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행사 뒤에 駐韓외국사절단의 부인회에서 陸여사에게 과도한 경호조치라고 항의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이를 전했고, 朴鐘圭 경호실장은 혼이 났다. 朴실장은 경호과장에 대해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朴실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라도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과잉 검문 검색을 하지 않도록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그해 8월15일 文世光은 국립극장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경호원의 검문을 피했다. 陸여사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陸여사는 대통령과 가족에 대한 과잉경호에 대해서 항상 불만이었다. 어느 날 경복궁에서 陸여사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양지회 주최로 경로잔치가 열렸다. 경호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각하 집무실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노래를 삼가 달라』는 것이었다. 陸여사는 이 지시를 묵살했다.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오니 경호과장이 마중나와 인사를 했다. 陸여사는 『거기서 지시했어요?』라고 했다. 경호과장이 어물어물하니 『그렇게 과잉충성하지 말아요. 집무실에서 들리긴 뭐가 들려요?』라고 쏘아붙였다.
1974년 봄 강원도 춘성군에서 양잠대회가 열렸다. 陸英修 여사가 탄 차가 행사장으로 달리다가 가평군을 지날 때 갑자기 뛰어든 소녀를 치었다. 陸여사는 뒤따르던 농수산부 장관 차에 환자를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陸여사가 양잠대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경찰로부터 『소녀가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陸여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울로 돌아온 제2부속실 金斗永 행정관에게 朴대통령이 問病(문병)을 지시했다. 金씨가 춘천병원에 가서 환자를 만나보니 골절도 내출혈도 없는 가벼운 상처였다. 이 보고를 받은 陸여사는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더라면 평생 가책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고 고민했다는 것이다. 陸여사는 며칠 뒤 그 소녀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했다.
특권을 싫어한 대통령 내외
1974년 6월3일 오후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朴대통령은 陸여사와 함께 모범원호대상자 59명을 만났다. 朴대통령은 중간쯤 서 있던, 월남전에서 火傷(화상)을 입은 金鎭澤씨를 앞으로 불러 냈다. 그는 두 눈만 반짝이고 코와 귀는 형체가 없이 번들거렸다. 대통령은 金씨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옆에 있던 柳根昌 원호처장에게 『성형수술을 할 수 있겠소? 가능하다면 내가 도와주겠소』라고 말했다.
6월6일 朴대통령은 陸여사, 槿惠양, 志晩군과 함께 춘천 소양댐을 구경 나갔다. 대통령은 놀러 나온 시민들과 사진촬영도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갑잔치를 마치고 소풍 나온 이한종씨 가슴에 달린 꽃을 보고 대통령이 『무슨 경사가 있었습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대통령은 『환갑 노인 같지 않게 건강해 보이십니다』라고 했고, 陸여사는 『축하합니다』라면서 李씨와 악수를 나누고 가족과 기념촬영을 했다. 朴대통령은 이날 직접 카메라로 관광객들을 찍어 주었다.
이즘 陸英修 여사는 제2부속실로 올라오는 진정서를 처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사안에 따라 대통령에게 알려 주기도 하고 부속실에서 상황파악을 위한 조사도 했다. 충청도의 한 여성이 陸여사 앞으로 진정서를 올렸다. 요지는, 시골에 와서 고시공부하는 서울 학생을 모든 것을 바쳐 뒷바라지하고 사랑했는데, 합격한 뒤에는 「위자료를 줄 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陸여사는 이 편지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다. 진정서 내용이 사실이었다. 朴대통령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 법관으로서는 곤란하지 않은가』라는 의견을 냈다. 이 사람은 법관 임용이 되지 않아 변호사로 개업했다. 10·26 사건 후 수십 명의 변호사들이 대통령 살해범 金載圭의 변호를 자원했을 때 이 변호사 이름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陸여사가 피살되기 몇 달 전 중앙고등학교 1학년생인 아들 志晩군이 상급생에게 얻어맞고 얼굴이 부어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제2부속실 金斗永 행정관에게 陸여사가 인터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까 지만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물었다면서요?』
『예』
『그런 건 왜 물어요. 모르면 어때?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학교에서 이를 알고 때린 학생을 정학시키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陸여사가 나서서 『제발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은 서울 음대에 재학 중이던 작은 딸 槿暎이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이크로 버스를 내어 주었다. 대통령이 그 버스에 타고 안내원 노릇을 했다. 朴대통령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요사이 아이들이 통 예절이 없어.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면 「근영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텐데,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니…』
1970년대 초 朴正熙 대통령 가족. |
『북한 배를 격침하라』
1974년 朴대통령의 일정을 살펴보면 陸여사 및 가족과 함께 한 행사가 많았다. 6월27일 오후 1시20분 朴대통령은 울산 현대조선에서 만든 유조선 1·2호 명명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자동차 편으로 서울을 떠났다. 陸여사와 槿惠양이 동행했다. 朴槿惠씨는 수년 전 이런 회상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부모님 사이에 앉았습니다. 두 분께서 車中에서 노래를 부르시기 시작했어요. 「두만강 푸른 물에」, 「황성옛터」, 「짝사랑」 들을 함께 부르시는데 화음이 잘 맞았어요. 저는 가운데 앉아 있었으니 스테레오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朴대통령은 1964년에 「금오산아 잘 있거라」라는 유행가를 작사·작곡했다. 가수 朴모씨가 불러 레코드로도 나왔으나 당시 청와대 대변인 朴相吉씨가 판매를 금지시켰다. 대통령의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금오산아 잘 있거라」는 朴대통령이 5·16 직전에 써둔 비장한 詩를 가사로 삼은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달리는 車中에서 존 적이 없다고 한다. 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든지, 스케치를 하든지, 생각을 하든지 했다. 앞자리에 志晩군을 태우고 달릴 때는 뒷자리에서 연필로 그림을 그려 「지만이 뒤꼭대기」라고 써놓기도 했다.
6월28일 울산 현대조선소 영빈관에 머물고 있던 朴대통령에게 徐鐘喆 국방장관이 다급한 전화를 걸어왔다.
『동해상에서 해군 경비정이 북한 해군 함정에 의하여 납치되어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뭐하고 있는 거요? 강릉에 있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북한 배를 격침시키고 우리 배를 끌고 오시오』
전화기를 들고 있는 朴대통령의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이제는 전화 받지 마! 받으면 혼선이 생겨!』
우리 전투기들이 출격하기는 했으나 짙은 안개로 목표물을 찾지 못했다. 해군 함정도 구해 오지 못했다.
『100년 뒤떨어진 근대화를 20, 30년 만에 해치워야』
朴대통령은 이날 10시50분부터 열린 울산 현대조선소 1차 준공식 및 26만t짜리 유조선 두 척의 命名式(명명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한국 중공업건설 역사상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鄭周永 회장은 1972년 3월에 조선소 건설에 착공하면서 아직 도크가 마련되지 않았는데도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시작했다. 조선업의 상식은 도크를 만든 다음에 배 건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경우 도크 건설에 3년이 걸리고, 배 만드는 데 다시 2~3년이 걸린다. 현대는 도크와 조선을 동시에 추진하여 시간을 단축한 것이다.
당시까지 조선공사에서 만든 가장 큰 배는 1만7000t짜리였다. 그 수준에서 26만t짜리 유조선 두 척을 동시에 지으려니 실수와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조선을 다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進水(진수)시키려고 하니 굴뚝을 달지 않은 것을 알았다.
鄭회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으나 도크에 물을 채우는 동안 굴뚝을 설치하라고 했다. 크레인에 굴뚝을 달아서 놓을 높이에 맞춰서 기다리고 있는데 도크에 물을 넣으니 선체가 뜨면서 맞춰진 높이보다 더 올라가 버렸다. 크레인에 매단 굴뚝을 다시 올리느라 법석을 떨었다.
