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중국 대만은 45년간 유신헌법으로 통치했다.
밑에 자세한 설명 나옴.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싶으면
우물안 개구리 시야를 버리고
70년대 당시 주변국 정치를 살펴보라.
1972년 시행된 유신헌법에 대해 말이 많은데요.
그 시대를 정확히 평가하려면 국가안보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
그리고 국제정치(정세) 측면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유신헌법을 평가할 때에는
우물안 개구리의 시야(시각)를 버려야 합니다.
아래 기사를 봅시다.
YTN 뉴스 2012-05-11 18:00
"스위스에서는 1971년 이후에야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하게 됐다."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스위스에 가서 따지세요.
1971년 이전에 당신들은 왜
반민주적 헌법을 갖고 있었느냐고...
정치란 것은 그 나라에 특수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스위스 빼고 말해 봅시다.
70년대 당시에 남한은 어찌하여
서구적 민주주의를 100% 실시하지 못했느냐고
따진다면 할말은 없습니다.
그러나...그 말은 옆집 초등학생에게
100미터 경주에서 왜 '우사인 볼트'를 따라가지 못했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 유럽 선진국은 남한보다 50~100배 잘살았고
그들은 한국보다 민주주의 역사가 2~3백년 앞서 있었습니다.
더구나 최빈국 거지나라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유럽 선진국처럼 서구적 민주주의를 100%
실시해야 한다?
1970년 당시 남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23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남한은 농업국가로서
국민들 대부분(6~70%)은 농민이었고
당시 농민들은 초가집에서 등잔불 켜고 살았습니다.
지금 남한은 농업인구가 6%에 불과한 공업국가입니다.
당시 농민들이 지금처럼 기계화 농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자유체제 국가들이 공산당과 맞서던 5~80년대 냉전기 시절에
자유체제 국가들 내에서는 공산당을 막아내는 방식을 놓고
논쟁과 이견이 많았으며..
그 결과 60년대에 월남에서는 군사정변이 7번 발생했고
냉전기 시절 태국에서는 군사정변이 17번 발생했던 것입니다.
태국에 가서 따지세요.
당신들은 왜 군사정변(구테타)을 17번 일으켰느냐고...
6~70년대 한국에 박대통령같은 특출한 정치인이 없었다면
한국의 정치는 봉기,소요 등으로 갈팡질팡 춤을 추었을 것이고
그 결과 한국에도 군사정변이 수없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한국.. 이 나라가 저절로 공산당을 막은 것처럼 보입니까?
한국.. 이 나라가 저절로 경제발전을 한 것처럼 보입니까?
당시 북한 공산당은 수백만명을 학살하며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는 등 국민들의 기본적 자유를 전부 박탈하고
국민들을 오직 남침용 살인기계로 만들어 대남 적화전략을
추진했는데...
남한이 느슨하게 서구적 민주주의 정치를 시행하여
북한을 막아낼수 있을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북한에서 그런 것 주장하면 즉시 총살입니다.
공산당 지도자 스탈린이 2천만명을 학살하고
김일성이 6백만명을 학살한 것이 거짓말로 들리나요?
공산주의 정치체제는 재산 국유제, 5호담당제, 집단농장제,
식량배급제..등으로 이루어진 강제통치의 체제이므로
자유체제 국가들은 공산당을 막아내기 무척 힘듭니다.
공산당은 칼을 갖고 덤비는데
붓을 갖고 그들을 막을수 있을까요?
6~70년대 남한이 겉멋 들어서 주제파악 못하고
자유로운 서구적 민주주의 정치를 했다면
남한은 아마 월남처럼 공산화되어
8백만명이 학살되었을 것입니다.
월남에서 학살된 인원 3백만은 월남 인구의 28%이므로
당시 남한 인구의 28%는 8백만 정도 됨.
정치는 시대적 상황과 상대성이 작용하는 분야입니다.
북한을 빼고 당시 남한의 정치를 설명할수 없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안보 위기 상황에서는
군인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군인들이 득세하는 것입니다.
박대통령 시절에 아시아 후진국 중에서
서구적 민주주의를 실시하여 성공한 나라가 없습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갈려고 하다가 다 망했지요.
