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 - 작품속
유화물감
리아 민순혜
며칠 전 큰맘 먹고 방을 정리 정돈했다. 바닥에 쌓여있던 월간지나 소책자는 모두 버리고 책장 안에 있는 책도 읽지 않는 것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책장에 공간이 생기자 평소 보이지 않던 작은 선물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는 유화물감 네 개가 들어있었다. 초록, 주홍, 빨강, 보라,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었다. 그 옆에 꽂혀있던 봉투 속에는 미술 전람회 팸플릿과 사진이 몇 장 들어있었다. 전시회가 끝난 후 갤러리에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물감은 그녀의 남편이 직장을 옮기게 되어 이사 가면서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잘 간수한다는 것이 그만 잊어버렸다. 나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유화반 동아리활동을 그만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화물감은 마개를 개봉하지 않아선지 아직 그대로인 것 같았다.
나는 책을 정리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오래전 ‘유화반 동아리’에서 그녀와 함께 활동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도 문화센터 유화반 강좌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삽화나 캐리커처(caricature)를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일반인을 위한 세부적인 미술 강좌가 흔치 않을 때여서 유화반에 등록했다. 강습 첫날부터 난감했다. 강습생 대부분이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로서 수업이 시작되자 각자 자유롭게 유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나는 스케치용 연필만 갖고 갔기 때문에 그냥 앉아있기도 뭣해서 뒤돌아 나오려고 일어서는데 강사가 불렀다. 다음 시간에는 유화 도구를 준비해오라며 준비물을 써주었다. 그때 유화반 고참인 듯한 그녀가 옆으로 왔다. 자신한테 여분의 캔버스가 있으니까 그려보라면서 자신의 옆자리로 이끌었다. 강사도 그게 좋겠다고 하면서 캔버스에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엉거주춤 그녀 옆에 앉아서 그리는 흉내를 냈다. 강습생들은 저마다 스케치해온 것을 그리거나 사진을 앞에 놓고 그리고 있었다. 시간이 끝날 즈음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강사 앞에 갖다놓고 합평을 기다렸다. 나는 내 캔버스는 한옆으로 비켜서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처음 그린 것인데 합평을 받아보라고 하면서 그것을 앞으로 갖다놓았다. 하필 맨 앞자리에 갖다놓아서 합평 순서도 제일 빨랐다. 그런데 강사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마치 마티스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고. 나는 ‘마티스’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집에 와서 백과사전을 찾아보고서야 마티스가 유명한 화가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 후로 강습생들은 나한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녀도 물론 더욱 친절했다. 도리어 내가 고마웠는데 말이다. 만약 첫날 그녀가 내 캔버스를 앞에 갖다놓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이후 유화반에 안 갔을는지도 모른다. 더욱 그녀는 강습시간마다 세세한 부분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정물화를 그릴 때 묘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있기라도 하면 자신의 그림을 앞에 놓아주며 보고 그리라고도 했다.
그녀의 배려는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가 바로 문화센터 건너편이어서 매주 강습이 끝나면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근처에서 칼국수나, 우동 등 점심은 간단히 먹고 후식으로 차나 커피는 우아하게 마신다고나 할까. 그녀의 집은 고급 찻집 못지않게 인테리어가 잘되어 있었다. 사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다. 상대의 말을 주로 듣는 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녀한테는 늘 친구가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역시 우울할 때면 시내에서 곧장 그녀 집으로 가곤 했었다. 그 점은 나도 닮을려고 노력한다. 남의 말을 경청하기… 정말 좋은 습관인 것 같았다.
그녀가 남편을 좇아 진주로 이사를 간 후로도 우리는 한동안 하루가 멀다 않고 안부를 물었다. 1년 후 그녀가 집들이를 한다면서 초대해서 가보니 사는 곳 아파트 상가에 세를 얻어 만든 화실로 안내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없다보니 시간이 날 때마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문을 열자 유화물감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 한면에는 완성 된 유화 캔버스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원색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보라색 톤을 주로 사용하는 그녀의 그림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유화를 감상하고 화실을 나왔는데 그녀가 잊었다는 듯이 다시 들어가더니 누드 그림을 한 장 갖고 나왔다. 자신이 스케치 한 것이라며 내 손에 들려줬다. 전업주부이던 그녀한테서 언뜻 화가의 진지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우리가 다녀가고 얼마 후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딸이 미국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해서였다.
그 후 우리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한테서 연락이 왔다. 딸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귀국했다면서 자신도 그동안 붓을 놓았는데 다시 그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사는 데에 지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나도 에너지가 솟아나곤 했다. 그녀는 지금 진주에서 활발하게 미술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 책장에서 찾은 오래전에 선물 받은 유화물감을 보면서 나는 더욱 그녀가 그리웠다.
─『시에』 2012년 여름호
민순혜
대전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배경음악 ; J.S. 바흐 / 오보에,현과 통저주음을 위한 협주곡 ,BWV1053R

첫댓글 2년전이었군요.... 시에는 어떤 내용인가 궁금해요.
카페에 올린적이 있었나... 아뭏든 늦게나마 측하합니다 ^^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ㅎㅎ 시간 나실때 = 게시글 4528번 ♡옌타이 부채♡ = 읽어 보시면 궁금증 풀리실거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