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간아, 일어나! 안 일어나? 내가 오늘만은 제발 일찍 일어나라고 했어, 안 했어?"
"으악! 일어난다고, 일어나!"
소녀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청년은 소리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바로 앞에서 마왕보다
무시무시한 소녀가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쳐다보자 후다닥 일어나서 씻으러 나가며 복수의
한 마디를 내뱉는다.
"어디서 다 큰 처자가 남자방에 불쑥 난입해서 사람을 깨워?"
또 그 말을 듣지 못할 소녀가 아니다. 하지만 소녀는 목적-청년을 깨우려는-을 달성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 화내는 것을 멈추고 수프를 끓이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청년이 부엌으로 들어오자 소녀는 청년의 앞에 수프와 빵, 양젖 치즈를 내려놓으며
오늘 하루도 청년의 아침을 잔소리로 시작하게끔 했다. 한마디로 잔소리를 시작했다는 거다.
"세상에, 내가 오늘 영주님네 아들 결혼식 있다고 자경단원으로써 빨리 일어나라고 하지
않디? 나도 일하러 세렌타에 내려가봐야 되니까 빨리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걸 무시하고 이 시간까지 엎어져 잤단 말이지?"
청년이 못 들은 척 수프만 떠먹자 소녀는 결정타를 날리기로 마음 먹었다.
'이 말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라고 생각하며.
"오늘 늦으면 피르 오빠가 용서 안 한다고…. 어, 밥 먹다 말고 어디 가?"
소녀의 말에 청년은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소녀는 '예의상' 어디가냐고 한 마디 던지고는 바로 밥 먹기에 열중했다. 물론, 청년의
것을 스리슬쩍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청년이 자경단복을 입고 나와서는 빵을 하나 물고 신발을 신었다. 소녀는 그런
청년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더니 딱 한 마디만 하고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으이그, 곱게 말할 때 들을 것이지. 아무튼 잘 다녀와, 오빠."
오빠라고 불린 청년도 한 마디만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래. 밥 천천히 먹고 좀 있다 성에서 보자, 카린."
특이하게 흰색의 긴 머리와 연보랏빛의 눈을 가지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카린인 것 같았다.
문을 박차고 나간 갈색의 머리와 연보랏빛의 눈을 가진 청년은 그녀의 오빠이고.
카린은 어느새 식사를 다 했는지 접시를 날라 설거지까지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카린이 방에서 나왔을 때 입고 있는 옷은 흰색의 긴 머리와 잘 어울리는 하얀
원피스에 금줄-색깔만 금색일 뿐 물론 가짜다.-로 허리 쪽에서 리본으로 묶은 것이었다.
"자, 그럼 나도 슬슬 출발해 볼까나."
소녀의 이름은 카린느 클레비스. 나이는 열 여섯. 귀족적인 이름에 반해 신분은 평민이다.
카린의 아버지는 카린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돌아가셨고 카린의 어머니는 카린을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젖먹이인 카린을 16살이 되도록 키운 장본인은 방금 전,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카린의 오빠인 카르넨 클레비스였다.
카린의 관점에서 카르넨-애칭은 카르-은 스무 여섯 해를 잘못 산 듯한 오빠였다.
26살이나 먹은 주제에 아직도 기사에 대한 환상을 품고는 그런 환상따위 왜 품냐고 물으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당연히 카린을 지켜주기 위해서지.'라고 대답하는 오빠.
그래도 얼굴은 주변에 소문날 정도로 잘생겨서 오빠와 같이 나가면 수근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리 카린의 관점이 '이상한 오빠'라곤 해도 카린이 태어나자 씻긴 사람도, '카린느'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열 여섯 해를 길러준 것도 다 카르가 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 소녀의 오늘 목적지는 카린의 마을인 호냐크에서 10분 거리인 영주의 성이 있는
세렌타의 영주의 성이었다. 오늘 영주 아들의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 일하러 가봐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저녁거리라도 받을 테니까.
"에휴, 10분 거리라지만 가기 귀찮네."
