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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4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에제 47,1-9.12
복 음 : 요한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생명의 샘, 생명의 강
-주님은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십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생명의 샘, 생명의 강이 되어 살고 싶습니까?
우리 주님은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십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소원은 주님처럼 생명수 샘솟는 생명의 샘,
생명수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이 되어 사는 삶일 것입니다.
마음이 바짝 말라 있을 때는 흡사 바닥이 드러난 마른 샘 같기도 하고 마른 강 같기도 할 것입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살 때는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동 우물도 있었고
집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우물도 있었고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옹달샘도 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곳곳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도 많았고 물고기도 많았고
빨래터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 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름철 비온 후면 시냇물에서 물고기도 참 많이 잡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마음 부자로 행복하게 살았던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하염없이 바라 봐도 지루한 줄 모르는 것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
끊임없이 맑게 샘솟는 우물이요,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나 강물일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맑게 샘솟는 우물이나 맑게 흐르는 강을 보면
마음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젠 거의 볼 수 없는 샘물이요 시냇물이요 강물이 되었습니다.
이젠 두레박, 바가지, 우물, 샘터, 옹달샘 같은 단어도 죽은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맑은 샘’같은, ‘맑은 강’같은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마음 상쾌한지요!
아주 오래 전 언젠가 비온 후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꼭 비가 와야 맑은 물인가
가뭄 중에도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일 수는 없나
맑게 샘솟는 우물일 수는 없나
늘 깊고 푸른 산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로 살 수는 없나
생명수로 촉촉이 적시며
임바다 향해 흐르는 맑은 강으로 살 수는 없나
언제 어디서나
밖으로는 푸른 산, 안으로는 맑은 강으로 살 수는 없나”-1998.9.21.
가능합니다. 바로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늘 생명수 맑게 샘솟는 생명의 샘이요
늘 생명수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생명수 샘솟는 ‘마음의 샘’으로, 생명수 맑게 흐르는 ‘마음의 강’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은 얼마나 은혜롭고 고무적이고 아름다운지요.
주님의 집인 성전에서 샘솟는 우물이,
또 여기서 발원發源하여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이 상징하는 바, 바로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기적들은 파스카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완전히 타락전의 에덴 낙원 동산 같고, 실낙원失樂園에서 복낙원復樂園으로 회복된 모습같습니다.
에제키엘의 복낙원의 꿈은 마침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에제키엘은 물론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복낙원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주일 복음은 태생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 못의 물로 눈이 떴는데,
오늘 벳짜타 못가의 38년 동안 누워 지내던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입니다.
‘파견된 이’의 말뜻대로 실로암 못이 상징하는바 예수님이셨고,
‘은총의 또는 자비의 집’이란 말뜻대로 베짜타 못이 상징하는바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나 계시는 실로암 못이자 벳짜타 못인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대로 주님과 38년 중풍병자간의 대화는 미사중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이뤄지는 대화 같습니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마음의 중풍병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중 영적 중풍병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곧장 일어나 내 ‘운명의 들 것’을 들고 힘차게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여기서 안식일을 범했다 하여 집요하게
시비를 걸고 들어오는 유다인들이 진짜 심각한 영적 중풍병자 같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게 경직되고 굳어져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니 말 그대로 영적 중풍병자들입니다.
정말 인정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인정머리 없는 놈, 싸가지(버릇) 없는 놈’이란
평가 들으면 그 인생 끝난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신 진짜 벳짜타 못인 예수님께서
치유 받은 병자를 향한 강력한 권고입니다.
이 또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영과 육은,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참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영적건강에 육적건강이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날로 영육의 병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죄악이 많다는 표지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인간의 죄악으로 병들어 가는 자연의 역습이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이 주시는 징벌의 표지일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기도는 물론 공동운명체라는 자각 하에
함께 어려움을 힘껏 참아 견디고, 지혜와 사랑을 나누며, 연대하는 길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용서받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때 비로소 영육의 회복이요 건강일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어,
우리 모두 당신 생명의 샘으로 살라고,
또 당신 생명의 강으로 살라고 우리 삶의 메마른 광야로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에 군대에 다시 입대하는 꿈을 꿨습니다. 꿈속인데도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분명히 제대했는데, 그래서 예비군과 민방위까지 모두 마쳤는데
다시 군대에 왔다는 사실이 눈물 나올 정도로 억울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참 병장이 아니라 이등병이었습니다.
‘다시 군 생활을 30개월이나 해야 해?’하면서 화를 내다가 잠에서 깼습니다.
사실 군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참 많습니다.