한번은 朴대통령이 26만t짜리 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구경하러 온 적이 있었다. 鄭회장의 안내로 대통령이 船體(선체)의 바닥으로 내려갔다. 이때였다. 갑자기 갑판 위에서 대포를 쏘는 듯한 폭음과 굉음이 터지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애써 표정을 바꾸지 않았는데 경호원들이 갑판 위로 뛰어올라가고 야단이 났다. 알고 보니 수백 명의 작업원들이 대통령이 밑으로 내려가자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일제히 갑판 위를 망치질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울산 현대조선소 준공식 겸 命名式 치사에서 『오는 1977년까지 두 개의 거대 조선소를 더 지어 조선능력을 연간 600만t으로 늘리고, 한 해 수출액의 10%인 10억 달러를 벌어들이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朴대통령은 비전을 항상 수치로 예언하고 이를 초과달성하는 사람이었다. 사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하는 그는 과장과 말장난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朴대통령은 『100년 전 조국의 근대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100년 뒤떨어진 근대화를 20, 30년 만에 해치우기 위하여 정부와 국민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역설했다.
『난 백악관이 싫어』
朴대통령은 이날 오후 울산을 출발하여 오후 3시40분에 포항종합제철소에 도착했다. 朴泰俊 사장이 대통령 가족을 영빈관 「白鹿臺」로 안내했다. 뜰에 나선 朴대통령은 朴사장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집이 왜 하필 흰색이야?』
『한라산 「백록담」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백록담의 白을 생각해서 희게 칠했습니다』
『이 사람아, 미국의 백악관 냄새가 나잖아. 나는 싫어, 백악관이야 뭐야』
朴사장은 머쓱했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포항제철을 시찰한 뒤 무기를 만드는 안강의 풍산금속을 방문했다. 歸京(귀경) 길에 대통령 일행은 추풍령 휴게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수원 민속촌을 경유하여 대통령 일행이 청와대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40분. 申稙秀 정보부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시국상황을 1시간 30분 동안 보고했다. 이어서 金鍾泌 총리와 洪性澈 내무장관과 徐鐘喆 국방장관이 들어와 보고했다. 일요일인 다음날 오후에도 朴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인천갑문과 한국기계공장, 그리고 인천수산시장을 시찰했다.
志晩군의 해운대 캠핑 소동
1974년 7월 말 陸여사는 중앙高 1학년생이던 志晩군을 부산으로 캠핑보냈다. 志晩군은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志晩은 적막강산 같은 청와대에서 갇혀 있다가 친구 집에 가서 놀 때 골목의 사람 소리, 개 짓는 소리 같은 것이 그렇게나 좋았다고 한다.
陸여사는 제2부속실 金斗永 행정관만 志晩군 일행에 딸려 보내려 했으나 朴대통령이 깡패 걱정을 하여 경호원 네 명이 붙었다. 志晩군 일행은 해운대 극동호텔 앞 백사장에 천막을 쳤다. 金행정관이 가보니 백사장에 사람이 보이지 않고 노점상과 행상들의 흔적도 없었다.
金씨가 그날 밤 호텔 뒷골목을 걸어가니 김밥장수 아주머니들이 거기에 쫓겨와 있었다. 金씨가 사정을 물었더니 아주머니들이 『대통령 아들이 왔다고 그래요. 내일 올라간대요』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金씨가 극동호텔 커피숍에 갔더니 朴英秀 부산시장과 柳興洙 부산시경 국장이 나와 있었다. 金씨는 두 사람에게 『잡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柳국장이 해운대경찰서장을 불러 지시하니 금방 백사장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해운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志晩군과 金씨는 진해만의 猪島(저도)에 도착했다. 朴대통령이 먼저 내려와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朴대통령, 陸여사, 志晩군, 그리고 金斗永씨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陸여사가 말했다.
『부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요?』
金씨는 以實直告(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陸여사는 대통령에게 『그 보세요. 제 말이 맞지요. 잡상인들을 쫓아내다니』라고 했다. 화가 난 朴대통령은 인터폰을 들더니 朴鐘圭 경호실장에게 소리쳤다.
『야, 지만이 갈 때 조심하라고 했잖아! 잡상인들을 백사장에서 다 쫓아내고 그게 무슨 짓이야』
金씨가 저녁식사 뒤 경호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니 야단들이었다. 朴경호실장은 鄭仁炯 경호처장과 安載松 과장을 불러 영문도 모르는 두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朴실장은 지만군을 따라갔던 경호실 책임자를 직위해제시키도록 지시했다.
다음날 朴대통령 가족 수행경호관 李相烈씨가 金씨에게 오더니 『각하께서 낚시 가시는데 함께 가자고 하신다』고 했다. 金행정관은 『난 안 간다』고 버티었다. 李경호관이 『이건 각하 명령이다』라고 했지만 金씨는 끝내 가지 않았다. 자신을 밀고자로 만든 대통령이 원망스러웠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잘 이야기하여 직위해제되기 직전의 경호계장을 구해주었다.
金斗永씨는 이렇게 썼다.
<그해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 직전에 朴경호실장은 부하들에게 『해외동포들도 많이 오니까 친절하게 경호에 임하라. 될 수 있는 대로 非노출로 활동하라』고 당부했다. 志晩군 피서 소동으로 직위해제되었다가 살아난 경호관도 그날 국립극장의 경호를 맡았다. 文世光은 바로 그 정문을 통과했다. 그 경호관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가 직위해제된 상태로 근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猪島 별장
朴대통령은 여름에 열흘 정도 휴가를 보냈다. 진해 해군기지 내의 공관을 썼다. 대통령은 낮에는 진해만의 猪島란 섬에 가서 쉬다가 진해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이동 중 해군의 엄호 등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을 본 朴대통령은 1972년 여름 朴鐘圭 경호실장에게 지시했다. 그 섬에 있는 일제시대 목조건물을 개조하여 잘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1973년 여름 朴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진해에 도착했다가 밤늦게 猪島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목조건물은 없어지고 새 돌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일반주택 정도의 크기로서 호화주택 수준은 아니었다. 朴대통령은 새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실장을 불러라』고 했다. 그는 朴경호실장이 나타나자 꾸중을 시작했다.
『집수리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너는 뭘 시키면 꼭 이렇게 하더라. 짐 내리지 마! 도로 나가자』
金正濂 비서실장이 나서서 만류했다.
『오늘 밤은 주무시고 가시지요. 진해 공관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朴대통령 가족이 하룻밤을 머무는 사이 측근들이 구수회의를 했다. 마침 이 섬에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이 와 있었다. 朴대통령이 좋아하는 鄭회장을 앞세우기로 했다. 다음날 朴대통령을 만난 鄭회장은 『각하, 제가 새로 짓도록 했습니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朴대통령도 이해하여 그 뒤로는 이 건물을 휴가 때 썼다. 朴대통령은 鄭회장에게 공사비를 지불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사치스러운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공화당의 중진인 金모 의원은 신축한 자택에 朴대통령을 모셨다가 혼이 난 경우이다. 金의원은 『사실은 저의 형님이 도와주어 지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 형님은 차관 얻어서 집만 지었나?』라고 쏘아붙였다.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이 솔선수범한 勤儉節約(근검절약)은 좀 심한 면이 있었다. 석유파동 이후엔 여름엔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선풍기와 부채로 견뎠다.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선 책상 위 전등만 켜놓기도 했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사람이 들어오면 대통령은 사람을 잘 못 알아보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청와대 직원들도 겨울엔 난방기를 잘 틀어 주지 않아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 물과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추위와 싸웠다.
마지막 휴가
朴대통령과 陸여사는 1974년 7월26일 금요일 휴가를 떠났다. 일행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진해 해군기지 내 대통령 공관에 이른 것은 오후 4시50분. 해군 함정을 타고 猪島 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45분이었다.