저렇게 말을 해도 365일 일하는 데에 하루도 빠진 적이 없는 카린이었다.
집 안의 실질적 가장으로써-카르는 '자칭' 가장- 저녁 거리는 항상 소녀의 몫이었다.
물론 카르도 자경단원으로써 한 달마다 월급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 돈은 항상 3등분을
해서 3분의 1은 남매의 용돈, 3분의 1은 바보 오빠가 나중에 카린의 지참금으로 넣어주겠다고
모으고 있는 돈으로, 3분의 1은 기타 생활비로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카린은 용돈으로
들어오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 나중에 가게를 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긴 하지만.
잡생각을 하면서 호냐크에서 세렌타로 통하는 길을 걷고 있던 소녀의 귀에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린!"
카린은 밝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흑발에 페리도트 빛의
눈과 테가 없는 안경을 쓴 남자.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인 영주 아들의 친구이자 공부선생.
카린을 키우는데 고생을 했다는-자기의 주장이다.- 피르 소카스였다.
"어, 피르 오빠! 오빠 지금 가는 거야?"
"응. 카르 형은?"
피르는 카르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도 카르는 피르를 은근히 무서워한다. 카린은 그 이유를
너무나 궁금해했으나 서로 그 이유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안 하고 있기에 포기한 실정이었다.
"아아, 내가 먼저 보내버렸어. 피르 오빠를 들먹거리면서."
그러자 피르는 쿡쿡 웃더니 잘했다는 말을 하며 카린과 발을 맞춰서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열더니 말을 했다.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와서 먹어. 카르 형도 같이."
"응, 알았어. 성에 가서 오빠한테 내가 전해줄게."
그것을 끝으로 다시 둘 사이에 말은 없었고 영주님의 성이 있는 세렌타에 들어서자
카린은 피르와 헤어졌다. 이리저리 사람 많은 대로에서 카린이 들어간 곳은 여관이었다.
세렌타에서 가장 큰 여관에 들어가자 카린과 또래인 피터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여어, 카린 왔어?"
"응. 영주님 성에 들리기 전에 잠시 들려봤어."
그러자 피터는 속셈을 알겠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더니 '잠시만'이라면서 자리를 떴다.
카린은 카운터 옆에 서서 여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영주의 성에
가기 위한 사람들이리라. 여기가 거의 변방이지만 영주님의 인품은 매우 좋아서 생일이나
결혼식같은 큰 행사가 열리면 영지민들도 찾아가고 주변 영지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온다.
"영주님의 아드님도 성격 좋다는 말, 피르 오빠한테 많이 들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피터가 카린에게 다가와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여깄어. 너도 참. 이런 데서 달라고 하지 말고 그냥 피르 형한테 붙으면 되잖아.
그 부자 형님은 어디다 버려놓고 이런 데서 일이나 하면서 먹을 거리나 받냐?"
"내가 혼자 잘 살 수 있는데 뭣하러 손을 벌려? 아무튼 그건 따로 잘 챙겨놔.
저녁에 받으러 올 거니까. 내일 아침으로 먹어야지."
그러자 피터가 퍽이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녁에 와서 받아도 되잖아? 뭣하러 지금 온 거야?"
"그야 당연히 사람들 수를 보니 저녁엔 남아나는 게 없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그럼 난 간다. 일 열심히 도와라. 아주머니고 아저씨고 바쁘실 것 같으니까."
카린이 문 쪽으로 나가면서 말하자 피터가 문을 향해 소리쳤다.
"니가 말 안 해도 그럴 거니까 저녁 되면 알아서 찾으러 와라!"
* * *
세렌타와 호냐크, 이 두 마을이 다인 우리 영지는 변방이다. 그런데도 성벽이 튼튼하지
않는 것은 뒤에 소샤크 산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험하고 높기로 유명한 산맥을
어떻게 넘어서 쳐들어 올 생각을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지는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여어, 카린 왔어? 너네 오빠는 한참 전에 오더니. 피르도 이미 들어갔어."
