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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고정관념을 바꾸라/왕하 5:1-14
성경본문 : 열왕기하 5:1-14
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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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변화를 추구하라’, ‘변화를 향해 출발하라’, ‘자화상을 바꾸라’, ‘말을 바꾸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변화 시리즈> 다섯째로 ‘고정관념을 바꾸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해서는‘고정관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고정관념’이란 한자로 ‘고착관념’(固着觀念), 영어로 ‘fixed idea‘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리학 용어로서 본인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이나 표상(表象)에 거듭 떠올라, 그 사람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관념을 말합니다. 강박관념과 더불어 강박신경증의 징후인 경우도 있으나, 반드시 병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이 심하게 되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도전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저는 이 고정관념을 손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큰 말뚝에 단단한 밧줄로 코끼리를 묶어 둔다고 합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고생만 하게 되고, 나중에는 코끼리 스스로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코끼리 조련사는 날짜가 지나면서 말뚝은 점점 작게 하고 밧줄은 가늘게 합니다. 나중에 조련사가 손가락만한 나무에 실오라기 같은 작고 가느다란 줄로도 집채만 한 커다란 코끼리를 매놓을 있다는 것입니다. 1톤 정도 무게가 나가는 무거운 물건들도 손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코끼리는 스스로 “나는 말뚝에 줄을 매어 두면 꼼짝 못한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고생만 한다. 아예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련사는 가느다란 줄로 코끼리를 묶어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벼룩 훈련법입니다.
벼룩은 원래 자기 몸의 70배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점프의 천재입니다. 그 벼룩을 병에 넣고 뚜껑을 닫아 놓으면 벼룩은 계속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뛰어 오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오히려 병뚜껑에 머리를 부닥치면서 서서히 생각이 바뀌어 집니다. “아! 내 능력은 병뚜껑이구나! 아무리 뛰어보아야 나는 병뚜껑이상을 뛸 수가 없구나!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
뛰어봐야 나만 고생이다.” 이것이 벼룩의 생각입니다. 이 때 병뚜껑을 열어놓으면 벼룩은 뛰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또 실제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린 병뚜껑을 쳐다보면서도 뛰어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벼룩은 ”전에도 수도 없이 뛰었지만, 할 수 없었어. 안돼!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어제 안 되었으니까 오늘 안 될 것이라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점프의 천재가 뛰지 않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의 무서움입니다.
과거에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꼈던 것만을 계속해서 생각하다보면 그 사람의 생각 속에 고정관념이 생깁니다. 다시 말해서 낡은 습관과 낡은 사고방식만을 주장하다보면 생각이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고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생각 뿐 아니라 행동까지도 한 자리에 고정되고 맙니다. 틀에 박힌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변화되어야 할 것, 우리에게 바꾸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는 이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틀에 박힌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지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원리, 즉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새로워질 수 없다’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나아만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1절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군대 장관, 오늘날로 말하면 국방부장관으로서 강대한 나라 아람나라의 전군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언급된 것을 보면, 왕의 각별한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리고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아람 나라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 가지 치명적인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그가 국방장관이고, 실세 중의 실세이고, 민족의 영웅이 분명하지만, 그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몸이 곪고 썩어 들어가는 병입니다. 심하면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 발가락 등이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지금이야 의학이 많이 발달되어 문둥병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으로부터 2,850년 전에는 문둥병은 인생 자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둥병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이 되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진 밖에서 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실세 중의 실세라 할지라도, 아무리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이제 인생 종쳤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소망을 잃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들려 왔습니다. 전쟁 통에 이스라엘에서 붙들려와 자기 집에서 종살이하는 하녀로부터 “주인님께서 제가 살던 고향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만 하면 그분이 주인님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3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왕을 만나 이스라엘 방문을 허락 받은 후, 왕의 편지를 들고 이스라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가는 그 모습이 매우 특별합니다.
다같이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가는 그는,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고 선물을 잔뜩 가지고 갑니다. 선물 품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대단히 값이 나가는 물품들입니다. 먼저 십 달란트, 오늘날의 무게로 환산하면 무려 342Kg 이나 되는 은과 육천 개, 오늘날의 무게로 환산하면 약 68.4Kg 이나 되는 금, 그리고 의복 열 벌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선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그의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돈만 있으면 다 해결 된다?
