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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요한 16,23)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필요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의에 따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기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리고 품고 있는 관심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욕망의 해석자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
(2615항)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간청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근거지와 선교지>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오늘의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행적을 짧게 소개하는데, 이 엄청난 선교를 이렇게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듯이 소개해도 되는지 생각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문장으로 요약된 것 안에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여기에 바오로 사도의 선교 Pattern, 곧 형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얼마 동안 지내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안티오키아가 바오로 사도의 선교 근거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14,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
(15,35)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
(18,22)
저는 여기서 근거지와 선교지 관계를 보고자 합니다.
안티오키아가 근거지라고 함은 선교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지가 없다면, 그래서 한 곳에서 줄곧 머문다면, 그곳은 근거지가 아니라 주거지거나 고향이겠지요.
프란치스칸인 제겐 이런 삶이 오랜 꿈이고 영원한 꿈입니다.
근거지는 있되 어디고 눌러 앉아 살지는 않는 선교의 삶 말입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소명을 프란치스코가 받았고,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같은 소명을 그 후예인 저도 받았음을 깨달은 이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저는 무작정 목포 북교동 성당 신부님께 전화를 드려 본당에 속한 섬에 가서 한동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그것이 1980년대 후반이고 간 곳은 신안군의 자은도라는 작은 섬이었으며 그 첫 시도가 발전한 것이 지금의 저희 순회 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 이후 교회는 점차 순회 교회에서 정착 교회가 되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교회 안에 다시 순례자와 나그네 정신을 불어넣었으니 이것을 교회는 정주 영성과 다른 탁발 영성이라고 일컫습니다.
아무튼 다시 얘기하면, 근거지가 있다는 것은 선교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근거지에 한동안 머문 바오로 사도는 이제 3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갈라티아와 프리기아 지방을 차례로 거쳐 갔다고 사도행전은 얘기하는데, 차례로 갔다는 것은 이전에 늘 가던 선교지가 있고 차례가 있었다는 표현이고, 실제로 그 이전에도 이 지방을 순회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습니다.(16,6 참조)
이렇게 떠나가서 바오로 사도가 한 것은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는 것입니다.
직접 선교도 하지만, 그곳 사람들을 제자로 키워 선교하게 했다는 표시인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 사도가 제자로 키운 것은 그들을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키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우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구나 자기 선교지가 있어야 하고 "가서" 주님의 교회를 재건하라는 소명을 받은 프란치스칸은 더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안주처가 아니라 근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몸으로 달려갈 선교지가 없다면 마음의 선교지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나를 찾는 주변 사람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 철부지이니 떼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좀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오래 전 연로하신 한 자매님께서 제게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기도 지향을 두고 기도 바치면서 너무나 웃겼습니다.
"시장통에 작은 점포를 가지고 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장사하기가 힘들어서 내놓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났는데도 매수자가 없어 답답해 죽겠다. 신부님 기도빨 세다니 부탁드린다. 팔리기만 하면 섭섭지 않게 후사하겠다."고 하십니다.
다행인지, 제 기도빨이 셌던 탓인지, 일주일 뒤에 자매님께서 환한 얼굴로 미사에 오셔서 아이들한테 아이스크림 한 턱 제대로 쏘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지향을 두고 바치는 기도, 하느님께서 보시고 깔깔 웃으시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역세권 아파트 분양에 참여했는데 꼭 당첨되기 바라는 청원기도,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사실 이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강요요 억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바람직한 청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성령께서 항상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 함께 기도해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더 꿋꿋이 더 당당히 살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우리가 고통과 시련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과 기꺼이 맞설 의로움과 의연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을 위한 지향도 필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 바쳐야겠습니다.
더 이상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 더 이상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그 누구도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런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청원기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청원 기도의 지향이 좀 더 폭 넓어질 때 생기는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큰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사소한 청들은 덤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매일의 기도 지향을 진지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도의 폭과 지평을 좀 더 확장시켜나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기쁨 충만한 삶>
기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나이 40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싶으면 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도 평생공부입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정말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주저함없이 기도 잘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평생 배워야 할 기도요, 무엇보다 기도의 필수 전제 조건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바로 오늘 본기도가 청원기도의 모범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요!
