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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20세기초, 일본열도는 자급자족할 수 없었다. 산업화의 여파로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었지만, 식량생산량은 좀처럼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했다. 식량 수입의 대금은 섬유 수출로 충당하는 판국이었지만, 대지진과 공황은 일본의 경공업을 파탄내고야 말았다. 서구 열강은 일본인의 해외이주를 차단했고, 높은 관세를 매겨 시장진출마저 좌절시켰다.
연표
총력전 체제가 수립되기 전, 20세기 초의 일본 사회에는 여러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지주가 가혹하게 소작인들을 착취했고, 도시에서는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미비했으며,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에서 억압받았다. 여러 곳에서 생활수준의 차이가 극단적이었고, 곳곳에 끔찍한 차별이 만연해있었다.
농촌의 부모는 딸을 옆마을의 나이많은 농사꾼에 시집보내느니 도시의 유곽에 팔아버렸고, 누이가 매춘부로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젊은 청년들은 이를 갈았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던 미성년의 여공들은 더럽고 축축하며 각종 유독 분진으로 가득 차 있는 공장에서 매일 15시간을 일해야했다.
한 해에 20만명의 여자들이 농촌에서 도시의 공장으로 쏟아졌고, 8만 명이 공장으로부터 귀향했다. 귀향자들 가운데 6분의 1 가량은 질병에 걸린 상태였고, 매년 3,000여명의 여공이 결핵 환자가 되었다. 그 시대에 결핵은 걸리면 죽기만을 기다려야하는 불치의 병이었다.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된 '쌀소동'은 궁핍한 1920년대의 불길한 전조였다. 1918년 여름, 36전 하던 쌀값이 한달만에 거의 두배 가까운 60전의 가격으로 앙등하자 군중들은 이내 수천의 무리를 형성하여 곳곳의 쌀집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광산노동자들과 피차별부락민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바다 건너의 식민지 조선인들도 파업 행렬에 동참했다.
소동은 10만에 달하는 군 병력이 출동하고 나서야 진압되었지만,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내각은 그 여파로 인해 붕괴했다.
이후에 취임한 자는 평민재상(平民宰相)으로 불리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드높았던 하라 타카시 총리였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3.1운동을 지지한 바 있던 진보적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는 이 때의 하라 내각 탄생을 두고 "시세의 기운과 이에 따른 국민의 여망"이라 논평했다.
그는 갖가지 개혁을 실시하며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교육, 교통, 산업, 국방 네가지 분야에서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개혁은, 무엇보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빈곤과 질병을 퇴치하는 데 주 목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군부에 대립각을 세우며 떳떳하게 맞섰다.
그러나 통치기구의 개혁과 재편 또한, 아래서부터 터져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21년 11월 4일 도쿄역에서, 하라 타카시는 군중 속에서 돌진해 온 어느 청년에 의해 가슴팍을 강하게 찔려 암살당하는 것으로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끝을 맺었다. 이토 히로부미 이후 12년 만의 총리 암살이었다.
1923년 9월, 관동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10만이 넘는 사망자와 340만에 달하는 피해자를 낳았다.
목조 가옥이 밀집해 있었기에, 화재로 인한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
유언비어로 인해 6천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으며, 중국인, 사회주의자, 무정부의자 등도 학살당했다.
1924년 11월, 중국에서 군벌들간의 내전이 한창이던 때에(제2차 직봉전쟁), 고베에서 열린 '대아세아문제' 강연에서 쑨원은 이렇게 물었다.
"일본은 서양 패도의 번견(番犬)이 될 것인가, 동양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가."
바야흐로 동양 평화가 위협받던 그 시대에, 일본이 어떤 역할을 맡게될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
1925년 이래 시행되었던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은 점차 모든 형태의 정치적 목소리와 움직임을 '국체(國體)에 반하는 행위'라 낙인 찍는 식으로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해나갔고,
경시청 특별고등부 검열과 (警視庁特別高等部検閲課)
사상범을 전향시키기 위한 각종 육체적 정신적 고문이 자행되었다.
1926년의 크리스마스, 다이쇼 천황이 세상을 뜨고, 히로히토 황태자가 새롭게 어좌에 올라, 쇼와 시대가 시작되었다. 쇼와 시대는 시작부터 기괴하게 삐걱거렸다.
천황 암살 사건을 계획한 혐의로 체포되었던 박열과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찍힌, 대역죄를 저질렀다기에는 너무나도 보무당당해 보이는 한 장의 괴사진이 연초부터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1927년 3월,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한 금융공황, 이른바 쇼와금융공황이 시작되었다.
77개 은행이 도산했고, 또 그 여파로 인해 수없이 많은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했다. 일본의 경공업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비상대출과 은행의 정리 합병으로 위기를 타개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중소기업인들은 사실상 도태되었다. 국가의 경제산업 일체를 중앙에서 쥐고 통제하는 구조의 원형이 이미 이때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28년 6월, 만주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한 때 천하의 대권을 노리던 봉천군벌 장작림이 탄 열차가
봉천 교외 황고둔역에서 폭발했다.
폭탄은 관동군 공병대에 의해 설치되었고, 주동자는 관동군의 고급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였다. 일본에 협조하지 않던 장작림을 제거하여 만주를 병탄하기 위함이었다.
만주 침략에 대한 관동군의 야욕은 결국 1931년, 마찬가지로 봉천 교외의 남만주철도 선로가 폭파되는 사건을 계기로 명약관화해졌다. (만주사변)
이 또한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칸지에 의해 오랫동안 계획된 것이었다.
