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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시대 원주원씨(고려사 등 여러 기록물에 나오는 인물)
원봉(元奉) 태조 임오 5년(922년)
6월 정사일에 하지현(下枝縣) 장군 원봉(元奉)이 귀순하여 왔다.
始祖 원극유(元克猷) 940년 / 왕건(王建 : 877~943)
신흥사 중수, 공신당에 삼한벽상공신 모습 그림
2世 원징연(元徵衍) 경종 4년 979년 장원 급제
경종(景宗) 4년(979) 기묘(己卯) 기묘방(己卯榜) 갑과(甲科) 1[壯元]위
993년 왕치(성종)가 원증연(元證衍)으로 하여금 이들을 호송하도록 하였는데,,,
[송 태종은],,, 원증연에게 문거(文據)를 발급하여 환국(還國)시키도록 하고,,,
원욱(元郁) 성종 갑오 13년(994년)
6월에 원욱(元郁)을 송나라에 보내,,,
원수몽(지광국사 혜린) 984년∼1067년 父 아관 원휴(元休)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
1021년 평양 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 가 되었으며, 1030년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덕종 때에 삼중대사(三重大 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랐다.
1059년 내전(內殿)에서 개최된 백고좌(百高座)의 제일 설주(說主)가 되었다.
3世 원영(元永) 현종 원년(1010년)
5월,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황보신(皇甫申)과
시병부원외랑(試兵部員外郞) 원영(元穎)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했다.
1030년에 왕순이 또 어사(御事) 민관시랑(民官侍郞) 원영(元穎) 등 293명을 파견하 니,,, 그 이듬해 2월에 [원영 등이] 하직하고 돌아갈 적에 물품을 등급이 있게 하사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원영 등을] 등주(登州)까지 호송하였다.
정종 경신 6년(1040),,, 9월 을묘일에,,, 원영(元潁)을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종석(元宗奭) 현종 1년(1010년)
서경 부유수(西京 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막료 최위(崔緯)·함질(咸質)·양택(楊澤)·
문안(文晏) 등과 함께 항복한다는 표문을 만들었다.
원태(元泰) 현종 신해 2년(1011년)
전몰한 대장군 채온겸과 신녕한,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 습유, 승리인,
태사승 유인택 등의 가족에게 쌀과 포를 차등 있게 주었다.
원우(元祐) 현종 병진 7년(1016년)
12월 신사일에 원우(元祐)를 공부상서로, 지채문을 우상시로 임명하였는데
그들이 다 무직으로서 이 벼슬을 겸임하였다.
원태진(元台瑨) 덕종 갑술 3년(1034년)
임자일에 원태진(元台瑨)을 시어사로 임명하였다.
정종 병자 2년(1036),,, 2월,,,경오일에 원태진(元台瑨)을 기거랑으로,,, 임명하였다.
원위(元尉) 문종 정해 원년(1047년)
장연 현령들인 최덕, 원위(元尉), 최숭망 등이 모두 선정으로 백성들을 교양하지 못하여,,, 그들의 관직을 파면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원항(元沆 : 1080~1149년) 1106년 급제 父 원구(元寇)
朝請大夫 檢校大子大保 國子祭酒 御書檢討官
예종(睿宗) 1년(1106) 병술(丙戌) 병술방(丙戌榜) 을과(乙科) 4위(4/34)
원준(元濬) 임충빈(1121~1186년) 의 장인
(同門下侍▨▨事 判刑部事 ▨▨公) 원준(元濬)
원항의 아들 원도(元燾) 인종(仁宗) (재위: 1122~1146년) 미상년 급제
[고려문과] 인종(仁宗) 미상(未詳) 시년미상(試年未詳)
영주통판(靈州通判)
원항의 딸 김유신 처 이씨(1123~1192년)의 母
어머니 원씨(元氏)는 급제한 ▨▨이다
원상(元尙) 고려의종 19년(1165년)
금나라의 군사가 침입해 정주(靜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의 방수별장(防守別將) 원상(元尙) 등 16인을 잡아갔다.
원양윤(元良允) 1225년 급제
고종(高宗) 12년(1225) 을유(乙酉)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1[壯元]위(1/69)
10世 원부(元傅 : 1220~1287년) 1237년, 1241년 급제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文純公
고종(高宗) 28년(1241) 신축(辛丑) 신축방(辛丑榜) 을과(乙科) 2위(2/35)
원종 기사 10년(1269),,, 12월,,, 갑신일에 원부(元傅)를 추밀원부사로 임명하였다.
원종 계유 14년 봄 정월,,, 갑자일에 원부(元傅)를 중서시랑 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정축 3년(1277) 정월 갑오일에 원부(元傅)를 (세자) 보(보)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갑신 10년(1284) 6월 병자일에 감수 국사 원부(元傅), 수 국사 허공(허공), 한강(한강) 등이 고금록(고금록)을 편찬하였는바 10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충렬왕 정해 13년(1287),,, 2월 경자일에 첨의 중찬 원부(元傅)가 죽었다.
원진(元振) 원종 경신 원년(1260년)
무술일. 서해도 안찰사가 급보로 보고하기를
안북도령(安北都領) 원진(元振)이 반란을 일으켜 그 고을의 부사 문수 및 자주 부사 김맥을 잡아 죽이었으며 옹진 현령 정숭은 몽고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11世 원관(元瓘 : 초명 정/1247~1316) 원종(元宗) 7년(1266년)
원종(元宗) 7년(1266) 병인(丙寅) 병인방(丙寅榜) 을과(乙科) 3위(3/30)
충렬왕 기묘5년(1279) 2월,,,정사일에 대방공 왕증이 독로화를 데리고 원나라로 출발
하였는데 김방경의 아들 김흔, 원부(元傅)의 아들 원정(元貞), 박항의 아들 박원굉, 허공의 아들 허평, 홍자번의 아들 홍순(홍순), 한강의 아들 한사기, 설공검의 아들 설지충, 이존비의 아들 이우(이우), 김주정의 아들 김심(김심) 등 양반 자제 25명을 보냈는바 모두 현직에서 3등급씩 올려 임명하여 보냈다.
1298,,, 11월 경술일에 원관(元瓘)을 지밀직사사 판도판서로 임명하였다.
11世 원경(元卿 : 충렬왕 을해 원년(1275년)
6월,,, 임인일에 원경(元卿) 등 10명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매(응)를 보내었다.
충렬왕 기묘5년(1279) 2월 기미일에 경(元卿)을 경상도에 파견하여
왕지 사용 별감(왕지사용별감)으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을미 21년(1295) 정월,,, 기사일에 원경(元卿)을 좌부 승지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병신 22년(1296),,, 5월 기사일에 원경(元卿)을 부지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원혁(元奕) 충렬왕 14년(1288년)
왕이 일찍이 내관 원혁(元奕)의 무릎 위에 앉아서 한담을 하는데 원혁(元奕)이 왕에게 말하기를 ‘임금이란 모든 것을 세밀히 살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전하는 너무 지나치 게 총명하니 조금 너그러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1世 원충갑(元沖甲 : 1250~1321) 충렬왕 신묘 17년(1291년)
봄 정월,,, 갑인일에 합단이 원주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별초(별초) 향공(향공) 진사(진사) 원충갑(元沖甲)이 적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충숙왕 신유 8년(1321) 6월,,, 임자일에 응양군 상호군 원충갑(元沖甲)이 죽었다.
원현(元玄), 원종수(元鍾秀) 충렬왕 17년(1291년)
원주 아전((州吏) 원현(元玄), 부행란(傅行蘭), 원종수(元鍾秀) 및 국학생(국학생) 안수정(안수정) 등 백여 명이 서쪽 봉우리로 내려가서 협공하게 되었다.
11世 원후(元珝) 충렬왕 정유 23년(1297년)
을축일에 원후(元珝)를 동지밀직사로, 원경(元卿)을 부지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진(元璡) 충렬왕 계묘 29년(1303년)
7월에 원충갑,,,,홍자번,,, 원진(元璡),,, 김유지 등도 또한 오기의 죄악을 말하였고,,,
12世 원선지(元善之1281~1330) 충선왕 신해 3년(1311년)
12월,,,계사일에,,, 원선지(元善之)를 좌부 대언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충숙왕 갑자 11년(1324) 5월에 원선지(元善之)를 동지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12世 원충(元忠 : 1290-1337) 충숙왕 병진 3년(1316년)
여름 4월 정해일에,,, 원충(元忠)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갑자 11년(1324) 2월 정묘일에 원충(元忠)을 첨의평리로 임명하였다.
정묘 14년(1327),,, 겨울 11월 무자일에,,, 찬성사 원충(元忠)을 1등공신으로 삼고,,,
충숙왕 정축 후 6년(1337),,, 여름 5월 기유일에 찬성사 원충(元忠)이 죽었다.
13世 원호(?~1356 : 元顥)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년)
가을 7월 경진일에 왕이 화원에 가서 연꽃을 구경하고 이어 밀직부사 원호(元顥)의 집으로 갔는데 김선장과 김예 등 몇 명의 종신들이 수행하였으나 왕이 친히 일산을 들고 갔다.
공민왕 갑오 3년(1354),,, 2월,,, 기유일에 원호(元顥)를 찬성사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병신 5년(1356),,, 원호(元顥)를 판삼사사로 임명하였다.
13世 원송수(元松壽 : 1324~1366) 충숙왕(忠肅王) 후 8년 1339년
고려문과 충숙왕(忠肅王) 후 8년 1339년 급제
공민왕 임진 원년(1352),,, 겨울 10월,,, 원송수(元松壽)를 좌대언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계묘 12년(1363),,, 3월 을유일에 지신사 원송수(元松壽)를 1등공신으로 하였다.
공민왕 을사 14년(1365),,, 3월 경진일에 원송수(元松壽)를 정당문학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병오 15년(1366),,, 6월,,, 병자일에 전 정당문학 원송수(元松壽)가 죽었다.
13世 원허(元詡, 一云 珝, 一云 翊) 이언충(1273~1338)의 사위
전(前)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珝)가 공의 사위이다.
13世 원의(元顗) 공민왕 계사 2년(1353년)
봄 정월,,, 무자일에 원의(元顗)를 전리 판서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무술 7년(1358) 봄 2월,,, 병신일에 판추밀원사 원의(元顗)가 죽었다.
원천석(元天錫 : 1330~1432?)
고려국자진사
원대유(元大有) 공민왕 무술 7년(1358년)
봄 2월 을미일에 흥왕사 사변 당시에 왕을 호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호군 안길성(안길성), 낭장 지승경(지승경), 원대유(元大有)를 지방으로 귀양 보내었다.
14世 원서(元序 : [고려문과] 우왕(禑王) 2년(1376년)
병진(丙辰) 병진방(丙辰榜) 동진사(同進士) 7위(17/37)
원익(元益) 신우 신유 7년(1381년)
11월,,, 정주(정주) 아전 구한석, 원익(元益), 이송수 등이 조국을 배반하고
요(료), 심(심) 경계로 도망가서,,, 도적이 되어 창주(창주)에 침입하였다.
원윤해(元允海) 신우 무진 14년(1387년)
3월 초하루 을해일,,, 상의국(상의국)에서 임금이 입을 의복을 빨리 못하였다는 이유로 별감(별감) 후덕부 소윤(후덕부 소윤) 원윤해(元允海)와 판사 강의(강의)를 죽였다.
14世 원상(元庠) 공양왕 경오 2년(1390년)
2월,,,임인일에 대간(대간)이 한양부윤 김백흥(김백흥)과
군기 소윤(군기소윤) 원상(元庠)을 순군(순군)에서 심문하였다.(김저의 옥사 연루)
계축일에 원상(元庠)을 석방하였다.
여름 4월,,,경신일에,,, 원상(元庠)을 광주(광주)로 귀양 보내었다.
