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 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여인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돌계집인데도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두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루카 1,44)
그리고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곧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 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친교요 소통입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서로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어제는 공동체 형제들과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기후 비상 시대-리허설’이라는 연극을 보기 위해 명동 국립 극장을 가는 전철에서 책을 보고 있는 한 친구를 보게 되었는데, 요즘 책을 잘 안 보는 시대에 책을 보니, 그것도 젊은 친구가 보니 그 자체가 관심이 가서 무슨 책을 보나 살짝 엿봤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였습니다.
무슨 이런 책이 있을까 생각이 되면서도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묵상하며 가던 길이었기 때문인지 만남이라는 주제와 즉시 연결이 되면서, 어떤 만남은 가져야 하고 어떤 만남은 우리가 그 만남을 피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피해야 할 만남 하면 즉시 나를 유혹한다든지 피해를 주는 사람이 생각이 나고, 요즘은 상처에 민감하고 조그만 부담도 못 견뎌 하니 상처를 주는 사람이나 부담을 주는 사람이 이내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책이 이런 유의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것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 아니고 우리도 이런 이유로 누구를 만나지 않아서 안 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진정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상대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떨 때 누구를 만나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나기만 하면 남 흉을 보게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도 그 사람이 남 흉을 잘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흉을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외로울 때 만나고 싶은 사람도 제 생각에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외로움이 병이 될 지경이라면 만나야 되겠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인 이유 때문임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외로울 때는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때인데 이 영적인 좋은 때를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로보다는 격려를 나누는 사람, 서로 영감을 주고 열정을 북돋는 사람, 이웃 사랑을 위해 같이 좋은 일을 할 사람, 위의 목적을 위해 같이 책을 읽고 나누기를 하는 사람, 뭐 이런 사람들이 퍼뜩 떠오르는데, 우리 신앙인이게는 오늘 마리아에게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와 같은 사람일 겁니다.
험담을 하기보다는 기도를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자기에게 내린 은총과 주님의 구원 업적을 나누고 찬양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그저 친척 사이이기에 만난 것이 아니고,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서로 위로하기 위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같이 특별하게 임신한 사이이기에 만난 것도 아니고, 요즘 젊은 엄마들처럼 태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나누거나 친교를 나누기 위해 만난 것은 더더욱 아니고, 자신들 안에서 그리고 자신들을 통해서 이룬 구원 업적을 같이 찬양하기 위해섭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여기서 나눔을 그쳐야 하는데, 아무튼 우리는 오늘 우리의 만남이 어떻고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기해 돌아보는 날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전능하신 분께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구원 능력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맡겨 드려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늘 곰곰이 생각하고(루카 1,29), 마음속에 간직하며(2,19.51)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돌계집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으로부터 찬미를 받으시고 또한 두 여인은 참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 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해외 교포사회에서는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농담을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집니다.
함께 나눌 수 있음이 기쁨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주 하느님을 믿고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가장 큰 일은 가장 작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야 그 일이 큰 일이라는 것이 역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가장 겸손하고 가장 작은 마음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선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모님의 영성입니다.”
(함께야)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우리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복은 알아보면 오고 알아보는 이에게 간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신이 가야 할 곳을 택하실 때 성모님은 당신을 바로 알아볼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43)
당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지구상에 엘리사벳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바로 엘리사벳에게 달려가셨습니다.
심지어 의인 요셉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알아볼 눈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요셉 성인보다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이 법칙을 “볼 줄 알면 온다”라는 법칙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 하느님은 아드님을 성모님 태중에 주셨을까요?
볼 줄 아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지만 실제로 그 안의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명예, 돈에까지 해당하는 법칙이라 믿습니다.
어쩌면 성모님이 사람을 가려서 만나는 것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이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보물로 만들어주신 분을 위함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간다는 말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성체’를 두고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품은 우리 각자도 거룩한 성체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우리 안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2006년 필리핀에서 한 어부가 낚시를 하다 왠지 묵직한 대왕조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어보니 씹다 만 껌 같은 허여멀겋게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부는 거참 희한한 게 다 있다며 그것을 침대 밑에 넣어두고 10년 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것의 가치를 알게 된 어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진주로 최소 ‘1,000억’원을 호가하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조개가 그만한 진주를 만들려면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어부는 1,000억 원을 침대 밑에 두고 1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부라면 진주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값이 많이 나가는 진주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선물하는 것은 진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것을 선물하지는 않으십니다.
사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열혈사제’에 나오는 정도일 것입니다.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신앙을 갖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있어도 이상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사제는 그냥 한 종교의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에게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생명의 빵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존재입니다.