다음날 대통령 일행은 옥포 지역을 함상순시했다. 7월28일 일요일 해운대에서 캠핑을 하고 난 志晩군이 내려와 합류했다. 8월2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8월4일 그는 함정을 타고 거제도 해금강 일대를 돌아봤다. 대통령은 8월6일엔 해군장병을 위한 오찬을 베풀었다.
8월7일 朴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오후 4시35분에 청와대로 돌아왔다. 申稙秀 중앙정보부장이 서재로 대통령을 찾아와 1시간40분간 보고했다. 이어서 金鍾泌 총리가 오후 8시에 와서 늦은 업무보고를 했다.
진해 猪島에서 朴대통령 부부는 유달리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가족경호를 맡았던 李相烈 수행과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두 분이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니시는데 저는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날따라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거예요. 두 분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나는 뒤에서 따라가는데 각하께서 「황성옛터」를 부르시더군요. 영부인도 따라 부르시는데 가사를 잘 모르시니 각하께서 리드하시고….
그렇게 물가에 가시더니 두 분이 「야호」 하고 소리치시더라고요. 「아, 동심으로 돌아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한참 계시다가 돌아오시더라고. 돌아오시면서도 옛날 노래 「노란 샤쓰」 등을 불렀습니다. 휴양 오셨을 때 그렇게 다정했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달빛도 있으니 얼마나 분위기가 좋아요』
文世光, 검문 받지 않고 들어오다
文世光은 자리에서 뛰어나와 7.5초 사이에 세 발을 쏘고 붙잡혔다. 이 사진은 마지막 총격을 가한 직후 체포되기 직전의 文이다. (뉴욕타임스紙 폴 B.로저스 사진) |
文世光(문세광)은 1974년 8월15일 오전 7시 조선호텔에서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 주세요. 도착은 오전 9시입니다』
文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40분에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車中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 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文은 또 왼쪽 옆구리에 손을 넣어 숨겨둔 권총의 공이치기를 위로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가 된다.
정각 오전 9시 文世光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 주었다. 중절모를 쓴 文世光은 기사가 공손히 절을 하는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文은 왼쪽 현관을 통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선발 경호원 3명, 경찰관 8명이 근무 중이었다. 文은 비표도 없이 통과했다. 중절모를 쓰고 으스대는 文의 모습을 본 경호원들은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그 뒤 조사에서 『3·1절 행사 때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날엔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변명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온 文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고 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통로에 카펫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朴대통령이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펫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장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다가는 경호원의 검문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10여 명이 한 곳에 모여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文은 가만있으면 자신이 검문을 받을 것 같아서 먼저 경호원에게 다가가서는 『우시로쿠 일본대사와 스즈키氏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느냐』고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경호원은 당황하여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文世光은 『극장 로비는 여기뿐인가요』라고 재차 일본어로 물었다.
경호원은 대충 『2층에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경호원은 文을 2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文은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하면서 1층으로 되돌아왔다. 경호원은 다른 간부 경호관에게 文을 인계했다. 경호원은 『저분은 일본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인계받은 경호관은 文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나타났다. 경호관은 文의 팔을 잡고는 기둥 뒤로 데리고 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文은 朴대통령이 입장하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약 10분 더 로비에서 머물렀다.
文은 다시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대통령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근무자는 文의 입장을 묵인하는 표정을 지었다. 文이 로비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니 출입구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그를 제지했다. 文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댔다. 일본어를 모르는 출입구 근무자가 로비 근무자를 바라보니 그는 無표정이었다. 출입구 근무자는 이를 들여보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극장 안으로 들어온 文을 안내하여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혔다. 朴대통령은 연설 중이었다.
魔彈의 射手
피격 前과 後의 단상. 사진 아래는 아내의 신발을 줍는 朴대통령. |
文世光은 국립극장 맨 뒷줄에 약 10분간 앉아 朴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저격을 결심하고 허리춤에 질러 두었던 권총을 뽑아 배 밑으로 옮기는 순간 젖혀 두었던 공이치기가 격발되어 한 발이 발사되었다. 「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총탄은 文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이때의 녹음 테이프를 들어 보면 朴대통령의 연설 사이로 「퍽」 하는 소리가 잡히지만 연설은 계속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때 朴대통령은 북한 측에 대해서 불가침조약을 제의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하는 순간 「퍽」 소리가 난다. 文은 허벅지에 오발을 하자마자 놀라서 복도에서 안으로 세 번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하여 뛰어갔다. 통로 쪽 자리엔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文을 제지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퍽」 소리가 난 뒤에도 6초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녹음테이프를 들으면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이라고 할 때 달려가는 文을 본 청중의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탕」 하는 제2탄 발사음이 들린다.
이 총탄은 朴대통령이 연설하던 演臺(연대)를 맞추었다. 文은 6초 동안 11.85m를 뛰어와서 20m 떨어진 朴대통령을 향해서 쏜 것인데 맞히지 못했다. 文은 제3탄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제4탄을 쏘려고 하니 朴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방탄연대 뒤에서 몸을 낮추어 버린 것이다. 文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18.2m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를 향해서 쏘았다. 총탄은 陸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文은 제5탄을 쏠 때 청중 이대산씨가 발을 걸어 넘어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연단 위 태극기에 맞았다. 文은 넘어진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文은 자리에서 뛰어나와 6초 만에 제2탄을 쏘았고, 7.5초 때 제5탄을 쏘고 잡혔다. 1.5초 사이에 세 발의 총성이 들렸다. 연발사격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놓고 경호의 실수를 미세하게 따져 나가면 현실의 긴박감과 유리되어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朴鐘圭의 행동 비판
文이 총을 들고 단상을 향하여 뛸 때 가장 먼저 대응자세를 취한 사람은 朴鐘圭경호실장이다. 그는 일어서더니 권총을 뽑아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온다. 그가 일어선 것은 文이 제1탄을 쏘아 「퍽」 소리가 난 지 4.5초 때였다. 그는 범인을 향해서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오는데 관중석에서 단상으로 보내는 조명에 눈이 부셨다. 표적을 잃은 것이었다. 朴실장의 행동에 대해서 1998년 청와대 경호실이 펴낸 사례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경호실장이라면 범인에 대한 응사가 主가 아니라, 피경호인 朴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연대로 나와 피경호인의 머리를 숙이게 조치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朴대통령이 스스로 연대 뒤에 몸을 숨긴 시기는 2탄이 연대에 맞은 후이거나, 3탄이 불발된 이후이기 때문에 범인이 제2탄을 정확히 사격했거나, 3탄이 불발되지 않았더라면 朴대통령 저격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98년 경호실의 사례연구서는 陸여사 피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범인이 대통령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하기 위하여 통로를 달리면서 총을 쏘는 상황인데도 통로 좌우측에 앉아 있던 경찰근무자들은 아무런 경호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총을 쏘는 범인을 밀어 넘어뜨리거나 정조준을 할 수 없도록 범인의 몸을 건드리기만 했어도 陸여사는 머리에 총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던 12명의 경찰관들은 무엇 때문에 행사장에 와서 앉아 있었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행사교육이나 우발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상에는 후미 근무자 2명을 제외한 5명의 근무자가 있었지만 범인이 고함을 지르면서 단상 쪽으로 뛰어나오며 사격을 하는 상황인데도 단상 좌우 측의 근무자들은 朴대통령이나 陸여사를 방호하러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朴鐘圭 경호실장이 뛰어나온 시점에 단상 근무자들이 행동을 취하여 피경호인을 방호하면서 머리를 숙이게 했더라면 陸여사는 생존했을 가능성이 컸다.
단상의 수행요원들은 범인이 연대를 맞힌 이후에야 행동을 취했으나 陸여사를 방호하려고 달려가던 경호원은 陸여사의 뒤쪽으로 숨고 말았다. 이는 경호원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文世光의 朴正熙 저격 및 陸英修 사살 사건은 공식행사 도중에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생중계 중에 일어났기 때문에 가장 상세히 기록되고 목격된 암살사건이 되었다. 수사도 완벽하게 이뤄져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이다.
