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기
□ 정전 두 번째 시간
□ < 정전입문 : 일원상, 개교표어 >
반갑습니다.
오늘이 정전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에 첫 시간을 가졌는데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누구를 위해 일할 것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을 여섯 가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믿고, 일 하고, 돌아갈 곳은 진리, 스승님, 교법, 회상,
사은과 자기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정전은 우리가 마음 공부 하자는 것이다.
목적은 공부의 방향로를 알아서 실생활에 써먹기 위한 것이고,
교전을 어떻게 봉독할 것인가?
1. 그냥 읽는다.
2. 머리로 이해하면서 사전을 찾아보고 뜻을 새긴다.
3. 마음에 유무념으로 대조한다.
4. 연마하고 외운다.
5. 실행한다.
이것이 같이 맞돌아 갑니다. 어떤 분은 전서를 47번 읽었다.
입교 한지 5년 되었는데, 먼저 교전의 기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신(信)
지(知)
각(覺)
신앙은 과거 종교 같으면 믿음이나 신념체계를 통해서 실행으로 된다.
잘 몰라도 믿음 하나로 판단의 기준을 세우게 되고 행동의 기준을
잡아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앎으로 연결이 되면 일시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더 재미가 있고, 능동적인 실행합니다.
그것이 다시 반복을 통해서 전체의 가닥이 잡혀서 의심이 터지고
성리의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스승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존경심과 횐희심이 나면서, 본인의 삶에 확실한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믿거나, 믿기만 하고 행을 안 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불신하는 경우도 있고, 깨달음도 하지 못하고, 앎에서 자만자족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법의 도를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법문을 들을 때는 어렵다 또 한 것이다.
나는 모른다, 잘한다, 못한다. 이런 분별심과 주착심을 놓아 버리고
빈 마음으로 그대로 흡수 해야 한다고 드렸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돈독한 신심으로 들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물건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집을 사준다던가. 맛있는 밥을
사준다던가,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면 너무 고마워 합니다.
그런데 법을 설해주는 것에 대한 가치를 상당히 쉽게 압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유형의 물건의 가치에 비교가 안 되는 가치가 법에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세일 하면 쫓아가도, 법문을 듣기는 어렵고 들어도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 청법이 가능 합니다.
법문을 들을 때 법문무량서원학이라 무량한 법문을 끝까지 다
배우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경전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해야 한다. 법문을 설하는 사람의 법문만 들을
것이 아니라 우주자연이 설하는 법문까지 들을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법문을 들을 때 다른 사람에게 적용 하려고 하지 말고
내 마음에 내 생활에 활용할 생각을 하고,
말하는 사람의 본의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좌산종법사님은 법문을 읽을 때,
‘읽을 때는 읽어도, 읽어도 안 보일 때까지 읽어라. 들어도, 들어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들어라. 무의식 세계에 저장해서
오토가 될 때까지 해라.’
이와 같은 말씀을 볼 때 내가 경전을 몇 번 보았다고, 아니면 몇 번
들었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합니다.
대종사님이 훈련 나시고 혜제 법문을 할 때 비슷한 법문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소를 저 지붕에 매달라고 하면 너희 같으면 매달겠냐?’
이런 예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될 집안은 소를 지부에 매라고 하면 갖다 맨다.
안 될 집안은 ‘무엇 하러 맨다요?’ 하면서 따진다.
그런 예를 선진님이 들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고 합니다.
‘저 예를 또 하시네?’ 가 아니라. 그 예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에 갖다
대기 때문에 달라진다. 앎에서 그친다던가 계교심으로 듣지 않고,
내 실행과 내 마음으로 깊숙이 다가오면 내가 깨달은 만큼 내 공부가
깊어진 만큼 내 신심이 깊어지는 만큼 느낌이 그때그때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법의 묘미입니다.
보통 음식도 자주 먹으면 질린다고 하잖아요? 법은 그러지 않습니다.
내 마음만 살아 있으면 들을수록 묘미가 있고, 들을수록 깊이가 있고,
들을수록 다시 생각하는 것이 법입니다.