사제는 한정된 시간에 신자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야 할까요?
당연히 사제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제를 사제로 세워준 것에 대한 예의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방문함으로써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을 알아볼 이들에게 우선 다가가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야 하는 수준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자신 안의 하느님을 믿게 할 성덕에 오른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이슬람 왕인 술탄을 찾아가 선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탄은 십자군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행동은 무모한 행동이었을까요?
술탄은 성 프란치스코에게만 이슬람 땅에서 선교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들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 그곳에 자기 형제들을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선교하기 위해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가게 됩니다.
이 당시 십자군은 다미에타의 나일강이 범람하며 홍수가 나고 역병이 돌면서 그리고 양쪽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서른일곱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교황 대리 펠라조의 특사로 서른아홉의 이슬람 술탄 알 카밀을 만나 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탄과 그 백성들이 개종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의 제사장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로 벌어지는 일이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의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슬람의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을 하며 불을 등진 채 도망을 쳐버렸고, 술탄 알 가밀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보물을 주려 하였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 서약을 한 프란치스코는 먼지인 양 재물을 무시하였고, 그것을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프란치스칸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에게 프란치스코를 보내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프란치스코를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능력을 알았기에 사마리아로 들어가면 당신의 파견이 허사가 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누구라도 주님을 믿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나마 자신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파견하신 것이고, 아드님은 교회를 파견하셨고, 교회는 바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질 때 분명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우선 ‘성호경’으로 시험해 봅시다.
저희 동기 신부 아버님께서는 가스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룻밤 사이에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로 항상 성호경을 긋고 다니십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성호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도 회개시키셨다고 합니다.
그중에 목사님도 네 분이나 있다고 합니다.
성호경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호경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다가갑시다.
이것은 가려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주는 것뿐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의 성채인 가톨릭교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피정 센터에 와서 낯선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온몸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절친처럼 여기며 기쁘게 환대하다 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을 많이 하고 삽니다.
첫 만남 때 인사부터 잘해야겠지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누추하고 불편하시더라도 머무시는 동안 주님 은총 안에 편안한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만남, 첫 인사가 잘 되면 그 뒤로는 매사가 술술 일사천리입니다.
그 간단한 환영의 인사에 세파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눈녹듯이 녹아내린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을 좀 더 생활화한다면, 이 심각한 위기 상황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우리 가톨릭교회를 찾아올 때, 기존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보이는지요?
진심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환영하고 환대하고 있는지요?
그들이 우리 성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가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마음속은 그야말로 복잡하고 심란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미래에 대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큰 그림을 그려주셨지만, 마리아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는 순간 즉시 다가오는 도전들과 근심 걱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서른 마흔도 아니고 10대 초반의 소녀 나자렛의 마리아는 마치 안갯속 길을 걷는 듯한 막막함으로 인해 힘겨웠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한 아름 안고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아인카림을 찾아갑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복잡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혼전 잉태 사건을 엘리사벳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마음에 걱정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모든 걱정은 한낱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선발로 튀어나온 엘리사벳을 그야말로 온몸과 마음으로 마리아를 환대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복음 1장 42~45절)
사촌 언니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에 불안·초조했던 마리아의 마음은 태평양 바다보다 더 편안해졌습니다.
이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 앞에서 대체 누구한테 가서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은 그 초대가 진정으로 참되다는 것을 진정성 있는 환대로 확증해준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삶의 다양한 순간 우리를 극진히 환대해주십니다.
내 품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내 성찬의 전례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영원한 안식처요 구원의 성채인 가톨릭교회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오늘 하루 우리 역시 주변 동료 인간들을 진심으로, 그리고 극진히 환영하는 환대의 영성을 생활화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환대란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친절, 작은 서비스, 작은 환영과 격려의 말이 환대의 영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 - 우정, 환대, 찬미>
계속되는 가뭄이 안타깝지만 게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부활시기와 더불어 5월의 성모성월은 참 아름답고 싱그러웠습니다.
꽃들도 새들도 많았던 수도원이요, 우리 나라 어디나 하느님 계신 천국처럼 느껴지는 계절이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참 좋고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오늘 5월 성모성월 마지막 날 5월 31일은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고, 내일부터는 6월 예수 성심성월(聖心聖月)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 참 좋아하는 성가 244장이 생각납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 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 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1절만 아니라 4절까지 모두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아름다운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오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제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 미사에 갑작스럽게 케익을 들고 축하차 방문한 분을 반갑게 환대하여 “아, 오늘은 자매님의 방문 축일이기도 하네요.”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반가운 분을 환대할 때면 꼭 그분의 방문 축일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의 두 도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우정과 환대가 참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가난하고 겸손한 찬미의 삶에서 가능했던 우정이요 환대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처럼 힘들 때 언제나 찾을 수 있는 도반은 있으신지요?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듣고 순종한 마리아였지만 심중은 참 착잡했을 것입니다.