공양왕 신미 3년(1391) 봄 정월,,, 국대비(국대비)의 생일이라 하여
원상(元庠) 등을 사하여 서울이나 지방에서 임의로 거주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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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상(1321~1375) (호장공계 시조 元克富의 7世孫/여말선초)
원호(1396~1463) (시중공계 시조 元益謙의 9世孫/조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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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족보기록 등 고려시대 원주원씨(고려개국~여말선초)
원성백계
始祖 元克猷(극유)
壁上開國翊贊一等功臣之號 官正議大夫兵部令 封原城伯 諡號 忠簡公
2世 元徵衍(징연) 文科 光祿大夫尙書省左僕射
3世 元永(영) 靖獻大夫吏部尙書兼密直司事
4世 元禹卿(우경) 文林郎閤門祗候
5世 元德(덕) 興祿大夫檢校太子少保知選部事
6世 元深夫(심부) 朝政大夫監察御使判國子監事
7世 元禮(예) 門下侍郞平章事兼常衣奉御(문하시랑평장사겸상의봉어)
元得正(득정) 吏部尙書上柱國左僕射精勇衛大將太子太傅
8世 元承胤(승윤) 左司諫大夫知制誥
元賢平(현평) 兵部侍郞西院鎭撫大將軍
9世 元瑨(진) 銀靑光祿大夫都僉議開府儀同三司事尙書省左僕射追封樞密院副使
元應龍(응룡) 吏部侍郞 致仕上柱國 ▶ 원현평
신록수(사위)
10世 元傅(부) 文科 推誠贊化功臣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諡號 文純公
元敏成(민성) 贈左僕射 上護軍 門下侍郞
11世 元瓘(관) 文科 匡靖大夫寫經院判官 僉議贊成事 進賢冠大提學 副摠部事 ▶ 원부
元珝(후) 副知密直司事
元卿(경) 奉翊大夫密直司事 典理判事 中京留守都指揮使 元朝宣授武略將軍
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
김칠초(金七貂) 一云 김흥예(金興裔) (사위)
元沖甲(충갑) 左僕射 鷹揚上將軍 諡號 忠肅公
12世 元忠(충) 推誠佐理功臣 三重大匡 僉議贊成事 判民部事 上護軍 原川府院君
諡號 忠元公 ▶ 원관
김승용, 민적, 박거실(부인 원씨 : 1288~1334), 김광철(이하 사위)
元善之(선지) 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 兼 判內寺事上護軍 元朝宣授 昭信校尉 ▶ 원경
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
元善長(선장) 通憲大夫判典儀寺丞兼中文副使密直代言知摠部事 / 장인 印侯
한악(사위)
元大明 進士 ▶ 원충갑
元大才
元大器(대기) 尙書禮部侍郞
이희백(사위)
13世 元顥(호) 誠勤佐理功臣 三重大匡 判禮儀三司事 左侍中 成安府院君 ▶ 원충
元詡(허) 金紫光祿大夫判三司事
元顗(의) 監察大夫 典理判書 判樞密院事
김광리, 홍유, 나영걸, 왕서(王諝) (이하 사위)
元龜壽(구수) 鎭撫使 ▶ 원선지
元松壽(송수) 文科 忠勤贊化功臣政堂文學進賢冠大提學 諡號 文定公
유보발, 안원숭 (이하 사위)
元奇(기) 護軍 ▶ 원선장
元保(보) 奉順大夫判禮賓寺丞
元奇 ▶ 원대명
元老(元憂) 書雲 副正 ▶ 원대재
元道(도) 軍器寺少監 ▶ 원대기
14世 元寅(인) 版圖判書判開城尹都官察使(판도판서판개성윤도관찰사) ▶ 원호
元賓(빈 1410년졸) 李朝 崇祿大夫議政府左參贊 歷 兵曹參判 漢城左尹 判中樞院事
元宣(선) 中靖大夫判三司左尹 杜門洞七十二人
허저, 기유걸, 박천상(이하 사위)
윤인귀, 허완, 윤보, 노유(이하 사위) ▶ 원허
변안렬(사위) ▶ 원의
元儘 典理判書 ▶ 원구수
元倜 判事
이광부(사위)
元序 文科 典書 ▶ 원송수
元庠(상) 崇綠大夫判中樞院事致任 諡號 僖靖公 子 元衷 初名 昌命 1444년졸(54세)
김약채, 허금, 진광진(이하 사위)
임세정(사위) ▶ 원기
元夏(하) 中靖大夫判三司左尹 ▶ 원보
진여의, 송결, 정연(이하 사위)
元宗亮 吏曹判書 江原道按察使 以孝命 旌閭 ▶ 원노(원우)
元穆(목) 翰林學士 贈爵保義將軍雄武侍衛司大護軍兵曹判書 ▶ 원도
元肅(숙 1425년졸) 崇綠大夫吏曹判書
전직(사위)
시중공계(관직은 족보 기록으로)
元惟琰 吏部尙書
始祖 元益謙 고려 신종조(재위 1197~1204)
文科 右侍郞
2世 元守仁 고려 고종조(재위 1213∼1259)
興祿大夫 國子進士 知同 平章事
3世 元成桂 고려 원종조(재위 1259~1274)
朝議大夫 義正 中郞將
4世 元温 고려충렬왕조(재위 1274년~1298년, 복위 1299년~1308년)
興祿大夫 中書侍郞 / 이겸
5世 元弘弼 고려 충숙왕조(재위 1313년~1330년, 복위 1332년~1339년)
國子進士 門下侍中 追封 崇祿大夫知門下省事
元鼎和 一云 弼
6世 元廣明 고려 충혜왕조(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中正大夫 宗簿寺令
元廣德 判宗簿寺事,
元仲章,
元天侑 精勇別將
元碩,
이정해, 이지석, 안송(이하 사위)
7世 元孟良 文科 監察御使, ▶ 원광명
元方甫 修義副尉 同正 贈 吏曹參議 同正 / 초명 仲良
元季良,
元天錫, 元天奉, 신자온(이하 사위)
元乙忠 典工判書, ▶ 원광덕
元乙規 豊德府使,
元乙珍,
이실, 원립(이하 사위)
元良季 ▶ 원중장
이흡(사위)
元暹 精勇別將, ▶ 원천유
元惠奉,
元覺璘, 안이태
元忠 ▶ 원석
이준영(사위)
8世 元積, 元穡 縣監, 元天佑, 安自佑, 金西貴 ▶ 원맹량
元憲 迪順衛精勇郞將 贈 吏曹參判 / 判官 ▶ 원방보, 자 9世 元滉, 元昊(1396~1463)
元仲倫, 元湜 縣令 ▶ 원계량
元演, 元洟 部將 ▶ 원을충
이방진, 이익, 윤탁(이하 사위)
元素 文科 知訓練觀事, 元沙安 ▶ 원을규
元渾 ▶ 원을진
元가, 元漫, 元珦, 조의륜(사위) ▶ 원양계
元龍得, 元龍海, 元佛老 ▶ 원섬
유치안, 조진(이하 사위)
元璡 宗簿寺令 同正 ▶ 원충
박가상, 안준(이하 사위)
호장공계
始祖 元克富 戶長
元天常을 기준으로 평균 30년~35년을 한 세대로 했을 때 = 180년~210년
출생년도 약 1011년~1141년경)
2世 元宗儒 戶長
3世 元寶齡 倉正
4世 元時俊 倉正 /
5世 元悅 精勇別將 / 大將軍
6世 元台輔 匡靖大夫樞密院密直司事,
元允迪 中正大夫宗簿寺令/ 宗簿令
元仁呂 1393 태조조 개국공신 朝奉大夫中郞將
7世 元稀 文科 郡守 ▶ 원태보
元天常(1321~1375) 國子進士,
元天錫(1330~1420?) 國子進士杜門洞七十二人 ,
元天佑 國子進士 餘興郡守 ▶ 원윤적
이자수(사위)
元松 禦侮將軍 ▶ 원인려
8世 元致 郡守 ▶ 원희
元湜 縣令 ▶ 원천상
이성부, 원헌(이하 사위)
元沚 直長 同正 ▶ 원천석
元泂(1363~) 基川縣監
이심, 김서유(이하 사위)
元諿 ▶ 원천우
元認
元譜
元克萬 忠佐衛
元吉萬
3. 족보기록 등 고려시대 원주원씨 외척 포함(사위는 밑줄)
원성백계
始祖 元克猷(극유)
壁上開國翊贊一等功臣之號 官正議大夫兵部令 封原城伯 諡號 忠簡公
2世 元徵衍(징연) 文科 光祿大夫尙書省左僕射
3世 元永(영) 靖獻大夫吏部尙書兼密直司事
4世 元禹卿(우경) 文林郎閤門祗候
5世 元德(덕) 興祿大夫檢校太子少保知選部事
6世 元深夫(심부) 朝政大夫監察御使判國子監事
7世 元禮(예) 門下侍郞平章事兼常衣奉御(문하시랑평장사겸상의봉어)
元得正(득정) 吏部尙書上柱國左僕射精勇衛大將太子太傅
8世 元承胤(승윤) 左司諫大夫知制誥
元賢平(현평) 兵部侍郞西院鎭撫大將軍
9世 元瑨(진) 銀靑光祿大夫都僉議開府儀同三司事尙書省左僕射追封樞密院副使
배 창녕정씨 부 大府卿 翰林侍讀學士 禧
元應龍(응룡) 吏部侍郞 致仕上柱國 ▶ 원현평
배 원주이씨 부 郎將 이한겸 조 司成 극량 증조 國子進士 황승
檢校大將軍 방열 玄孫
신록수 신천인 (사위)
10世 元傅(부) 文科 推誠贊化功臣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諡號 文純公 / 文成公 安裕와 동서(同壻)지간
배 峯城郡夫人 서원염씨 부 少傅禮賓卿 수장 조 尙書工部侍郞 극모
증조 太師禮部尙書 文孝公 신약 외조 知三司使 宜寧 심문준
元敏成(민성) 贈左僕射 上護軍 門下侍郞
11世 元瓘(관) 文科 匡靖大夫寫經院判官 僉議贊成事 進賢冠大提學 副摠部事 ▶ 원부
배 개령홍씨 부 判三司使 녹도
배 곽씨 부 同知密直 여필 외조 門下侍郞同平章事 文靑公 海州 최자
배 鷄林郡大夫人 경주김씨 부 樞密院 左承旨 신 조 工部尙書 경손
증조 門下侍郞同平章事 文狀公 태서 외조 判小府監事 平山 윤번
元珝(후) 副知密直司事
元卿(경) 奉翊大夫密直司事 典理判事 中京留守都指揮使 元朝宣授武略將軍
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
김칠초(金七貂) 一云 김흥예(金興裔) 강릉인 上將軍 부 禮部侍郞 웅 (사위)
元沖甲(충갑) 左僕射 鷹揚上將軍 諡號 忠肅公
배 원주이씨 부 進仕 영필 조 進士 양생 증조 郎將 한겸 司成 극랑 玄孫
12世 元忠(충) 推誠佐理功臣 三重大匡 僉議贊成事 判民部事 上護軍 原川府院君
諡號 忠元公 ▶ 원관
배 弁韓國大夫人 남양홍씨 부 僉議都監 南陽府院君 匡靖公 奎
조 兵部尙書樞密副使 사윤 외조 僉知政事 判三司使 光州 김간
김승용 안동인 管軍萬戶 密直使 부 典法判書 훤 中贊 忠烈公 方慶孫
민적 여흥인 進賢冠大提學 文順公 부 贊成事 致任 忠順公 종유
박거실(부인 원씨 : 1288~1334) 춘천인 昭信校尉 正尹 부 昭信校尉
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兼 匡靖大夫 平壤府尹 조 僉議贊成事 文懿公 항
김광철 密直司事 化平君 文敏公 父 侍中 大提學 文正公 태현(이하 사위)
元善之(선지) 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 兼 判內寺事上護軍 元朝宣授 昭信校尉 ▶ 원경
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
배 언양김씨 都僉議評理 文愼公 연 조 守太傅 侍中 平章事 判吏部 翼戴公 전
증조 太子太傅 侍中 侍中 判吏部 威烈公 就礪 외조 僉議中贊 文景公 양천 許珙
元善長(선장) 通憲大夫判典儀寺丞兼中文副使密直代言知摠部事
배 연안인씨 부 忠勤輔佑功臣 僉議密直 檢校政丞 平陽君 莊惠公 후 연안인씨 시조
한악 청주인 宣力佐理功臣 上黨府院君 中贊 都僉議右政丞 思肅公 부 翰林院直學士
知制誥 致任 平簡公 사기 조 僉議中贊 文惠公 강 (사위)
元大明 進士 ▶ 원충갑
元大才
元大器(대기) 尙書禮部侍郞 배 경주이씨 부 동호
이희백 南部副令 원주이씨의 중시조(사위)
13世 元顥(호) 誠勤佐理功臣 三重大匡 判禮儀三司事 左侍中 成安府院君 ▶ 원충
배 辰韓國大夫人 안동권씨 부 贊成事 福安府院君 겸 조 都僉議左政丞 永嘉府院君 文正公 부 증조 贊成事 文淸公 咺 외조 贊成事 完陽君 文簡公 全州 최성지
元詡(허) 一云 翊 金紫光祿大夫判三司事
배 전의이씨 부 政堂文學 文義公 언충 조 暑丞 贈 大司成 자원
증조 鷹揚上將軍 贈 平章事 천 외조 江寧君 남양홍 수
元顗(의) 監察大夫 典理判書 判樞密院事
김광리 광산인 典理判書 부 政堂文學 章榮公 진
홍유 남양인 密直副使 부 江寧君 수
나영걸 나주인 萬戶 錦城君 부 僉議評理 良節公 익희,
왕서(王諝) 高麗 宗室 翼城大君 부 淮安大君 순 (이하 사위)
元龜壽(구수) 鎭撫使 ▶ 원선지
배 남양홍씨 부 侍中 益城府院君 탁 조 贊成 江寧府院君 寬靖公 선
증조 工部侍郞 尙書 백수 외조 僉議贊成事 吉昌府院君 昌和公 安東 권준
元松壽(송수) 文科 忠勤贊化功臣政堂文學進賢冠大提學 諡號 文定公
배 청주정씨 부 直提學 보 조 判事 淸河君 幘(책) 증조 贊成事 章敬公 瑎(해)
외조 都僉議評理 良敬公 全州 최문도
배 안동권씨 부 贊成 玄福君 겸 조 贊成 吉昌府院君 昌和公 준
증조 都僉議政丞 永嘉府院君 文正公 부 외조 贊成事 忠肅公 平壤 조련
