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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9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저희 마음이 산란하오니
만약 평화를 팔고 사는 가게를 보셨다면 평화를 사러 가시겠습니까? 담는 그릇은 얼마나 커야 할까요? 평화를 준다는 사람이 있다면 따라가시겠습니까? 평화를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줄 수 없다면 사기꾼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평화를 잠시만 맡아 달라고 하시면 맡아 주시겠습니까? 그 때 보관료는 얼마나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보관료를 지불하시겠습니까? 평화를 저울로 단다면 무게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평화의 부피를 잰다면 얼마나 클까요? 평화를 깨트리는 망치나 폭탄은 어떤 것이 가장 좋을까요? 남자가 평화를 더 많이 가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자가 더 많이 가졌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평화를 아니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줄 수 있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파는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평화입니다. 잠시만 맡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저울로도 달 수 없고, 크기도 측량할 수 없는 평화를 주시고 그 무엇으로도 깨트리고, 폭파시킬 수 없는 그런 평화를 남녀노소, 빈부, 유식 무식을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평화는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답니다. 세상의 악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 주실 당신이 이제 잠시 후면 군사들에게 잡혀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슬픔으로 산산이 조각나듯 찢어질까봐 걱정이 태산 같으신 예수님의 고별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이별의 말씀은 "샬롬"입니다. 그 평화의 원천이신 당신 자신을 송두리 채 내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를 해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제자들이 슬픔으로 마음이 찢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산란(散亂)이란 말은 슬픔이나 괴로움으로 마음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평화는 굳건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마음을 하나로 주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주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에서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평화를 "언 발에 오줌 누듯" 세상 것에서 얻으려고 하고 임시방편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산답니다.
두 번째의 것은 바로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좌불안석(座不安席)이나 바늘방석과 같이 불안한 것입니다. 욕심으로 부풀어 오른 모든 기대 수준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까봐 불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나 싸움터에서 상대방을 이겨야겠다는, 또 이겨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것이 평화를 깨트립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곧 부활하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오시겠다는 말씀을 다시 들려주시면서 현성용(顯聖容)처럼 하느님의 본성을 제자들에게 되돌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왜 불안한가요? 그러면 우리는 지금 마음이 왜 산란한가요? 그 원인들이 예수님이나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없는 일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경우 바로 그 산란함과 두려움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모르는 체 하고 살고 있지는 않나요? 모두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 당장 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이제 주님은 세상과 싸워서 영원한 승리를 쟁취하러 죽음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들에게 가시는 것이지만. 주님에 대하여 아무 권한도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주님을 심판하러 오지만, 주님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잡혀가십니다.
죽으러 가는 이 판국에 평화를 주시겠다는 주님은 정말 이상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과 당신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는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의 것에 산란하고 두려워 겁을 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산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축일5월 9일 성 제오르지오 프레카 (George Preca)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880-1962년
같은 이름 : 게오르그, 게오르기오, 게오르기우스, 쁘레까, 제오르지우스, 조지, 호르헤
성 게오르기우스 프레카(Georgius Preca, 또는 제오르지오 프레카)는 1880년 2월 12일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몰타(Malta)의 수도인 발레타(Valletta)에서 빈첸조 프레카(Vincenzo Preca)와 나탈리나 체라볼로(Natalina Ceravolo)의 아홉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열심한 부모에 의해 그는 그 해 2월 17일 발레타의 포르토 살보(Porto Salvo)에 있는 동정 마리아 본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88년 프레카 가족은 발레타에서 멀지 않고 빠르게 성장하는 항구도시인 함룬(Hamrun)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의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본당에서 게오르기우스는 견진성사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다.
17살이 된 어느 날 그는 플로리아나(Floriana)에 있는 마글리오(Maglio) 정원을 따라 걷던 중 그가 다니던 리케움(Lyceum) 학원의 교수인 에르콜레 몸팔라오(Ercole Mompalao) 신부를 만났다. 에르콜레 신부는 그에게 “네가 어른이 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의 친구가 되고, 너도 그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너는 그들을 통해 너의 좋은 운명을 찾을 것이고, 그들도 너를 통해서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케움 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게오르기우스는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몰타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그의 고해사제였던 알로이시우스 갈레아(Aloysius Galea) 신부가 1905년 4월 8일에 선종했는데 며칠 뒤 게오르기우스에게 발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가르치도록 너를 선택하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에 감동한 게오르기우스는 라틴어로 규칙서를 작성하여 교황 비오 10세(Pius X)의 승인을 받고자 했다. 그는 모든 본당에서 평신도 보조자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양성할 책임을 맡을 7명의 종신 부제들의 모임을 마음속에 그렸다. 1905-1906년 사이에 그는 함룬에서 남성으로 구성된 한 청년 모임을 알게 되어 그들을 자신의 영성 모임에 초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청년 모임의 지도자였던 에우게니오 보르그(Eugenio Borg)를 주목하였고, 그에게 요한 복음에 대해 설명하였다. 에우게니오 보르그는 후에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는 사제 서품을 몇 달 앞두고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성 요셉(Josephus)에게 전구하여 호된 시련에서 살아났지만 그 질병의 결과로 왼쪽 허파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었다. 그는 1906년 12월 22일 피에트로 파체(Pietro Pace)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예수 성탄 대축일에 함룬의 성 카에타누스 본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서품식 이후 여러 주간 동안 그는 미사를 봉헌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작은 다락방에 칩거하여 하루 종일 묵상과 관상 생활에 전념하였다. 1907년 1월 말경 그는 예전에 보았던 청년 모임을 불렀고, 2월 2일 함룬의 타누초(Ta’Nuzzo) 성당에서 열린 영성 모임에 그들을 초대하였다. 