우리가 청법을 할 때, 나는 어렵다. 모른다. 불신한다면 서로 간에
시간 낭비가 되기 쉽다. 공부를 할 때 사실 믿음으로 해결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왜 견성을 못하냐? 나는 왜 성리에 가늠이
안 잡히냐? 간단합니다.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뚫리는
것이지 머리로 뚫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7대 교서에 대해서 말씀 들렸죠. 우리 교당은 전서 사경을 하기
때문에 불조요경을 보았느냐? 안 보았느냐? 이런 말 할 필요가 없죠?
전서 사경을 다 한 것을 교당에 내시면 책으로 만들어서 앞으로 계속
보관할 것입니다. 기재하는 것이 마음이 동반되어야 하고 신심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또 스승님을 만나야 하고,
정성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전과 대종경은 원불교의 본경에 해당됩니다.
정전은 원리를 제대로 밝힌 것이고, 대종경은 응용을 한 내용입니다.
오늘은 제일 중요한 교사입니다.
오늘 오신 분은 일원상을 감 잡을 수 있도록 최대한 하겠습니다.
(일원상을 그립니다. )
대종사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진리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죠?
/ 일원
네 진리의 이름을 일원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왜? 붙입니까?
수한이라고 이름을 부르면 수한이가 되죠? 수한교우라 이름 불렸지만
수한이는 아닙니다. 수한이라고 명명했으니까 수한이지만,
사실은 수한이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종사님은 깨치신 진리를 일원이라고 표현 하셨다.
일원이라는 언어를 형상화 한 것이 일원상 입니다.
자,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무, 생령, 에너지. 법. 신, 도,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알고 보면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인
것의 차이지 내용은 같습니다.
그 내용을 이렇게 하셨다.
그럼 다른 종교를 한 번 보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에수님이 못박혀 죽은 상징입니다.
타종교에서 이름은 의인화 되었습니다. 부처님, 하느님.
이처럼 의인화하면 너무 편해요.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등상불을 모셔 놓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원불교는 일원이라는 진리의 이름을 이런
형상으로 표시를 한 것이다.
일원상은 일원의 형상입니다.
일원은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두 가지로 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로 설명하면 신앙문과 수행문입니다.
일원은 인과보응과 진공묘유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을 우주만유의 본원이다,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
자. 우주만유라고 했습니다. 우주만유는 무슨 말이죠? 전쳬를 말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천지만물, 허공법계 똑 같은 말 입니다.
천도품 15장을 보면 293쪽을 펴보세요.
사람이 죽으면 지•수•화•풍으로 흩어집니다.
먼저 호흡이 멈추고, 열기가 식으면서, 물이 흘러나오고, 뼈가 땅이
됩니다. 음•양 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지수화풍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근방에서 풀이 납니다.
풀이 무성하게 됩니다. 그 풀을 낫으로 베어서 밭에 논에 거름으로
씁니다. 자란 곡식을 산 사람이 먹습니다.
자 여기서 우주만유의 본원에서 무엇이 본원입니까?
자. 다시 259쪽 성리품 10장 입니다.
‘대종사 봉래정사에 계시더니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층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사방 산골에서 흐르는 물이 줄기차게 내리는지라.’
바다의 근원을 찾아보니 뭐죠? 강이네, 더 들어 갔더니 냇물이네.
더 들어갔더니 계곡물입니다. 더 들어갔더니 비입니다. 비는 어디서
왔습니까? 바다에서 왔습니다. 웃기네…ㅋㅋ
자. 어떤 것이 뿌리 입니까?
본원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 나무를 그리시며 )
거꾸로 들어가 봅시다. 잎은 가지에서, 가지는 큰 가지에서, 큰 가지는
나무줄기에서, 나무줄기는 뿌리에서..
나무에서 내가 잎이라고 하자. 가지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지를
자르면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은 이파리가 죽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다면 가지를 절대 못 자르게 하겠죠.
그럼 큰 가지를 자르면 어떨까요?
큰 가지도 나 하고 상관이 없다고 자르면 나는 죽습니다.
이것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못 자르게 하겠죠.
만약 나무줄기를 자른다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조금 더 시간이 오래있다가 마를 뿐 결국엔 말라 죽습니다.
그럼 여기서 어떤 것이 근원입니까?
