒷치닥거리는 내 담당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과 학우들이 많았기에
그의 석방을 위한 노력은 힘겹진 않았다
당시 우리학교엔 6천여 학우엿는데
대략 2천 여명의 석방 탄원 서명을 받았으니
참 놀라운 숫자였다
그를 특히 사랑하는 학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것 같다..
변호사를 찾아가니.. 나름대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탄원서는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후에 그는 사회대 부회장이 되었다..
언제난 그는 내 자리를 대신 채워주었다..
운동권 조직속에서 난 잘 자리잡지 못했다..
난 그들과 어울리기엔 그들과 족보가 맞지 않았던것 같다..
난 자생적인 운동인 이었고 그들은 선배들에 의해 조직화되거나
일방적으로 학습된 경향이 많았다 ..
5년간의 학교생활동안 언제나 친구는 나의 자리를 대신 채워주었다
본시 선거는 내가 나가야 했지만 조직원과의 불편함으로 내가 나서지 않자
늘 친구가 대신했다..
사회대 선거도 그랬고 총학생회도 그랬다
사회대 선거는 이겼고 그는 열정적으로 일을 잘 처리했다
그가 부회장을 하던 해
가을 축제가 있었다..
학우들의 호응이 별로 없던 그해 쓸쓸했던 가을
본관 대강당을 꽉 채운 사회대 축제가 시작되었다..
..
운동권 축제랑은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초대가수 있었다..
신계향이라고...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그녀가 노래를 불렀다
통기타를 넓은 강당에서..
혼자 연주하면서..
"그대 사랑~~ 가~을 사랑 "
그렇게 시작되는 노래였다..
넓은 강당이 그녀의 살아 숨쉬는 노래에 모두 압도되었다..
너무 유명한 노래였는데 너무 모르는 가수 였다
교수도 놀랐고 , 우리도 놀랐다..
그런 유명한 곡이 그런 가수의 노래 였다는 것이..
그렇게 리얼하게 살아 숨쉬는 노래는 정말 들어 보지 못했었다..
..
난 그 축제를 보면서..
나중에 일할 땐 꼭 니놈과 일을 함께 할거라고 맹세했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곤 그는 군대를 갔다
강원도 화천으로..
원래 난 정이 없는 놈이라
면회갈 생각도 안햇는데
어쨌든 두번을 면회를 가게 되었다..
그의 친구랑.. 셋이서..
처음가보는 강원도 화천은 정말 추웠다..
그는 건강했고
별 탈은 없어 보였다..
심리학과를 나온 그는
특이하게도 사상전 부대에 배치가 되었다.
그는 휴전선에서 헬기를 타고 대북방송을 한다고 했다.
후후..
참 우끼는 일이 아닌가..
우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했고..
최종적으로 사람중심의 자주사상..
즉.. 주체철학의 신봉자들이었다..
물론..
그는 예나 지금이나.. 사상적으로 참 불철저한
감성의 운동가였다..
도대체 이론적으로는 발전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사상전 부대에서
대북방송을 하고 있었다..
..
그를 보내고 대학 5학년을 마치고 최초로 졸업한
나도 군대를 갔다..
나는 두번을 면회 갔지만
그녀석은 사실 오지 않았다..
나중에 말년에 내가 안양으로 복귀하자
통닭을 사들고 왔었다..
그의 집이 근처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잘 알기에 섭섭하진 않았다.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늙어서....
marti~
추천 0
조회 750
04.11.09 22:00
댓글 2
다음검색
첫댓글 ㅜ,ㅜ
음... 마음 아프겠다.. 마니... 힘내.. 마티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