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편에 「古傳記를 살펴보면 전한 홍가3년 계유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에 漢山(今 廣州)으로 도읍을 옮겨 389년을 지나 제13대 근초고왕 함안 원년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北漢城(今 楊洲)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하여 일연은 온조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옮긴 곳, 즉 한산을 今廣州라고 하여고려시대 당시(1281년)의 廣州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를 쓸 당시 일연은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고려시대 당시의 廣州, 즉 지금의 河南市 春宮洞 일대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당시 일연이 인용한 고전기가 어떤 사서를 지칭하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古傳記, 즉 예로 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록, 혹은 사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古傳記를 인용하여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시점에는 이미 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라고 고려사회에 공지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어찌보면 삼국유사가 씌여지기 훨씬 전에 이미 고려사회는 하남시 춘궁동 일대(당시의 廣州)가 백제의 하남위례성임을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이 당시 고려사람들에게는 그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口傳的 상식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삼국유사에 씌여진 일연의 기록이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직설적이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고려시대 당시의 광주, 즉 광주의 읍치소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적으로 전모가 이미 다 밝혀진 사항이라 이 글에서 더 이상 언급한다는 자체가 낭비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은 피하는 것이 좋을듯 싶다. 그런데 이 싯점에서 일연이 말한 廣州를 왜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국한시키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떤 역사 기록을 보아도 기록속에 나타나는 어떤 지명이 그 지명의 중심부나 읍치를 지칭하고 있음은 이미 다 아는 상식이다. 고려시대의 廣州는 이미 그 이전시대인 고조선 시대의 마한, 마한의 목지국, 백제의 한성, 신라와 통일신라의 신주와 한주, 한산주, 그리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고려의 개국공신인 왕규의 행정적, 군사적 치소인 廣州(하남시 춘궁동)를 거치면서 이미 한반도 중부의 중심도시로 자리잡아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일연과는 사뭇 다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쓸 당시 하남위례성과 관련해 古傳記를 비롯하여상당히 많은 과거 역사자료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나는 기껏해야 일연, 다산, 금서룡, 이병도등의 선학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최근 풍납토성발굴성과나 하남시 인근의 발굴성과를 나름대로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다. 특히 풍납토성에서 그동안 발굴된 건축유구 중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의 왕궁의 흔적이라고 추정되는 유구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을 하고 있다. 혹자는 풍납토성에서 王都漢城이라는 명문이라도 나와야 하남위례성이라고 믿겠느냐고 윽박지르는 학자도 있다. 百濟王都와 관련된 유구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王都漢城 명문이라도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는 당신은 풍납토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는 고고학적인 결정적인 증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하면, 옹색하게 해대는 답변중 하나가 경당지구에서 출토된<大夫>명 토기라고 한다. 大夫를 大部-大城-漢城으로 최면을 걸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아니 大夫와 백제가 도데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렇게들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풍납토성은 발굴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몇몇 학자와 관련 기자들의 주도로 역사, 고고학적인 증거와는 상관없이 이미 백제왕도 한성이 되어 있었다고 보는게 나의 시각이다. 1998년 현대 리버빌을 단초로 발굴을 시작한 풍납토성은 발굴도 하기 전에 이미 하남위례성과의 관련여부를 놓고 이미 언론사 기조를 다 장악하고 있었다. 그후 경당지구 발굴때는 마치 하남위례성을 확인하는 작업 정도로 생각하며 발굴을 시작했던게 사실이다. 발굴중인 현장을 포크레인으로 훼손한 부분과 관련해서도, 大夫는 백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중국이나 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관직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풍납토성이 백제와는 별로 상관없는 토성임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부득 부득 우기는 것을 보면 집단체면에 걸린 요객들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몰고 온 마당에 자기들의 주장에 반하는 자가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가 누구이든 칼로 내리칠 기세이다. 칼을 맞았어도 이미 여러번 맞아 만신창이가 되었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아는 후배들이 하는 말이 재미있다. 선배가 만약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였다면, 선배는 벌써 죽었을 거라고.....여기에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할 중대한 사안은 다산이 주장한(?) 하남위례성이나, 하북위례성 모두,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편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역사적 진실을 단 몇 줄의 글로 후학들에게 엄청난 과제를 내려 주신 일연은 천재적인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일연이 준 엄청난 양의 과제가 무엇인지 조차 아직 감도 못잡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남위례성의 대치성인 하북위례성의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일연은 北漢城이라는 표현으로 하북위례성의 존재와 그 위치(今楊州)를 분명히 하고 있으나, 하남위례성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저희 후학들로서는 감히 하북위례성의 존재에 대해 현 단계에서 언급하는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지난번 저의 책에서도 잠시 하북위례성에 관해 언급하였지만 본격적인 연구 성과에 의한 결과는 아니고, 이제부터가 하북위례성 관련 연구의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삼국유사에 대한 상식적인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충렬왕 7년(1281년)에 편찬한 역사서로 5권 목판본이다. 1310년대에 그의 제자 무극이 간행하였지만 이것이 처음 간행한 것인지, 그 후 다신 간행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조선 전기 중종조 간행본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석남본과 송은본이 현존한다. 보물 제419호로 지정된 것은 송은본으로 3,4,5권만 있는데 이중에서도 권3의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상태이다. 이 책은 권4와 5로 서문과 발문이 없으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완질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추정되며, 규장각 소장본 발문의 기록으로 보아 중종 7년(1512)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며, 한국 고대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과 유적을 조사, 연구하는데에도 기본적인 자료가 되며,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에도 가장 오래된 중요문헌으로 손꼽힌다. 또한 이 책에 실린 향가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가운데 최대로 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출판되었다는 점, 전해오는 간행본 중 몇 종 안되는 귀중본이란는 점 등으로 볼 때 서지학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평가된다.
첫댓글 정말로 오랫만에 글 올립니다. 옛날과 역사문의 분위기가 다소 달라진걸 느낌니다.
풍납토성을 백제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조차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하남시 춘궁동이 하남위례성지 였음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조차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당시 廣州가 하남시 춘궁동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