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셍이라는 사람이 처음 사용한 ‘인지하기 어려운 초 박판의 차이, 틈새’라는 뜻을 가진 이 어휘를 한국의 사상가를 위시해서 이젠 상품개발까지 이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앵프라 맹스, 인간관계에서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야릇한 간격이 인간들로 하여금 울게도 웃게도 한다. 이 앵프라 맹스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형제와 형제 사이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존재한다. 부부사이에도 물론이다. 그래서 이어령씨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책에 의하면 감기에 걸려 혼자 누워 엄마를 애타게 기다릴 때에 늦게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찬 손으로 열이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혼자 말로 걱정하실 때에 이 앵프라 맹스를 처음 경험했노라고 했다.
앓아누워 어머니를 그리워한 어린 아들, 애타는 마음으로 열이 나는 아들에게 손을 얹고 있는 어머니 사이에도 이 앵프라 맹스가 존재한다면 모든 인간 사이에 이와 같이 아주 미세한 갭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에덴동산을 쫓겨난 모든 인간들에게 있는 죄성에 의한 자기방어는 깊이 박힌 본성이다. 물로 씻어 낼 수 없고 화장으로 가릴 수도 없다. 웃는 연습을 하고, 좋을 얼굴 표정을 지으면 다소 나아질 뿐 그 속에 있는 앵프라 맹스의 칸막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어령씨는 ‘러브 소나타’의 집회의 찬양 속에서 이 앵프라 맹스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 앵프라 맹스가 전혀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심전심의 나라이다. 언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곳, 자신의 변명이 필요 없고, 자랑이 필요 없고, 설명이 필요 없는 곳 오직 보고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일수록 자기 방어가 강해 이기적이며 고집이 세고 에고이즘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의인들은 높디높은 자기 방어의 성을 허물고 밖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의 허물과 오류를 드러내고 양해를 구하며 자신의 사랑과 용납을 행동으로 보인다. 감정이입이 빠르고 다른 사람과 공감을 빨리 나눈다.
물론 어릴 때부터 EQ 곧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사교적이고 활발하고 명랑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상대적이다. 경건하고 밝은 부모의 영향일 가능이 많다. 다시 말하면 앵프라맹스가 없는 몸의 언어(body language)로 키워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예배가 있었고, 찬양이 있었고, 기도가 있었으며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신앙의 분위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늘 가지고 있는 앵프라맹스 때문에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이 앵프라 맹스를 완전히 지우고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용납하고 가슴을 열고 위로하고 함께 걸어가는 삶이 될까 사모하고 간구한다.
앵프라 맹스가 전혀 없이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손을 잡고 주를 찬양하는 것을 연습하는 곳은 오직 교회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 강단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언제나 생명의 떡과 생수가 수여되어야 한다. 항상 주 예수그리스도로 먹고 마시고 기뻐하고 그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축제가 열려야 한다. 교회는 양프라맹스가 없는 자유를 얻어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고 가슴을 열고 얼싸 안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사랑의 강수에 굳은 마음이 녹아져 강물처럼 흘러 넘쳐야 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입과 입들이 하나가 된 맑고 청아한 물소리와 같은 찬양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연이 벌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