유보발 문화인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부 文化君 溫靖公 인기
안원숭 순흥인 政堂文學 文惠公 부 政堂文學 文淑公 목 中贊 文成公 유 曾孫 (사위)
元奇(기) 護軍 ▶ 원선장
元保(보) 奉順大夫判禮賓寺丞
元奇 ▶ 원대명
元老(元憂) 書雲 副正 ▶ 원대재
元道(도) 軍器寺少監 배 정경부인 전주이씨 ▶ 원대기
14世 元寅(인) 版圖判書判開城尹都官察使(판도판서판개성윤도관찰사) ▶ 원호
배 은풍신씨 부 密直司事 殷山伯 중전 조 大提學 성 증조 主簿 同正 익보
외조 副正 강릉김씨 한신
元賓(빈 1410년졸) 李朝 崇祿大夫議政府左參贊 歷 兵曹參判 漢城左尹 判中樞院事
배 정경부인 수안이씨 부 僉議遠山府院君 恭良公 수산 외조 僉議評理 인천 채윤신
元宣(선) 中靖大夫判三司左尹 杜門洞七十二人
배 광주안씨 부 典校副令 복종 조 知益州事 덕연 증조 文科 정
외조 典客令 令允 一云 英允
허저 양천인 平章事 부 典書, 기유걸 행주인 贊成事 부 都僉議政丞 德城府院君 군철, 박천상 순천인 侍中 平陽府院君 부 吏部侍郞 원룡(이하 사위)
윤인귀 파평인 知門下府事 부 贊成事 계종, 허완 양천인 判書 부 典書 부, ▶ 원허
윤보 해평인 都僉議 부 評理 海平君 지표 ,
노유 교하인 判寺事 부 瑞原君濟都僉議左政丞 慶陽府院君 康平公 책손 (이하 사위)
변안렬 원주변씨 시조 推忠亮節宣威翊贊補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三司事 原川府院君
부 誠勤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三司事 양 조 追封 重大匡門下贊成事判禮儀 司事 순 (사위) ▶ 원의
元儘 典理判書, 元倜 判事 ▶ 원구수
이광부 양성인 門下侍中 陽城君 부 都僉議評理 判密直司事 上護軍 방해(수방)(사위)
元序 文科 典書 배 경주이씨 부 判開城尹 창로 조 侍中 鷄林君 文忠公 제현
증조 檢校政丞 臨海君 文定公 진 외조 戶部尙書 平簡公 淸州 한공의 ▶ 원송수
元庠(상) 崇綠大夫判中樞院事致任 諡號 僖靖公 子 元衷 初名 昌命 (1391~1444)
배 貞敬夫人 손씨 부 監察御使 용
김약채 광산인 忠淸道都觀察使 追贈 資憲大夫禮曹判書 兼 藝文館大提學 부 光城君 정
政堂文學 章榮公 적 曾孫
허금 양천인 典理判書 부 知申事 경 조 陽川君 백 中贊 文景公 珙 玄孫
진광진 (이하 사위)
임세정 장흥인 贊成事 安定君 부 副令 급 (사위) ▶ 원기
元夏(하) 中靖大夫判三司左尹 ▶ 원보
진여의 大護軍, 송결 司憲侍史, 정연 초계인 牧使 부 保勝別將 화(이하 사위)
元宗亮 吏曹判書 江原道按察使 以孝命 旌閭 ▶ 원노(원우)
元穆(목) 翰林學士 贈爵保義將軍雄武侍衛司大護軍 兵曹判書 ▶ 원도
배 청주한씨 배 밀양박씨 부 兵使 성양
元肅(숙 1425년졸) 文科 崇綠大夫吏曹判書 배 정경부인 경주설씨
전직 용궁인 判事 (사위)
시중공계
元惟琰 吏部尙書
始祖 元益謙 고려 신종조(재위 1197~1204)
文科 右侍郞
2世 元守仁 고려 고종조(재위 1213∼1259)
興祿大夫 國子進士 知同 平章事
3世 元成桂 고려 원종조(재위 1259~1274)
朝議大夫 義正 中郞將
배 원성원씨 부 兵正 彦卿
4世 元温 고려충렬왕조(재위 1274년~1298년, 복위 1299년~1308년)
興祿大夫 中書侍郞
배 충주이씨 副戶長 君立
이겸 원주인 戶長 부 京軍 유광
5世 元弘弼 고려 충숙왕조(재위 1313년~1330년, 복위 1332년~1339년)
國子進士 門下侍中 追封 崇祿大夫知門下省事
배 충주유씨 부 及第 龍彦
元鼎和 一云 弼 배 원씨 부 仁悅
6世 元廣明 고려 충혜왕조(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中正大夫 宗簿寺令 배 박씨 부 굉녀 외조 송연
元廣德 判宗簿寺事, 元仲章, 元天侑 精勇別將, 元碩,
이정해 원주인, 이지석 원주인 令同正, 안송(이하 사위)
7世 元孟良 文科 監察御使 배 원주이씨 부 判軍器事 지연 ▶ 원광명
元方甫 修義副尉 同正 贈 吏曹參議 同正 / 초명 仲良
元季良 배 방씨 부 희적
元天錫 국자진사 호는 운곡 부 윤적, 元天奉, 신자온(이하 사위)
元乙忠 典工判書 배 해주기씨 부 判書 덕보 ▶ 원광덕
元乙規 豊德府使, 元乙珍, 이실 용인인 副正 부 백규, 원립 원주인 부 유길(이하 사위)
元良季 ▶ 원중장
이흡 원주인 別將 부 자장(사위)
元暹 精勇別將, ▶ 원천유
元惠奉, 元覺璘, 안이태
元忠 ▶ 원석
이준영 원주인 부 同正 지수(사위)
8世 元積, 元穡 縣監 ▶ 원맹량
원천우 원주인 驪興郡守 부 宗簿令 윤적, 안자우 , 김서귀 雲州府使 (이하 사위)
元憲 迪順衛精勇郞將 贈 吏曹參判 / 判官 ▶ 원방보, 자 9世 元滉, 元昊(1396~1463)
배 원주원씨 부 國子進士 天常, 조부는 宗簿令 允迪 증조는 精勇郞將 元悅
외조 閣門祗侯 원양길
元仲倫 ▶ 원계량
元湜 縣令 부 천상(사위)
元演, 元洟 部將 ▶ 원을충
이방진 원주인 縣令 부 宗簿令 린 , 이익 원주인 縣監 부 사익, 윤탁 강릉인(이하 사위)
元素 文科 知訓練觀事 ▶ 원을규
元沙安, 안가상 주천인 부 縣令 용(사위)
元渾 ▶ 원을진
元가, 元漫, 元珦, 조의륜 주천인(사위) ▶ 원양계
元龍得, 元龍海, 元佛老 ▶ 원섬
유치안, 조진(이하 사위)
元璡 宗簿寺令 同正 ▶ 원충
박가상, 안준(이하 사위)
호장공계
始祖 元克富 戶長
元천상을 기준으로 평균 30년~35년을 한 세대로 했을 때 = 180년~210년
출생년도 약 1011년~1141년경)
2世 元宗儒 戶長
3世 元寶齡 倉正
배 원성원씨 부 양의공 明守 조부 증문하성사 泰 증조 진사 有溫
4世 元時俊 倉正 배 익흥이씨 부 景城 조 倉正 朝朝 증조 郎將 淑賢
5世 元悅 精勇別將 / 大將軍
6世 元台輔 匡靖大夫樞密院密直司事 배 영월신씨 부 判密直事 廉
元允迪 中正大夫宗簿寺令/ 宗簿令
배 익흥이씨 부 大將軍 松堅 조 監察 貞 증조 別將 堯幷
元仁呂 1393 태조조 개국공신 朝奉大夫中郞將 배 정부인 청주한씨
7世 元稀 文科 郡守 ▶ 원태보
元天常(1321~1375) 國子進士 배 원성원씨 부 합문지후 良吉 조부 진사 淳
元天錫(1330~1420?) 國子進士 杜門洞七十二人
배 원성원씨 부 종부령 廣明 조 문하시중 홍필 증조 중서시랑 온 외조 박굉
元天佑 國子進士 餘興郡守 ▶ 원윤적
배 원성원씨 부 감찰어사 孟良 조부 종부시령 廣明 외조 檢校 益興 이지연
이자수(사위)
元松 禦侮將軍 배 숙부인 남편문씨 ▶ 원인려
8世 元致 郡守 배 금성나씨 부 郡守 師古 ▶ 원희
元湜 縣令 배 원성원씨 부 季良 조부 종부시령 廣明 증조 문하시중 弘弼 ▶ 원천상
이성부 하빈인 부 濱, 원헌 원성인 부 贈參判 (이하 사위)
元沚 直長 同正 배 최씨 부 淑 ▶ 원천석
元泂(1363~) 基川縣監 배 의인 주천안씨 부 조 증조 외조 이송견
이심 원주인 兵使, 김서유 풍덕인 (이하 사위)
元諿, 元認, 元譜, 元克萬 忠佐衛 배 숙부인 전주주씨, 元吉萬 ▶ 원천우
4. 원주원씨 3계 시조 출생년도 추정(시중공계와 호장공계)
시중공계 원주원씨 혼맥 관계(족보 기록)
3세 원성계 成桂 배 원성원씨 부 병정 언경 彦卿
5세 원정화 鼎和 일운 필 弼 배 원씨 부 仁悅
6세 원광명의 손
7세 6세 원광명의 사위 元天錫 부 윤적 자 원지, 원동
7세 6세 원광명의 사위 元天奉
8세 7세 원방보의 사위 원헌 배 원주원씨 부 국자진사 天常, 조부는 종부령 允迪
증조는 정용랑장 元悅
8세 7세 원맹량의 사위 元天佑 부 종부령 윤적 자 집, 인, 보
8세 7세 원계량의 사위 元湜(식) 부 천상 자 사단
9세 8세 원적의 사위 元儉
9세 8세 원중륜의 사위 이승의 사위 원백생(伯生)
10세 9세 원수의 사위 元龜鶴 부는 생원 元諫 자 登孫, 賀孫
11세 10세 원순지의 사위 元世昌 자 光壽
11세 10세 원효건의 사위 元舜擧 부 潁 자 滉, 담, 당, 종
11세 10세 원효건의 사위 元璉 부 甫侖 자 희, 공희, 검희
11세 10세 원효정의 사위 元山暈(산훈) 부 보형, 계자 언준
6세 원광덕의 손
7세 6세 원광덕의 사위 元立 부 惟吉 자 元旭(욱) 감찰
8세 7세 원을규의 사위 安可祥의 사위 元就文(취문) 현감
10세 9세 지화의 사위 元吾
6세 원중장의 손
10세 9세 元儒의 사위 元敬老
10세 9세 元有寬의 사위 元繼生 자 元潭
10세 9세 元有寬의 사위 元尙經
호장공계 원주원씨 혼맥 관계(족보 기록)
15세 원보령 배 원성원씨 부 양의공 明守 조부 증문하성사 泰 증조 진사 有溫
19세 원천상 배 원성원씨 부 합문지후 良吉 조부 진사 淳
20세 19세 원천상의 자 원식 배 원성원씨 부 季良 조부 종부시령 廣明 증조 문하시중 弘弼
20세 19세 원천상의 사위 元憲 증참판 子 원황, 원호 등
23세 22세 원영의 아들 원순거 배 원성원씨 부 생원 孝乾
19세 원천석 배 원성원씨 부 종부령 廣明 조 문화시중 홍필 증조 중서시랑 온
22세 원보형 甫荊 배 원성원씨 부 생원 증정랑 諫 조부 안렴사 려각 宗亮
23세 원산운 배 원성원씨 부 참군 孝精
23세 원유 瑜 배 원성원씨 부 碩末 충갑후
23세 원팽노 彭老 배 원성원씨 부 自謙
24세 원형연 瑩然 배 원성원씨 부 증참판 仲稑
19세 원천우 天佑 배 원성원씨 부 감찰어사 孟良 조부 종부시령 廣明
원성백계와 시중공계, 호장공계 혼맥 관계
호장공계 22世 甫荊 배 원성원씨 父 生員 贈正郞 諫 祖父 안렴사정려각 宗亮(원성백 14世)
호장공계 23世 元瑜 배 원성원씨 父 碩末 충갑后(원성백계)
시중공계 9世 元有寬의 사위 元繼生(원성백계 15世)
시중공계와 호장공계 혼맥 관계 중 주요부분
元天錫 배 원성원씨 父 宗簿寺令 元廣明 祖父 門下侍中 元弘弼 曾祖 中書侍郞 元温
元廣明의 사위 元天錫 父 允迪 子 元沚, 元泂
元天尙의 子 元湜의 배 원성원씨 父 季良 祖父 宗簿寺令 元廣明 曾祖 門下侍中 元弘弼
元天佑 배 원성원씨 父 監察御使 孟良 祖父 宗簿寺令 廣明
시중공계 6세 원광명(딸) = 호장공계 5세 원열(손자 원천우)
시중공계 6세 원광명(딸)(⟰) = 호장공계 6세 원윤적(아들 원천석)
원성백계 시조부터 9세까지 출생년도 추정
3世 元永 약 982년생(2世 元徵衍 979년 갑과 1위, 3世 元永 1010년 판관 임명)
10世 元傅(1220~1287년) ▶ 3世 元永에서 10世 원부까지(238년차) 한세대 약 34년
4世 元禹卿 약 1016년생, 5世 元德 약 1050년생, 6世 元深夫 약 1084년생,
7世 元禮 약 1118년생, 8世 元承胤 약 1152년생, 9世 元瑨 1186년생
기타
임충빈(1121~1186)의 장인 원준 약 1100년생
원항(1080~1149)의 아들 원도 약 1110년생
시중공계 시조 원익겸 출생년도 추정
始祖 元益謙 고려 신종조(재위 1197~1204) 文科 右侍郞
출생년도 약 1011년~1141년경 사이(⟰)
호장공계 시조 호장 극부 출생년도 추정
始祖 元克富 戶長
元天尙(1321년생)을 기준으로 평균 30년~35년을 한 세대로 했을 때 = 180년~210년
출생년도 약 1011년~1141년경
5. 사기 수사 구당서 신당서 송사 원사 명사 청사에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기록된 사신(使臣)관련 원씨
6. 원주원씨 3계 족보 서문중 원씨 역사 관련 부분
가. 원성백계
정축보 서문(丁丑譜 序 1457년)
