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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7.7.23.) 말씀/ 역대상 14:10
날마다 주께 묻는 신앙
10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얼마 전에 책을 검색하다가 '경영학보다는 소설에서 배워라'는 책이 눈에 띄어 읽게 되었습니다. 문학 소설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무게를 두고 쓴 책입니다. 과연 이런 소설 문학이 그렇게 읽을 가치가 있을까요? 목회자에게도 필요하고, 또 사업을 경영하는 CEO들에게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책 표지 뒷면에 한국의 최고 경영자라 할 수 있는 호암 이병철씨의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경영에 관한 책에는 흥미를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지엽보다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최고 경영자의 소설을 권하는 말입니다. 사업이나 장사도 따지고 보면 그 방법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저류에 깔린 인간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나 도스트예프스키는 인류 역사에 최고의 문학가이고 이들의 작품은 문학사에 고전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분들의 작품은 어떤 목사님의 수많은 설교보다도 더 낫다고도 말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과연 그러한가 하고 읽어보려하면 책들이 너무 방대해서 잘 읽지도 못합니다. 다행히 저는 얼마 전 마음먹고 도스트에프스키의 대표작 ‘카라마죠프가의 형제’와 톨스토이의 ‘안나까레니나’를 읽었습니다. 노튼출판사가 영국,미국,호주의 유명한 작가 125명에게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작품 10권을 꼽아달라고 청탁해서 순위를 정한 '톱 텐'이란 책이 있는데...,그 수 위에 톨스토이의 '안나까레니'가 1위, '전쟁 과 평화.가 3위에 올라 있습니다. 톨스토이 사후 100년이 지났어도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최고의 작가, '안나까레니나'를 최고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평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예술가 톨스토이. 그가 남긴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 위선, 질투, 신념, 사랑 등 인간의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증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걸작이다. 다양한 인간의 성격 심리 묘사 인간관계,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를 주는데 소설이 그만큼 유익하다는 것 입니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경영자가 인간 심리를 모르고 어떻게 장사를 할 수 있으며,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인간 심리를 모르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필요성에 대해서 스탠포드 경영학 박사 톰피터스는 자신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영학 서적들은 답을 제시한다 반면 대부분의 소설들은 위대한 질문들을 던 져준다. 그것이 내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소설을 즐겨 읽는 이유 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 다양한 문화와 역사의 이야기 이기도하지만 끊임없이 삶의 문제 인생 문제,사랑, 죽음, 구원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 '나'라는 한 인간의 편협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이해력과 세계관을 키워가는데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또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옛 성인군자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 소설은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양한 세대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합니다. 또 간접적으로 지켜보고 또는 질문을 듣고 던지면서 더 나은 '나' 로 극복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답이 아니라 위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문학 소설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명작 소설 '쿠오바디스'를 잘 알 것입니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벤허 십계와 더불어 지금보아도 아주 감명 있는 문학작품입니다. 10여년 전 로마에 갔을 때 권순만 선교사님의 안내로 소설의 배경이 된 이 장소 아삐아 가드에를 직접 가보았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베드로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물론 소년의 목소리를 통해서 만나지만 베드로가 질문 합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온 양들을 위해서 죽으로 다시 로마로 간다. 베도로는 거기서 즉시로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어린양이 있는 로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로 뒤돌아가서 거기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죽음을 각오가고 전하는 그의 메시지는 아주 감동 입니다. 이런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쿠오바디스도미네?' 그리고 질문도 듣습니다. '너도 가서 순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좋은 소설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전혀 말을 안 하고 질문도 잘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질문을 자주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살이는 길을 떠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의 성격은 계속 묻는 것입니다. 묻고 정확하게 알고가야 헤메이지 않고 바르게 도착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물으면서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사람도 만나고 교제도하고 그렇게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위암 사형 선고받고 독일에서 로마까지 걸어서 여행을 완주한 독일 사람 책을 읽었는데 그 분 이야기가 6개월 동안 여행 하면서 사람을 만난 것이 인생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보다 더 많이 만났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섬김고 섬김받을 줄 하는 삶에 대해서도 새로 배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길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아브람이 말씀을 좋아 순종했다고 나오는데 히브리서를 보면 그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목적지를 모르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왜 하나님은 한 번에 길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을까요?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물으라는 것입니다. 왜 한 번에 약도를 다 알려주시지 않고 그 때 그 때마다 질문하고 묻도록 하시나요? 묻고 답하는 것처럼 좋은 교육도 없고 좋은 관계성 맺는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이 무엇입니까? 문답법입니다. 질문하고 답하고 질문 하고 답하고,,, 학교에서 선생은 질문하는 학생을 아주 좋아 합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배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선생을 신뢰하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생은 학생이 질문을 하면 복도에 서서라도 아주 정성껏 답변을 해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순간순간 물으면서 답도 얻으면서 믿음과 신뢰를 쌓고 친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번에 답을 가르쳐주시지를 않고 그 때 그 때 자주 묻도록 하십니다. 물론 어떤 때는 질문했는데 답이 없다면 답답 합니다. 그것도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역시 믿어야 하고, 인내를 하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고 당장 필요하면 하나님은 정확하게 답을 주십니다.
