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장영실>을 쓴 이재운입니다. 혹시 제 소설을 읽고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 가운데 "소설하고 드라마가 왜 이렇게 다르지?"란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것같아 몇 가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일종의 독자 서비스라고 이해해주십시오. 1. 드라마 속 장영실 아버지 장성휘는 서운관 관리였나?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성휘 일가는 당시 원나라에서 기술자로 있다가 귀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장성휘 형제들이 모두 정3품 전서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가문은 원나라의 선진기술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장성휘가 아들 장영실을 가르쳤나? 불가능합니다. 장영실이 장성휘의 외아들이기 때문에 당시 장성휘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실제 어떤 기록에도 아버지가 나오지 않고, 전서로 있던 장성휘의 형제들은 일제히 경상도 일대로 내려가 은둔합니다. 이로보아 저는, 장성휘가 고려 멸망, 조선 개국기 정변에 희생되었다고 추정했습니다. 형제들도 낙직되어 내려가거나 유배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소설에서 장성휘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공양왕 지지파로 묘사했는데, 당시 조선 개국 때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정몽주 세력이거나 근왕세력입니다. 아마도 더 적극적인 정몽주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정몽주 세력은 정몽주를 포함하여 모든 일가족이 천민이 되어 노비가 되었습니다. 원래 역적으로 규정되면 남은 가족은 모두 천민이 됩니다. 그래서 개경에 살던 장영실과 그의 어머니는 노비가 되어 개경에서 먼 동래현으로 배속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장성휘가 나타나 아들 장영실을 가르치는 드라마 내용이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3. 드라마 속 장영실은 서자였나? 서자가 아니라 양반이었다가 아버지 장성휘가 고려멸망 과정에서 역적으로 처형된 뒤 관노로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장씨 일가는 대대로 아산을 영지로 삼아 살았는데 느닷없이 동래현으로 내려갈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또 개경에서 전서 벼슬을 살던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가 그 먼 동래현까지 내려가 관기를 임신시킬 이유도 거의 없습니다. 전서는 서울인 개경에만 있으면 되지 동래에 갈 업무가 없습니다. 4. 드라마 속 장영실의 어머니가 일찍 죽었나? 장영실의 어머니는 관노로 끌려갔다가, 당시 나이가 20대이므로 관기로 뽑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관기는 대개 관노 중에서 뽑습니다. 5. 서울에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데 부산만 일식할 수 있나? 그럴 일은 없습니다. 퍼센트의 차이가 있을 뿐 위도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일식 현상은 유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부산에서는 완전 일식을 보이는데 서울에서는 조금도 일식 현상이 없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명백한 과학적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2009년 7월 22일 우리나라 전역에 일식 현상이 있었는데, 당시 서귀포는 93.1%가 가려지고, 광주는 86.6%, 부산은 85.3%, 서울은 78.5%가 가려졌습니다. 난 과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지적하지 않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치나 사회나 과학이나 지식인들은 항상 입을 다물고 있어야 되는 줄 아는가 봅니다. 6. 장영실은 어떻게 세종에게 발탁되었나? 장영실의 기술은 어려서부터 뛰어났습니다. 이에 누군가의 추천으로 이천 등에게 알려진 듯합니다. 일반 관노라면 누가 쳐다보지도 않겠지만 고려조 장성휘 전서의 아들이었다고 하면 유심히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정몽주와 그의 세력을 직접 처단한 태종 이방원 입장에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장영실을 불러 올릴 수도 있습니다. 실록에 보면 장영실은 태종 이방원이 불러올렸다고 나옵니다. 아마 세종이 즉위하였으나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였던 것같습니다. 당시 태종 이방원은 그가 죽인 고려역적들의 자손을 많이 사면해주었습니다. 일례로 노비처럼 수군으로 오래도록 붙들려 있던 정도전의 아들 정진을 불러올려 중용하거나, 정몽주를 역적에서 충신으로 사면하는 등 적극적으로 해원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장성휘 전서의 아들 장영실이 관노로 있는데, 누군가 장성휘를 알던 관리가 "장영실의 기술이 아버지를 닮아 매우 뛰어나다"는 보고를 올리고, 태종이 이에 화답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7. 장영실은 왜 파직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나? 세종은 조선의 건국왕이나 다름없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장수였다가 쿠데타로 집권하지만 곧 아들 이방원의 쿠데타로 물러납니다. 이방원은 고려 귀족 등 반발세력, 형제 권력다툼 등을 평정하느라 평생 피를 흩뿌리며 전쟁을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지요. 그렇게 무리하게 정권을 안정시킨 다음에 고려 때 죽은 사람 중 그 후손들을 선택적으로 사면시키는 대화합을 시도하고, 그런 다음 피묻은 칼을 잡은 채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새 나라 조선을 아들 세종이 제대로 열어주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된 세종 이도는 처음에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하고, 왕실의 권위를 위해 여러 가지 천문기기를 만들고 천문도를 그리는 등 황제나 다름없는 일을 벌입니다. 이 일에 장영실이 앞정섭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러한 세종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고, 결국 겁박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명사대외교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결국 세종은 임금의 가마를 명나라 천자 가마처럼 만든 장영실을 파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종은 그뒤에도 장영실이 만든 천문관측 시설 등을 모조리 철거합니다. 결국 명나라의 압박을 못이긴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장영실은 관직에서 사라집니다. 이후 그는 고향 아산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그의 묘지는 아산에 있습니다. 저는 소설가이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개연성이 있지 않으면 황당한 스토리는 꾸미지 않습니다. 특히 글로 남는 책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방송이야 보고나면 그만이지만 글은 영원히 남기 때문에 오류를 그대로 두면 언젠가는 잘못된 역사로 자리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드라마는 재미있게 보시더라도 머리에 남겨두지는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드라마 보면서 이 책으로 클리닉을 하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
출처: 알타이하우스 원문보기 글쓴이: 알타이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