“,,, 우리 북원원씨(北原元氏)는 진한(辰韓)으로부터 일어나서 오래도록 신라(新羅)에 벼슬을 하였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 神聖王)가 천운에 따라 나라를 세울때에 우리의 선조 극유(諱 克猷)께서 풍운의 기회를 맞아 태조를 도아서 삼한을 통합하고 삼한공신 병부령(三韓功臣 兵部令)의 벼슬을 받았다. 그때부터 이후로는 조종(祖宗)이 차례로 이어 내려온 기록이 간략하나마 가문에 소장되고 있으나 지파(枝派)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지않았으므로 널리 찾아다니면서 족보를 창간하고자 하였으나 자손들의 성명이 흔적도 없으니 말을 하고자하여도 두려워서 말을 할수 없고 붓을 들어도 써내려가지지를 않으니 다만 조상들이 차례로 세대를 이어 내려간 순서를 삼가 갖추어 세보의 첫머리에 올리고 거기에 조종(祖宗)의 파(派)를 이었으며, 아직 찾지 못한 자손들의 이름은 후손들 중에서 잘 아는 사람이 있을때까지 기다리고저 하였는데 아조(我祖)가 시중(侍中) 원부(元傅)와 원관(元瓘)에 이르러서는 연대가 그리 멀지않아서 기록이 아직 남아 있으니 널리 찾고 발굴하고 사방으로 물어보고 방문하여 자손들을 찾아서 얻어내고 지파(枝派)의 실마리를 찾아서 파별로 한데 묶어 처음으로 세보(世譜)를 만드니 조종(祖宗)의 백숙(伯叔)이 차례로 엮어지고 형제(兄弟)와 손질(孫侄)이 질서정연하게 알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순서와 질서를 손바닥과 같이 헤아릴수 있어서 백자(百子) 천손(千孫)이 각기 구족으로 친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구족이 친하면 각기 예의가 행하여지며 예의가 행하여지면 그것이 왕업에 도움이 됨이 큰 것이다. 옳지 못한 일을 꾸몄거나 대륜을 어지럽힌 자는 몰아내고 넣지 않았으니 그 것이 교화를 밝히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또한 찾아다니면서 구태어 기록한 것이 더러는 잘못이 있을 것인즉 그러한 것들은 뒤를 이어서 보충하고 바로 잡을 것을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바이다.” 1457년 정축 3월 사온주부 운손 龜 근서
경신전보 서문(庚申前譜 序 1740년)
“,,,원성원씨(原城元氏)는 우리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다. 연대가 아득히 멀고 기록이 없으므로 비록 그 성을 가진 처음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不祥基 得姓), 구보 서문에 말하였으되 진한(辰韓)때에 원씨(元氏)가 일어나서 대대로 신라(新羅)에 벼슬을 하였고,,, 후에 四大派로 나누어졌으며 고려 병부령 원성백 극유(高麗 兵部令 原城伯 克猷)를 시조로하는 第一派가 있고 그 다음으로 元克富를 시조로 하는 派와 다음으로 元愉琰을 시조로 하는 파와 다음으로 元允昌을 시조로하는 派가 있다고 하는 말이 만성보(萬姓譜)에 실려 있다. 대저 본관이 같으면서(同貫) 종족을 달리하는 것에(別宗) 관해서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오랜 세대가 이어오면서 자손들이 갈라지고 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기고 빠진 것이 생겨서 원씨는 두 가지 성이 있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으니(元有二姓之語) 이것이 어찌 보법(譜法)이 불명(不明)한 탓이라고 아니하겠는가,,, 원성백(原城伯)이 천운에 따라 왕업을 일으켜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때에 즈음하여 왕의 대업을 도와 그 벼슬과 지위가 홀연히 백대(百代)의 종조(宗祖)가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하도다. 이로 말미암아 그 후로 일세에 이름이 드높았던 상신이 대대로 끊어지지 아니하고 태부 문순공 부(太傅 文純公 傅)와 그의 아들 찬성공 관(贊成公 瓘)이 일심으로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므로서 그 명성이 중국(中國)에까지 떨치니 어쩌 성사가 아니겠는가. 고려가 망하자 삼사공 선(三司公 宣)은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숨어서 살았으며 묘소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로 영영 그의 자취를 없애버렸으니 그가 고심으로 정절을 지킨 것이 또한 특별나지 아니한가. 아조에 들어와서 통제사 균(統制使 均)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름을 떨치고 웅장한 전략이 여러 모든 장수들의 으뜸이 되었다,,, 대저 원씨의 덕이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참되고 정직하며 착한 것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며 나아가서는 강개(慷慨)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들어서는 성실하고 신중히 하는 것을 스스로 좋아하는 가풍이 있으니 이렇듯 명문 거족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밝은 세상이거나 어두운 세상이거나 가리지 아니하고 항상 빛났도다,,,”1740년 함종 어유봉 찬선 근서
전경신보발(前庚申譜跋 1740년)
“우리 원씨는 성울 얻은지 천백여년이 넘으나 각집에 가지고 있는 것이 다만 한권의 직파만의 기록을 한 것이 전해 오고 아직 세보의 간행을 하지 않으니 우리 동성들은 흩어져서 서로 먼곳에 살면서 노상에서 만나면 서로 몰라 남과 같이 되었다. 비록 고려의 개국공신 정의대부병부령령공(원성백)이 시조인 줄은 아나 일인에 몸에서 연대가 멀어지면 지파(다른 형제분들의 파)가 있어 반드시 번성하고 있을 터이나 어느파의 나뉨과 어느 대에 갈림을 모르고 있으니 어느 자손은 어느 분이 할아버지임을 알 수가 있겠는가,,,” 1740년 후손 홍적 근발
경신후보 서(庚申後譜 序 1800년)
“,,,대저 원성원씨(原城元氏)는 아래위로 천여년에 걸쳐서 대대로 훈업(勳業)이 뛰어나서 우리나라의 거족(海東望族)이 되었으며 밖으로는 공훈을 세워서 의로써 나라의 기둥이 되고 안으로는 뜻을 지키고 천성을 다하니 충신과 효자가 어느 때고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그 중에서도 명성이 중국(中國)에까지 떨치고 더욱 밝고 빛나며 저명하였던 분은 찬성공(贊成公)이시다. 일심으로 왕실에 충성을 다하여 큰 공을 세우시니 마땅히 하늘로부터 후한 복과 녹을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번창한 것이다,,,” 1800년 가선대부행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민태혁 근서
계해보서(癸亥譜 序 1863년)
“,,, 원성백(原城伯)께서 고려 태조가 천운을 타고 왕업을 일으킬 때에 태조를 보필하여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였으며 그 공훈(功勳)이 금석(金石)에 새겨지고 교룡기(交龍旗)에 휘날리며 백세를 내려오면서 더욱 빛나니,,,” 1863년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연일 강관 동양 신석우 근서
계해보발(癸亥譜跋 1863년)
“,,, 우리 북원원씨(北原元氏)는 진한(辰韓)때부터 신라시대(新羅時代)를 지나면서 명문거족(名門巨足)으로 혁혁한 업적을 세우며 대를 이러 사적(事蹟)이 아직까지 남아있도다. 옛날 천순 정축(1457년)에 우리 십삼대 방조 사온공(司醞公 諱龜)이 비로소 족보를 만드시어 고려개국공신 병부령 원성백(高麗開國功臣 兵部令 原城伯)을 시조로 모시고 그 뒤를 이어 명공거경(名公巨卿)들을 대를 끊지않고 기록하니 문순공(文純公 諱 傅)와 그 아드님 찬성공(贊成公 諱 瓘) 같은 분은 왕실에 충성을 다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울리고 고려가 망하매 삼사공(三司公 諱 宣) 같은 분은 망복(罔僕)하고 지조를 지켜 찬신(竄身)하여 세상에 나서지 않으셨고 방계(傍系)의 일가에도 문정공(文定公 諱 松壽)의 높은신 문학과 이조(李朝)에서 양도공(讓悼公 諱 閔生)은 일세(一世)에 가장 우러러 뵈올 일이며,,,” 1863년 후손 후등 근발
신유보 서문(辛酉譜 序 1921년)
“,,, 원성원씨(原城元氏)는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다. 일찍이 고려가 삼한을 통합할 때 공훈을 세워 원성백(原城伯)을 시조로 하며 그 이후에 훈업과 덕망으로 왕업을 보필한 혁혁한 업적이 사책(史冊)에 실려있다,,, 원주원씨는 신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백년(千百年)에 이르도록 충효와 문학으로 이름을 드 높였고 아름다운 덕을 거듭하여 세상에 나타난 것과 나타나지 않은 것에 틈이지지 아니한 것이 마치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근원이 있는 것과 같으며 그 지파가 무성하고 또한 길어서 장차에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로다,,,” 1921년 자헌대부 전홍문관 학사 벽진 이우면
신유보발(辛酉譜跋 1921년)
“,,, 구보(舊譜)의 서문을 보면 진한(辰韓)때로부터 비롯되어 신라(新羅)를 거쳤다고 하였으니 우리 세계(世系)의 내려온 바가 오히려 궐(闕)하였고 고려초(高麗初)에 사대파(四大派)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관향(貫鄕)이 같다고 하면서 종족(宗族)의 분별(分別)이 또한 애매(曖昧)하니 어찌 족보가 없다면 옛날과 같이 순박(淳朴)함도 무방(無妨)하지 않겠는가. 옛날 우리 선조 매한(梅漢 諱 松壽) 선생께서 세기(世紀)를 초잡아 전하실 때 원성백(原城伯)으로써 시조(始祖)로하고 역대(歷代)로 다만 맏아드님 한분식으로 이어 내려오다가 十世 문순공(文純公 諱 傅)에 이르러 세분 아드님을 두시여 비로소 대소종(大小宗)으로 분파(分派)를 하셨고 그 다음의 파(派)는 들은 바 없으며 十六世에 이르러 방조(傍祖)이신 사온공이 世祖 丁丑(1457년)때 세보(世譜)를 처음 만드시니 대종(大宗)의 開城尹公 參贊公 三司公派와 소종(小宗)의 評理公 侍丞公의 후손들은 차례로 고징(考徵)할 수 있으나 초간(初刊)때는 잘 갖추어지지않았고 二十五世인 英祖 庚申(1740년)에 이르러 오파(五派)의 종첨(宗僉)이 자리를 함께하여 족보를 중간(重刊)하니 정축에서 다시 二百九十年의 거리가 있는 것이다,,,” 1921년 후손 영의 근식
무술보 서문(戊戌譜 序 1958년)