서둘러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은 마리아의 모습이 이를 입증합니다.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참 좋은 도반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두 분이 줍니다.
첫째, 우정의 삶입니다.
행복한 삶의 여정을 위해 도반과의 우정은 필수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에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도반이야말로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두분 도반과 같은 관계의 도반이 있으신지요?
부부관계도 이런 영적우정의 영적도반의 관계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참 좋은 선물의 도반입니다.
서로간의 우정에 전제되는 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자매 도반들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관계요 형제 도반과의 우정관계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둘째, 환대(歡待)의 삶입니다.
마리아의 영적도반이자 영적우정의 사람, 엘리사벳의 마리아 환대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이미 태중의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우정도 함께 시작됨을 봅니다.
하느님의 섭리 은총이 참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환대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 아름다운 환대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말 한마디 천량빛을 갚는다 했습니다.
엘리사벳의 환대는 마리아에게는 그대로 눈물 겹도록 고마운 위로의 구원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우정과 환대일 때 진짜 도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분 도반 사이의 신뢰와 사랑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엘리사벳의 환대가 참 극진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과연 환대에 충실한 우리의 삶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셋째, 찬미(讚美)의 삶입니다.
엘리사벳의 우정의 환대에 감격한 마리아의 즉각적 응답이 저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성모님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저녁 성무일도 끝무렵에 바치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찬미의 모범입니다.
아니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생래적 특징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느님 창공을 자유롭게 날게하는 영혼의 양 날개가 찬미와 감사입니다.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찬미와 감사의 사람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더불어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오늘 마리아의 노래 전반부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의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고, 후반부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대표적 노래가 바로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이 바치는 찬미 감사가로 이런 찬미와 감사의 고백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순수한 마음과 더불어 가난과 겸손의 영성을 깊이해 줍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둔 가난한 아나뷤의 전형적 모범이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은 마리아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찾는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 모두에 대한 위로와 격려이기도 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딸 시온이요 이스라엘이요 예루살렘입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하느님 중심의 찬미의 삶에 쏟아지는 축복이 참 놀랍습니다.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하느님 찬미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영혼이 육신에 끌려가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갑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제목이기도 합니다.
또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성서에 얼마나 많이 반복하여 나오는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과 더불어 우정과 환대, 찬미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의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 모두 우정의 삶, 환대의 삶, 찬미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 12,2-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세기의 만남’을 찾아보았습니다.
냉전의 시기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만남이 주로 있었습니다.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후르시초프의 서기장의 비공식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쿠바의 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중국의 마오쩌뚱 주석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 이후로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85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동유럽은 민주화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18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으로 한반도의 핵전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세기의 만남은 분쟁과 갈등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만남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다면,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할 수 있다면, 폭력이 평화로 변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세기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미리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좋은 기운이 함께 만나니,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옵니다.
엘리사벳의 고백은 우리가 늘 바치는 ‘성모송’의 기원이 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태중에 아들 또한 기뻐 뛰노나이다."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은 성모님은 참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분,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고, 가난한 이를 배불리시는 분께서 나를 복되다 하시나이다."
내가 만나는 이웃의 장점을 찾아 낼 수 있다면, 내가 만나는 이웃의 좋은 점을 칭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
만남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면, 깨달은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희망의 불씨가 될 것입니다.
행복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드러나고, 내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신가요?
그럼 욕망의 불꽃에서 멀어지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축복의 인사를 드렸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것처럼 우리들의 만남이 이렇게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5월 마지막 날입니다.
나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나를 통해서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절망 중인 이웃들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겨울을 보내고 날씨가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서 겨울옷들을 정리했습니다.
세탁소에 맡길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때 제가 했던 행동이 있습니다.
혹시 주머니에 물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주머니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빈 주머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옷에서 손에 잡히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돈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공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돈을 어떻게 써야 더 행복할까요?
많은 이가 자신을 위해 쓸 때 더 행복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해 쓸 때 행복감이 더 오래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위한 마음이 그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 인간은 도저히 혼자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누군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됩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이와의 연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 단절되는 혼자만의 삶보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왜 방문했을까?’라는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친척 언니를 찾아가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는 이날을 특별히 기념할까요?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협력으로써 상대방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라는 것이지요.
앞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 성녀와의 연결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모의 노래’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어떤 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라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죄짓게 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서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처럼, 지금 우리가 연결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 연결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