자신의 주제 파악을 하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길을
택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반공 국가였던 대만은 유신체제를 45년간 지속시켰습니다.
밑에 자세한 설명 나옴.
지금은 공산당이 대부분 다 망했지만
1970년 당시만 해도 공산당이 잘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지구의 절반이 공산권 국가였습니다.
1917년 이후 74년간 존속되던 공산주의 체제는
모순이 드러나 1991년 공산주의 종주국 쏘련(러시아 연합)은
'공산혁명(계급투쟁) 포기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공산당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만일, 공산당이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남한은 아직도 1인당 국민소득이 3백불 상태에 있다면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은 지금도 유신헌법을 원할 것입니다.
그래야 공산당을 막아낼수 있고
거지나라 후진국 경제를 발전시킬수 있고
국민들이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6~7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6.25전쟁 이후의 북한의 대남전략
*5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53.8 - 61.5 )
전후 복구기: 6.25전쟁에 따른 피해복구에 주력하던 시기
*6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61. 6 - 70. 12 )
폭력혁명 추진기: 4대 군사노선(62. 12) 및 3대 혁명역량 강화노선(64. 2) 등 폭력혁명 노선을 채
택하고 청와대 기습사건(68. 1), 통혁당 간첩사건(68.6)..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68. 10)..
현충문 폭파사건(70. 6) 등의 무력도발을 감행.
참고: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이란? ① 전인민의 무장화 ② 전국토의 요새화 ③ 전군(全軍)의 간부화
④ 장비의 현대화
이렇게 북한은 6.25전쟁으로 인한 전후 복구가 마무리되자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무장공비를
남파하여 남한 사회를 혼란시키기 시작합니다.
이때 박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한 것이죠. '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한데 공산당은 남침을 계속 노리고
있고 ..어이쿠, 이렇게 여야가 서로 헐뜯으며 밤낮 이전투구 선거를 하는 식으로 정치를 하면 나라
는 거덜날 것이고 결국 북한에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60년대 후반에 들어 남파 간첩의 잦은 출몰, 무장공비 침투가 본격화되자 박대통령은 1968년 예비
군을 창설하여 그에 대응했던 것이며, 한편 당시 국회에서는 시국이 비상하므로 대통령에게 비상대
권을 부여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60년대 중반부터 월남전에 참전하여 고전하고 있던 미국은 1971년 주한미군 7사단 철수를 강행하여
박대통령을 화나게 하였으며...결국 박대통령은 이제 미국도 믿을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60년대 후반, 계속적인 북한무장공비 침투와 주한미군 7사단 철수 등.. 이런 시대적 상황이 유신헌
법 제정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군사학의 귀재이며 선견지명 능력이 뛰어났던 박대통령은 다가오는 위험을 예감하고 유신헌법을 추
진하게 됩니다. 판단은 후세의 국민들과 역사가에 맡기며...
*7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71. 1 - 83.10)
폭력혁명 및 2차 남침전쟁 추진기
북한은 남북회담(7.4남북공동성명 추진)을 하는 등 겉으로는 위장평화 공세를 펼치며 한편으로 남
침땅굴 굴착..제1땅굴(74년), 제2땅굴(75년), 제3땅굴(78년)...박정희대통령 저격(74. 8)...김일성
의 중국 방문(75.4)..이렇게 북한은 남침전쟁을 위해 은밀히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에 협조 요청.
월남이 공산화되는 등 베트남, 캄보디아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75년 봄, 중국을 방문한 북한 김
일성은 남침전쟁을 위한 군사적 행동에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음이 최근(2012년) 드러남. 연합뉴스
2012-05-16 08:09 보도.
베트남 공산당의 땅굴 전술을 배운 김일성은 70년대에 3개의 남침땅굴을 은밀히 굴착하며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박대통령 저격(74년8월), 중국 방문(75년4월) 등으로 북한 김일성
은 남침 전쟁 추진을 본격화 하였던 것임.
70년대 중반의 한반도 안보정세는 이렇게 위태했으므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그에 대응하였던 것임.
북한은 1971년부터 은밀하게 남침땅굴을 파고 있었지만 1974년10월까지 남한은 북한의 남침땅굴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1974년11월에 가까스로 남침땅굴(제1땅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일 당시 남한의 정치와 사회가 혼란하였다면, 그리고 한국군의 군기와 기강이 나태하였다면 북한
의 남침땅굴을 찾아낼수 있었을까? 월남이 망한 것은 공산당의 남침땅굴 때문인데...
