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새로 게시판을 개설하면서 첫번째 글로 올린 글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이라는 게시판으로 현대에는 인정받기 힘든 가설을
민족관이나 종교,과학,지역관등에 연연하지 않고 의견을 나누는 장소로
개설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글도 단지 가설임을 인지해 주십시오.
--본문--
진시황하면 떠오르는 것 만리장성, 통일, 분서갱유, 불노초 이런것들~!
여기서 분서갱유에대해 이야기해보면 분서갱유(焚書坑儒)란 말그대로보면
책을 불태우고 유생을 묻어버린다는 뜻인데 백과사전에서 그의미를 찾아보면
개요
책을 불태우고 학자를 생매장한 일.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래 상앙(商)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지만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황(始皇) 34년(BC 213년)
유생이 진제국의 철저한 군현제 강행을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기 이외의 사서는 모두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수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되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하는데 실패한 방사(方士)들이
달아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던 것도 사실이라면, 분서갱유가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위와 같이 쓰여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보면 분서갱유는 만행이 아니라 변혁일수도 있다.
진시황 영정은 중국에서 손에 꼽는 위대한 정치가이다. 왕위에 올라 전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법가를 기반으로 율령을 정비하고 경제에도 탁월해 국고를 늘리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면 인사또한 탁월해 출신국을 가리지 않고 실력제로 발탁했으며 막하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감싸주는 등 인덕 또한 범왕과 달랐다.
(참고로 이사[李斯, ? ~ BC 208]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고 남색가로 알려졌으나
진시황은 이를 알면서도 그를 감싸 임용하고 있다.)
이런 진시황이 이유 없이 왜 분서갱유따위의 만행을 저지르겠는가?
이유는 정체성의 확립이다. 즉 중화사상을 만들려고 하엿던 것 같다.
흩어진 나라들들 합쳐 통일한후 당시 필요했던건 중원을 묶어줄 확실한 정신적인
힘이 필요했다. 당시 중국은 자신들을 중국이라 생각치 않았다. 예를 들어
유교경전에서 칭송하는 백이,숙제는 중국인이 아니요. 동이족이였고 그밖에
경전에 인물들도 상당수 현재 그들이 오캉캐라 부르는 족이다.
(심한경우 은나라가 현재의 만족이나 동이족이였다는 설도 있다. 사료로 보면
주는 은을 멸하고 은의 왕족을 모두 옮겨 송나라에 살게 했는데 사료에 남은
송인들의 생활방식이 동이와 그것과 비슷했다는 내용도 있다. 점을 치는걸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가무를 좋아했다는 등등해서...그리고 선인사상에 졎은
그들의 행동을 주나라 사람들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인이 유태인보듯
경시했다는 내용도 알수있다. 참고로 고사성어에 바보짓 하는 사람들은 다
송나라사람이다. 사족이라는 고사에 뱀 다리를 그리는 것도 송인이구.
하여간 원래 천재들의 행동은 범인이보기엔 이상하기에... 좀 억지스럽지만...)
즉 문화적으로 북방계 민족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통일이후 이를
타파할 필요성이 절실했고 이를 위해 북방족에게 사대적인 사서나 유교경전을
비롯해 이에 관계된 학자를 제거해 버린것이다.
학자 처단의 명분이 불로초인데 고서들에 보면 선인들 혹은 북방 우두머리들의
수명이 기본이 백년이고 천세도 나온다. 위서라고 의심되지만 한단고기나
우리네 환웅이야기에도 수명의 기본이 몇백세이다. 이런 말도 안돼는 사료에대한
증명을 진시황이 요했고 여기에 대해 학자들은 불로초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고
설명했을수도 있는 것이고, 진시황은 그런게 있다면 찾아와 보라고 하였으나
학자들은 그런걸 찾아올리가 없었고 결국 학자들을 사단을 읆는 방사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것일수도 있으리라 추측된다.
그 증거로 생각해 볼것이 유교를 비롯해 제자백가는 다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건드린 건 북방 사대에 관한 부분으로써 일본이 우리역사를 왜곡했듯
필요한 부분만 왜곡했을수도 있지 않을까? 부분왜곡을 바로잡는데 한대의 학자들이
고생은 했지만 중용한 부분은 복구할수 없을 정도로 회손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더 집고 넘어갈것은 진시황의 북방족에 대한 컴플랙스의 결정판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바로 만리장성이 그것이다 현대의 만리장성은 명대에
이루어 졌다고 하지만 거의 이와 동일한 규모로 진대에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이다.
그 위대한 진시황이 미쳤다고 그엄청난 대군을 보유하고도 뭐가 무서워 방어적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당시 오랑캐는 오히려 중국쪽이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근거자료로 현재의 해안선의 높이로 정리된 것이 BC 400년 전후라는 점이
있다. 그전에는 해안선이 더높아 곡창지는 북부로 더올라간다. 지금 황사를
날리는 황하상류는 옛날에는 코끼리가 사는 우림지대 였다는 것이다.
즉 북방족이 비록 농경민족은 아닐지라도 더 양질에 땅을 보유하고
더 강대국이였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시황 이전까진 중국이 북방족에 사대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족과 지리적으로 분할하고
분서갱유를 통해 정신적으로 재정비하고 만리장성 이남의 단일 문화형성을 위해
운하와 도로를 정비하고, 도량형을 통일한것이다.
아마도 진나라가 조금더 나라를 보전했으면 중국인은 스스로를 한족이 아니라
진족이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즉 민족적 개념과 중화사상의 창시자는 진시황
이엿던 것이다. 덛붇여 황제라는 단어 자체를 만든사람도 진시황이지 않은가??
또한 지금의 중국이 하는 동북공정을 보면 그옛날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으니 정말로 타당성이 있는 가설이 아닐지?
카페 게시글
동아시아 역사 토론장
분서 갱유의 진실-만행이 아닌 변혁!
황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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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14 16:21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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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래 진시황이 악인은 아닙니다. 한(漢)나라의 입장에서 역사서가 쓰여졌기 때문에 진시황이 폄하되어 기록된 것일 뿐입니다.
좁은 소견일지 모르지만...그것이 진시황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조금 더 앞날을 생각했더라면 강제적으로 무언가를 파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더 나은 것을 창출해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뛰어난 신하의 능력을 꿰뚫어 볼 줄 알고서 작은 과실을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아량을 가진 군주였다면 어째서 타 문화의 우월성은 인정하지 못했겠습니까? 아무리 정체성 확립이 우선순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