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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이른 더위를 피하려 휴일이면 사람들이 이 계곡으로 몰려들고 있다. 사내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몇 일전 택시를 불러 타고 읍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지만 별다른 치료방법은 없고, 약만 한 달 분량을 타 가지고 돌아왔다. 이젠 기력이 약하여 바깥출입도 잘 못하고 집안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통증이 심할 때면 진통제에 의존하고 수면을 많이 취하는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식사도 쌀가루를 빻아 미음을 쑤고 거기에다 화개장에서 사온 약재를 섞어 조금씩 먹는 편이다. 그것도 한 그릇을 먹으려면 두세 번에 나누어 먹을 정도로 기력이 약해졌다. 사내는 자신의 남은 생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경미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어 하고 경미에게 혼자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령을 터득케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통증이 오면 힘들어 하였다.
일요일 이다. 아침부터 산골자기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일찌감치 산을 찾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바람소리에 실려 들어왔다. 경미는 갑갑해 해는 사내를 부축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은 아래층대로 마을과 계곡의 아랫부분을 바라다보는 한가로움이 있는 반면 이층에 오르면 마을의 입구와 건너편 산등선과 파란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아저씨! 기분이 좋으세요?“
“응! 이층에 올라오니 시야가 넓어서 참 좋다. 나도 젊어서는 너른 세상을 많이 다니고 싶었었는데 사업을 한답시고 바빴고, 지금은 또 이렇게 몸이 안 따라주니 안타까울 뿐이다. 너는 내 떠나고 나면 너 살고 싶은 대로 세상에 나가 모든 것 훨훨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살아라.”
“아저씨도 또 그런 말씀하신다. 슬퍼지게.”
“현실적인 이야기다. 내 이제 정말로 얼마 안남은 것 같다. 너 고생 안 시키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야 할 텐데.”
“.....“
“너 올해 스믈 여덟이지? 참 좋은 나이다.”
“새삼스레 그런 애기는 뭐하려 하세요. 전 나이 같은 거 잊어버렸어요.“
“젊은 사람이 그러면 쓰나? 아직 살날이 창창한데.”
“요즘 아드님과 통화 하셨어요?“
“아니! 한적 없어.”
“전화 하세요. 그래도 자식인데. 나중에 한 남기지 않게요.“
“네가 걱정 안 해도 된다. 그 녀석은 밥 굶지는 않는다.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처가도 살만해. 다만 모든 걸 너무 싶게 생각해서 탈이지.”
“그런데 아저씬 친척들은 왜 안 오세요?“
“오늘은 마지막으로 너한테 그 애기도 좀 해주어야겠구나. 내가 살아 온 과정에 대해서. 나 여기 좀 눕게 베개 좀 가져오겠니.”
경미는 자신이 거쳐하는 방으로 들어가 베개와 얇은 이불을 가지고 나와서 사내를 마루에다 눕혔다.
햇살이 나무 사이를 뚫고 지나와 정자 앞부분을 내려쬐고 있다. 여름에 접어들어 계곡물소리는 더욱더 우렁차게 들려오고 일찍 땅속에서 나온 매미가 터 잡고 요란하게 영역표시를 하고 있었다. 건물 앞자락 소나무와 참나무를 건너뛰며 다람쥐 쫒던 청설모 녀석도 일찌감치 출근을 하여 나뭇가지 타기를 뽐내고 있다. 나무숲과 건너편 언덕을 응시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내 고향은 예전에 말했지만 금산군 군북면인데 우리 아버지는 그곳에서 농사를 제법 많이 지으셨어. 우리 면내에서는 부농이었지. 예전 노인네치곤 학식도 있으셨고 해서 나를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지. 나는 외동아들이고 시골에서는 공부도 조금 하였는데 서울에 가서는 사립대학을 다녔는데 집에서는 법률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적성이 안 맞았어. 어째든 대학을 졸업하고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친구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무역업을 배웠지.”
“그래서 사업을 하신 거군요.“
“그런 편이지. 그런데 처음부터 사업을 하려고 한건 아니고, 친구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졌지. 그래서 친구 녀석에게 사업을 물려주려고 했는데 그 녀석은 죽어도 사업은 못하겠다하고 공직에 발을 들여 놓았어. 그 녀석이 바로 전번에 왔던 그 녀석이야.”
“그래서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친구 아버님이 나에게 사업을 맡기셨고, 나는 고향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고 논을 팔아 사업을 인수 받았어.”
“예! 그랬었군요. 젊어서부터 사업을 직접 하셨네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우리면 사람 중에 이현상 이라는 분이 계셨거든. 잘 알지? 이 위에서 돌아가신.”