첫째로 나아만에게 ‘돈만 있으면 다 해결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로 값비싼 선물을 많이 가지고 가면 그 유명한 엘리사 선지자라 할지라도, 밖으로 뛰어나와 자기를 기쁘게 반겨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아픈 부위에 손을 얹어 자신의 병을 즉시로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 그는 돈을 인생의 최고 가치에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누가 뭐래도 돈이 최고다’라고 생각하며 ‘돈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년 전 어떤 신문에 남대문 시장의 화제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불길을 피해 급히 밖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불길을 피해 밖으로 어렵게 빠져나온 한 아주머니가 엉엉 울더랍니다. 그래서 그 우는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 가게에 수천만 원이 들어 있는 손금고를 두고 나와서 그것이 아까워서 운다고 하더랍니다. 결국 말리는 소방관들을 뿌리치고 그 아주머니는 거액이 들어 있는 손금고를 꺼내오기 위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후 아주머니는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렵게 불길을 잡고 나서 소방관들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기절초풍할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뛰어 들어간 그 아주머니가 손금고를 부둥켜 앉고 새까맣게 타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아주머니입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돈을 최고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편안한 잠을 살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돈으로 대저택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가구는 얼마든지 들여 놓을 수 있지만, 참된 사랑은 살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돈으로 수천 평의 땅은 살 수 있지만, 단 한 평의 천국도 살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자녀들 교육을 시킬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선교도 갈 수 있고, 돈이 있어야 비전센터도 건축할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불의한 방법이 아닌 선한 방법으로 돈 많이 버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만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권력은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
둘째로 나아만에게는 ‘권력은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값비싼 선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갈 때, 홀홀 단신의 몸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그는 수많은 말들과 병거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병을 고치러 가는 환자 치고 굉장한 행렬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나아만은 권력으로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천하의 엘리사 선지자라 할지라도 이 거창한 행렬을 보면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을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찰스 콜슨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 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미국 권력의 최정상에 올랐던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먹은 것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워터 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철저하게 깨어졌습니다. 권력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력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감옥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기를 다 마친 후에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다가, 수년 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플린턴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권력이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없고, 주님의 사랑이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권력은 한계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진정한 힘이 되지 못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력이 사람을 진정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사람을 진정으로 굴복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많은 말들과 병거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왕의 친서를 가지고 찾아간 아람 나라의 국방장관을 엘리사 선지자는 어떻게 대했습니까? 밖으로 나와 엎드려 인사하며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쁘게 영접하기는 커녕, 한 하인을 통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라는 말만 전해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아만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1절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 왔으면 나와서 인사하고 내 몸에 손을 얹어 기도를 해주어야지, 하인을 보내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고?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 이 친구 안 되겠구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나아만의 세 번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내 생각과 경험이 최고다?
셋째로 나아만에게는 ‘내 생각과 경험이 최고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상반절에 보면 ’내 생각에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자기를 열렬하게 환영할 줄 알았습니다.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에 맞는 대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또 12절을 보겠습니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나아만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요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에 있는 다메섹 강이 훨씬 맑고 깨끗하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의 경험에 따라 더러운 요단강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자기 나라에 있는 다메섹 강에 몸을 담그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권고를 따르기보다는 이제까지 살면서 겪었던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나아만 장군처럼 여러분의 생각을 최고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경험만을 고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 역도 경기에서 ‘500파운드’(227킬로그램) 벽이 있었습니다. 그 500파운드의 벽을 좀처럼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리스트로서, 5년 동안 전 세계의 슈퍼 헤비급을 주름잡았던 역도 선수 바실리 알렉세예프의 목표는 500파운드 벽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벽을 깨뜨리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역도 경기에 출전하여, 1차시기에 간신히 499 파운드를 들어올리고, 2차 시기에서 신기록에 도전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1차시기 판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1차 시기에서 들어올린 무게는 499파운드가 아니라, 501파운드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6명의 선수들이 500파운드를 들어올렸고, 알렉세예프는 그 대회에서 무려 560파운드라는 대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고, 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꼈던 것만을 계속해서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정관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경험의 노예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에게 과거의 경험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경륜있는 사람을 찾는 것 아닙니까? 개인이나 가정이나 공동체에 훌륭한 과거의 경험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험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험을 최고로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생각만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최고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정리해보면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갔던 나아만에게는 세 가지의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권력은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최고’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해서, 우리는 어떻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한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앞으로 나아가라
첫째로 우리는 제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자세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계획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행동하기에는 아직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환경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자기의 경험에 맞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인을 통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메세지를 들은 그는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분한 마음으로 엘리사의 집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종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듣게 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쉽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장군님이시여! 뭘 그렇게 어려워하십니까? 몸을 씻고 깨끗이 되라고 말씀하는데, 장군께서는 그것도 못하십니까? 이것은 주인님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까? ”
여러분! 질문 하나 할까요?
지금 나아만 장군이 왜 이스라엘에 왔습니까?
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집까지 찾아왔습니까?
심심해서 왔습니까?
아니면 관광 삼아 여행 왔습니까?