요사이 일부 방송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을 보면 수사 전문가들이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주로 음모설을 제기한다. 이들은 사건의 전모를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극히 부분적인 점(그것도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니 이상하지, 전문가 눈으로는 하등 이상할 게 없다)을 아마추어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황당한 상상을 하고 있다.
투명하게 목격되고 수사된 사건
당시 장면을 담은 텔레비전 중계 필름을 한 번 더 보자.
<이날 식장은 무대 위로만 조명이 쏟아졌고 객석은 어두웠다. 文이 쏜 제2탄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단상의 朴鐘圭 경호실장은 이상한 움직임(文이 뛰어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듯 고개를 빼며 왼손에 종이뭉치를 든 채 일어섰다. 세 번째 총성(이것이 陸여사 명중탄)이 울릴 때는 무대 맨 앞으로 뛰어나와 종이뭉치와 권총집을 떨어뜨렸다. 네 번째 총성이 울릴 때는 오른손에 권총을 거머쥐고 총소리가 나는 곳을 겨냥한다.
이때 朴실장의 위치는 文이 총을 쏜 곳과 陸英修 여사를 잇는 線(선)에서 약간 왼쪽으로 비낀 곳이었다. 네 번째 총성과 동시에 여러 사람이 몰려들어 文을 제압하자 朴실장은 겨누었던 총을 거두어 들였다.
단상 위의 요인들은 총성이 울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지듯 몸을 낮추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 뒤로 숨는 사람도 있었다. 陸英修 여사의 동작이 가장 늦었다. 세 번째 총성이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오른쪽으로 몸을 낮추려고 고개를 숙인 듯하던 陸여사는 뒤쪽으로 급히 고개가 젖혀졌다(이때 머리에 총탄을 맞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왼쪽으로 머리를 떨구었다(注: 여기서 왼쪽·오른쪽은 단상을 바라보는 視点 기준).
文世光이 체포된 직후 또 한 방의 총소리가 울리고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壇上(단상)의 한 경호원이 뒤늦게 객석을 향해 쏜 총알이 합창단원으로 앉아 있던 D열 86번의 張峯華(장봉화·당시 18세. 성동여실高 2학년)양을 맞혀 절명케 하는 순간이었다.
이 총소리 직후 벽면을 비추던 방송은 「지지~」 하는 소리와 함께 중단된다. 경호원들은 무대 위에서 권총을 뽑아 들고 演臺(연대) 뒤로 숨은 대통령을 경호한다. 객석의 하객들은 의자 밑으로 숨느라고 아우성을 친다. 이때 독립유공자석에 앉아 있던 卓금선 여인이 『국모님이…』라고 소리치며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가 陸英修 여사를 안아 일으킨다. 陸여사는 卓여인과 경호원들에 의해 들려 나가고 張峯華양과 저격범 文도 밖으로 들려 나간다>
朴대통령 가족 경호 담당인 李相烈 수행과장은 이날 국립극장 단상 뒤에 쳐진 커튼의 뒤에서 근무 중이었다.
『「와~」 하고 소리가 나서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니 文世光이 달려오면서 총을 쏘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연대쪽으로 뛰어나가 보니 각하께선 오른쪽으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으켜서 연대 뒤에 쪼그리고 앉도록 했지요. 대통령께서는 「야, 우리 집사람에게 가봐」라고 하시더군요. 순간적으로 무슨 예감이 드신 듯했어요』
녹음 테이프에선 이런 소리가 들린다.
〈『가만 계세요』(경호원이 연단 뒤에 숨은 대통령에게)
『가만히 계세요』(대통령에 대한 경호원의 당부인 듯함)
『잡았니?』(대통령의 물음인 듯함)
『예』(경호원의 답변인 듯함)
『사모님이…』(경호원의 말인 듯함)〉
이 직후 「탕」 하는 소리가 나고 여자들의 비명이 들린다. 뒤늦게 경호원이 쏜 총탄에 합창단원 張양이 맞는 장면이다. 이 총격은 文世光을 체포하는 소란 속에서 일어났다. 文이 마지막 총탄을 쏜 지 15초 뒤였다. 이 총격의 주인공인 金모 경호원은 1998년 경호실 보고서 작성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는 단상의 휘장 뒤편에서 경호에 임하고 있었다. 「탕」 하는 총소리와 군중의 함성을 듣고 휘장을 헤치고 무대로 나왔다. 文世光이 통로 중간쯤에서 단상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보였다. 朴鐘圭 실장의 권총에서 나는 두 발 정도의 총소리를 듣고 범인을 향해서 실탄을 발사했다.
잠시 후 범인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내가 쏜 실탄에 의해 제압된 것이라고 오해했다(실제로는 시민이 발을 걸어 넘어뜨려 잡혔다). 가늠쇠를 보고 발사할 수는 없었다. 정확한 사격이 되지 않아 범인제압에 실패하고 참석자를 희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한이 된다』
모든 것이 순간적이었다. 文世光이 네 발을 쏘고 붙들릴 때까지는 8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사이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事後에 설명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金경호원이 총을 쏘았을 때는 文이 붙잡힌 뒤였는데도 그는 자신의 총격에 文이 맞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시 텔레비전 필름을 본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2분 만에 演臺 위로 朴대통령이 몸을 드러내자 장내에서는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전 10시26분20초, 朴正熙 대통령은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러분,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 당황하거나 겁먹은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10여 초간 아무 말 없이 연설문을 바라보던 朴대통령은 중단했던 기념사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 『다시 한 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의 기본원칙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그 원칙의 첫 번째는…』라면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연설을 재개한 지 4분40초쯤 지나면서부터 朴대통령은 조금씩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설문만 향하던 눈길을 거두어 객석을 이따끔 쳐다보았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기도 했다. 꼿꼿하던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횟수가 많아졌고 말을 빨리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읽은 곳을 다시 읽어 가볍게 더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도 두 군데 있었다. 연설문을 건너 뛰어서 읽거나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실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연설문을 다 읽은 朴대통령은 『감사합니다』라면서 연대 뒤로 한 발 물러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의자로 되돌아가던 朴대통령은 밑에 떨어진 陸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梁鐸植 서울시장이 재빨리 몸을 숙여 고무신과 핸드백을 먼저 주워 경호원들에게 건네 주었다. 의자에 앉은 朴대통령은 曺相鎬 의전수석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장내 아나운서의 말에 따라 성동여자실업高 학생들이 일어나 광복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동요된 표정 없이 노래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선 朴대통령은 3부요인 등과 악수를 나누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朴대통령이 퇴장하자 절대금연인 객석 여기저기에서 뽀얀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장내 아나운서는 『지금 퇴장할 수 없으니 잠시 자리에서 기다려 달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청중들은 오전 10시50분부터 한 사람씩 몸 검색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이날 외국기자 다섯 명이 현장에 있었다. 많은 편이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고 있었고, 朴대통령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란 소문이 돌아 서울과 도쿄 특파원들이 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돈 오버도퍼 기자(워싱턴 포스트)는 『그날 내가 가장 놀란 것은 文世光의 총격이 아니라 朴대통령이 연설을 再開한 것이다. 아내가 총에 맞고 실려 나갔는데도 연설을 계속하다니, 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우리 미국인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이해도 가질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朴대통령의 공인다운 태도를, 미국인들은 인간으로서의 冷血的(냉혈적)인 모습을 느꼈던 것이다.
