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분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춘천에서 출발, 깎아지른 산세를 배경삼아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를 두어시간 남짓 달린다. 민간인 통제구역과 평화의 댐을 지나 이윽고 양구를 가로지르는 수입천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다시 작은 마을을 몇 개 지나니 드디어 아담한 학교 하나가 시야에 잡힌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오미리 오미분교. 학교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산자락이 병풍처럼 학교를 감싸는 곳이다. 지난 64년 세워진 이 학교는 하루종일 고단한 농사에만 매달리는 오미리 주민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이 샘솟는 마을의 행복한 샘터였다.
학교가 세워진 초창기에는 300명의 학생들로 북적이는 어엿한 '국민학교'였다. 하지만 주민들 대부분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학생수가 급격히 줄면서 67년부터는 분교가 됐다. 36년간 배출한 졸업생은 719명. 수많은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을 키웠던 오미분교는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6학년생 6명은 방산중학교로, 나머지 12명은 수입천 너머 5km 떨어진 방산초등학교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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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분교의 산증인인 '기사 할아버지' 김영수씨. 폐교가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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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분교는 지난 92년에도 교육청의 학교통폐합 방침 때문에 문을 닫을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먼 길을 다니게 할 수 없다"며 학부모들이 강하게 반발해 통폐합이 무산됐다. 하지만 이번엔 학부모들 스스로가 통폐합을 결정했다. 이미 2학년 학생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입학 자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좀 더 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경쟁심과 사회성을 키워주겠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주인을 잃은 학교 건물은 일반인들에게 임대해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공방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학교가 없어진다는 얘기에 가장 서운한 사람 중 하나는 77년부터 이 학교의 살림을 도맡아 온 주사 김영수(58)씨다. 26년을 근무하는 동안 학교 화단에 심겨진 나무들부터 책걸상 하나하나까지, 학교 안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물건이 없다. 그의 자녀 셋과 동생 둘도 모두 이 학교를 다녔으니, "학교가 집이나 다름없다"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행여라도 아이들이 추위에 떨까, 그는 겨울이면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미리 교실에 난로불을 지피는 일을 스물 여섯해 동안 거르지 않았다. "올 겨울만 지나면 이제 그럴 일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참 서운하다"고 말하는 김씨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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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송 분교장에게 설장고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 ⓒ오미분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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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18명에, 교사는 송세영 분교장과 백금호, 원현정 선생님 등 3명 뿐인 이 아담한 학교 아이들은, 여름에는 학교 앞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겨울이면 얼음낚시와 스케이트를 배운다. 1등도, 꼴찌도, 반장도, 왕따도 없다. 이곳 아이들에게 학교는 배움터이기 전에 친구를 만나 어울리는 놀이터다.
학원에 가본 아이도 없다. 대부분 학원 보낼 가정형편도 안되는 데다, 된다 해도 멀리 양구읍까지 보낼 엄두가 나질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3명의 선생님들이 개인 교습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학업 성취도는 도시 학생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전교생 모두 1대씩 개인 컴퓨터를 가지고 있어 정보화 교육 여건도 도시 학교 못지 않다.
일찍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방과 후 집에서 우두커니 부모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몇 해 전부터는 특별활동으로 설장고를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의 반응이 좋아 열심히 연습한 덕에 연주 실력도 나날이 늘어, 지난 1일에는 강원도 사물놀이 겨루기 대회에서 삼도 풍물로 초등부문 으뜸상을 받았다. 수학이나 과학경시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꼴찌를 기록하며 큰 학교 아이들과의 실력차를 확인한 채 풀이 죽었던 아이들은 이번 수상을 통해 전에 없던 자신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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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밥으로 보온을 한 통에서 사슴벌레 애벌레를 꺼내 보여주고 있는 윤수. ⓒ미디어다음 김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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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 성장하는 덕분에 이 학교 아이들의 꿈도 자연친화적인 것이 많다.
