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때, 단식의 때 -분별의 지혜-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이다”
2024.9.6.연중 제22주간 금요일 1코린4,1-5 루카5,33-39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엊저녁 식사시 알레르기 비염으로 요동치던 심신이 자고 일어나니 씻은 듯 정적의 평화입니다.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지혜이자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 일어나 강론 쓰기전 대략 일별해 보는 인터넷 뉴스입니다. 예전에는 수천명이 보던 굿뉴스 묵상란이 요즘은 백명 안팎입니다. 아마도 유투브에 몰려가 있는 듯 합니다. 시골이 소멸해가고 수도권이 번성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블랙홀 같은 유투브는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끝없는 심연입니다. 정말 분별의 지혜와 절제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9월2일부터 9월13일까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4개국에 제45차 해외 사목 순방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기뻐하는 사진과 더불어 몇 메인 뉴스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감히 형제애를 꿈꾸도록 하자!”
“여러분의 최고의 환영과 믿음에 감사한다.”
“인도네시아는 내적믿음의 대화에서 모범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향한 도상의 순례자들로서 우정을 키워가도록 하자.”
“여러분은 삶의 올림픽에서 사랑의 챔피언들이다.”
제목들도 영감과 꿈을, 생명과 빛을 제공합니다. 시대의 현자, 영원한 청춘, 88세 고령의 가톨릭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현자의 말씀도 분별의 지혜에 도움이 됩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 부끄러움은 어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다산>
부끄러움을 아는자가, 하나 덧붙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야한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맹자>
어제 읽은 노자도덕경 16장 한 말마디가 너무 좋아서 게시판에 써서 붙여 놨습니다.
“스스로 비우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라(致虛極 守靜篤;치허긋 수정독)”
이런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입니다. 자기를 몰라 남을 심판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결코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들 역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종이자 하느님의 신비의 관리인임을 자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묻습니다. 이 물음에는 심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인간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고 교만한 이들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사랑이 절대적 가치의 분별의 잣대라면 단식은 상대적 가치에 불과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할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축제의 때는 단식할 수 없다 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으로 고해인생을 자초하지 말고 축제의 때는 기쁘고 즐겁게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단식한다면 과시가 아닌 이웃에게 숨겨진 단식, 하느님께 열린, 사랑의 단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상, 곳곳에 맛집들이 넘치고 먹는 재미로 살아가는 이들이 넘치는 시절, 자발적 단식이 유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너무 많이 잘 먹습니다. 카페에서 밥을 배불리 먹고 빵과 커피를 또 먹고 마십니다. 먹는 것 역시 빈부의 양극화가 뚜렷합니다. 때로 넘치는 식단을 대할 때는 “먹기도 힘들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많은 사람들이 먹는 재미(식욕), 성(性;sex) 재미(성욕), 돈맛(물욕)이란 기본적 욕구로 살아갑니다. 욕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탐식, 탐애,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 삼락(三樂)이라는 “배움의 즐거움, 친구와 만남의 즐거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 초연한 즐거움”에다 하느님 찾는 맛의 즐거움을 더한다면 정말 이상적이겠습니다. 밥맛이, 성(sex)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 맛, 말씀의 진리 맛으로 사는 이들이 정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건강한 이들이겠습니다. 이래서 영적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며 축제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발상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유연한 단식,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수행에 유연할 것을 촉구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묵은 포도주가 상징하는 옛 것에 습관화, 보수화되어 꼰데가 되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유연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새삼 부단한 내적혁명의 회개가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좋은 분별의 지혜를 지니고 늘 “새 포도주에 새 부대”의 현실을 살게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시편37,27).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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