잎은 가지, 큰 가지, 나무줄기, 뿌리, 땅, 햇빛, 바람이 불어야지 땅에서
물을 빨아들입니다. 모세관현상, 탄소동화작용으로 나무가 삽니다.
근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기독교 사상과 원불교 사상의 가리--일의 갈피와 조리--를
내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뿌리를 근원으로 압니다.
뿌리만이 하느님이다. 그런데 원불교의 신앙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다.
결국은 시체, 풀, 곡식, 다시 어린아이로.. 다 우주만유의 본원입니다.
물이 비로 와서 바다로 가지만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듯이..
그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서양에서 왔는지… 백록담에서 왔는가? ㅋㅋ
이것이 바로 만법귀일 일귀하처이다.
우주 만유 본원을 여기에서 가늠잡아야 한다. 아하~ 우주 만유가 전부
하나로 엮여 있구나. 본원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구나.
우리가 신앙의 대상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우주만유를 천지, 부모, 동포, 법률 네 개로
나눴습니다. 나눴지만 서로 엮여 있습니다.
이것(사은)을 다시 일원이라고 합니다. 다시 입니다.
그런데 우주만유가 현상까지만 아니라 시간까지 포함한 것 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일원은 사은이요. 사은은 우주만유 입니다.
이것을 원불교 신앙의 강령으로 표현한 것이 처처불상 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의 관계이면서 서로 어떤 관계인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은혜이다.
이 관계가 인과라는 원리로 되어 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내가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위력이라고 한다. 하나도 위력이 아닌 것이 없다.
비 내리는 것도, 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도, 풀이 나는 것도,
사람이 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과의 원리에 의한 음양의 위력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한다는 것은 내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우주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을 뿌리 또는 창조주라고 얘기 합니다.
우리의 뿌리는 본원인데 우주 만유 전체가 다 하나로써 본원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이것 때문에 살고 있고,
이것에 의해서 살고 있고, 이것은 인과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위력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바로 우주 만유의 본원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은의 빚 덩어리이다. 이것을 다 대종사님께서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 표현해 주셨다. 우리는 무엇을 신앙할 것인가?
이것을 신앙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 보면 내 생존의 근원이다.
이것이 내 외적인 위력이다. 이 위력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절대적 은혜라고 한다.
‘교무님! 우리 집이 태풍이 쓸려 갔어요.’
‘하우스 다 날라 갔는데 무슨 은혜에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무님 나만 은혜 받았습니까? 다 받았는데?’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교무님 우리 엄마가 나를 미워했어요. 안 나으려다 낳았어요.’
전부가 다 인과의 원리요. 위력입니다.
그리고 사은에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위력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불공, 또는 보은이라고 합니다.
동포의 은혜를 구체화해서 불공하는 법이 사요 입니다.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
타자녀가 누구 입니까? 나와 다른 대상이죠? 이분들이 있어야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녀 교육은 당연한 것이다.
공도자는 나와 둘이 아닙니다. 공경의 대상이요. 존경해야 하고 당연히
모셔야 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떠하였는가? 과거에는 하늘만 숭배했고, 아버지만 우대했다.
사농공상 중에서 사만 우대했다. 금수초목은 우습게 알았습니다.
법률은 구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이것들이 다 하나같이 위력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농사지어 본 분은 알 것이다.
식물이 식물이 아니다. 사람이 그것을 먹고, 사람이 썩어서 식물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죽을 때가 되면 자연을 찾는 것 아닌가?
내가 살아나가는 것이 결국 무슨 위력으로 사는가?
사은의 위력으로 산다. 그래서 그 사은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복이 달라지는 것이다.
왜냐?
그것이 인과의 원리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원을 생각할 때
나무 뿌리, 큰 바다, 또는 사람만을 본원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본원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고, 처처불상 신앙이 못 된다.
일원상에 수행이라고 했습니다. 수행은 진공묘유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제불제성의 심인이라고 했습니다. 제불제성은 누구 입니까?
모든 부처님 모든 성자님 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란?
대종사님, 부처님만 들어가지 않고 공자님까지 다 들어갑니다.
그 분들의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분들이 행동하게 된 마음.
심인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수행의 표본이 됩니다.
일원은 사은 신앙의 대상이면서 수행의 표본이라고 합니다.