한마디로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정말 이런 기도는 그대로 응답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오래 전 개신교 목사님과 주고 받은, 자주 인용했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일언지하에 대답했고 내심 흡족했습니다.
지금도 묻는다면 역시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삶이었는지, 참 성인의 삶이었는지, 참 행복한 삶이었는지는 죽음에 직면해서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환상이나 거품이나 거짓은 말끔히 걷히고 진실만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착한 자매들이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을 때는 답이 생각나지 않아 대답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먹을 것을 묻습니다만 저는 이런 경우 “자매님을 좋아합니다. 하느님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에둘러 대답하곤 합니다.
언젠가는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부끄러워하는 분에게 주신 글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좋은 분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좋은 분 자체가 최고의 선물로 생각됩니다.
아마 하느님도 그러할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한 수사가 문틈으로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참 잘 썼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당신 외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만으로 족합니다!”
요지의 문답이요, 수 차례 인용한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저에게 청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 역시 주님이신 당신을 한결같이 간절히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 하나뿐이겠습니다.
당신의 전사답게 죽는 그날까지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다가, 즉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는 것뿐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미사와 강론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며 걷는 것 하나뿐이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다 아시는데도 청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다 보면 필요한 것 한가지는 주님뿐임을 깨달아 알 것이며, 사랑의 눈만 열리면 다 받은 것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여기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이겠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항구히 간절히 사랑하는 것 하나만이 참 필요한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이래서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습니다.
제멋대로, 제생각대로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요,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의 이름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하는대로 받을 것이며 무엇보다 충만한 기쁨이란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제가 볼 때 사도행전의 혜성같이 등장한 신비의 인물, 아폴로도 성령께서 교회에, 바오로에게 보내 주신 뜻밖의 기쁨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며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며 공공연히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니, 교회에, 바오로에게 천군만마의 역할을 하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복자(福者)도 부자(富者)도 자유인(自由人)도 아닙니다.
마음은 참 어둡고 허전할 것입니다.
참으로 꼭 필요한 주님만을 청할 때 기쁨과 평화, 희망의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주님 자체가 기쁨이자 평화요 희망이기에 기쁨 충만한, 희망찬 평화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내 이름으로 청하라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가 해야 할 바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는 복된 운명의 인생 여정임을 깨닫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며칠전 나눈 짧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은
다 예쁘다
사람도
다 예쁘다
웃는 얼굴은
다 꽃이다
주님은
다 예뻐하신다.”
그러니 용기를 내시고 주님 사랑에 더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평생 노력이요 평생 훈련입니다.
무엇보다 참 필요하고 참 좋으신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선물이신 주님을 모시는 은혜 충만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
(시편 135,3)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내 이름으로!"
(요한 16,23)
예수님의 이름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예수'는 '주님(야훼)은 구원(도움)' 또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히브리말 '여호수아'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를 줄여서 '예수아'로 불린 것을 그리스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예수스'로 음역된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이미 그 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르는 동시에 하느님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전하시려 판관과 임금, 예언자를 무수히 보내셨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청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하나이시며 또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이후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 청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요한 16,23)
예수님은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를 잘 아시면서도 우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청이 당신의 가르침과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이런 과감하고 대범한 약속을 하십니다.
비정상적으로라도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검은 거래와 청탁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지요.
정당하지 않은 이권을 욕망하는 이, 불법인 걸 알면서도 알선하고 중개해서 이득을 취하는 이, 자기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이루어 주고는 대가로 더 큰 부를 일구는 이,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각자 서로의 욕망을 알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가진 헛되고 악한 욕망이 풍기는 악취가 서로를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경우, 청을 귀기울여 듣고 계시는 분이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앞에 우리가 들고 나가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어느 누가 헛되고 악한 것을 청할 수 있을까요?