그 시간이 쉽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시간이었고 저를 성장시켜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군대에 가라고 하면 “죽어도 못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꿈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꿈꾼 것뿐인데 계속 걱정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다시 군대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럽다며 울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매여서 지금 충실히 살지 못하는 모습에 한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하는 걱정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또 일어날 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걱정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닐까요?
꿈에서 깨어나면 그만인 것처럼, 내 생각의 굴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나지 못한다면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해서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 가십니다.
이 벳자타 못은 사제들이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씻는 곳으로,
사람들은 이 못의 물이 출렁이면 천사가 내려온 것으로 신체의 질병이 치유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긴 시간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이 사라지는 건강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예수님 질문에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가장 근본적인 치유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일깨워주십니다.
헛된 생각의 굴레에서 깨어나라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지금까지 나를 지고 있던 육체를 들고 모든 선행 안에서 걸으라는 명령입니다.
단순히 병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내 생각의 굴레에서 깨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저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당신 사랑의 표지로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의 표징, 생명의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야곱이 축복의 징표로 간직했던 엉덩이뼈의 상처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과 자비를 바라보며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가야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표시로 우리에게 남겨주신 상처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상처를 보여주시며 당신의 표지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는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과 자비를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사순을 살되, 부활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순은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닌,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이현주)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에게
안성맞춤의 건강을
저마다에게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봄이 있고
건강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삶을 원하십니다.
건강한 믿음과 건강한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건강한 삶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주님 사랑입니다.
본래의
우리자신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건강한 삶은
회개의 삶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건강한 삶의 기초입니다.
회개를 통해
건강한 삶의 원천이신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로 돌아서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게 하는 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우리는
주님께 아픔을 건넵니다.
이 사순시기가
건강한 삶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치유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오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민성기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1990년이니까 30년 전입니다.
우리는 사제품을 앞둔 부제반이었습니다.
설교학 수업에서 강론을 발표하였습니다.
기준에 대한 강론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 했습니다.
땅에서부터 기준을 잡으면 저는 키가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부터 기준을 잡으면 저는 키가 큰 편입니다.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을 때입니다.
엄하게 단속하고, 교칙에 따라 벌을 주었지만 흡연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화장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화장실에서의 흡연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면서 언제든지 교장실 방문을 환영한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가지 않았지만, 초코파이가 있는 교장실은 학생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게임 중독으로 학교에 오지 않고, 오더라도 잠을 자던 학생들을 야단치지 않고,
학교에 게임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게임에 몰두하는 집중력을 키워주었고,
학생들 중에는 컴퓨터 전문가들이 생겼고, 컴퓨터를 전공으로 대학엘 가기도 했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이 공부의 기준이 아니라, 좋아하는 과목이 공부의 기준이 되니
학생들이 학교를 좋아했고, 학교의 분위기도 좋아졌다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꽁꽁 얼어붙게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국경이 없습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습니다.
감염 대책에 대해서 평가하거나 비판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국가적인 재난에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지혜를 모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의료진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는 것입니다.
감염된 분들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가 사라지도록 모임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걱정, 공포, 두려움, 분노는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내, 나눔, 격려, 지지, 희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대부분의 교구는 미사를 중단하였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미사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성찰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박해시기에 몇 년씩 미사 참례를 할 수 없었던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분주했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책을 읽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0년은 우리 민족의 저력이 드러났던 해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38년 동안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던 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짜타’라는 연못에 몸을 담그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도 있었지만
그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건강을 회복하길 원합니까?’
환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원하지만 아무도 저를 저 연못으로 데려가 주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연못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직접 고쳐주셨습니다.
연못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크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고 싶은 사람에게만 세례가 유효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벳자타 못에서 38년 동안 누워 지낸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7개의 표징 중 세 번째입니다.
요한복음에서의 표징은 믿음을 주는 사건이나 사물을 말합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벌어졌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중개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믿음으로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표징은 어제 보았는데 그리스도께 무언가 바라는 이가 표징을 얻게 되고
그렇게 자신과 가족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세 번째 표징의 주제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믿음을 선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벳자타는 ‘올리브의 집’이란 뜻이 있습니다.
일부 수사본에서 베테스다로 되어있는데 그 뜻은 ‘은총의 집’입니다.
성경에서 올리브와 같은 ‘기름’은 ‘은총’, 혹은 ‘성령’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은총으로 새로 태어난 한 우리에 든 양들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벳자타가 “양 문” 옆에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누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가?’란 주제로 말하려고 한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깁니다.
벳자타 못은 은총이 내리는 장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못에 천사들이 내려오면 물이 출렁이는데
그때 가장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치유된다고 합니다.
38년이나 그곳에서 치유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십니다.
38년이나 그곳에서 있었다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분명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라 물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명하십니다.