“,,, 대개 원씨(元氏) 성(姓)은 春秋때(기원전 770~221) 衛나라 元咺에서 비로소 보였으며 또한 탁발 위(拓跋 魏 五胡 十六國의 한 나라)가 원이라고 성을 갈았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中國)의 원씨(元氏)이며 우리 나라의 원씨(元氏)와는 성(姓)은 같으나 종족(宗族)은 달리한다. 북원(北原)의 원씨(元氏)는 진한(辰韓)으로부터 일어나서 신라(新羅)에 이르렀고 훌륭한 사람이 계속해서 나타나서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계대(系代)와 순서(順序)를 헤아려 알 수 없었는데 고려(高麗)때에 이르러 비로서 사대계(四大系)로 나누어져서 그 첫째가 이름이 克猷이니 원성백계이고 다음이 克富이니 운곡계이고 다음이 惟琰이니 시중공계이고 다음이 允昌 또는 序이니 충숙공계로 모두 별개의 派로써 만성보에 실려 있다. 그러나 계대(系代)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서 비록 같은 본관이기는 하나 종족이 다른 것인지 또는 같은 것인지를 고증할 수 없으니 이는 족보가 없으므로 해서 그들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 하는 내력을 상세히 알지 못하는 탓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원씨(元氏)가 지난해부터 족보를 편찬한 것에 합의하여 지금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시조 휘 극유(諱 克猷)는 고려 태조가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세울때에 삼한을 통일하는데 널리 보필함으로써 일등공신 병부령(一等功臣 兵部令)을 하사하고 원성백에 봉하였으니 성(姓)을 얻게 된 시초의 명백한 증거가 되며 참으로 우리 동방(東方)의 화려한 거족(巨族)이 되었다. 그 후손들의 향기로운 이름과 아름다운 행적을 연이어서 혁혁히 역사에 빛나고 있으니 고려조(高麗朝)에 있어서는 좌복야 휘 징연(左僕射 諱 徵衍)과 이부상서 휘 영(吏部尙書 諱 永)과 평장사 휘진(平章事 諱 瑨)과 중찬 문순공 휘 부(中贊 文純公 諱 傅)와 찬성사 휘 관(贊成事 諱 瓘)과 정당문학 문정공 휘 송수 (政堂文學 文定公 諱 松壽)등이며 모두 당대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가선대부 동지돈령원사 영가 후인 1958년 김용진 근서
무술보발(戊戌譜跋 1958년)
“,,, 지난해 화수회(花樹會)때에 여러 종친들이 족보 간행할 것을 협의하자 三系(原城伯系 侍中公 耘谷系)가 모두 일치되었으나 그러나 三八線으로 남북이 중단되어 여러 종족이 이북에 있는 자가 소식이 통하지 못하여 수단할 도리가 없었으니 이것이 유감 되는 바이다. 또 우리 원성백(原城伯)의 맏파 계통은 종족(宗族)이 가장 적은데다가,,,” 1958년 제창 근발
수보후감(修譜後感 1958년)
“무릇 우리 원씨의 修譜는 이번이 六度째이다. 그 첫 번째는 世祖 三年 丁丑으로서 지금부터 五百二十年이 되었고 傍祖 司醞公 龜씨가 처음 一卷을 抄하여 기록하며 스스로 撰한 序文이 있으나 인쇄를 못하여 다만 필사한 것이며 보존하고 있는 것도 극히 희소하여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없는 듯하더니 이번 設壇의 일로 전북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軍字鑑定公 諱 蒙의 宗派인 裕奎의 집에서 다행히 寫本 二部를 지금까지 奉安하면서 失傳하지 않고 있으니 기쁘도다. 직접 司醞公의 손길을 접하는 것 같으며 완연히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하였다,,, 再度는 瀷씨가 주재하고 弘履씨와 弘復씨가 좌우에서 일을 했으녀,,, 三度는 병상(秉常)씨가 주재하고 懿常씨와 榮燝씨가 좌우에서 일을 했으며,,,四度는 렴(燫)씨와 의(懿)씨가 주재하고 在貞 厚豊 錫鼎씨들이 좌우에서 일을 했으며,,,五度는 경의(景義)씨가 주재를 하고 明義 濟學 周義씨들이 좌우에서 일을 했으며,,, 六度는 나의 아버지(勳植)가 주재를 하고 濟春 弘植 春植 裕成이 總務의 책임을 지고,,," 1958년 유병 근식
원주원씨 족보 서(原州元氏 族譜 序 1988년)
“,,,우리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시조(始祖)는 분명히 극자 유자(克字 猷字)이시다. 오백여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우리 족보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을뿐만아니라 근세에 이르기까지 출간된 만성보(萬姓譜)나 전고대방(典故大方) 등 보학(譜學)에 관한 권위있는 문헌에도 한결같이 ‘원주 원씨(原州元氏)의 시조(始祖)는 극유(克猷)이다’라고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런데 근자에 일천여년(一千余年)을 한결같이 우리 원성백계(元城伯系) 종원들의 정신적 지주로써 또 우리 종족의 화목과 단결의 구심점으로서 우리 가슴속 깊이 새겨져있는 우리의 시조 극자 유자(克字猷字)에 대하여 일부에서 이긴 하나 그 권위와 정통성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희석하려는 듯한 언조가 보임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우리 원성백계 자손들은 이를 주시해야 함은 물론 이러한 온당치 못한 주장을 바로잡는데 힘을 합쳐야할 것이다,,,”이제 까지 우리 원성백계는 우리 원성백계를 위시하여 운곡계(耘谷系) 시중공계(恃中公系) 그리고 제四파로서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는데 충숙공계 문중에 오랫동안 소장하여온 옛 문헌 및 가승첩 등 중요한 자료들을 고증해 본 결과 충숙공계가 우리 원성백계와 같은 극자유자의 자손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양계가 흔연히 합보하기로 합의하고 그 계통을 찾아 제 자리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1958년 원성백계 34세손 예재 근서
수보후감(戊辰譜跋 1988년)
“,,, 宗中의 事業中에서 가장 중대한 사업이 修譜事業이며 한번 修譜를 하려면 擧宗的으로 團合하여 物心兩面으로 적극적인 協助와 努力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戊辰譜는 당초 一千九百八十三年 四月二十四日 송탄시 도일동 원릉군 묘하에서 統合宗中 宗親會 總會時에 三系가 大同譜를 편찬할 것을 발의하고 그 후 보학에 정통한 종원들로 하여금 史料를 수집하여 합보문제를 연구하도록 하고 한편으로 족보편집위원회를 조직하여 서울 장충동 2가에 보소 사무실을 개설하고 편찬위원장에 시중공계의 종훈씨 간사장은 역시 시중공계의 종극씨가 맡게 되었고 총무에도 역시 시중공계의 준희씨가 취임하였으며 우리 원성백에서는 서산의 정식씨가 종사하였다. 족보의 편찬은 삼계가 각기 종전대로 추진하되 합보가 이루어지면 首卷에 上岱를 기록하고 不然이면 역시 상, 하권만 增補하면 될 수 있게 舊譜의 규칙대로 편찬키로했다는 側聞이었다. 기후 누차 합보를 위하여 사료를 수집하여 연구검토한 바 다각적으로 고증하였음에도 통합의 기록이나 연대 등 객관성이 전혀 고증되지 않아 부득이 종전대로 삼계가 각기 수보를 할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게되어 많은 경비와 시간을 낭비하면서 합보는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 것이다. 이렇듯 합보를 云謂論爭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정치나 경제에 관한 일이라든가 종사외의 다른 일이라면 나름대로 이해와 득실에 의하여 손익을 헤아려 입장과 형편에 따라 타협 양보 이합집산이 편의대로 될 수 있겠으나 조상으로부터 자손으로 이어지는 世系나 召穆이야 어떻게 權度로서 정하고 權勢나 命令으로 强作되어 천륜을 멋대로 할 수 있으며 잘못되면 換父易祖가 되는 것이니 어쩌 소홀하게 생각할 문제이겠는가. 여하간 많은 사료들에서 조상의 사적을 탐지해 보았고 조상을 위하여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 결과 현재까지의 자료로서는 도저히 합보를 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본 기간중에 참으로 뜻밖에 희한한 사료가 발견되어 첨언코저한다. 그것은 高麗誌 華閥譜이다,,, 세종때라면 이조가 고려를 망한지 일천한 건국초이고 보니 麗朝를 亡한 李朝가 고려조의 世祿臣을 連芳하여 수록한 화벌보를 이상한 색채로 보았을 것이며 당시의 相公 김질이 압수하여 소멸하였다함은 이해가 되며 儒士의 家에서 숨겨 보존하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나는 화벌보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고 섭섭함과 반가운 마음이 우연이 발동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기록에 의하며 고려개국공신 29인의 휘자 밑에 高麗 開國壁上功臣 諡 무엇 등이 일제히 수록되었고 별도로 各位의 世系와 諱字와 관함이 기록되어 있는바 그중에 원성백께서도 開國壁上功臣 諡 忠簡이라고 기록되었으며 世系에는 元克猷 그 아래로(2世 宗順,,, 15世 廣明) 15世까지 諱字와 官啣이 아울러 정연하게 수록되었으니 이를 보면 원성백께서 또 한분(종자순자)의 아드님이 계셨고 9世손 惟字琰字는 현 시중공계의 시조이시며 10世以下도 현 시중공계 세계와 대조한바 14世 弘益과 弘弼의 한 字가 다를뿐 여타는 상위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함께 고려를 개국하신 공신들의 가문들이 조상님들의 友誼와 世交로 傳之子孫하려는 친목에 뜻을 두고 편성했으리라 믿는 화벌보이고 보면 이 어찌 중요한 사료의 발견이 아니겠는가,,, 詳考하며 찾아보는 것이 도리이며 상식이어늘 그렇게 선조들의 고증을 못얻어 恨하시던 시조의 기록이요 合譜의 史料를 못찾아 고심중인때에 그것을 보고도 어찌 방치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절호의 기회인 합보를 위한 기구가 존재할때의 일이니 邈遠한 사료만 놓고 삼계가 곡 합보를 추진하고 이러한 世表까지 기록된 이 화벌보는 議題조차 안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꼭 이 화벌보를 막연히 믿자는 말은 아니지만 조상을 찾는 사업을 전담해야 하는 합보위원들의 진의는 어디에 있었는지 상식으로 헤아려지지않는 섭섭함이다. 동성동본은 백대도 지친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 사실이 분명한 것으로 고증되었을 때 시중공계와 우리는 오랜 숙제가 풀리고 대대로 동근관계를 탐구하던 중대사가 밝혀지리니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하루 속히 사실을 검토하여 史家의 考證을 얻어 조상을 알려줘도 모른체한다는 남의 조소와 우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에 始祖의 諡號로 알려진 忠簡公을 기입할가 생각했다. 그러나 不遠 화벌보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믿어 未完한 시점에 기록했다. 만일 그 고증이 희박해졌을 때를 생각해서 경솔한 듯하여 보류했다,,,” 1989년 창식 근서
무진보서(戊辰譜 序 1988년)
“,,, 수보 업무가 본궤도에 오를 무렵 뜻밖에도 시조가 변경될 뻔한 이변을 당하였으나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현출하셨던 조상님들의 음덕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후손들은 이 점 특히 명심하여 다시는 이런 실책이 두 번 다시 되풀이 되는 일이 없도록 배전의 화합과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이번 수보사업은 먼저 六派에서 각 두명 위원이 선출되어 도합 十二名으로 宗事委員會를 구성하고 委員長에는 開城尹公派의 藝載氏가 修譜幹事에 三司公派의 蒼植氏가 財務幹事에 역시 三司公派의 裕浩氏가,,, 실제 업무는 委員長 藝載氏가 主宰하고 修譜幹事 蒼植氏 전담하면서 參贊公派의 衡植氏와 將植氏가 잠시 조력하였다,,,“ 1990년 삼십이세손 장식 근기
나. 시중공계