개인 영달과 세속적 영화만을 청하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라기보다 성삼위 하느님 아닌 다른 존재에게 졸라대는 주술이나 거래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기도는 마음 가득한 바람을 안고 하느님 앞에 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라는 이름에 장착된 '말씀'과 '사랑'이라는 필터가 작동하면서 마음속의 욕망은 정화와 정돈의 과정에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결국 영혼의 청원은 더 낮고 더 희생하고 더 품고 더 가난하고 더 나누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지요.
바로 거기에 '아버지의 뜻'이 있고 예수님께서 계시니까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6,27)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당신의 역할을 분명히 하십니다.
당신이 중개자로서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가 깨끗해져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실 장본인이 맞지만, '바로'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강조하시면서 우리 시선과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성삼위 하느님 내부에 흐르는 서로에 대한 겸손과 사랑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라고 하시네요.
우리에 대한 성부 하느님의 사랑에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는 뜻이고, 또 아버지께 사랑받는 비결이 당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살짝 귀뜸해 주시는 듯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요한 16,24)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성령에 힘입어(로마 8,26 참조)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께 드리는 사랑과 찬미와 청원 등이 곧 기도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삼위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모든 행위가 곧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대목에서는 모처럼 선교의 장이 순조롭게 펼쳐집니다.
그동안 반대와 공격, 박해의 위험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평화롭고 또 생명력이 넘쳐 독서 말씀에 머무르는 내내 마음이 기쁘고 흡족합니다.
바오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이름을 씨 뿌렸던 곳들을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사도 18,23) 주고,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하고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는"(사도 18,24) 준비된 일꾼 아폴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데리고 가서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사도 18,26) 주며 아폴로의 빈 곳을 보완해 채워주고,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사도 18,27) 주지요.
이 모든 움직임을 관상하다 보니, 교회는 어느 한 독보적인 인물에 의해 꾸려지는 영리 집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시켜 부르신 이들이 서로 파견하고 환대하며, 가르치고 배우고, 협력하고 보완하면서, 살이 붙고 혈관이 이어져 가고 뼈가 차오르면서 형성되어 가는 유기체라는 것이 보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이들이 자기 안위를 잊고 서로에게 베푸는 선의와 사랑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일의 성과나 사업의 성공, 숫자의 증가나 빛나는 업적이 아니라 교회 지체들 안에 흐르는 충만한 기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 이름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또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느님의 응답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복된 지위에 초대받은 우리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간절히 청할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이 전부이시니 그분을 청해 얻음으로써 모든 것이 뒤따라 올 것이니까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진다면 이미 기도는 시작된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아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퀸즈 성당의 신부님들은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팬데믹 기간에 매주 나눔을 하였고, 지금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캠핑도 같이 다녔습니다.
퀸즈 성당의 봉사자들은 매달 우편물 작업을 도와주십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가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토요일에 가서 하루 머물기도 하고, 일찍 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늑한 방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LA에도 제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부부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명예기자로 인연을 맺었지만, 지금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제자들처럼 제가 LA로 갈 기회가 있으면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작년에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LA에 만들었습니다.
기꺼이 사무실을 내어주고 지국장을 맡아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제가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본당에서의 사목경험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표를 듣고 교구 사목국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첫 본당신부를 마치고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업무를 맡았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지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을 계속 움직이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신부님도 한 번 해볼까?”하면서 자동차를 뒤로 당겨 앞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해달라며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2~3번 연속해서 해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달라며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할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경우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움직임 자체를 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고, 어른은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볼 수 없습니다.
화가는 그 모습의 본질을 계속 찾으며 보는 것이고, 일반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만 보면서 자기 판단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판단이 등장하면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겉으로만 대충 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은 분이 될 것입니다.
기도, 묵상, 미사,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하기 싫어하고 지루해야 하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6,23)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일을 선포하실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하나를 보면서, 주님의 본질을 보게 되고 새로움을 찾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머물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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