미군과 한국군이 월남에 주둔하여 월남을 도왔지만, 월남은 국내정치 실패로 사회가 혼란하여 남침
땅굴을 찾아내지 못했고 또한 월남 사회가 이념적으로 썩어 월남은 공산간첩들의 천국이 되었죠.
결국 수렁같은 월남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철수하게 됨. 이후 월남은 공산화되어 자유시민 3백만명
이 학살당함.
반공체제 국가였던 대만의 현대사 살펴보기
대만은 45년간 유신헌법으로 통치하였다.
반공 자유체제 국가였던 자유중국(대만)은 국민대회헌법 즉 대통령 간선제 헌법인 유신헌법으로 45
년간 통치된 나라입니다. 그 기간은 1950년부터 1994년까지 입니다.
또한 대만은 1950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령이 무려 38년간 지속된 나라입니다. 공산당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죠. 공산당은 칼을 갖고 덤비는데 붓을 갖고 공산당을 막을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공산권이 붕괴된후 대만은 헌법을 서구적 민주체제로 바꾸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80년대말과 90년대초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5~1987년은 중공(중국),
쏘련(러시아 연합)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점입니다.
공산당의 잘못을 인정하는 개혁파 즉 중국의 등소평, 소련의 고르바초프 등장으로 공산권은 변하기
시작하죠.
공산권 종주국 쏘련은 1991년에 공산주의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 뜻은 공산당이 공산당의 계급투쟁
즉 프롤레타리아 공산혁명에 의한 세계공산화 목표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서구적 민주주의에 좀더 접근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
니다. 한국은 1987년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고 노태우 정부를 출범시킵니다.
대만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말 90년대초 사이에 대만은 계엄령을 풀고 헌법을 개정하게 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 한국과 대만이 쌍둥이처럼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정치적 변화를 하게 된
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산권의 붕괴 시기와 관련이 있는데, 한국 대만 등 반공국가들은 공산당의 적화위협
감소를 바탕으로 정치적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할수 없는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에 이렇게 국제정세가 돌아가자 한국 국민들도 이제 서구적 민주정치를 해도 좋다고 생
각하게 된 것이지요. 70년대에는 어림 없는 일입니다.
대만의 반공지도자 장개석 총통은 국민대회헌법(유신헌법)으로 집권하여 1975년까지 25년간 집권하
고 편안하게 죽었는데, 대만의 이런 정치를 계엄통치라고 부릅니다. 당시 대만에서 언론,출판,집회
,결사의 자유는 당시 한국보다 훨씬 더 심하게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참고;총통은 특별한 것이 아님. 중국은 한국 노태우 대통령을 '노태우 총통'이라고 언급했던 것을
참고 바람.
젊은이들은 당시 남한과 대만의 정치를 독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동 시대의 공산권 독재자들은
장개석 총통보다 수만배 더 심한 독재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공산당은 잘못된 공산주
의 이념을 믿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공산당은 반대파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여 중국,소련,북한,월남 등에서 최소 5천만 이
상을 학살했으며 '공산주의'의 모순으로 굶겨죽인 사람을 합하면 1억명이 넘습니다.
공산당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이유는 그들이 믿는 유물론 사상 때문인데, 즉 인간을 영혼이 없는
물질의 존재로 보았으므로 '사후의 생'이나 영혼 ,종교 같은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학살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공산당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이유는 공산주의의 문제점 때문인데, 공산주의 집단
농장 체제는 사람들을 게으른 노예처럼 만들어 창의력과 생산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생각하고 발명하고 열심히 일하기 보다는 대충 눈치보다가 배급이나 받아먹으면 되는 공산
주의 체제는 사람들을 게으른 노예로 만들었으며 인간의 창의력과 창조력을 말살하였던 것입니다.
|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싱가포르는 현재도 유신체제입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없이 세계 최고의 강소국입니다.
싱가폴에서 리콴유가 통치할 때에는 ..그가 30년 통치했는데...길거리에 껌 뱉으면 40만원 벌금이었죠. 지금도 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