원주원씨세보 서문(己未初刊譜 1739년)
“元氏는 新羅때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始祖로부터 世代가 명확하다 高麗朝때에 平章侍郞 侍中으로 벼슬이 높고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었으나 세대가 멀어서 족보에는 상세하게 기록하지 못하였다. 李朝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十二世가 되었으며 그동안에 자손이 많이 불어나서 번창하고 벼슬이 높이 올라 유명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면서 三百여년이 흘러갔다. 新羅와 高麗朝때에 우리 원씨의 성하고 쇠하며 밝고 어두운 행적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얻지 못하니 이는 어찌 문헌이 없는 탓이라 아니하겠는가,,, 신라와 고려 이상 계대의 족보가 전해지지않아서 아득히 먼 옛일들을 알 수 없으니 원통하고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739년 통훈대부행 세자시강원문학 원경하 근서
기미 범례(己未 凡例)
“一, 우리 元氏의 世譜는 예전에 刊行된 것이 없으므로 삼가 여러 종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家乘을 모아서 참고로 해서 바르게 고치고 정리한 것이 모두 八편에 달한다.,,, 一, 원주원씨는 우리 門中外에 원성백계 원극유와 운곡계 원극부의 兩派가 있는데 이는 本貫은 같으나 系는 달리한다(兩派卽同貫而異系也).,,, 一, 原州의 별칭은 原城 平原 北平 一新 靖原 益興 成安 등이 있다. (酒泉縣에 속하며 일명 鶴城 酒淵 奈城이라고도 한다.)”
원주원씨 세보 발문(跋文)
“元氏의 本貫은 원주인데 그 世系가 갈라져 너무 많기 때문에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우리 시중공계의 先祖는 益謙이시다. 元克猷와 元克富의 자손은 그 世界가 상세하고 또 계대가 갖추어 이어져 있으며 本貫은 같지마는 宗族은 같지 않아서 족보상에 始祖를 각기 달리 쓰면서 數十여세대를 내려오고 있다,,, 종친인 참판 경하씨가 일찍이 잘못되었다(원성백계 1740년 경신전보 족보 서문중 일부)는 뜻을 편지로 써서 어유봉의 아들인 석윤에게 보내고,,,족보 서문에서 원문중 삭제하라는 부분은 ‘四大派로 나뉘어졌는데 高麗 兵部令 원성백 克猷를 始祖로하는 一派가 있고 그 다음으로 元克富 그 다음에 元惟琰 그 다음에 元允昌을 始祖로 하였다는 것이 萬姓譜에 있다. 대저 本貫이 같으면서 宗이 다르다는 것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고 세대가 오래되어 分派의 접속이 잘못되거나 없어져서 元氏가 두 性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찌 譜法이 밝지 못한 데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까지 八十九字를 삭제하고 이를 다시 고쳐서 그 이후에 ‘諱 克猷가 高麗 太祖를 보좌하여 벼슬이 兵部令이 이르렀고 원성백으로 封해졌으니 이 분이 元氏의 上祖이다. 원성백으로부터 十六代 司醞公 龜에 이르러 비로서 族譜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1743년 원명규 지음
계미년 세보 발문(跋文1833년)
동지공께서 구보 발문에 원주원씨는 三家가 本貫이 같고 宗派가 다르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대개 振威元氏의 족보에서 나온 것을 옮겨 쓰신 것인데 그것은 그 글을 쓴 찬성 어유봉도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고치도록 하였으며 元弘履 또한 그 글을 지우고 고쳤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 序文을 보니 고치지 아니하고 예전 그대로이니 이것이 관연 무엇인가 耘谷元氏 族譜 序文을 쓴 元綸도 또한 三元氏가 같은 근원이라고 쓴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그들 兩家에서는 일찍이 國史에서 추리고 家乘을 그대로 베껴서 믿는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문헌에 증거가 없으니 믿는다는 말만 듣고 믿으며 의심한다는 말만 듣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本이 같다거나 혹은 다르다는 말은 삼가야할 것이다,,,“ 1833년 현손 규 우배수근식
계미보 예정 항렬자(1833년)
24世 世◯, 25世 ◯常, 26世 用◯, 27世 ◯中, 28世 必◯
기사 三간보 서문(己巳三刊譜序 1869년)
“,,,우리 元氏가 姓을 얻은 것은 高麗朝 中葉이고 李朝 英祖 己未年에 비로소 족보를 발간하였다,,, 그 아버지가 舊譜에서 보고 아들이 빠져있으면 기록해 넣고 형이 舊譜를 보고 아우의 기록이 보이지 아니하면 보완하였으니 손자나 증손자 代에 이르러서는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이번에 발간된 족보는 만 七年이 걸려서 약간 오래된 감은 있으나 먼 벽지에 사는 종친들까지도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1869년 통훈대부행용담현령 필상 근서
기사 세보 발문(跋文1869년)
“,,, 대저 元氏는 本貫이 같고 그 宗派가 다르다는 말은 舊譜 跋文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1869년 불초손 도상 우배수근발
갑자 四간보 서문(甲子四刊序 1924년)
“,,, 지난번에 만든 追錄을 원고에 넣고 족보에서 누락된 자손에 대하여는 고증이 있으면 새로 계통을 찾아서 바로 잡았다. 그러한 결과 북쪽에서는 北間島로부터 남쪽으로는 바다건너 濟州道에서 수단이 몰려와서 빠른 시일내에 완료하였다,,, 이번 족보는 지난번 三刊譜에 비해서 자손이 번성하여 倍가 넘게 증가하였으니,,, 우리 원씨가 高句麗와 新羅에 봉사하였으나 문헌이 없어져서 고증이 없으므로 세대와 연혁을 밝힐 수 없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新羅와 高麗의 例를 거울삼아 문헌이 없어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1924년 영희 근서
무술 五간보 서문(戊戌五刊序 1958년)
“,,, 우리 元門은 新羅와 高麗 때에는 考證이 자세하지 않으나 李朝 때에 와서 英祖 己未(1739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간행하고 그 후 八十五年(1833년) 癸未에 再刊하였으며 그 후 四十六年(1869년) 己巳에 三刊이 간행되고 그 후 五十五年(1924년) 甲子에 四刊譜가 간행되었으며 그 후 三十四年(1958년) 戊戌年에 第五刊譜의 완성을 보게된 것이다. 四刊 甲子譜를 간행할 때에는 族祖이신 지당곤(지당공 道常)께서 일을 전담하시었으며 再從叔父(道喜)가 보좌하여 一年 半만에 완성하였으며 이 번 五刊譜는 유당숙부(道喜)께서 편찬 업무를 전담하셔서 약 一年여에 끝을 냈으니 이는 甲子譜 편찬의 경험과 치밀한 內務와 종친 여러분이 열렬하신 호응으로 이루어진 결과인 것이며 과연 신속하게 완결된 것이라 하겠다,,, ” 1958년 종대 근서
무술보 편찬정서를 끝내는 날의 소감(1958년)
“우리 元門의 花樹會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서기 1948년 戊子에 처음으로 조직되어 수년을 지내는 동안 서기 1950년 庚寅에 6.25의 무참한 전란으로 二년여를 휴무상태에 있다가 부산으로 피란 갔던 정부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서기 1953년 癸巳부터 다시 발족하여 매년 5월말이면 연례총회를 개최하였는데,,, 1955년 총회 석상에서 찬반 양편을 조정하는 한 방편으로 먼저 원주원씨 종사를 편찬할 것을 제의하였던바 이것이 가결되었으며 花樹會 幹事長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종사 편찬에 대한 모든 일을 할 수 없이 책임지게 되었다. 그 후 약 반년간 헌신 전력하여 종사편찬을 완료하고 서기 1956년 丙寅 정월에 인쇄가 완료되어 배본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8년 총무 도희 삼가 씀
一九八五年 乙丑譜 序文(1985년)
“지금으로부터 二千五百年前에 孔子께서는 ‘元氏는 天明의 起運이 發源하여 萬代를 이어오는 系統이 闡明되었다’라고 春秋에 기록하시고 元氏 創世의 根源을 밝혀서 後世에 傳하셨다. 우리 原州元氏의 根本을 거슬러 上考하면 中國 周나라 文王의 九男으로 衛나라 임금이 되신 康叔의 後孫이 元縣을 다스렸으므로 그 地名을 따라 天子께서 元이라는 姓을 賜하시니 이 땅에 비로소 元氏가 發祥하였으며 始祖는 衛나라 大夫인 元咺이시다. 그로부터 一千二百 七十餘年을 내려오면서 元氏는 中國에서 많은 公卿을 輩出하면서 繁盛하였고 唐나라 太祖 때에 元咺大夫의 後孫인 元鏡이 高句麗로 派遣되어 槿域의 元氏 始祖가 되시였다고 하나 高句麗 新羅 高麗를 거쳐 李朝에 이르는 一千餘年의 文蹟이 없어서 可히 考証을 할 길이 없다,,, 이번 修譜 과정에서 三系가 合譜하기로 결의하고 업무를 추진하였으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原城伯系에서 考証이 未備하다는 이유로 獨自的인 編輯을 固執하여 끝내 合譜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을뿐더러 侍中公系에서는 印刷 完了된 족보를 다시 수정하여 인쇄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이르르니 莫大한 時間과 人力과 經費를 추가로 부담하게 되어 두루 애석한 마음 금할 길 없으며 先祖들께서 片片이 뜻을 傳하시면서도 合譜를 이루지 못하신 사연을 조금이나마 窥知할 수 있을 듯하다,,,“ 중앙종친회장 음성공후 십육대손 용석 근서
다. 호장공계
구보서(舊譜序 1666년)
우리 원씨(元氏)는 북원(北原)으로부터 이어 나와서 세족(世族 행세하는 거족)이 된지 오래되었다,,, 중략,,, 구보는 전하지 아니하고 신보는 아직 만들지 못하여 내가 항상 이것을 개탄하고 한스럽게 여겼더니 요즘 우연히 한 족보를 고향(향간)에서 얻어서 가문의 내력을 참고해보았더니(가승과 참고 한 즉) 틀림없이 맞는 것이었다. 대개 그 족보가 이루어진 것이 가정 병오년(1546)의 것이며 전란에도 그것이 보존되어 다시 구갑을 지냈으니 하늘이 어떤 사람을 기다리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었던가. 실로 우리 가문의 큰 행운이라 할 것이다,,, 중략,,, 초보를 만들어서 반복 상세히 고징하고 질의해서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세 번 초안을 바꾸었으니 드디어 서차가 정정하고 오백년 십팔대의 대서가 요연히 한권의 책중에 열리니 효제의 마음이 어찌 유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우리 종족의 자손들은 대대로 선조께서 가문에 전해신 덕과 의를 지켜서 내가 오늘날에 족보를 만든 뜻을 저버리지말고 영원히 클수 있는 고목과 같이 풍성을 심으면 우리 원씨 가문의 복되고 융성함이 장차 백세에 이르도록 무궁함이 더욱하리라.
