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경첩 (외 2편)
안이숲 문틈에 나비 한마리가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사뿐히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소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백을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어지는 서러운 날갯짓 소리 수없이 들었어요 빗장에 방청 윤활제를 솔솔 뿌리면 마당 귀퉁이의 세월에 퍼렇게 멍든 잡초가 피어오르고 당신은 눈코입이 삭아 자꾸만 떨어져 내립니다 붉은 눈물이 소리가 되어 공중을 묶어 놓고,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이제 편안하게 쉬셔요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십 년, 뒷목부터 낡아가는 수의는 그만 벗으셔도 돼요 염습을 마친 8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겹겹이 에운 문틈 사이로 녹슨 쇠 울음소리 선명하게 들려오는 밤 당신의 평생 그 어디쯤에서 터지는 발성법을 익혀 이리도 가늘고 긴 곡비를 준비했을까 우리 한번은 서로를 열어야 하는데 어머니, 어느 쪽이 제가 돌아갈 입구일까요
손등의 기원
손등에 여름 장마가 지나가는 중이다 여자의 손은 수영에 능숙하다 배영과 접영은 기본기, 가까운 해변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녀올 수 있다
결혼을 하면 여자의 손등은 바다가 된다 깊은 물을 조심해야 해, 바다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가끔씩 뒤집기를 해야 한다 거품 치는 파도를 잘 타 주어야 한다 딸아이가 엄마 하고 부를 때 손등은 출발 준비를 마친다 손이 춤추는 일은 여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므로 손등에는 커다란 서핑보드가 들어와 살고 있다
손등은 파도에 끄떡 않는 갯바위 같다 우직한 여자의 오래된 손등에 검은 따개비가 핀다 바닷가 백사장에 누워 햇볕을 받으면 손등은 햇빛 가리개가 된다 누군가 기대기에 좋은 벽이 된 다 다섯 개의 문을 가진 유람선이 된다 자꾸만 기대고 싶은 손등을 풀면 마른 바다를 다시 만난다 바닷물에 손등을 푹 담그면 손등은 바다를 건너는 연륙교가 되어 마침내 먼 섬까지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여자에게 손등은 때로 무인도, 등대에 불이 켜지면 손등은 바다를 바라보는 한 채의 집이 된다 그 여자의 손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삐걱거리는 안방의 골마루가 된다 시집간 딸아이가 자주 드러누웠던 마룻바닥은, 햇살이 닿아 반들거린다 손등을 펴면 먼 바다를 건너온 모레가 쌓인다
깡마른 그 여자 손등에 사막이 생긴다 선인장 꽃이 핀다 푸른 옹기 옆구리 모두 유통기한 하나씩 흉터처럼 찍혀 있는데 나는 나의 유통기한을 기억해 본 적 없다
할머니는 몇 대째 이어 내려오는 내 몸속 물이 씨간장이라고 명명해 주신 적이 있지만 씨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부터 서리 맞는 일을 배웠다
가끔 몸을 씻겨 주는 소나기를 피부에 새겨 넣기도 하고 바람이 전해주는 먼 곳의 이야기를 담아 씨의 근원을 만들었다 씨란 할머니의 그 윗대 할머니의 고함소리 한 번씩 뚜껑을 열 때마다 세상 모두를 달이고도 남을 만큼 짰다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는 날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일도 허기가 져서 무두질해 부드러워진 옹기 한 벌 걸쳐 입고 먼 섬으로 떠나고 싶기도 하고 옹기를 반으로 뚝딱 잘라 양산을 만들어 쓰고 도시로 쇼핑을 나서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마트에서 파는 나의 짝퉁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 들은 이후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시간이 쌓인 짱짱한 나의 둘레 진짜는 진짜답게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법 나는 나의 방식을 온몸으로 쟁여둔다
훌쩍 성숙한 씨 간장 한 그릇, 따스한 봄이 퍼갈 때를 기다려 나는 나를 완성한다
―시집 『요즘 입술』 2023.12 --------------------------- 안이숲 / 본명 안광숙. 1972년 경남 산청 출생. 경상대학교 대학원 졸업. 2021년 계간 《시사사》 상반기 신인상 당선. 시집 『요즘 입술』. 계간 《시와사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