표본이라는 것은 어떤 표준이 되는 본보기 입니다.
표준과 표본은 약간 다릅니다.
대종사님이 깍두기를 안 먹었으면 우리도 안 먹어야 합니까?
그건 대종사님의 특성이죠? 대종사님의 심법, 마음이 어떠냐가 중요하지
행위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행위 이면에 마음 이것을 우리는 수행의 표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은 어떠세요?
심인(印) 왜. 도장이냐? 똑같다는 것입니다. 인주가 많고 적음의 차이지..
심인을 마음도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형의 도장입니다.
중생이 써서 나온 마음과 제불조사가 쓰는 마음이 다르다.
성질이 났습니다. 한자로는 화라고 하죠.
보통 사람이 화낸 마음과 대종사님이 화낸 마음은 같죠?
무슨 차이일까?
대종사님의 마음은 일원상의 마음이요,
그 사람의 마음은 송곳 같은 마음이다.
제불조사의 심인은 화를 내도 이 마음이다. 일을 해도 이 마음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마음은 찌그러졌습니다. 일원상의 마음이 아닙니다.
제불조사의 마음은 둥근마음이다. 둥근마음이되, 진공묘유의 마음이다.
진공묘유는 어려운데 하나씩 뜯어보면 참으로 쉽다.
‘묘’자는 언제 써 주는 것인가?
있을 때 있어지는데 와! 하게 있어진다는 말이다. 즉 알 수 없게
있어진다. 그래서 ‘묘유’라 한다. 신묘하다, 기묘하다고도 한다.
묘하다, 묘하게 있어진다는 것이다.
분명히 기분 좋게 걸어갔는데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묘하게 안 좋은 마음이 든다.
그러려고 안 했는데 그런 마음이 든다.
그러면 제불조사의 심인은 완벽한 일원상이고,
중생의 마음은 완벽한 안 일원상인가? 어때요?
대종사님 형태는 둥그렇다. 그런데 중생은 둥그럴 때도 있다.
무슨 차이인가?
퍼센트의 차이다.
여러분 교당에 헌공금 낼 때 몇 퍼센트나 둥근마음으로 내세요?
기도비 낼 때는 얼마나 둥근마음으로 내세요?
대종사님이나 부처님은 진공묘유에 바탕 하여 낸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진공과 묘유가 따로인 줄 안다.
이것이 진공과 묘유가 사실은 하나이다. 그러면서 같이 엮어진다.
왜 공 앞에 진 자를 넣는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은 텅 비어서 돌 같은 공,
또는 전혀 감각이 없는 무기를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진공은 그러하지 않다. 진공이 곧 묘유이다.
그래서 ‘공이불공’이라고 한다. 공은 공이되 불공이다.
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은 공이되 있다는 말이다.
유는 유대로 ‘유이비유’이다.
유는 유되 유가 아니다. 제 몸이 유죠? 유가 아닙니다.
지수화풍으로 생로병사가 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묘유와 진공이 따로 있는 줄 안다.
진짜 공부는 진공과 묘유가 같은 줄을 알며, 진공이 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 어떤 이가 바자회 희사금을 냈는데 이름이 빠졌다고 화내더라.
그것은 진공으로 안 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면
그냥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기가 막히게 기억한다.
몇 월, 며칠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줬다. 받는 표정이 어쨌는지도
기억한다.
선물은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받은 사람은 철저하게 유념해서 기억해야 하는데,
언제 받았는지를 기억 못한다.
내가 결혼식에 봉투를 넣어 주었는데, 우리 자식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안 오면 괜찮은데, 내가 준 사람이 안 오면..
‘너 그럴 수 있어? 품앗이가 뭔지도 몰라?’ 한다.
‘어! 액수가 줄어들었네?’
‘너만 바뻐?’
그 때 온갖 것이 나온다.
제불제성의 마음은 봉투를 냈어도 진공의 마음이다.
그런데 일반 중생의 마음은 진공의 마음이 아니다. 기억하고 있다.
차라리 거래가 없던 사람은 사이가 좋은데 어중간한 사람은 사이가
멀어진다.
그래서 내 마음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내 마음을 제불제성의 마음으로 변화시키자.