후예손 생원 륜 경서
족보후서(族譜後序1767년)
삼한기(三韓紀)에 가로되 진인(秦人)이 나라가 망하여 우리 한나라도 들어왔다(入韓). 한나라가 동계(동녁의 경계)를 떼어서 주니 이것이 진한(辰韓)이 되어 20국을 통치하였다. 이 국(國)이 주(州)를 뜻함이며 원주(原州)도 그 하나에 속한 것이다. 원씨(元氏) 또한 그때 난을 피하여 들어온 것이라 하였다. 고보(예전 족보) 서문에 가로되 원주원씨는 진한(辰韓)으로부터 일어나서 역대에 걸쳐 신라를 섬겨 천년을 빛나게 지냈다,,, 중략,,, 원극유, 원극부, 원유염 3대파가 있고 원극부, 원유염 이상의 12세에 평장사공 휘 경이 있는 바 그분이 같은 시조가 된다는 것이 구보(舊譜)에 명백하다 하나 불행히 화재로 없어졌다. 또한 평장사공이 병부령 극유와 더불어 근세에 분파되었다고는 하나 이는 문헌으로는 가증할 수가 없다,,, 이하 생략
후예손 효달 근서
원주원씨 족보 발역(跋譯 1767년)
,,, 첫째 상상공이 만든 보책을 표준으로 삼아 수록하되 각파 후손들이 파조를 1대로 쓴 것은 대개 복잡한 것을 생략한 것이다. 오직 상상공이 만든 보책은 호장공을 시조로 삼았고 각파 단자 중에 이와 같은 것이 많고 평장공으로 시조를 한 책도 또한 많으니 생이 보고 들은 것으로는 같고 다름을 상세히 알 수 없는지라,,, 상상공이 시골에서 구한 보책이 옳지 않을까? 그런즉 수정한 원고중에 평장사공이하 12세가 없는 것은 무슨 일일까? 이제 종인들 가승에 호장공으로 시작한 집이 많고 평장사공이하 12세를 별달리 기록해 놓았은즉 그 사이가 문득 없어진 것일까? 이제 인쇄를 하려고 하니 감히 가승을 고칠 수가 없으므로 평장사공 12세를 책 첫머리에 수록하고 기록 아래 주를 단 것이라,,,
숭정 갑신후 3 정해(1767년) 추8월 일 후예손 효건 근발
원주원씨 족보 중간 서(重刊 序 1825년)
,,, 아아 우리 원씨는 동방(東方)에 있어 진한(辰韓)으로부터 일어났으며,,, 옛 아(我) 5세조 상상공이 우연히 향곡에서 옛 족보 한권을 얻었다. 인해서 널리 모든 가문의 명보와 고증을 하고 가승도 고증을 하여 초보 1권을 완성하고 그 초고를 세 번이나 바꾸었으니 그 경건함이 지극하였도다. 지난 정해년에 비로서 인판을 넣어서 편안한 것이 세권이며 오십여철이라,,,
서기 1825년 을해 10월 용태 근서
구보서(舊譜序1872년)
,,, 아아 우리 원씨는 성을 가진 뒤로부터 동방의 명족이오 북원(北原)을 관향으로하여 가문에는 충효를 전하고 대대로 청분을 이어왔다. 진한(辰韓)으로부터 근원이 멀고 대대로 신라에 벼슬하여 문벌이 밝고 빛나더니 아 운곡선조께서 고려말에 이르러 잠시 태학에 다녀오셨음은 서사에 있지 아니하였다,,,
후예손 즙 근서
구보서(舊譜序 1872년)
,,, 아아 우리 씨족은 어느 때에 성을 가졌는가 그것은 평장사 때에 비로서 나타났고 운곡선생에 이르러서는 숨었음에 이름이 있으니 동방의 청족이라 하며 북원(北原)은 우리의 구관(舊貫)이다,,,
후손 명재 근서
구보서(舊譜序 1872년)
우리 원씨는 일찍이 진한(辰韓)에서부터 여러 대에 걸쳐 신라에 벼슬하여왔으나 그 연대와 세계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이 어찌 문헌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시조인 평장사공의 휘는 경이며 여조에 벼슬하니 상류거족이오 우리 동방에 으뜸가는 가문이었다. 평장사공으로부터 12세 보윤공 휘 기도에 이르렀고 보윤공이 호장공 휘극부를 생하였다. 호장공으로부터 5세 정용별장공 휘열에 이르렀고 정용별장공이 2자를 생하니 장남이 태보요 차남이 종부시령공 윤적이었다,,, 후예손 사범 근발
구보서(舊譜序 1936년)
,,, 아아 우리 원씨는 진한(辰韓)으로부터 비롯해서 역대에 걸쳐 신라와 고려를 섬김에 관직이 계승하고 문벌이 밝게 빛나니 드디어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 되었고,,,
병자 3월 상순(1936년) 후예손 현모 근서
원주원씨 세보서(世譜序 1960년)
,,, 아아 우리 원씨는 평장사공이 이 나라에 온 이후로 본관(本貫)을 북원(北原)이라 하였으며 그 0가 적지 않아 국중(國中)에 깔렸었고 비록 운곡 원성백 시중공의 파계(派系)로 일컫으로 있으나 윗 조상으로 볼 때는 모두가 같은 자손이 된다,,,
서기 1960년 3월 30일 운곡 18세손 창규 근서
원주원씨 세보서(舊譜序 1960년)
,,, 우리 원씨가 그 성을 얻은 것이 이미 2천여년이 되었다. 처음 삼한(三韓)때에 비롯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에는 높은 재상이 끊이지 않더니 고려의 운이 다 함에 선조 운곡선생이 신하된 자의 절의로서 세상에서 숨어 스스로 조용히 지냈거늘 태종으로부터 신하된 자로서가 아닌 특별한 처우를 받아 드디어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서기 1960년 경자 춘망 운곡 21대손 증식 근서
원주원씨 보발(譜跋 1960년)
,,, 아아 우리 원씨는 원래 중원(中原)으로부터 나와 장상(將相)의 귀함에 이르러 그 이름들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당나라때에 시조 평장사공이 칠학사와 더불어 어명으로 조선에 와서 여러차례 여러 나라와 화협하고 만민을 교도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번성하고 문벌이 빛나더니 고려말에 이르로 운곡선생이 계출하시니 그는 백세의 사표이오 만고의 기상이러라,,, 아아 삼가 우리 원씨의 보첩을 살피건데 신라때부터 계보가 있었으며 고려초에 그 계보를 이은 것이 있었다하나 여러번에 걸친 병란에 화를 입어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였다,,,
서기 1960년 경자 춘3월 후예손 정길 근발
원주원씨 세사 서론 (世史 序論 1960)
원씨의 창세연원과 경시변천에 관려된 정사와 비승의 원서들을 일일이 탐구 고찰컨대 원씨는 본디 주지성세에 계출하야 중원 여러 국조에 현달하였으니 천자의 사성하신 그 연대는 가고할 수 없으나 주양왕 기축(단기 1702년 기조수도왕 3년에 비로소 그 성명이 춘추에 노현되었거니와 그 현성하신 분이 주문왕 지자 위군 강숙의 후예로 위국의 공족이시며 원씨이 비조이신 위국정경 원훤대부이시라,,,,,중략,,, 당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진청으로 태종이 도덕학예지사 팔인을 선출하니 팔인 중 그 한분이 동래시조이신 평장사, 원경대부이시다. 평장사공이 당제의 칙령을 받들고 정관계묘(단기 2976년)에 칠학사와 더불어 고구려에 이르러 여 당간 친선을 회복하고 보장을 고구려 국왕으로 책봉케하였더니 단기 2978년 을사에 의외변란으로 여당 국교가 파괴되매 책지에 따라 신라에 오셔서 국정을 선조하여 만방을 협화하며 교화에 진력하야 만민을 교도하시니라. 오호라 원씨의 전후사적과 신구행장이 고금죽금에 저작되고 내외금석에 누각 되었으련만 진시의 분서지사와 여조의 멸족지고을 당하고 간간 병마지화와 왕왕 창졸지변이 있어서 대성문헌과 송업지명이 모두 소실되니 가고할 총집이 없는지라 이에 창해의 유주와 사주의 매계를 찾고자하여 십수년간 만종장서를 섭렵열람할새 경 서 자 집의 저본을 개개히 고열하야 연관사료의 단적으로 세쇄한 것은 문사의 경개만을 부분적으로 발췌채록하고 중요연관성이 있는 것은 장구의 전체를 원문 그대로 유취수재하야 소원 연류를 명백히 표현하는 원씨 세사를 집성하야 상고 득성기원과 역세연혁과 동래사실을 소상히 편술하였고 특히 중엽계도를 투명코저 여러 보첩을 상고하니 주요사적으로 그 개요만을 표식되었을뿐이오 원가의 실기로는 신라시의 계보가 있고 여초에 계서지문이 있다하니 신진이 후일 광심박고하야 원문사적을 명시할 하락도서의 출현을 기다리고 사책의 만일을 보철하는 바이로다.