『객석에다 쏘면 시민이 다치잖아』
陸英修 여사가 서울대학병원으로 실려 가고 공식행사가 끝난 직후, 국립극장 극장장실에서는 침통한 대화가 오갔다. 극장장실에는 朴대통령을 위시하여 丁一權 국회의장, 閔復基 대법원장, 金正濂 비서실장 등이 배석했다. 朴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용을 좀 설명해』
『…』
좌중에는 침묵만이 흘렀고, 대통령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장장실 입구 바로 앞에 朴鐘圭 실장이 멍하니 서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하늘만을 응시한 채 누가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누가 와서 대통령의 말을 전해도 말이 없었다.
『각하께서 상황 설명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
대통령은 몹시 궁금한 듯 다그쳤다.
『뭘 좀 알아봤나?』
한 비서관이 말했다.
『알아본 것은 없지만 궁금하시다면 저라도 본 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말해 봐』
『첫 번째 총성이 울리자, 단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피하고 朴鐘圭 실장이 뛰어나가 즉시 응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각하의 허리춤을 잡아 연설대 밑으로 피하게 한 다음, 영부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대통령은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영부인의 안부는 묻지도 않고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객석은 어두워 잘 안 보일 텐데 그곳에다 쏘게 되면 시민들이 다치잖아』
『응사 시에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영부인은 아마 지금쯤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 행사장으로 갑시다』
朴대통령의 다음 행사장, 즉 지하철 개통식으로의 이동 지시가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만류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역사에 보면 오스트리아 황태자 살해 사건 때도 암살조가 세 팀이 있었습니다. 제1조가 던진 폭탄이 황태자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되자, 제2조가 다른 장소에서 결국 황태자를 살해하지 않았습니까. 측근의 만류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두 번째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결국 폭탄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부하들은 제2의 암살조가 또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가면서 진언을 했다.
朴대통령은 그런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질 않았다.
『일단 일정이 잡힌 공식행사이니만큼 가봐야 되지 않겠는가』
『각하께서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시고, 지하철 개통식에는 丁一權 국회의장이 대신 참석하는 게 좋겠습니다』
목표물이 대통령이니만큼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도 개통식에 가봐야지』
그러면서 대통령은 자동차에 올랐다가 망설이듯이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집사람이 걱정되니까 내 대신 丁의장께서 참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李龍澤 당시 수사국장의 증언
文世光 사건 수사 책임자가 되는 정보부 李龍澤 수사국장은 8월15일 새벽에 골프장으로 가기 위하여 일어났다. 잠자리에 있던 아내도 일어나더니 『꿈이 이상합니다. 앉아서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라고 했다. 꿈 이야기가 심상치 않았다. 陸여사가 소복을 입고 한 소녀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더란 것이었다. 陸여사가 소복을 입었다면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李국장은 골프 약속을 취소하고 남산의 수사국으로 출근했다. 당직자에게 간밤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그는 수사국 요원들을 비상대기 상태로 놓았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텔레비전을 보다가 총성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뛰어나오면서 부국장실의 문을 여니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야, 이 사람들아, 놀아도 텔레비전은 틀어 놓고 해야지. 지금 8·15 행사장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출동하자』
李국장은 과장을 태우고 국립극장으로 달리면서 본부에 지시했다.
『방송사에 연락을 해서 국립극장에서 찍은 장면은 방영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라』
李국장이 국립극장장실에 들어가니 朴대통령이 침통하게 앉아 있었고, 朴鐘圭 실장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李국장이 보니 대통령의 양복 어깻죽지에 검은 물방울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그곳을 만져 보았다. 피였다. 아마도 총탄이 陸여사의 머리를 관통할 때 튄 피 같았다.
李국장이 들으니 범인은 체포되었다가 오발로 다친 허벅지 치료 때문에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李국장이 국립의료원으로 가는 車中에서 라디오를 들으니 『범인은 일본인이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국립의료원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경호실 정보처장이 범인의 여권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李국장이 받아서 뒤져 보니 여권과 함께 외국인등록증이 나왔다. 여권은 「요시이 유키오」 이름으로 되어 있었으나, 외국인등록증엔 文世光으로 적혀 있었다. 경호실에선 여권 이름만 보고 일본인이 범인이라고 기자들에게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경호처장은 『일본인이 아니네』라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李국장은 응급실로 들어갔다. 의사들이 文世光의 오발로 관통당한 허벅지를 붕대로 감고 바지를 입히고 있었다. 범인은 얼굴과 몸이 퉁퉁한 好人型(호인형)이었다. 李국장이 일본말로 이야기했다.
『아나다 조센진데쇼. 우소와 다메다(당신은 조선인이지. 거짓말은 안 돼)』
『하이』
李국장은 陸여사가 수술을 받고 있던 서울대학병원으로 갔다. 朴대통령은 전용 입원실에 있었다. 李국장이 범인은 在日한국인이라고 보고하니 朴대통령은 『허, 또 우사(창피당)하게 생겼구나』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朴鐘圭 실장을 향해서 『어떻게 범인이 일본인이라고 나갔나』라고 추궁하더니, 『앞으로 수사는 정보부가 맡아서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李국장은 陸여사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과 文이 오발한 권총탄알을 현장에서 직접 찾아냈다. 陸여사의 머리를 꿰뚫은 총알은 떼구루루 굴러 무대 휘장 뒤로 갔기 때문에 찾는 데 애를 먹었다. 文의 오발탄도 접는 의자에 끼여 있어 겉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정보부는 文世光의 진술을 받아 일본 경찰에 알려 주고 보강수사를 부탁했다. 李국장이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文世光이 몇 번이나 『인천이 어디 있는가』라고 수사관에게 묻던 점이었다. 『왜 묻는가』라고 추궁했으나 文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측에서 文에게 암살에 성공하면 반드시 구출해 주겠다고 약속한 모양입니다. 인천이 그런 목적의 접선장소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文은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朴鐘圭 경호실장에 대한 신문은 李龍澤 수사국장이 집을 찾아가 직접 했다. 朴실장은 文世光의 제1탄(허벅지를 관통한 오발탄)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을 때 電球(전구)가 터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文이 통로를 달려나오는 것을 보고 朴실장은 왼손에 들고 있던 프로그램 종이를 떨어뜨리고는 오른손에 든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젖혔다. 그가 文을 향해서 쏘려고 하는 찰나에 단상을 향해 비추던 조명이 눈을 부시게 해 표적을 잃어버렸다. 朴실장은 한 방을 쏘긴 했는데 청중이 다칠까 봐 총신을 올려 발사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여중생을 죽게 한 총알은 다른 경호원이 쏜 것이었다.
李龍澤 국장은 朴실장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서 국립극장 안의 조명을 사건당일과 같이 재현해 놓고 단상에 서 보았다. 과연 눈이 부셔 조준사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李국장은 朴실장의 권총을 압수하고 그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과 대조했다고 한다.
5·16 혁명 당일 시청 앞의 朴正熙 소장. 오른쪽은 車智澈 대위, 왼쪽은 朴鐘圭 소령. |
『나는 자칼이다』
金淇春 검사(前 법무장관)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파견 나가 정보부장 보좌관을 맡고 있었다. 文世光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8월 초순 金淇春 검사는 가족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갔었다. 휴가지에서 金검사는 막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소설 「자칼의 날」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文世光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申稙秀 정보부장은 8월16일 金淇春 검사를 불렀다.
『범인이 어제부터 서른 시간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내가 청와대 대책회의에 나가서도 할 말이 없다. 金검사가 범행 동기와 배후를 캐내어 보라. 나를 비롯한 간부들이 오늘은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겠다』
文은 링거주사를 맞으면서 남산 분실 수사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金검사는 일본어 통역을 옆에 앉히고 文과 대면했다. 金검사는 수사관의 제1성이 범인의 진술을 얻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곰곰이 생각해 둔 질문을 던졌다.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지요.
『읽었습니다. 센세이(先生)도 읽었습니까』
―나도 읽었소. 그런데 당신이 바로 자칼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자칼입니다』
실마리가 잡히자 대화는 차츰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사상이 무엇인가.