만주사변보다 2년 전인, 1929년 10월.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 열도에까지 도달하자, 곪을데로 곪아있던 사회모순이 일순간에 터지며 일본이라는 체제를 근간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예상치못한 곳에서 산발적으로 괴물의 모습을 한 채 높으신 분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정치 테러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총리는 칼에 찔렸고,
청년장교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제국은 이미 이때에 이르러, 자기 통제 능력을 잃어버렸다.
밑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하고, 또 영향력있던 주장은 일본이 바깥으로 팽창해 식민지를 얻어야한다는 외침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서구 선진국의 일본에 대한 견제,
1924년 이민법으로 인해 일본계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길은 막혔다.
이를테면 '일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적 정책(1924년 이민법)'이나 '살인적인 관세 장벽', 그리고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일본 열도의 구조적 한계'를 근거로 들었다. 팽창정책의 도덕적 정당성이나 실현가능성을 떠나, "일본은 일본을 먹여살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실로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자급자족할 수 없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총력전 체제가 절정을 맞는 1940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쌀 생산에 들인 노력이야말로 '견디지 못하는 것을 견디고, 작은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수준이었다. 일본은 손톱만큼의 황폐한 땅이라도 모조리 경작했다. 이를 통해 240만 헥타르의 경작지가 320만 헥타르로 넓어졌으나, 문제는 그동안 인구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생활수준의 상승에 더불어 더 많은 쌀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해에 180만 톤 가량의 쌀이 만성적으로 적자였다. 이미 20세기 초, 일본의 농업생산성 향상 프로젝트는 한계에 봉착해있었고, 1920년대 일본의 쌀 수입량은 10년 전에 비해 세 배나 늘어나 있었다. 대금은 섬유 수출로 벌어들인 국민들의 고혈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섬유산업은 대공황을 맞아 완전히 파탄났다. 일본은 이미 이때에 이르러 구조적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한가지 무서운 질문이 뒤따랐다.
"10년 뒤, 일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일본에겐 세가지 길이 있었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1924 이민법 항의 시위
첫번째는 해외이주를 적극 유치하여 인구과잉으로 인한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길은 우생학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서구열강의 아시아인 이주제한법 등에 의해 좌절되었다. 한 도쿄시민은 미국 대사관 근처에서 스스로 배를 가름으로써 항의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이 불길한 사건은 향후 틀어지게 될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암시했다.
1921년에 있었던 제2차 국제 우생학 컨퍼런스의 로고. 20세기 초는 우생학의 전성기였다.
두번째 길은 국제시장에 참여하는 길이었다. 살인적인 관세장벽과 쇼와 초기의 잇따른 공황,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공황이 이 두번째 길을 가로막았다.
마지막 길이 바로, 팽창과 침략이었다. 미영을 비롯한 서구열강은 식량자원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광대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고있었다. 명백히 '동양'의 일본이 '서양'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싹텄다.
울분에 찬 당시 일본의 우익 선동가들, 그리고 다수의 청년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당장 일본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만주를 확보해야한다. 만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소련이 잡아먹기 전에 미리 중국을 침략해야한다. 중국을 정복하는 것이 난관에 봉착한다면, 남진하여 동남아시아의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를 얻어야한다.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를 얻는 것을 미국이 방해한다면, 미국의 기를 꺾어야한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듯, 군부는 그렇게 움직였다.
관동군의 일부가 독단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거나 일본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가 빈발했던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인들 중에선 실제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었고, 귀족적이고 고상한 정치인들의 실수가 호랑이보다 무섭게, 그리고 혐오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울분에 찬 이들은 그 대가도 물론 누군가의 피로써 치러야 하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진행된 개혁은 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개혁은 지배계층의 정당과 무산계급의 정당이 대연정하는 등의 '타협적' 개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모든 의식을 송두리째 뒤바꿀만한 비가역적이고 철저한 개혁이었다. 국가총동원체제, 총력전이 시작된 것이다.
총력전체제는 청년들의 울분을 잠재웠으며, 일본을 더 근대적이게 뒤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일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이 상처는 1980년대 일본 버블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그 시점에까지 일본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흉터로 자리잡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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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 류이치. (2011). 다이쇼 데모크라시/어문학사.
Ogura, T. (1963). Agricultural development in modern Japan.
Zhen, J. (1984).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Princeton University Press.
Barnhart, M. A. (1987). Japan prepares for total war: The search for economic security, 1919–1941. Cornell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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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w, M. H., & Chuma, K. (2016). The Turning Point in US-Japan Relations: Hanihara’s Cherry Blossom Diplomacy in 1920-1930. Spr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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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붙이는 추신입니다.)
베댓펌
그래서 일본인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전범 등 사악한 군부 우두머리들이 순진한 쇼와천황과 일본국민을 꼬드겨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는 생각이 어이가 없는 것
일본은 이미 모순에 가득 차 있었으며 일본국민들도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동양에서 가장 우월한 일본인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고 서양 식민지를 병탄해서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셍긱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대였음
그런데 본인들이 선동당한 희생자인 척 하는 건 어이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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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세기 초도 이미 조선 침략 후잖아
18말 19초
서양에 지들이 존나 뜯기면서
쟤네 왤케 잘나가지 연구하니까
제국주의가 답이라
지들도 침략시작한거지
적극 열렬히 전쟁에 반대한 일본인이 몇이나 된다고 ?
양아치 버러지 취급받는 일본인보다도
조선인들은 더 거지같이 살았음
일본인은 다 전범공범 이라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