4학년 윤수의 꿈은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되는 것. 항상 자연 백과 사전을 보며 곤충 채집 방법과 기르는 법을 꼼꼼히 익히고 있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학교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윤수의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른다. 마당에 들어서면 불쏘시개로 쓸 통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윤수는 이 통나무에 붙어살던 사슴벌레와 각종 애벌레들을 모아 깡통에 톱밥을 채운 집을 만들어 줬다. 처음엔 온도를 잘 맞춰주지 못해 죽어버리는 애벌레들이 많았지만 곤충키우기에 능숙해진 요즘은 매일 방과 후 꺼내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윤수네 집 안마당은 있는 그대로 자연학습장인 셈이다.
아이들의 일기장과 그림에도 자연은 빠지지 않는다. 화가가 꿈인 선정이가 뽐내기 게시판에 걸어놓은 그림에는 양구 주변의 아름다운 계곡과 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이 학교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아이들의 순박한 눈빛과 마음. 세 교사는 "여러 시골학교를 다녀봤지만, 오미분교처럼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아이들은 만나본 것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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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놓인 필기통의 펜들도 2년 내내 꿈적 없었다고 설명하는 송 분교장. ⓒ미디어다음 김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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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현정 교사는 "요즘은 읍내 학교만 나가도 아이들이 도시 아이들 못지 않게 드세고 영악스럽지만, 우리 학교 아이들은 정말 착하고 순진하다. 교무실에 놓아둔 천원짜리 한 장이 몇 달째 그대로이니 자물쇠가 필요 없다"며 "아이다운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간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오미분교가 없어진다는 소식에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67년 오미분교가 세워진 것은 이 마을 아이들이 수입천 너머 방산초등학교에 가려면 징검다리 4개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가득 쌓이고 여름에 폭풍과 장마가 오면 으레 등교길이 막혀 이를 안타까워한 어른들의 건의로 작은 학교가 세워졌다.
마을 구석구석까지 길이 생기고, 걸어서 30분 걸리는 10리 길도 몇 분이면 버스로 갈 수 있는데도, 이 학교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마을사람들을 만나보면 금새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오미분교는 단순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 출신이자 5학년 인경이의 아버지인 최일수(38)씨는 "학교가 폐교된다는 소식에 놀라고 서운하다"고 말했다. 1년에 한차례 초등학교 동창회를 갖고 있다는 그는 "이젠 학교에서 후배들이 뛰노는 모습을 못보게 됐다"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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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최씨와 인경이, 그리고 남동생. 이제 '동문 가족'으로 남기는 힘들어졌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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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도시인 탓에 양구군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50%정도는 군인 자녀들. 하지만 오미분교 학부모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 눌러 살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외지로 나갔다가 IMF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오미분교 아이들은 수십년간 얼굴을 맞대며 내남없이 지내온 주민들이 함께 기르는 자식들이다. 엄마가 도시에 나가 계신 도현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송이와 영균이, 사촌 성균이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보호자를 자처한다. 급식 시간이면 어머니들은 순번을 정해두고 아이들의 먹거리를 챙겨준다.
오미분교의 가을 운동회는 마을 전체의 잔칫날이다. 노동일을 나가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버스 운전을 하는 아버지들도, 하우스에서 일하던 어머니들도 모두 학교 운동장에 모여 닭싸움과 제기차기, 줄다리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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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했던 지난 가을운동회도 이젠 추억 속의 풍경이 됐다. ⓒ오미분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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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오미리도 대부분 노인들이 지키는,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마을이 됐다. 마을 사람들의 희망을 가꿔온 오미분교가 문을 닫으면, 학교 운동장에 울려퍼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자취를 감추고, 오미리는 더욱더 조용한 마을이 될 것이다.
때문에 오미분교의 폐교 소식은 마을 사람 모두에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아쉬움 뒤에 남긴 어른들의 마음과 희망은 한결같다. "앞으로 세상이 그들에게 안길 상처를 이기고 지금처럼만 바르고 예쁘게 자라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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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박한 선한 이웃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도시가 번성할 수록 더 흙 속의 자연과 순박한 미소가 아쉬워지는 시대의 한 단면이겠지요, 모놀가족이 더 필요하여 짐을 느끼게 되어 옮겨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