우리가 항상 ‘상’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 때의 마음은 나도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얼마든지, 제불제성의 심인의 마음이 20%면 30%, 30%이면 50%로,
90% 이상으로 올릴 수 있다. 그럴 수 있어요? 없어요?
내가 질문을 너무 웃기게 했죠?
제불제성의 심인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해요. ‘나는 할 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으로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특징이 무엇인가?
변화하는 마음이다. 진급으로도 변하고, 강급으로도 변한다.
선한 마음도 나고, 악한 마음도 난다. 우리가 수행의 표본.
제불제성의 마음씨. 그런 심법. 그런 혈성. 그런 정성, 그런 지혜로
얼마든지 변화시키자. 하기만 하면 된다. 늘려나가면 된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중생의 본성
이것이 녹차물이다. 본래는 무색의 물이다.
녹차의 성분만 빼면 똑 같은 물이다.
본성과 심인은 그와 같은 것이다. 본성과 심인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착각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하고 있다.
녹차 성분만 빼면 그대로 물이다.
진급과 강급이 개인의 속도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이것도 알고 보면 인과의 원리이다. 전생에 닦은 사람, 연마를 깊이
있게 한 사람, 신심 있게 한 사람은 빠르다. 그러나 늦은 사람은 조만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결국은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일원상이다.
나는 본래 녹차와 같이 파란색인가? 녹차 성분만 빼버리면 맹물이다.
시커먼 마음만 빠지면 된다. 잡념만 제거되면 일심이 되는 것이다.
잡념이 놓아지면 일심은 자동으로 된다. 망념을 쉬면 진성이 드러난다.
얼마나 자신감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법문인가. 아무리 시커먼 물도
색만 빠지면 맹물이다. 아무리 빨간색 물도, 색소만 빠지면 맹물이다.
본래 빨간 물, 파란 물, 검은 물이 아니다.
그래서 가장 바탕이 되는 근본성품은 바로 일원이다.
우리가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심인을 잘 닮아가야 한다.
정산종사께서 갑자기 아산
이 분을 불러서 다짜고짜 그 학교가 중앙대학교 분교인데,
그 학교를 인수하라 하였다. 말만 하지 십 원짜리 하나 준 적이 없어요.
당시 원광대학교는 원불교학과와 국문학과만 있었다.
그 당시 교무님들 월급도 없을 때입니다.
그때 원광대학교 다닌다면 원광대학교가 대학이냐?
멸치가 생선이냐? 이렇게 할 때 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사람이 만나자고 백 번 연락을 해도 중대 총장이 만나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 사람이 중대 총장이 출퇴근하는 집을 찾아갔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조금만 이야기하자 하였다. 그냥 가버려요.
그럼 퇴근 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충남)--을 싸가지고 가서 하루 종일 그 총장을 기다렸던 것이다.
며칠 동안 그러니 총장이 너무 미안해서 잠깐 들어오라고 하였다.
애기를 하니 총장이 감동을 했다. 그렇게 해서 원대가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씨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참 어려운 겁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사은의 보은하려는 마음이요, 바로 둥근마음이요,
일체생령을 위한 마음이다. 그것이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우리가 닮아갈 마음도, 그런 심인을 닮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색소만 빼면 본래 심인이요 일원이다.
그래서 중생이 이렇게 앉아있지만, 본래 중생은 하나도 없다.
다 본성을 포함하고 있는 대상이다. 이것이 일원상이다. 전부..
진공묘유의 마음은 우리의 핵심 마음공부이다.
진공묘유의 마음을 풀어서 뭐라고 설명하는가?
이 일원상이 바로 진공묘유이다. 진공묘유는 바로 일심, 알음알이, 실행.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것이며, 공•원•정이다.
진공이 빠진 묘유는 있을 수 없고, 묘유가 빠진 진공은 있을 수 없다.
진공이 빠진 묘유는 덕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이 난다.
진공에 바탕 하여야 덕으로 나타나서 심인이 됩니다.
진공만 있어도 안 된다. 묘유가 함께하여야 한다.
우리 원기 100년 대적공실 법문이 정산종사 법문에 나온다.
함이 없는 가운데 무위로 하라는 것이다. 무위라는 것이 진공묘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쓰는데 진공에 바탕 하지 않고 마음을 쓰면
전쟁, 섭섭함. 상극. 싸움. 아쉬움이 난다.