단기 4293년 경자춘 후예손 창식 근서
원주원씨 세사(世史 1960)
전문 생략
서문(序文 1986년)
우리 원씨의 유래는 중국 주나라 문왕지자(文王之子) 무왕(武王)의 소제(少弟)이며 위국(衛國)의 군주이신 강숙(康淑)의 지예(支裔)이다. 강숙이 위군으로 봉후(封侯)되어 누대를 지나 9세 무후(武侯)때 공자 한 분이 원현(元縣)에 봉채(封采)되여 살던 중 천자(天子) 국인(國人)이 성씨(姓氏)를 흠정분포(欽定頒包)할 때 처음 원씨를 사성(賜姓)받으신 분이 원훤대부(元咺大夫)이시다. 이로부터 약 1300년 후에 당나라 태종 정관계묘에 고구려 보장왕은 국민교화를 위하여 당 태종에게 구도교(求道敎)를 진청(秦請)하니 이를 좋게 여겨 당태종의 칙명으로 노자도덕경을 가지시고 고구려에 도래하신분이 원훤대부의 묘예(苗裔)이신 원경대부(元鏡大夫)이시다. 고구려에 도래하신 후에는 여당간에 국교회복에 진력하시니 보장왕은 원경대부에게 좌명공신을 봉작하셨다. 연이나 도래하신지 2년후에는 연개소문이 난을 야기(惹起)함으로 원경대부께서는 당태종의 칙지에 따라 신라로 변경하시니 선덕여왕은 상빈으로 예우하셨고 원경대부는 유속(流俗)을 일신(一新)하고 만민교화에 열과 성을 다하셨다. 고려 충숙왕 17년 경오에 호 운곡 원천석 선생이 19세손으로 탄생하셨다,,,
서기 1986년 병인 2월 일
원주원씨운곡계 종중 문장 원인식 근식
기타1. 고려국자진사 운곡선생 묘갈중에서
“선생의 세첩(世牒)을 상고해보니, 시조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이다.(始祖 戶長克富)극부가 종유(宗儒)를 낳고, 종유가 창정(倉正) 보령(寶齡)을 낳고, 보령이 창정 시준(時俊)을 낳고, 시준이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을 낳고, 열이 종부령(宗簿令) 윤적(允迪)을 낳았다. 윤적은 천상(天常), 천석(天錫), 천우(天佑)를 낳았다. 천상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혹은 ‘본조(本朝, 여기서는 조선왕조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드러났다’고 하지만, 참고할 데가 없다. 천우는 현령(縣令)을 지냈다.”(1670년 司憲府掌令 許穆 지음)
기타2. 통훈대부 사간원 정언 겸 지제교 부군 묘표중에서
공은 원주 사람이니 호장(戶長) 휘(諱) 극부(克富)의 후손이다. 증조의 휘(諱)는 윤적(允迪)이니 종부령(宗簿令)으로 치사(致仕)하였고 조고의 휘(諱)는 천석(天錫)으로 국자감(國子監)에 진사(進士)로 호는 운곡이요 선고(先考)의 휘(諱)는 형(泂)이니 기천현감(基川縣監)이며 선비(先妣)는 주천안씨니 랑장(郞將) 거정(距鼎)의 따님이다.(1742년 11세손 효인 근서)
마루리 사족 : 상상공 륜의 서문에 나오는 벅찬 감동과 운곡선생 묘갈과 정언공의 묘표에 담긴 숭조의 정신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어봅니다,,,
7. 원주원씨 역사를 조롱거리로 만든 원경(元鏡)의 등장
숭조심과 애국심의 부재가 만들어낸 호장공계 가승(시조 원경이하 12세손)
始祖 1世 元鏡(원경) / 1872년
高麗佐命功臣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平章事(고려좌명공신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配 驪興李氏 父 府院君(부원군) 祐新 祖 大提學(대제학) 正珪
元鏡(원경) / 1935년
高麗佐命功臣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平章事(고려좌명공신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配 驪興李氏 父 府院君(부원군) 祐新 祖 大提學(대제학) 正珪 中原弘農人(중원홍농인) 高麗 光宗十一年(960년) 以 太學士 泰士(태학사 태사) 東來時 池 辛 洪 郭 張 李 河 八鏡 同來(추가 변경됨)
元鏡(원경) / 1986년
高句麗佐命功臣 大唐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平章事(고구려좌명공신 대당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配 驪興李氏 父 府院君(부원군) 祐新 祖 大提學(대제학) 正珪 西紀 六四三年 寶藏王의 秦請으로 唐나라 太宗이 道德學藝之士 八人을 選拔하여 東來하시다.(일부 삭제 일부 추가 변경됨)
2世 貞立 員外郞
貞何 判密直
3世 希跡 侍中 ▶ 父 정립
希英
希先(1935년 삭제 ▶ 希英 員外郞(1986년 員外郞 관직 추가)
4世 枝和 典校令 墓 松都 南龍井 碣石猶存云 ▶ 父 희영
枝和 典敎令 墓 松都 南龍井 碣石猶存云
5世 仁孫 中樞院事
淑孫 寺承(사승)
始孫 始一作 治 典書 配 李氏 父 文華(1872년)
始孫 始一作 治 典書 配 李氏(1935년 父 文華 삭제 ▶ 1986년 복원)
6世 繼祖 文科 中書令 ▶ 父 시손
胤祖 文科 政堂文學
泰祖 文科
錫祖 文科
永祖 文科
7世 漢佑 三司右使 ▶ 父 윤조
漢弼 摠制 一云 贊成事
漢佐
漢耈
漢老 ▶ 父 영조
8世 錫百 密直司 ▶ 父 한필
錫千 大將軍
錫萬 監察御使
錫三(1935년 삭제 ▶ 1986년 복원) ▶ 父 한노
錫五(1935년 삭제 ▶ 1986년 복원)
錫九
9世 儀 或云 丁義 世子少監察御使 (1986년 儀 或云 丁義를 丁儀로 변경)▶ 父 석천
丁鍰(정환) ▶ 父 석구
10世 震鐵 給事 同正 ▶ 父 의
震明 修文殿大提學
寶碧 ▶ 父 정환
11世 三山 城城府使 ▶ 父 진명
愼山 代言
萬雄
12世 起仁 ▶ 父 삼산
起圖 圖作度 甫尹
起聖
英修 ▶ 父 만웅
13세 克富 戶長 ▶ 父 기도
謹 按舊譜 平章事公以下十二世別0
卷首然其世次昭穆明白無疑則刊之別0爲子孫道極知未安古今依式刊正于右(1872년)
어느 노승이 원도희님에게 보냈다는 시중공계 가승(1956년발간 원주원씨 종사 수록)
始祖 1世 元鏡(원경)
高麗 仁宗 戊午(1138년) 及第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
配麗州李氏 麗興府院君 佑新之女 大提學 正珪孫 二子 貞立 貞何 判密直
2世 貞立
員外郞 三子 稀跡 稀英 稀光
3世 希跡 侍中
4世 枝和
初諱 私(和)忠 典敎令 三子 仁孫 淑孫 治孫
墓在松京南龍井碑碣如舊云訪問松京近處未得今聞龍井在豊德云
5世 仁孫
五子 繼祖 胤祖 奉祖 錫祖 永祖 幷登科
6世 繼祖
四子 漢佐 漢耈 漢老 漢有
7世 漢老
三子 錫三 錫五 錫九
8世 錫九
9世 丁鍰(정환)
二子 寶碧 寶尙
10世 寶碧
11世 萬雄
12世 英修
三子 彦琰 末琰 有琰
13세 有琰 吏部尙書 舊譜卷首別祿과 有惟가 相異라
子 益謙 (익겸) 文科 子 守仁 (수인) 同平章事 子 成桂 (성계) 中郞將
子 溫 (온) 侍郞 子 (弘弼 (홍필) 侍中公 子 (廣明 (광명) 同正致仕
子 仲良 (중량) 子 方甫 (방보) 同正 子 憲 益興君
昔에 一 過去 老僧이 自謂姓元이라 하고 右錄을 書送한 것인데 謹按高麗 仁宗 戊午로부터 至我朝初 壬申이 爲 二百五十四年인바 其間世系가 二十餘代라는 것은 事理에 不當하고 僧 의 所傳은 이 같으니 또한 어찌 全然 所據가 無하리오 或 仁宗이라 한 것이 誤耶아 同正 府君이 吾家 舊譜에는 初諱 仲良이라시다가 後改 方普라 此錄에는 分하여 二代로 되었으니 또한 疑心 處이라 編末에 附하여 以俟博考하노라 右는 侍中公系 道喜 所藏 家乘 七 卷末 編에 在함이라 耘谷公系 家譜와 互照한즉 代數가 符合에 同源異派가 分明하나 中間數代 에 伯季가 相異하니 家譜가 誤耶아 世系가 誤耶아 然則 何를 正이라 爲據하여 合譜할 道가 無 하고 좀더 博考의 日을 待하나 行列이나 同一히 할 目的을 兩系가 相議한 後 耘谷公後 四 十七世와 侍中公後 三十四世가 同一하므로 行列字를 泰以下至魯字 十八世 豫定함이라
▶ 시중공계 원도희님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原州元氏宗史(1956년 발간)에 수록한 것임
8. 기타 지나가는 길에,,,
원혼의 후손에 대하여
원혼(元混)
[문과] 중종(中宗) 20년(152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19/33)
초명 원손(元遜), 자 태초(太初), 생년 을축(乙丑) 1505년(연산군 11)
합격연령 21세, 본관 원주(原州), 거주지 미상(未詳)
[이력사항] 전력 생원(生員) 관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타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 원유륜(元有綸) [조부] 원호달(元浩達) [증조부] 원지어(元止於)
[고조부] 원숙(元肅) [처부] 유흡(柳洽)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혼[ 元混 ]
자 태초(太初), 출생-사망 1505년(연산군 11) ~ 1597년(선조 30)
본관 원주(原州) 대표관직(경력)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병조판서, 좌참찬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태초(太初). 증조는 지어(止於)이고, 할아버지는 호달(浩達)이며, 아버지는 유륜(有綸)이다.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지평(持平)을 거쳐, 1534년 헌납(獻納)이 되고, 1539년 장령(掌令)에 올랐다. 1543년 사은부사(射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병조참의·우부승지·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이해 다시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 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에 이어 이조·공조·병조의 참의를 지내고, 전라도관찰사·대사간·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우참찬을 거쳐 형조·호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좌참찬, 1580년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93세까지 살아서 땅의 신선이라고 불려졌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사근(元思謹)
[무과]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9/28)
자 경중(敬仲) 생년 신사(辛巳) 1521년(중종 16) 합격연령 44세
본관 원주(原州) 거주지 원주(原州)
전력 충순위(忠順衛)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원혼(元混)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관직 : 충순위행부사직(忠順衛行副司直)
[제] 원사인(元思訒), 원사눌(元思訥), 원사훈(元思訓), 원사량(元思諒)
[출전] 《갑자 식년 문무과방목(甲子式年文武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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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계 14세 원언좌 1526년생~1564년졸(갑자졸) 배 고성이씨 父 嶇 監察
자 元士訒 분토동 성황당
자 엽 曄, 엽의 子 원해(생부 원탁) 숭정기사생 1627년생
길 길, 1564년생, 해주군 길의 子 도 1585년생
탁 晫, 만력 계미년 1583, 족보상 1613~1676
자 元士訥 子 繼先, 繼組 수원군 동북면 만의 상곡
자 元士謹 1579년생~1664년생 子 휘 暉 경주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 89-1 장공산
자 元士諒 无單
15세 원사인 후손 한세대 평균 28세 정도
15세 사인 士訒 1538년생 추정 16세 길 1564생 17세 도 가정 을유생 을묘졸
18세 덕기 갑인생 을사졸 19세 응규 계미생 을사졸 20세 중재 계축생 을축졸
21세 종진 정해생 을사졸 22세 영채 갑자생 무오졸 23세 식 경인생 임인졸
24세 세기 갑자생 정미졸 25세 치상 갑오생 26세 용근 1853년생
27세 영희 1879년생 28세 종수 1933년생 29세 상연 1959년생
30세 동석 1983년생
만가보
원황
자 원효연 효이 효재
자 원중치 형 중비, 중거, 중륙
자 원극인 극인 동생 경인, 윤조(출), 박인 처 원주원씨
자 원욱수(元頊壽), 원욱수 큰형 팽수, 둘째형 담수
자 원여림 사위 원혼 처 원주원씨 문 판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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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공계 24세 원혼(元混) 및 그의 자
22세 영(1447년 식년시 3등)
23세 1자 순거 2자 순보(1458~1512) 3자 순좌
24세 순보의 2자 원해(1496~1562)
순좌의 2자 원혼(元混) 자 태초 문과 숭록대부판중추부사 1525년 종중 정해생 수 93세
배 강릉최씨 부 생원 세효 부 참판 응현
25세 원혼의 자 원사근(元思謹) 无單
자 원사인(元思訒) 无單
자 원사눌(元思訥) 无單
자 원사훈(元思訓) ⇒ 26세 琳 이하 수단
자 원사량(元思諒) 无單
첫댓글 운곡계라는 표현은 호장 극부님의 전체 후손을 포괄하는 개념이 아닌 것 같아서 폐기하고 호장공계라는 표현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자합니다,,,
이씨 조선의 정통성을 살리기위해 정인지 김종서 등에 의해 왜곡되어진 고려후기 역사와 당시 역성혁명(?)을 진행한 이성계 일파의 반대편에 섰던 원주원씨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한 일일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