“예! 알아요. 빗점골에서.“
“사실 난 그분의 얼굴을 몰라. 내가 몰라. 그분은 1953년도에 돌아 가셨으니까 난 그땐 어렸었지. 우리 고향 분이었으니까 어릴 적 그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는 우리 사회가 공산주의나 빨치산 이라면 무조건 나쁜 쪽으로 이야기 되었으니까 당연하게 그런가 하고 생각만 했었는데, 내가 대학을 다니고 그리고 살아가면서 많은 책을 읽어 보니까 그분에 대해서만큼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냐하면 그분의 집안이 부자이고,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 하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고 그러거든, 그러다가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자 그분은 6.10만세사건 이라는 소리 들어 보았지? 그기에 참가해서 감옥생활도 하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항일운동도 하고 노동운동을 해서 감옥생활을 많이 했는가 보더라. 그러다가 어쩌다가 공산당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래서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나 보네요.”
“결국엔 그렇게 되었다는군. 그런데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생각할 점이 많더라고.”
“피곤하신데 조금 쉬었다 하세요. 아래층에 가서 물 가져올게요.“
“그럴까. 아! 날씨 참 좋다. 그지?”
‘예! 그러네요.“
경미는 물을 가지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생활할 날도 머지않았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아침에 끓여 두었던 보리차를 가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물을 조금 마시고 난 사내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아 그 공산당에 들어가게 된 건 자신의 집은 비록 부자로 살았지만 이현상 이라는 사람 자신은 가진 사람보다는 못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다보았다고 생각이 들더라. 하여간 그분은 그곳에서 활동을 계속하여 고위직에 까지 올라가서 여순반란사건 때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6.25를 맞이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남부군 총사령관까지 하였단다. 내가 전해 듣기로는 그 사람은 부하직원들을 항상 따뜻하게 대하고 모든 일을 솔선수범하고, 또한 사람의 인명을 중시해서 적군이 잡혀 와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더라. 그래서 밑에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매우 존경하고 했는데 아무든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게 생각하였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에는 빗점골에서 죽었는데 항간에는 자살을 했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고 이야기들 하던데. 어째든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해서 활동을 한 건 잘못 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민족운동과 노동운동도 했고, 그리고 인도주의자라는 거지.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나쁘게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나는 나의 고향사람이라 그런지 우선 친근감이 가고, 또 우리 집도 어렵게 살지는 않았지만 나도 항상 어려운 사람들 편에서 일을 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고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조금은 영향이 있었지.”
“우리 동네 사람들도 예전에 이야기를 많이 하긴 하던데 지리산 주변 사람들도 빨치산에 많이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그렇겠지. 결국 그 사람들이 이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아니고 인근 지역 사람들이 많았단다. 우리 친척들도 연관이 있었는지 그 후 뿔뿔이 흩어져서 연락을 끊고 살아왔어. 나도 그 당시를 살았으면 거기에 쏠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저씨야 어딜 가도 남들이 욕은 안 할 거여요.“
“괜히 공치사 하지마라. 쑥스럽게.”
“아니에요. 아저씨도 저처럼 가진 돈 없고 어려운 사람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사람 보면 다 알 수 있거든요.”
“몰라. 세상사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 돕고 살면 좋으련만 세상이 어디 그러하니?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무시하는 게 예사고.”
“그런 세상이 올까요?“
“모르겠다. 경미 너희 같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아라.”
“가만 보면 마음착하고 어려운 사람은 일찍 돌아가셔요.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고, 아저씨도...”
“이젠 그런 애기 그만하자. 괜히 마음이 어두워진다.“
“그래요.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오후가 되자 날씨가 어두컴컴해 지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경미는 이층의 문단속을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바람이 불어 문이 심하게 덜컹거린다. 경미는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가 꿈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행여나 낮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신의 고향마을 헤매고 다니지는 않을까? 그의 영혼은 어디에 있던지 풍요와 빈곤이 양립하는 세상 울타리에서 이념의 틀을 뛰어넘어 자신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을 못 이루던 경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경미는 꿈속에서 아버지를 면전에서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미를 보고는 돌아서서 자꾸만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경미는 아버지를 붙잡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갔으나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가 버리고 경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경미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고, 해가 떠서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사내는 옆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젖혀진 이불을 덮어주려다 경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팔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게 아닌가? 숨을 쉬는지를 확인 하려고 자신의 귀를 코끝에 대어 보았으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흔들어 깨우려고 몸을 흔들자 고개가 옆으로 툭 젖혀져 내린다.
“아- 아저씨! 아저씨! 눈을 떠 보세요. 아저씨!“
경미는 사내의 가슴을 흔들어 보았으나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였다. 순간 경미는 눈앞이 캄캄해져 오면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죽은 것이 확실할까? 그렇다면 다음은?
경미는 한참동안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그가 적어 준 서울과 구례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의 친구는 장례준비를 해서 내려오겠다고 했고, 구례의 친구는 즉시 달려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은 아들 내외였다. 문득 아들 내외가 먼저 오면 무슨 봉변을 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정오가 지난 시간에 전화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고 맨 먼저 달려온 사람은 구례의 친구였고, 그 다음은 아들 내외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연락이 되었는지 그 다음 날에 장례준비를 하여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와 주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장지를 고향이나 서울의 공원묘지로 옮겨 가려고 하였으나 친구들이 지금 살던 집 근처에다 묘지를 만들어 달라는 고인의 뜻을 따르고 필요하면 다음기회에 이장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의하여 집 근처에다 묘지를 만들기로 했다.