일심은 천 가지, 만 가지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알음알이, 실행.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왔는데 내가 차분한 일심으로 하라고 했는데
알음알이를 거꾸로 알려주었다면 덕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어울려져야 비로소 진공이 됩니다.
일심만 해도 안되고, 일심이 반드시 알음알이, 생각이 깊어야 하고..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실행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살고 못살고 하는 것이 전부 다 이 안에 들어 있다.
제불제성의 심인은 천 생각 만 생각의 마음을 한 생각으로 만들 수 있다.
모난 마음을 둥근마음으로 부드럽게, 편안하게, 깨끗하게, 맑게 만들 수
있다. 그 마음이 바로 진공묘유의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욕심이나
무명만 벗어버리면, 우리의 본래 성품은 일원상과 같은 둥근 마음이다.
우리가 법위등급에 보면,
보통급도 특신급도 ‘~000사람이니라’는 말이 나온다. 결국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 부처님 하면 다른 것을 이야기 하는데,
상전급도 항마위도 출가위도 여래위도 다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의 본성 자리가 바로 일원이다.
그 일원은 바로 진공묘유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 진공묘유는 내적 속성과 체성이라고 합니다.
일원상의 체성 이라고도 하고 속성이라고 합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이것이 신앙이라고 했죠.
일원상서원문을 보면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함.
일워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한다고 나온다.
이것은 내적인 속성.
내 안에 본성 같은, 본래 부처님의 심인자리가 갊아져 있다.
그것을 회복하자. 그래서 그것을 복성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수행을 통하여 빼내 버리면 된다. 빠지게 하면 된다.
결국 우리가 수행을 잘 하면 신앙의 위력이 따라온다. 마음으로써 우주
만유 처처불상 신앙을 하고, 또 신앙을 잘 하면 수행의 체성에 합하게
된다. 즉 내가 처처불상을 잘 하면 주위 사람들이 다 도와준다.
그래서 내 본래 체성을 잃지 않게 된다.
신앙과 수행이 서로서로 도와준다.
원불교는 외적인 위력, 내적인 속성을 서로 도와주게 되어있다.
--------------------------------질문 답변------------------------------
Q_
낼 때 걸림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화를 내는 것이 은혜가 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_교무님 : 질문이 좋다. 화낼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화를 내죠?
처음에는 화를 낸 줄 알기도 합니다. 성질 급하면 자기가 화 속에
빠집니다. 대종사님은 진공에 바탕한 화냄 입니다.
그래서 저 밖에서 핏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 갔더니 ‘음. 자네 왔는가?’ 한다. 이중적이죠.
그 화 내는 것이 방편이 된다.
누가 한 번씩 뒤집어 놓으면 죽겠어요. 그 때 탁 멈추어서 수양 연구
취사로 해내야 한다. 화 내지 않은 것이 마음 이라면 진공에 묶인
것이다. 돌 같은 마음으로.. 그래서 내가 진공과 묘유가 하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연주 :
-------------------------------- 2 부 ------------------------------
일원상에 대한 설명 여태 했는데 감을 잡겠습니까?
일원은 진리를 말하고 일원상은 형상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신앙으로 말하면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고 말한다.
우주 만유의 본원이 바로 일원이다.
그것을 신앙하고 은혜에 보은하고 불공 할 때에 복이 있어진다.
그것이 외적 위력이다. 그 다음 내적으로 제불제성의 심인 자리,
일체중생의 본성 자리는 진공묘유 이다. 묘하게 있어지는데
그것이 진공에서 있어지는 것이다.
진공을 알려면, 일념미생전 자리를 알아야 한다.
한 생각 나오기 이전 자리를 바로 진공묘유라고 한다.
이 자리는 바로 의심을 걸어서 반드시 깨쳐 알아야 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를 알 때 나의 실체를 아는 것이고, 실생활에서 진공묘유를
활용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우리가 이 자리를 실행해 나가고, 앎으로써,
깨달음으로써 이 자리를 실행해 나가야 한다.
일원상을 보면 아 저게 나의 마음이다. 나의 실제 마음이라고 생각
하셔야 합니다. 일원상은 우주 만유 전체를 다 해놓은 신앙의 정말
소중한 부처님이다. 저 일원상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이 없다.