들것을 깔고 있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이젠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결국 치유를 받고 예수님을 찾아 알고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숫자 ‘40’은 죄와 싸우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그랬고, 예수님도 40일간 세속-육신-마귀와 싸워 이기셨습니다.
38에 ‘은총과 진리’가 더해지면 40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실 것인지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란 자기 죄를 이길 수 있기만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겨서
은총과 진리면 곧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건강해지고 싶은 사람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따른 각국의 대응방식’이라고 해서 카톡을 통해 본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웃기 위해 가볍게 쓴 것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내용 같습니다.
1. 중국 : 가둬 놓고 조용히 죽게 둔다.
인생은 어차피 일장춘몽, 밤낮없이 집에서 중국몽을 꾸다 보면
이생이 저 생인지, 저 생이 이생인지 헷갈리는 호접몽
(중국의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와 외물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2. 일본 : 남몰래 조용히 죽길 바란다.
너 하나 죽어 올림픽을 개최하는 가미카제가 되는 것이 일생일대의 영광이라고 느끼게 하여
사무라이 정신을 계승한다.
3. 영국 : 죽음조차 개인의 자유, 죽든 말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며 국가가 관여할 일은 별로 없다.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없는 삶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마그나카르타
(1215년 영국 귀족들이 국왕 존의 잘못된 정치에 분노하여,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왕에게 강요하여 받은 법률 문서)의 전통임을 재확인한다.
4. 미국 : 죽음을 각오하고 람보처럼 바이러스와 교전하게 한다.
총으로 세운 나라 총으로 지키려고 총포상으로 몰려가 총과 실탄을 싹쓸이한다.
5. 이탈리아 : 죽음도 예술처럼 맞이하게 한다.
발코니에 모여 손뼉 치고 노래하며 베토벤의 장엄미사처럼 사를 찬미한다.
6. 대만 : 봉쇄시키고 배급한다.
가택연금 수준의 자가 격리조치를 내리고 어기면 4천만 원의 벌금 폭탄을 투척하고
마스크는 배급제로 해서 양안(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 간의 관계를 일컬어 ‘양안 관계(两岸关系)라 한다)이 하나의 중국임을 입증한다.
7. 북한 : 죽음도 우리끼리 주체적으로 맞이하게 한다.
국경을 철통같이 봉쇄하고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방역투쟁을 가열차게 벌인다.
8. 한국 : 조용히 죽고 싶어도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
코로나를 생화학전으로 규정하고 첨단 진단키트와 방호복으로 무장한
유능한 어벤저스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들은 CSI처럼 현장과 동선을 탐문하고, CIA처럼 GPS 위치를 추적하고, 38기동대처럼
구매내역까지 조회해서 조용히 숨어서 죽겠다는 신천지 환자들까지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많이 아픈 자는 음압병실로 데려가서 정성껏 무료로 치료하고,
조금 아픈 자는 레저시설 같은 곳으로 보내 돈까지 주면서 쉬게 한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 국경을 개방해서 타국 확진자들이 한국 오면
한국 돈으로 무료치료해주는 친절도 베푼다.
어벤져스 의료진들의 헌신으로 여전히 국민들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박탈된 일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코로나로 죽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처음부터 바이러스가 우리 안에 기생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참 바이러스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입니다.
38년 동안 자신의 죄의 자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했던 오늘 치유 받은 병자처럼
솔직하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드러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지가 있는 사람이나 공동체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깨끗하여지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남을 위한 세례는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만 붓는다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이 성체를 통해 자신 안에 살게 된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 안의 죄의 욕구가 통제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자신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사람에게만 성사가 유효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377)
자신으로부터의 참 자유를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
그래서 평생을 의미하는 38년 동안 그것만을 희망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셔서
죄를 이길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소원인 사람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게 해 주는 표징을 볼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구, 이웃을 심판하는 마음, 육체를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이 큽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싶습니까? 그러면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너도 건강해 지고 싶으냐?
이 릴리안 수녀
벳자타 못에 거의 다다르자 그곳의 광경을 바라보니 아픈이들이 가득했었습니다.
신음소리와 함께 말이지요...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계신 예수님은 연민 가득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부르짖고 계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내려가자" 하셨고, 우린 서둘러 내려가 여러 시선들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못가에서 치유된 이의 기쁨과 희열
그리고 치유 받지 못한 이의 부러운 시선, 간절한 마음..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이에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들것을 들고 일어나라."하셨지만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예수님만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간절한 마음에 일어설 시도를 합니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펴봅니다.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는 신기해하고 감탄한 그..
병에서 해방된 그의 모습을 보고 자리를 뜬 예수님과 나.
이제 저에게 물어보십니다.
"너도 건강해지고 싶으냐?" 라고 말이지요....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