그 후 이 작은 모임은 함룬의 프라 디에구(Fra Diegu) 거리에 작은 공간을 빌려 같은 해 3월 7일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두 날이 그리스도교 교리회(the Society of Christian Doctrine)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이 평신도 모임의 회원들은 모범적 생활과 가톨릭 신앙의 원리로 충실히 양성되어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처음에 이 모임을 ‘교황의 아들과 딸회’(Societas Papidum et Papidissarum)로 불렀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들이 모임을 갖던 낡고 허름한 공간 때문에 농담 삼아 ‘박물관’(Museum)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별명은 곧 그들 모임의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박물관’ 철자에 라틴어의 첫 글자를 따서 ‘M.U.S.E.U.M’(Magister Utinam Sequatur Evangelium Universus Mundus!)이라는 이름을 고안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선생님, 전 세계가 복음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1910년에는 지안니나 쿠타자르(Giannina Cutajar)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여성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후에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1910년경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스스로 늘 ‘아기 예수님의 놀라운 발현’이라고 부른 매우 강한 신비 체험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마르사 크로스(Marsa Cross) 근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거름 자루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있는 12살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그를 바라보며 급히 도와달라고 청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손수레에 손을 얹는 순간 너무도 큰 영적 감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를 갔는지 또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기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이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그 소년이 예수님이었고, 주님께서는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정통한 교리와 양성으로써 주님의 들판과 포도밭을 재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계신다고 이해하였다.
이 교리교사들의 모임(M.U.S.E.U.M.)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회로 발전하였다. 교리교육 사도직에 헌신하는 이 평신도 모임은 자신들을 단순한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인도했고, 그들 스스로 짧은 기도나 규칙적인 묵상을 통해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매일 한 시간 동안 교리교육을 받고 이어서 그룹 모임을 가졌다. 1909년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센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상심하였지만 주저함 없이 이 명령을 따랐다. 그 후 교구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교구청에 이의를 제기해 이 금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14년과 1915년 사이에 여러 일간지들이 새로운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모욕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회원들에게 온유함의 서약 또는 약속을 하도록 명했고, 장난삼아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기꺼이 용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모욕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치며 모든 고통을 참아내었다. 1916년 마우로 카루아나(Mauro Caruana) 주교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우여곡절 끝에 호의적인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비록 몇 가지 변경 요구는 있었지만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교회의 최종적 승인을 위한 길이 열렸고, 그 결과 1932년 4월 12일 카루아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 승인을 받았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몰타 제도(諸島)에 복음의 가치와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몰타 사람들을 위해 교리 · 윤리 · 영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의 개인적 사용을 위한 기도나 대중적인 신심을 위한 기도를 담은 수많은 소책자들도 출판하였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 특히 ‘사랑 받은 이의 목소리’라고 부른 복음의 위대한 사도였다. 그는 회원들과 대중들에게 복음서의 문장과 구절들을 기억하도록 고무하였고, 카리스마에 충만한 그의 강론은 항상 성경의 비유나 이야기 그리고 성인들의 생애를 참조하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할 영광을 지켰고, 어떤 것이 추악한 죄악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또한 죽음과 심판, 지옥과 천국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는데 주저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감동적으로 선포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언이나 격려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왔고, 그의 전구로 이루어진 치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사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초자연적 은총을 받았다. 사제로서 겸손과 친절, 온유와 관대함을 지닌 그는 진정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목자였다.
몰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강생(降生)의 신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17년부터 그는 요한 복음 1장 14절의 말씀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Verbum Dei caro factum est!”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회원들이 이 말씀의 배지(badge)를 두르기를 원했다. 1921년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에 그리스도교 교리회는 몰타와 고조(Gozo) 섬의 도시와 촌락에서 처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구유 예식을 준비했는데, 이는 그 이후 몰타 제도에서 성탄절을 경축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반에 참석하여 성탄절을 위해 준비한 작은 구유나 아기 예수상을 만져보기를 원했다.
이 거룩한 사제는 특별히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어려운 순간마다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하심에 의탁하도록 배웠다. 그는 1918년 7월 21일 카르멜회의 3회원이 되어 이듬해 9월에 서원을 하면서 프란코(Franco)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 센터에 모인 어린이들에게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스카풀라(Scapulars)와 기적의 메달 사용을 장려했고, 그리스도교 교리회 본원 성당을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 봉헌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개인적으로 묵주기도를 암송하기 위해 ‘빛의 신비’ 5단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51년 5월 19일에는 산타 베네라(Santa Venera)에 성 미카엘(Michael) 학교 주춧돌 축복식을 가졌고, 1952년에는 호주에서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시작하기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영국, 알바니아, 수단, 케냐, 페루에도 진출하였다.
복음에 대한 봉사와 하느님 백성의 그리스도교적 양성을 위한 길고도 활동적인 삶을 산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1962년 7월 26일 목요일 저녁에 산타 베네라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몰타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다. 생전에 그는 매우 검소한 장례식을 원했지만 시 당국과 교회의 고위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의 유해는 함룬 인근에 있는 기적의 메달 동정 마리아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곳은 곧 지속적인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2001년 5월 9일 몰타의 플로리아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전례적으로 5월 9일에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제오르지오 프레카 (George Prec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이배근 가브리엘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