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8.8.목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1170-1221) 기념일
예레31,31-34 마태16,13-2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믿음과 지혜는 함께 간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8월의 말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라는 독립불개(獨立不改) 말마디를
상기하고 싶습니다.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진리를 말해 줍니다. 몸따로 정신따로가 아니라 둘은 함께 갑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면 거친 내일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다산>
“하늘이 문왕의 글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이 글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문왕의 글을 없애지 않을 것이니, 광(匡)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논어>
이런 자기 확신의 지혜와 자유는 하늘을 알고 자기를 알았을 때 저절로 솟아 나오는 말씀이겠습니다.
새삼 다산과 공자의 내적경지를 헤아려 알 수 있겠으니 두분은 말그대로 현자입니다.
요즘 과학잡지 ‘뉴톤(2023.2월)’에서 인지 편향의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무려 30개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보고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되었습니다.
유일한 답은 성령의 은총에 의한 하느님의 지혜뿐 이겠다는,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이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기억, 판단의 왜곡이나 치우침을 ‘인지 편향’이라 한다.
이른바 ‘생각하는 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지 편향은 직감적으로 빠른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에,
비합리적인 생각에 빠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이렇게 알아가는 과정 또한 평생과정의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질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입니다.
지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점차 무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탐욕, 분노, 질투, 편견등 무지로부터 벗어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오늘날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 분열, 불화, 전쟁 또한 무지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닙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이 물음이 무지 해결의 열쇠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믿는 우리들의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에 각자 답해야 합니다.
앎의 깊이는 끝이 없습니다.
앎의 깊이에서 만나는 참 주님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멋진 답변에 주님의 격찬과 더불어 상급같은 축복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제자다운 정답의 답변에 감격하신 주님의 응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또 하나의 베드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정체를 깊이 깨달아 앎은 은총이요 주님을 깨달아 알 때 참나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을 알아야 참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탐구여정은 함께 갑니다.
주님을 모르면 아무리 물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참된 겸손도 지혜도 불가능하고 도저히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곧이어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의 반대의 반응이 매우 격렬합니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 완전 착각이었음이 입증됩니다.
고백은 맞았지만 여전히 무지한 베드로요 주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베드로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습니다. 베드로를 통한 악마의 유혹임을 직감한 예수님의 지체없는 꾸짖음입니다.
어느새 광야에서 유혹했던 사탄의 재차 침입인 것입니다. 놀랍고 무섭지 않습니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반석이라 격찬받던 베드로가 졸지에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정말 베드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공부를 마친 것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질책의 기억은 늘 살아 있어 베드로의 믿음의 여정에 끊임없는 생생한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님의 물음에 이어 곧장 떠오르는 요한복음 후반부(21,15-13) 베드로를 향한 부활하신 주님의
삼차에 걸친 물음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또한 주님의 앞서의 물음에 이어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세차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후 말씀 역시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베드로와 사도들은 물론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입니다.
성인의 생애를 보면 말그대로 주님을 따르는데 자신을 온전히 소진시킨 순교적 삶이었음을
그의 51세 죽음에서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인은 청빈한 삶과 설교로 알비파와 카타리파 영지주의 이단과의
치열한 싸움에 승리를 거둔 분입니다.
하느님은 때에 맞게 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인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이단과의 싸움에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낮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큼 온화한 사람이 없었으며, 밤에는 그만큼 온전히 밤을 새우며
기도한 분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은 성인입니다.
또 묵주기도의 보급에 성 도미니코 성인의 공헌이 지대합니다.
묵주기도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핵심이었으며 교황12세의 인정도 뒤따릅니다.
“마라이아의 묵주는 성 도미니코 수도회로 하여금 회원들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얻도록 해주기 위한 원리와 토대로 받쳐지게 되었다.”
성 도미니꼬는 죽기 전 마지막 자신의 동료들에게 남긴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성인은 자신을 수도원 형제들 무덤의 맨 가운데에 묻어 달라고 후임 수도원장에게 부탁을 남겼고
이어 유언을 남깁니다.
“형제들간에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겸손하십시오.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서
영적 보화를 쌓아 가십시오.”
성인이 선종할 즈음 이미 서유럽의 8관구에 60여곳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500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1300년경에는 500여 곳의 수도원에 회원들은 1만여명이었다 하니 살아서는 물론 사후 큰 기적을 일으킨
참 성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념하고 기억할뿐 아니라 내 고유의 성인이 되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우리 삶의 좌표이자
이정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새 계약이 우리 모두 성인이 되도록 고무하고 격려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31,33).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당신 구원, 그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