어떤 것도 다 신앙의 대상이라는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대로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는
우리들의 마음인 것이다.
다음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개교표어를 간단히 하고
마치겠습니다.
원불교의 개교표어는 강령을 잡아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개교표어이면서, 원불교의 목적이며 하나의 방향이다.
그러면 ‘물질이 개벽되니,’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일제 초이다.
사람이 생각해 내는 것은 다 만들어내는 것 같다.
물질이 개벽되었는데 우리의 정신은 어떠한가?
그것을 따라 잡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거기에 끌려가고
빨려가고, 오히려 우리의 주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외적으로 우리의 물질 개벽을 배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물질개벽을 통해서 무지와 질병과 가난을 다 처리하고
정신 개벽을 통해서 신앙과 수행, 즉 복과 혜를 잘 가꾸어 갈 것인가?
신앙을 잘 하면, 외적 위력에 잘 불공 할 것 같으면 복이 쏟아집니다.
내적으로 우리 본성의 심인자리로 갊아서 끌어내면 이것이 지혜로써
어디서나 막힘 없이 환영 받고 살 수 있고 그 복을 장만하기도 합니다.
물질이 개벽하니 ---외적
정신을 개벽하자. ---내적 (도덕)
앞선 것을 외적인 것이라 한다. 지금 과학문명이 발달하는데 어떻게 잘
개벽해서 우주 생명체들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정산종사님 말씀을 빌려서 말씀 드리겠다.
첫째는 물질을 구하는 정신의 문제 입니다.
보통 사람은 어떻게 구하는가?
내가 전에 공항에서 시간이 나서 수입 가방을 구경하는데
가방 하나가 200만원 3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보통 월급이 200-300만원이 되기 어려운데, 그 가방을 사고 싶어서
악착같이 산다면 그것이 바로 노예이다.
구하는 정신이 분수와 인과와 순리에 맞지 않다.
대종사님은 초창기에 방언 공사를 하셨다. 근검절약과 이소성대를
하셨다. 실지로 땀과 노력에 하여 인과의 원리에 맞게 하셨다.
이것이 올바른 정신이다. 순리로 구한다. 자기 분수에 맞게 구한다.
그런데 정신이 썩고 사람의 가치가 전도 되어, 그런 사람들을 보고는
부러워합니다. 좋은 차 몰고, 좋은 옷 입으면 좋은 사람인가?
겉 사람으로 살면 안 되고, 속 사람이 중요하다.
겉으로 아무리 좋아도, 속 빈 강정이면 그것은 안 된다.
우리가 구하는 정신이 분수에 맞게 구하고, 순리에 맞게 구하느냐?
인과에 맞게, 이소성대에 맞게 구하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물질을 구해서 어떻게 쓸 것인가? 사용하는 정신이다.
사용하는 정신이 내 이득만을 위해 쓰는가? 다 함께 하기 위해 쓰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득만을 위해서 산다.
자기나 자기 가족에 국한되어 있다.
오늘 뉴스를 봤더니, 혼자 사는 노인의 경우 자녀가 용돈을 주는 경우가
드물다 한다. 어쩌다가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었어?
이것이 바로 물질의 노예라는 것이다. 자기 애완견은 병원에 치료해
주면서, 자기 아버지, 어머니는 아프다는데 속으로 돈 계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물질을 욕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효도는 집어 던지고,
양심을 던져버리고 오직 돈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쓸 때 자리이타로 써야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정신이다.
그런데 그 정신이 바로 진공묘유의 정신이다. 처처불상의 정신이다.
미국에 퀘이커 교도들은 조직도 과학도 싫으므로 자연 그대로 살자 하는
사람들이다. 과학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다.
우리는 과학문명을 선용하자는 것 입니다. 원자력이 좋아요 안 좋아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칼이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선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도학문명의 문제점도 있다.
도학만 앞세우면 가난해진다. 소극적이 된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아니다, 도학과 과학을 병진시키자 하였다.
주종을 말하자면 도학이 주요 과학은 용이 된다.