사물엘 상을 보면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모든 불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왔습니다. 다윗이 듣고 대항하려 하였지만 이미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 10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역대상 14:10) 하나님은 즉시로 다윗에게 은답해주십니다.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다윗은 이에 바알브라심으로 올라가 거기서 그들을 치고 이렇게 말 합니다. “하나님이 물을 쪼갬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물을 쪼갬같이..얼마나 완벽한 승리 입니까! 그 다음에 또 블레셋이 골짜기를 침공했습니다. 이제는 경험상 그들을 맞아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승을 거두고도 다윗은 겸손히 하나님께 또 묻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과 다른 방법입니다. 섬세하게 기습작전으로 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역대산 14: 14-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15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쳐서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게 되었고,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한 무장을 사고 싸워도 패할 수 있고, 아무 불리해도 하나님 싸우시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작전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날마다 주님께 물으며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묻고 질문하는 것은 교육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한국 학생들은 암송과 단답형에 길들여졌는데 나중에 보면 세계적인 인물이 안 나옵니다. 잘의 응답 토론을 통한 논리 사고가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답은 깊은 질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이 없으면 좋은 답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진국형 좋은 교육은 틀려도 좋으니 질문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계 0.1% 인구로 15%가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낸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라고 묻기 보다는 ‘오늘 학교에서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카스토리에 올렸더니 울산의 박창준 목사님이 이런 답글을 올렸습니다. “제가 경험해 볼 때, 사람은 잘 나갈 때 질문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에 질문하게 하시네요. '주께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지?' 자녀들의 죄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질문하게 만드시네요. 그 질문들이 우리를 깊고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네요 ~질문의 시기? 잘 나갈 때는 안하게 되고 힘들고 여려울 때 심히 부족함을 느낄 때... 그렇게해서 배우게하시고 더 깊이 주님을 체험케하시고 성숙으로 이끄시는 주님! 박목사님도 깊은 영성 체험을 많이 하셨네요~~”
사람이 힘들고 어려우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답을 얻는 것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질문의 효력을 안다면 평상시 매일 매일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모르는 것은 그 때 그 때 물어야 되지만 또 적극적으로는 새롭게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알기 위해서는 배움을 위한 질문을 자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목사님 물을 것이 있어야 묻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식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알려고 하는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과 달리 귀찮을 정도록 묻는다는 것입니다. 아빠 하늘이 왜 파래? 아빠 물은 왜 투명해, 피는 왜 빨개? 왜 우리는 일찍 자야되? 무엇이던지 질문을 해야 답이 있고 그렇게 해서 대화도 하게 되고 관계성도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질문 없다면 답도 없고, 언 떤 사건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사람과의 관계로 요원해 집니다. 말이 없고 질문이 없는 사람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질문도 잘 해야 합니다. 단 답으로 하면 단 답이 옵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깊이 있게 질문 하면 깊은 답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작은 일이라도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도 하게 되고, 배우게 되고, 발전하게 되고, 원숙한 믿음에 이르는 답을 얻게 됩니다. 이런 질문 이런 노력 없이는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며 삶을 진짓 하게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좋은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 현재보다 더욱 성숙한 나에게도 나아가는 길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가 제일 의심이 많은 자입니다. 그래서 의심 많은 사람들을 도마로 비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도마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자들을 불러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4) 그 때 제자들 모두 근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나서서 이렇게 질문 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귀한 말씀이 도마의 질문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 도마만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이야기 했지만 도마는 죽어도 자기는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강한 의문을 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 예수님이 다시 그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에 답을 주셨습니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의심이 많은 도마는 뒤 늦게서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을 하였지만 주님으로부터 이런 아주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28). 물론 그도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인도에서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고 또 의심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주께 물으면 됩니다. 주님이 대답해주실 것입니다. 설령 당장 답이 내려지지 않아도 이렇게 우리는 묻고 답을 기다리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믿음을 쌓아가게 되고,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날마다 주께 물으며 성숙한 답을 얻는 신앙인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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