『나는 공산주의를 신봉합니다. 나는 공산혁명을 이룩하려는 한 수단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혁명가답게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라. 왜 비겁하게 말을 하지 않는가.
『알았습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권명 요시이 유키오는 누구인가.
『여자친구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입니다』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여권은 어떻게 마련했나.
『요시이 미키코가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호적등본 등 인적사항 서류를 제공해 주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권총은 어디에서 났는가.
『오사카 고츠(高津) 파출소에서 훔쳤습니다』
―누구의 지시로 훔쳤는가.
『조총련 오사카 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金浩龍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1973년 11월11일 홍콩 여행 중 권총을 구입하라는 명령과 함께 金으로부터 50만 엔을 받았습니다. 1974년 2월 초순의 어느 날 밤 10시쯤에 「朴正熙의 암살은 8·15 기념식 행사 때 하기로 한다. 이를 위한 사전준비로 현재 관여하고 있는 金大中 구출위원회 등의 모든 조직활동에서 손을 떼라. 도쿄 아다치(足立)에 있는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가와가미(川上勇治)란 이름으로 입원해라. 입원비는 조총련이 담당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1974년 2월12일부터 3월11일까지 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 金浩龍으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
―만경봉號에 탄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1974년 5월3일 밤 10시쯤 金浩龍의 지시로 한 시간 가량 승선하였습니다』
―만경봉號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배 식당에서 47세 가량의 북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金검사는 文世光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文이 머물렀다는 만경봉號 내부와 고츠 파출소의 내부 모습을 그리게 했다. 文은 의외로 그림솜씨가 있었다.
일본 경찰의 非협조
범행 배후를 밝히면서도 文은 당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국가원수를 저격한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도 전혀 죽음을 예상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文은 이따금 『밖은 괜찮으냐』란 질문을 했다. 그때까지도 文은 범행을 하고 나면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세력이 자기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金검사가 文으로부터 받아낸 진술은 곧 신문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기자들의 관심은 요시이 유키오와 요시이 미키코 부부, 그리고 金浩龍으로 쏠렸다.
8월16일 오후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를 여권법 및 출입국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요시이 미키코가 1973년 11월 초 같은 방법으로 남편 명의의 여권을 文世光에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해 11월19일 이 여권을 사용한 文世光과 함께 2박3일간 홍콩 여행을 간 사실을 밝혀 냈다.
8월18일 오후 배후 인물 金浩龍은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 西지부 사무실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가졌다.
『文世光과는 1972년 9, 10월경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배포하던 중 그의 집 앞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文을 만난 것은 모두 세 번이며, 1974년 7월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文에게 암살지령이나 거사자금을 전달한 사실은 없다. 요시이 부부와는 면식조차 없다. 일본 경찰이 이 사건과 관련, 직접 찾아오거나 출두요청을 해오더라도 (나는) 응하지 않겠다』
초기엔 일본 경찰도 범인이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한국의 대통령을 저격한 것 때문에 나름대로 수사에 열을 올렸다. 한국 측이 文世光의 배후세력으로 조총련을 지목하자 일본 수사당국은 非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게 된 데는 당시 金大中씨를 납치한 것으로 알려진 중앙정보부가 文世光 사건을 맡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文世光 사건을 수사했던 전직 정보부원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경찰에서 金大中씨 사건과 관련한 협조 의뢰 문서를 보내오면 우리는 무조건 「잘 알 수 없음」이라는 회답을 보내곤 했습니다. 주권이 침해당했다고 시끄러웠던 일본으로서는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 측은 그 앙갚음을 文世光 사건 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도가 점점 심해져 「文이 미키코를 만났다는 다방이 오사카 ○○지역에 있다는데 시실인가」라고 물어도 「네 시간 동안 찾아보았지만 잘 모르겠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우리가 직접 확인해 보니 찾기 쉬운 곳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文世光, 殺意의 탄생
文世光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사카 이쿠노區는 在日교포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으로 도시빈민층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文世光은 일찌감치 민족차별 문제에 눈을 떴을 것이다. 文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때였다. 文은 과격파에 속했다.
난조 세쿠오(南條世光: 문세광의 일본 이름)는 고교 시절 사회과학연구회의 멤버였다. 그가 고바야시 미키코(小林美喜子·요시이 미키코의 처녀 때 이름.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한 후 요시이 미키코가 되었다)를 만난 것은 이 서클에서였다. 여고 재학 시절의 미키코도 文世光 못지않은 운동권이었다. 미키코는 일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고 시절에 같은 반 친구들은 文과 내가 꼭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내게는 그가 첫사랑이지요. 상대가 한국 사람이니까 집에서 반대하더냐구요. 실은 그 반대랍니다. 내가 결혼할 것을 바라면 文은 「결혼은 한국 여성과 하겠다」고 단호히 말했어요』
고교를 중퇴한 文은 1968년부터 民團(민단) 이쿠노 지부에 가입해 韓靑(한청)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의 文은 말수가 적었고 무정부주의적인 성향도 있었다. 1971년 도쿄 民團에서 분란이 일어나자 文은 非주류파에 가담해 행동을 했다. 1971년 8월 民團 도쿄본부 습격사건 때는 선봉으로 참여해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다. 文이 左派(좌파)로 기운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해 9월3일 조총련계 청년조직 朝靑과 민단계의 韓靑은 오사카의 페스티벌 홀에서 「7·4 공동성명을 지지하는 在日동포 오사카 청년학생 공동대회」를 가졌다. 韓靑 소속이던 文은 조총련 오사카 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을 여기서 만났다.
文世光 사건에 관한 검찰 공소장과 법원(1심) 판결문은 文과 金浩龍의 관계를 소상히 적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첫 만남 이틀 후인 1972년 9월5일 밤 10시쯤 金浩龍은 文世光의 집을 방문, 『같은 민족끼리 정치이념을 초월하여 자주 만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후 매월 한두 차례씩 만날 때마다 金은 『북조선은 金日成 주석의 주체사상 아래 모든 인민이 단결하여 잘 사는 사회를 이룩하고 있다. 반면 남조선의 경제는 일본 자본에 수탈당하고 있으므로 민생고가 날로 심해 가고 있다』는 교양을 했다>
1973년 8월 金大中씨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9월 초 일본에서는 「金大中 구출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에 가입한 文은 오사카 주재 한국 총영사관을 점거하고 영사관 직원을 인질로 삼아 金大中씨와 교환할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文은 反韓운동가로 나선 것이다. 文世光에게 朴대통령에 대한 殺意가 싹트게 만든 것은 金大中 납치사건 이후 일본을 휩쓸던 反韓 분위기였다.
옛 애인과 부부로 가장, 홍콩으로
정보부의 조사과정에서 文은 1973년 10월 하순 자신의 집을 찾은 金浩龍과 이런 약속을 했다고 진술했다.
「朴대통령 저격장소는 삼일절 기념식장으로 한다. 무기는 권총으로 하되 출처를 숨기기 위하여 제3국에서 購得하기로 한다. 무기 구입 자금은 金浩龍이 조달하고 무기 구입은 혁명정신에 입각하여 文世光이 직접 한다」
이 무렵 文과 그의 첫사랑 미키코는 각자의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文은 한국 여성 姜成淑과 결혼하였고, 미키코는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하였다. 文과 미키코는 연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973년 10월 하순 어느 날 정오 오사카 天王寺驛 근처 에코호텔 지하 다방에서 文과 미키코가 만났다.
文은 『한국의 공산혁명을 성공시키려면 朴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며 『권총을 구입하기 위해 홍콩에 가야겠는데 나는 韓靑과 金大中 구출위원회 활동 등으로 인해 한국대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기 어렵다. 당신 남편 이름으로 일본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키코는 文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대답하고 『부부로 가장하여 함께 홍콩에 가자』는 文의 제의에도 동의했다고 한다.
