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각 분야의 最高는 모두 수도 서울에 위치합니다.미국이나 영국같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단된 나라에서는 주마다 명문대학도 있고 어마어마하게 큰 마트도 있습니다.샌디에고의 한 마트는 잘못들어가면 다시 길을 찾아 나올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수도육군병원은 화양동인가 화곡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명칭도 국군통합병원
서울병원으로 바뀌었습니다.79년 박통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보부 패들과 보안사 패들이 총격전 벌리며 난리치던 곳이기도 합니다.
70년 젊은날의 내靑春은 눈물과 술로 얼룩진 나날이었습니다.이래서는 閉人이 되겠다 어디라도 탈출구라도 찾자고 간곳이 군대입니다.그곳은 모든것이 잘 맞았습니다.學校같이 공부 잘하는놈,못하는놈 차별하지도 않고 時間되면 밥주고 잠재워주고 운동시켜주고 군대말로 體質에 맞았습니다.요즘 사고방식
같았으면 말뚝 박았을것입니다.요즘 젊은이들 4년제대학 나오고 취업이 되지않아 부사관으로 많이 지원합니다.장교들은 여기저기 전출을 다니지만 부사관들은 자신만 원하면 한곳에서 계속 근무 할 수 있습니다.기술병과 같은 경우에는 제대후에 5급 문관으로도 근무 할 수 있습니다.거기다 20년 근무하면 군인연금이 쏠솔하게 지급됩니다.
70년 3월 훈련을 마치고 촌놈이 난생 처음 서울 南山이란 곳을 올라가 봤습니다.내려다 본 아래에는 고층빌딩 숲이었고 이런곳이면 사람 살만한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경복궁에서의 군대생활은 녹녹치 않았습니다. 일석점호가 끝나면 卒兵들은 어김없이 탄창고에 집합하여야 했습니다.식기닦는데 고추가루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고참의 구실입니다.얻어 터지고 나면 엉덩이는 조금 아파도 속은 후련합니다.빳다를 맞지않고 그날 그냥 취침했다가는 새벽 3시쯤 기상하여 해괴망측한 구실로 얻어 맞아야 하니깐요.당시 이등병 월급은 800원 병장은 1,200원 이었습니다.그 돈으로 휴가올때 고속버스 車費도 되지않아 집에 SOS를 날려야 했습니다.
이럴바에야 조금 고된 훈련받고 4,000원짜리 軍隊生活 하자고 집에는 알리지도 않고 원주로 떠났습니다 .소문에 북한124군부대 버금가는 훈련이라고 했는데 내무반 생활이 편하니 육체적 苦痛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기본교육도 막바지 전술학훈련 받으러 백달리로 완전군장에 구보를 하였습니다.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들도 그렇게는 훈련받지 않습니다.모두를 40KM를 완주하고 밤늦게 여장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새벽에 동초근무라 전우가 깨워 일어났더니 발등이 퉁퉁 부어 있습니다.이 무슨 변괴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보 끝나고 막사앞 시냇물에 발을 씻었는데 조그맣게 성처난 부위로 세균감염이 된것 같습니다.아무런 말도 못하고 2시간 근무서고 다음날 훈련받고 막사로 돌아와 양말을 벗어보니 어제보다 더 부기가 심합니다.
눈내린 산길에서 공격 앞으로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진짜 바보같았습니다.
6개월 훈련을 마치고 청량리역에 도착하였습니다.절뚝거리며 성북동 혜경이네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 大邱로 내려왔습니다.
와과병원에서 고름도 썩션하고 발등의 상처는 조금 나아지는듯 했습니다.열흘간의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니 그때 데모가 심하던 때라 폭동진압 훈련으로 며칠을 보내다 도저이 발등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병원으로 후송을 요청하였습니다.그냥 약먹이고 드래싱이나 하면 상처가 나을것 같은데 실험용으로 이식수술을 받았습니다.허벅지 살을 떼다가 발등에 부치니 상처는 보름만에 완치되었습니다.전문의는 軍隊오면 군위관 소령입니다. 그분의 집도로 공짜치료를 받았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하얀 쌀밥에 김,시금치,소고기 국으로 삼시세끼 먹으니 살이 토실토실 올랐습니다.이렇게 한가하게 보내도 국방부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허벅지와 발등에는 그날의 상흔들이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사내녀석이 몸에 상처 좀 있으면 어떻습니까? 보름후 부대로 復歸하여 서울대,고대,성대로 출동하여 폭도들 진압하고 포로들을 체포하여 부대 연병장에 팬티바람으로 세워 놓고 허벌나게,아니 다시는 데모같은것 못하게 정신 敎育을 시켰습니다 .언놈은 X 빠지게 軍隊생활하는데 "幸福에 겨운 녀석들 공부는 하지않고 데모질이야" 라고 적개심에 불타 있었습니다.그들중에는 親舊들도 분명히 있었을것입니다.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기 때문에 인정사정 볼것 없이 그들에게 많은 육체적 고통을 준것 같습니다.이게 다 40년이라는 긴 歲月이 흐른 젊은날 한폭의 그림입니다.보름간의 病院生活은 군대생활 3년중에 가장 잘먹고 가장 편안했던 나날이었습니다.감히 어떻게 각하의 시신이 모셔졌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내려주신 福된 날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