"아, 알아요. 오빠는 제가 아침에 내보냈고 피르 오빠는 오면서 만났거든요. 전 여관에
좀 다녀오느라 늦었어요."
"그래? 혹시 저녁거리 부족하면 우리 집에 꼭 오고. 렌체가 너 정말 좋아하는 거 알지?"
"헤헤-, 언제 꼭 들릴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알버트 아저씨."
"그래그래, 안에 일 하느라 분주한데 너무 잡아놨구나. 너도 수고하렴."
나는 알버트 아저씨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성의 넓디 넓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외성이고 내성으로 들어가야 사람들이 시끌벅적해지니 아직은 조용했다.
알버트 아저씨는 세렌타에 사는데 벌써 20년째 영주님 성의 경비대원이었다. 지금은
경비대장이고 원래 문을 지키는 역할 따위는 신참한테 주는 건데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직접
서시는 모양이었다. 알버트 씨의 부인인 렌체 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야무지다며 틈만 나면
우리 집에 먹을 것을 싸들고 오시고는 점심 때 만나면 나에게 항상 점심을 주신다.
점심만 먹기 미안해서 설거지도 도와드리고 청소도 도와드리고 했더니 요즘에는 아예 만날
때마다 용돈도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신다. 나야 좋긴 하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내 흰 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엉망이 되었다. 엉키기 좋은 머리라 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묶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머리 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법. 최대한 머리를
보존하며 내성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여기 왜 이렇게 기냐.
원래 태어났을 때 내 머리는 갈색이었다고 한다. 오빠는 연한 갈색이고 나는 짙은
갈색이었단다. 그런데 5살쯤이던가, 머리가 점점 탈색이 되더니 이제는 흰머리 뿐이었다.
뭐, 흰머리라고 늙어보이는 게 아니라 왠지 신비스러워 보인다는 말까지 자주 들어서 별로
불만은 없었다. 어릴 적에는 이 머리를 놀리는 애들도 많았는데 피르 오빠와 우리 오빠가
한 번 애들을 따끔하게-아마 무력으로-혼내 준 이후로는 그런 애들은 없었다.
영주님 아드님-어감이 이상한걸-의 결혼식은 점심 먹고 오후라서 외성은 너무나 고요했다.
하지만 내성 쪽으로 점점 다가가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내 귀에 전달되었다.
내성의 문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오호라, 우리 오빠군.
"어, 카린! 늦었네? 어디 들렸다 온 거야?"
"아아, 여관에 들렸다 왔어. 근데 제 시간에 도착했나봐?"
그러자 내가 피르 오빠를 들먹인 것이 생각났는지 나에게 소리쳤다. 물론, 나는 한참 전에
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피해가 없었다.
"야! 피르는 나보다 한참 늦게 왔다고! 너 그렇게 오빠를 울궈먹어도 되는 거야?"
"뭐, 그 때문에 일찍 도착했잖아? 좋은 게 좋은 거야."
바야흐로 우리의 싸움이 시작되려는 찰나, 옆에 있던 다른 자경단원 오빠가 말렸다.
"으이그. 그만해라, 카르넨. 예쁜 동생한테 그게 무슨 짓이야? 간만에 일찍 와서 칭찬도
들었으면서. 카린이 저녁거리 때문에 10분이나 걸려서 여기 온 거 안 보이냐? 자, 카린.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아직 일거리는 많이 남았지만 인력은 한참 부족하거든."
"네, 그럼 전 가볼게요. 아, 오빠!"
"왜?"
"오늘 저녁은 피르 오빠네 집에서 먹자. 오빠가 와서 먹으래."
"알았어. 시간 보고 되면 갈테니까 피르랑 먼저 가서 먹고 있어."
"응."
나는 대답하고는 오빠와 옆에 있던 자경단원 오빠한테 인사하고 내성으로 들어섰다.
자, 그럼 오늘의 일거리를 열심히 시작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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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 트웰브 오브(Twelve Of)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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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내용이 재미있는데,너무 평범한거 아니에여?~~~ 좀 평범하지 않게좀 해주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