1973년 11월11일 金浩龍은 文을 찾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50만 엔을 주었다. 다음날인 文은 한큐여행사를 찾아가 요시이 유키오의 서류에 자신의 사진을 첨부해 제출하며 여권 작성을 의뢰하였다. 11월17일 文은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단수여권을 발급받았다.
11월19일 부부로 위장한 文과 미키코는 오사카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에 도착했다. 이날부터 두 사람은 홍콩과 구룡반도 일대의 고물 시장, 장물 시장, 총포점 등을 돌아다니며 권총 구입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날인 11월18일부로 남긴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일본 오사카 경찰 발표).
「올해(1973년)는 朴정권이 金大中씨 사건으로 붕괴의 시기에 있어 11월의 유엔 총회가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일인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구호 밑에서 혁명전쟁의 여행을 출발한다」
일본 경찰에 따르면 文은 홍콩을 거쳐 한국에 들어갈 예정으로, 서울의 한 호텔을 예약해 놓고 홍콩으로 떠났었다고 한다. 文이 서울行을 포기한 것은 홍콩에서 무기 구입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文을 조사했던 전직 정보부 요원은 『우리는 文과 미키코가 불륜의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文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키코와는 혁명적 동지 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 文의 진술이었다』고 말했다.
만경봉號에서 만난 북한공작원
11월 하순 文은 다시 金浩龍을 만났다. 文은 「홍콩여행에서 권총 구입에는 실패하였으나 해외여행의 경험을 체득하였고, 불법여권 사용에 성공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金은 『앞으로 계속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1974년 정초가 되자 金浩龍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韓德銖 조총련 중앙본부 의장이 혁명과업 수행을 위하여 가일층 노력하라는 당부와 함께 정초 선물을 보내왔다』며 인삼주 한 병과 과실주 한 병을 내놓았다.
1974년 2월 초 金이 또 文의 집을 찾아왔다. 金은 『朴正熙 암살은 8·15 기념식행사 때로 하라. 앞으로 이 계획에 전념하기 위해 韓靑과 金大中 구출대책위원회 등의 모든 조직활동에서 손을 떼라』는 지시를 내렸다. 金은 또 『도쿄 아다치(足立) 소재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십이지장궤양을 구실로 1개월간 입원하라. 입원방법은 병원장을 찾아가 가와가미 유지(川上勇治)라고 말하면 된다. 병원 비용은 우리가 댄다』고 말했다.
입원한 文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하였다. 3월11일까지 입원해 있는 동안 文은 金浩龍으로부터 입원비로 16만 엔, 생활비로 85만 엔, 잡비로 5만 엔을 받았다.
5월3일 金浩龍은 文에게 『4일 밤에 오사카港에 정박 중인 만경봉號에 승선하라』고 지령했다. 4일 밤 9시경 文은 金浩龍이 보낸 사람(성명 미상)의 안내로 15명의 조총련계 교포와 함께 만경봉號에 탔다.
한 시간 가량 船內에서 대기한 文은 밤 10시쯤 선박 안 식당에서 47세 가량으로 보이는 북한인을 만났다. 文은 북한인으로부터 『그동안의 영웅적 사업은 이미 보고를 받아서 잘 알고 있다. 혁명정신과 투쟁경력에 치하를 보낸다. 현 시점에서 남조선의 공산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朴正熙를 암살하는 길밖에 없으니 이 과업을 끈기 있게 수행해 주기 바란다』는 지시를 받았다.
6월 말 文은 요시이 유키오의 집 부근 다방에서 요시이 부부를 만났다. 먼저 요시이 유키오가 『내가 북조선에 가게 되었는데 여권 신청을 하면 당신이 홍콩여행할 때 내 명의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난다. 걱정이다』는 말을 했다.
文은 『나는 이번 8·15에 朴正熙를 암살해야 한다. 당신의 북조선 방문을 다음 기회로 연기하고 이번에도 당신 명의의 여권으로 남한에 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키오는 文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7월 초 文은 범행에 사용할 총을 오사카 南경찰서 고츠(高津) 파출소에서 훔치기로 했다. 그는 여섯 차례 승용차를 몰고가 파출소 뒤쪽 주차장에 세워 놓고 정찰했다.
7월18일 새벽 4시30분 순찰을 돌고 온 히라시마(平島), 하타(畑) 두 경관이 파출소에서 잠에 들었다. 文은 뒷문을 파이프 렌치로 따고 들어가 이들이 풀어 놓은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과 실탄 다섯 발, 그리고 다른 권총 한 자루와 실탄 다섯 발을 훔쳤다.
文은 이때 같이 훔친 수갑이 달린 권총집을 나라(奈良) 현의 야마토천(大和川)에 버렸다고 진술하였다. 일본 경찰은 文의 진술을 토대로 야마토川 부근을 수색해 이 권총 케이스를 찾아냈다.
『밤이슬이 내리듯 방아쇠를 당겨라』
미키코로부터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신원서류를 받은 文은 7월20일 한큐여행사를 찾아가 여권 발급, 서울까지의 왕복 항공권, 그리고 조선호텔 예약을 의뢰하였다. 7월24일 文은 여권과 항공표를 발급받고, 7월30일에는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서 관광 목적의 사증을 발급받았다.
文은 7월24일 저녁 金浩龍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화했다. 다음날 文의 집 앞에서 金은 80만 엔을 주면서 『빛이 내리듯, 밤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듯 방아쇠를 당겨라. 가급적이면 安重根 의사의 경우처럼 1m 이내의 거리로 접근하여 사격하라』고 말했다.
8월5일 文은 산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구입, 내부를 뜯어내고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을 감추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文은 8월6일 오전 11시30분 오사카發 서울行 대한항공기에 탑승, 오후 1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文이 이날 갖고 들어온 가방은 13kg짜리 하나였다. 권총이 든 라디오를 이 가방에 넣어서 세관을 통과한 것이었다. 당시 김포공항 검색대 근무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면세품이기 때문에 별다른 검색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文世光은 입국한 이후 열흘간 조선호텔 1030호실에서 투숙했는데, 이 호텔에 상주하던 경찰 외사과 형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文世光은 8·15 기념행사가 국립극장에서 열리고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사실은 8월14일자 석간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았다. 8월14일 밤 文은 방 안의 거울 앞에서 사격동작을 연습했다. 새벽 2시까지도 잠이 오지 않아 권총과 실탄을 만지작거렸다. 8월15일 그는 오전 6시 호텔 다방에서 식사를 하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 국립극장에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프런트에 승용차를 대기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1998년에 대통령 경호실이 작성한 「8·15 사건 경호실패 사례 연구 보고서」는 文世光의 차가 승차표 없이 정문을 통과할 때도 전혀 검문을 받지 않았고, 그가 비표 없이 로비로 들어오는 것을 어느 한 사람도 제지하거나 검문 검색을 하지 않았으며, 文이 약 50분간 비표 없이 로비를 서성거리고 의자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표 없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용한 상황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정문, 로비 출입구, 로비內, 극장 출입구의 네 곳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文을 검문 검색했더라면 허리춤에 권총을 숨겨 놓고 있었던 文은 체포되거나 범행이 저지되었을 것이다. 文이 권총을 들고 통로를 뛰어가고 있던 때 통로 양쪽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경찰관들 중 한 사람이라도 다리를 걸었으면 陸여사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陸여사의 운명, 노랗게 변한 하늘
陸英修 여사를 보좌한 제2부속실의 행정관 金斗永(당시 34세)은 4년째 퍼스트 레이디를 모시고 있었다. 8월15일 그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陸여사는 응급실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 주변에 경호원들이 있었다. 한 경호원은 환자의 두 다리를 들고 있다가 반가워했다. 대통령 부인의 다리를 받치고 있자니 황송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던 것이다.