아니면 아람 나라 국방장관이라고 폼 잡으려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인생을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든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려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은 분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기보다 엘리사 선지자가 명한대로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장애물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 못 한다, 해보나마나 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우리 인생의 큰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인간의 지식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다음 내용들은 신문기사에서 직접 인용한 것들입니다. 1840년, “시속 30마일(48Km)의 속도로 여행하게 되면 누구나 분명 질식하고 말 것이다.” 1901년,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 1926년,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1930년, “사물에 고정되어 있는 에너지를 동력화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인간의 고정관념을 뛰어 넘은 사람들이 토마스 에디슨과 라이트 형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다‘를 ’할 수 있다’로 바꾸었습니다. ‘불가능하다’를 ‘가능하다’로 바꾸었습니다. ‘불’이라는 글자 하나 차이지만, 그것은 인류 역사의 미래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죽어도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를 갖지 않고는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없고, 새로운 열매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상적인 환경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행동은 하지 않은 채 고민만 하는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 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니라.”(전11:4)
환경을 기다리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삶 속에서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상적인 환경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그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행동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제 자리에 앉아 고민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2)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라
둘째로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준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준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일산에서 성광침례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유관재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그 목사님이 한국에서 온 손님과 함께 애나하임에 있는 엔젤스 야구장에 갔습니다. 그 야구장은 약 5~6만 명이 들어가는 야구장으로, 수만 대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까지 완비된 곳입니다. 그 분은 큰 트럭 옆에 주차해놓고 경기가 끝난 후, 저 트럭을 찾으면 본인이 주차한 곳을 쉽게 찾을 것으로 생각하고 야구장에 들어갔습니다. 그 분 일행은 야구경기를 즐겁게 관람한 후, 끝나기가 무섭게 주차장으로 갔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그 큰 트럭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큰 트럭이 주차장을 빠져 나간 것입니다. 수만 대 중에 자신의 자동차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30분 동안 기다린 후,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빠져 나가고 자동차가 몇 대 남지 않았을 때, 멀리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의 자동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변하지 않는 주차장 번호를 기준으로 삼았으면 되는데, 움직이는 자동차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변하는 사람이나 불완전한 돈이나 흔들리는 세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람 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은 늦게나마 하나님의 기준을 따랐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요단강에 몸을 담갔다는 것입니다. 비록 요단 강물이 깨끗하지 못하고 지저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요단강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변하는 사람을 우리 인생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불완전한 돈이나 흔들리는 세상을 우리 인생의 기준으로 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
셋째로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물에 몇 번 몸을 담그라고 말했습니까?
일곱 번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아만은 요단강 물에 풍덩하고 뛰어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병이 나았는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문둥병은 낫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습니다. 두 번째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다시 한번 살펴보았지만, 낫기는 커녕 여전히 진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들어갔다가 나왔지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피부 색깔이 바뀌었다든지, 흐르던 진물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든지 하는 변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 엘리사라는 친구 가짜 아닌가? 이거 내가 적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네 이 놈들, 아까 처음부터 내가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느냐?’ 뭐 이러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또 자기 혼자라면 그래도 미친 척 하고 계속 요단강에 뛰어 들겠지만, 수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몰고 온 부하들이 다 자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국방장군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정도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나아만이라면 계속 요단강에 몸을 담글 수 있겠습니까?
나아만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요단강에 몇 번이나 몸을 담갔다고요?
일곱 번이나 요단강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기에서 우리가 나아만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끝까지 인내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오늘 나아만의 이 자세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1962년 루게릭 병에 걸려 전신마비 상태에 빠졌지만, 자신의 연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는 수많은 삼진 아웃을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홈런왕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24세 때 전쟁터에서 불구의 몸이 되었고, 28세 때는 포로가 되어 5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후에는 세무공무원이 되었지만, 영수증을 잘못 발행하여 또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작가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나이 58세 때 감옥 안에서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를 집필했습니다.
본 번연이 종교 재판에서 패배하여 감옥에 있을 때, 기독 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센더스라는 사람은 미국 전역의 식당을 돌며 무려 천 번이나 거절당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 한 끝에, 미국 전역에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라는 체인망을 구축 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는데, 그것은 “N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심이 되는 일이 있습니까?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까? 상황이 전혀 호전 될 기미도 없습니까? 그러한 분들에게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의인은 포기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번 시도해서 실패 보았다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도 나아만처럼 포기하지 말고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계속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문을 계속적으로 두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닫힌 문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과거에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꼈던 것만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지 않습니까? 또 이 자리에 입만 열면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 ‘내가 군대 갔을 때’, ‘내가 왕년에’,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등의 말을 하며 과거에 붙들려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날마다 입만 열면 다른 사람만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타령만 하고 있는 분이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오늘 그러한 분들은 과거라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기 바랍니다. 찬란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벗어버려야 할 낡은 습관과 낡은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기 바랍니다. 제 자리에 앉아 고민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떠한 기준보다 하나님의 기준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실패했다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