이것을 어떻게 병진하고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돈을 앞세우고 과학을 앞세워서 사람을 차별하고 부모 몰라 하고 양심
어기면 되느냐? 예전에 어릴 때는 손님 오면 다 먹여서 보냈다.
요즘은 오직 눈에 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났어? 우주 만유에서 났다.
내가 노력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사은의 은혜 때문에 나온 것 아닌가?
그러니 사은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더 위력이 있어지는
것 입니다. 보은 할 때 불공이 되어 복이 있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를 모르니 나만 아는 것이죠.
대종사님은 정신개벽의 내용이 여러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진리적 신앙이다. 우주 만유의 본원을 신앙하는 것이
진리적 신앙입니다. 우주 만유 전체가 다 본원이고 이것을 신앙 한다.
우리가 어디서 마음 공부를 할 것이냐? 사실적 도덕. 내 마음의 진공
묘유의 마음을 어떻게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만들도록 훈련해 갈 것이냐?
왜 나는 본래 본성을 갖춘 일원상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적 도덕을
순간 순간 경계 속에서 제불제성의 마음, 둥근마음, 원만구족한 마음,
텅 빈 마음에 바탕해서 쓴다. 이것이 정신개벽의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자력양성도, 지자본위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도
필요하다. 우리 사요는 인간불에 대한 불공 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천지에서 왔다 천지로 돌아 간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알고 보면 이 속에서 나서 살아가는 것이다. 따로 구분 지을 것이 없다.
제가 개교의 동기에서도 자세히 하고,
다음주부터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에 대해서 한다.
뼈대만 말씀 드리면 처처불상 시시불공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처처불상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신앙해?
사사불공으로 한다. 신앙의 방법이 사사불공이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 공부해?
무시선 무처선이다. 진공묘유를 언제 어느 때나 쓰는 것이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이다.
그 다음 원불교 사상 전체의 특징이 나와 있는데,
첫째는 동정일여다. 진공묘유도 멍 때리는 진공, 돌 같은 진공, 감정이
없는 진공이 아니라. 묘유가 함꼐 하는 진공이다. 그래서 동정일여다.
다음은 영육쌍전이다. 돈은 필요 없다가 아니라, 돈도 잘 벌어야 하고
진리도 얻어내야 한고 그것이 보은이 되어야 하는 영육쌍전이다.
다음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이다. 모셔 놓은 불법 받들기만 하는 불법이
아니라, 내가 불법으로 생활하고 생활 속에서 불법을 구현해 내는 실지
생활불교의 모습으로 복과 혜를 직접 장만해 내자는 것이다.
다음에 교리도..
--------------------------------질문 답변------------------------------
Q_
못하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당장 내가 내일 좌선을 하고 싶은데
그때 되면 못하게 된다. 안되니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A_교무님 : 그것이 신분의성과 불신, 탐욕, 나, 우의 관계이다.
신분의성으로 불신, 탐욕, 나, 우를 물리치면 간단히 해결할 문제이다.
아침에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눈이 번쩍
떠지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나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자기의 형편에 맞게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의 마음으로
서서히 해 나가면 된다. 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송곳 같은 마음이 서서히 둥근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수행을 통해서 할 수 있다. 내 본성이 원래 일원상이기 때문이다.
Q_최성양 : 저희가 화요공부방에서 공한 마음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진짜 공한 마음이 아닌데도 해야 할
때 걱정이 되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A_교무님 : 좋은 질문이다. 누구를 대할 때 원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별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원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내적으로 시비심이
생긴다. 옳다, 틀리다. 그러다가 미운 마음이 들어요.
그 다음에는 지구 밖으로 떠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진공묘유가 어려워요?
중국 사람은 한글이 어렵고 한국 사람은 한문이 어렵다. 두 가지 입니다.
자주 접하면 쉽고, 알면 쉽다. 알고 모르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면 어렵고 아직 익숙치 않으면 어렵다.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마음이 나는데,
그때 그 마음을 진공묘유로 공을 들이고 수양, 연구, 취사로 하다 보면
어느새 그 마음이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심인자리,
둥근 마음으로 바뀌어 나간다. 마음은 변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안 변하는 것이다.
타이핑:
편 집:
|
첫댓글 먼 곳에서도 공부심 놓지 않고 계시네요. 반갑습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