머리 관통상을 입은 陸여사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헉, 헉」 불규칙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한 20분간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에 朴대통령이 서울의과대학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들어왔다. 뒤에는 朴鐘圭 경호실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金씨가 본 朴대통령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새까만 얼굴이 샛노랗게 변해 있었다. 대통령은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시오』라고 단단히 부탁하고는 대통령 전용 입원실로 올라갔다.
陸여사에 대한 수술은 오래 걸렸다. 수술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면서 건물벽과 마당이 오렌지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날의 이런 목격담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金씨는 陸여사가 끼고 있던 반지와 머리뼈 조각을 의사로부터 받아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陸여사가 운명한 뒤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머리뼈 조각은 총탄을 맞을 때 생긴 것이었다.
이날은 공휴일이라 서산농장에 가 있던 金鍾泌 총리가 申稙秀 정보부장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金총리는 申부장에게 『이것은 한 사람의 소행이 아닐 것이다. (朴대통령이 시승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청량리와 영등포 전철역 주변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수술 도중 수술실로 내려와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 대통령은 오후 2시쯤 청와대로 돌아갔다가 오후 4시에 다시 병원으로 와서 『절망적』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오후 6시50분에 청와대로 돌아갔다. 陸여사는 오후 7시쯤 운명했다.
『네 엄마가 돌아가셨대』
중앙高 1학년생이던 朴志晩군은 청와대 응접실에서 장난을 치다가 어머니 陸英修 여사의 팔을 꽉 잡았다. 陸여사는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 며칠 전부터 팔이 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모가 광복절 기념행사장으로 떠난 뒤 志晩군은 작은누나(槿暎) 및 외할머니(李慶齡)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다. 갑자기 텔레비전의 중계방송이 꺼지자 외할머니는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고 걱정을 했다. 작은누나는 대통령 부속실로 전화를 걸었다.
오후 1시쯤 작은누나와 志晩군은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오후 6시를 넘어 아버지는 『일단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표정이 없었다. 청와대 본관에 들어온 朴대통령은 직원들에게 『식사를 했는가』라고 위로했다. 아버지는 志晩군을 아무도 없는 접견실로 끌고 갔다. 문을 닫고는 아들을 껴안고 엉엉 우는 것이었다.
『네 엄마가 돌아가셨대』
志晩은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이때 처음 보았다.
저녁 8시30분 陸여사의 유해가 청와대에 도착했다. 朴대통령은 까만 양복을 입고 志晩·槿暎과 함께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는 본관 1층 영부인 접견실에 안치되었다. 영부인 담당 제2부속실 행정관 金斗永이 접견실 입구에 서서 울고 있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金正濂 비서실장이 金씨의 옆구리를 내지르면서 『각하를 모시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라고 야단을 쳤다. 金행정관은 『각하, 들어가시지요』라면서 집무실로 모셨다. 陸여사 유해는 다시 대접견실로 옮겨졌다. 정부는 5일장의 국민장으로 하기로 했다.
朴대통령은 매일 새벽에 2층 침실에서 내려와 분향했다. 그때 프랑스에 가 있던 槿惠씨는 장례식 3일 전에 귀국했다. 朴대통령은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가 딸을 차에 태우고 들어오면서 사건을 설명해 주었다.
朴대통령은 아내의 殯所(빈소)를 지키면서 애틋한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지금도 어느 행사에 갔다가 막 돌아올 것만 같구먼. 행사 때 내 걸음이 빠르다고 좀 천천히 가라고 하더니 저 사람이 먼저 갔어』
朴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2층의 내실에서 1층의 집무실로 내려가는 것이 출근길이었다. 陸여사는 출근 모습을 이렇게 일기에 담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 보통 뛰어 내려가는 버릇이 대통령에겐 있다. 「또 뛰어가시네」라고 2층 복도에서 혼잣말처럼 말했더니 두어 걸음 더 빨리 뛰어 내린 다음 유유한 자세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우습기도 하고 미덥기도 하다>
『언젠가는 나병환자들을 위문하고 그들과 일일이 악수했다면서 그 손을 내밀더군. 나도 선뜻 그 손을 잡아 주었지』
8월19일 오전 9시20분 청와대 본관 앞뜰에서 發靷式(발인식)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앞에서 절을 하는 志晩군의 喪服(상복)에 실밥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감아 당겨서 끊어 주었다. 비정상적인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의 발로였다. 朴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의 옆문을 부여잡고 運柩(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 유명한 장면을 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촬영했다. 申稙秀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모시고 본관으로 돌아갔다. 이날 오후 7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가 대통령을 만나 조문했다. 金東祚 외무장관, 金永善 駐日대사, 우시로쿠 駐韓 일본대사, 金正濂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5·16 혁명 때 車智澈(왼쪽)을 朴대통령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이 朴鐘圭(오른쪽)였다. |
車智澈의 등장
1974년 8월20일, 朴대통령은 정상 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金鍾泌 국무총리는 오전·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만나 陸여사 서거 후의 國政 방향에 대해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吳定根 국세청장을 추천했다. 朴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吳定根은 5·16 군사혁명 때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 출신(당시 중령)이었다.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선두 지휘관이었다.
이날 오후 2시55분부터 3시20분, 朴대통령의 사위 韓丙起 칠레 대사가 청와대로 들어왔다. 韓대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車智澈 공화당 국회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33분부터 5시20분, 朴대통령은 車의원을 불러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물론 車의원은 충성을 맹세했다.
8월21일 오후 2~3시 사이 朴鐘圭 실장이 대통령에게 離任(이임)인사를 하고, 신임 車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朴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실 인물이 陸여사에서 車실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10·26 사건을 예약한 인물교체였다.
陸여사와 車실장은 여자와 남자라는 것 이상으로 달랐다. 陸여사는 온화하면서 겸손했고, 車실장은 강경하면서 오만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싫은 말을 의무적으로 했고, 車실장은 좋은 이야기만을 의무적으로 했다. 陸여사는 대통령의 열려진 귀였고, 車실장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다.
누가 車실장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고, 대통령이 왜 그를 발탁했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지만 모든 결정은 朴대통령의 몫이다. 기자가 입수한 朴대통령 재임기간중의 면담일지를 읽어 보니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발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陸여사 피살 이전에도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獨對했던 정치인은 단연 車智澈 의원이었다. 이는 朴鐘圭 경호실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호실장이 면담을 주선해 주지 않으면 그렇게 잦은 獨對는 이뤄질 수 없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한 달 전 공수단의 車대위를 포섭하여 金鍾泌씨에게 선을 보인 다음 朴正熙 소장 앞으로 데려간 사람이 바로 朴鐘圭 소령이었다. 5월16일 서울시청 앞에서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朴소장 양쪽에 호위로 서 있는 두 사람 또한 朴鐘圭와 車智澈이었다. 둘 다 미국에서 공수부대 훈련도 받았다.
朴실장은 車의원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물론 朴대통령의 車의원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朴실장은 친한 사람들에겐 『車의원이 나의 후임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朴대통령은 「저돌적 충성심」을 보이는 이 젊은 정치인을 거의 아들처럼 총애했다. 또 한 사람 朴대통령이 情을 주고 있었던 사람은 全斗煥 준장이었다. 朴대통령은 월남전선의 全斗煥에게 편지를 써 「귀관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는 요지의 당부를 했다.
車의원은 당시 好評을 받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답지 않게 신중하고 공부를 많이 하며(한양大에서 박사학위 받음)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호실장이 되면서 그의 인격의 일부로 나타나는 오만방자함도 두드러지지 않을 때였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권력자가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부하를 멀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법이다. 金日成 정권이 지령한 朴대통령 살해는 실패했으나 陸여사 피살로써 반 쪽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첫댓글 이렇게 긴글은 처음 읽어 봤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그분을 만난건 행운이었다 라고 김재규가 말했죠
우리나라 만세 !!! 박정희 만 만세 입니다 ..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