서울에서 준비해온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사람들에 의하여 장례절차는 매우 간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고 시신을 염하고 입관절차를 거쳐 잠시 동안 아들내외와 지인들이 고인에 대한 예를 표했다. 경미는 관을 붙들고 오열을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같이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보살펴준 고인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고 애도했다. 친구들이 서럽게 우는 경미를 일으키며 위로를 한다.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아들 내외는 매우 못 마땅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내색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관을 들어서 집 옆 공터에 파놓은 묘지로 이동을 했다. 고인의 관이 땅속으로 내려져 묻힐 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흐느꼈다.
아들 내외는 내내 경미의 눈치를 보면서도 장사를 치루는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례에 사는 친구는 경미에게 장례를 마치면 곧바로 자신을 따라 가자고 하면서 돌아가신 아저씨와 사전에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미는 바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이곳에 있을 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장례가 끝나자 서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집에는 아들내외와 구례의 친구만 남았다. 구례의 친구는 고인의 부탁으로 경미를 이곳에서 데려 나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어 다음날 같이 가자고 경미더러 짐을 챙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내외는 경미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재산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 줄 것을 다그쳤지만 경미는 자신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경미는 구례 친구를 따라 일단 이곳을 떠나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아들 내외는 경미를 붙잡는다.
“아가씨! 정말 이러면 곤란하죠. 꼭 그러면 법으로 하는 수밖에.”
“우리 아버님 재산을 돌려 줘야지 뭐하는 짓인지 몰라.“
“전 재산 같은 거 몰라요. 저도 이젠 이곳을 떠날 거여요.”
경미가 떠난다는 말에 아들 내외는 더욱 길길이 뛰며 경미를 압박한다.
“아저씨! 아저씨는 아시죠? 그렇죠?“
“알아도 내가 말 못해준다. 너희 아버지 재산이다.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가씨에게 이러면 안 된다. 이 아가씨가 이런 상황이 올까봐서 벌써부터 여길 떠나려고 했는데 잡은 건 네 아버지다. 아직은 이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아들이 버젓이 있는데.“
“어째든 우린 지금 여길 떠날 거다. 이것도 다 너희 아버지 유언이다. 난 네 아버지가 부탁한 대로 할 뿐이다.”
“아무튼 아버지 재산은 어는 누구도 손 못 댑니다.“
“경미씨! 어서 짐 들고 나와요.”
“예!“
“그냥 간다고요? 이야기도 안 끝내고.”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된다. 우리 집으로 데려가니 네가 알아서 해라.“
“아저씨도 너무 하세요. 아무리 아버지가 부탁하셨다지만.”
“넌 어떻겠니? 친구가 죽기 전 부탁을 하는데. 내 원망은 마라. 간다.”
경미는 짐을 챙겨서 집을 빠져 나왔다. 나오면서 집 열쇠 하나를 그들에게 던져 주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정이 많은 곳이지만 아들 내외와 함께 있다는 건 너무나 싫었다. 짐을 들고 승용차에 오르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경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경미는 차를 타고 내려오다 하동읍에 잠시 들렀다 가기를 부탁을 했다. 무작정 구례로 가는 것보다는 미장원에 들러서 자신이 그곳에서 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알아보고 싶었다. 미장원에 도착하자 주인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어쩐 일로.“
“제가 의신에서 나오게 되어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이곳에서 생활하며 일을 좀 배울까 해서.”
“아무 때나 오세요. 요즘은 손님도 많고 또 안쪽에 방이 비어있어서 살림도 할 수 있어요. 오늘부터 이곳에서 생활 할래요?”
“경미씨! 일단은 구례에 갔다가 와야 해요. 내가 돌아가신 아저씨가 남긴 말도 전해야 하고, 여기 주인 되시나 본데. 내일이나 모레쯤 오면 되겠어요? 경미씨! 그러면 되겠지?”
“그럴게요. 사장님!“
“그럼 그렇게 합시다. 아가씨!”
“제가 방이랑 치워 놓을게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세요.“
“고맙습니다. 아가씨!”
경미는 어쩌면 이 미용실에서 일을 배워가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야만 아저씨를 빨리 잊고 자신의 생활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차를 다시 돌려 구례로 올라가고 있다. 경미는 돌아가신 아저씨의 부탁이라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돌봐주는 이 아저씨도 너무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저 같을 걸 이렇게 돌봐 주시고.”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그 친구하고 나하고는 피를 나는 형제보다 더 가까이 지내왔으니 남의 일이 아니지. 그리고 아가씨가 그 친구를 끝까지 돌보아 준 게 나도 고맙거든.”
“저야 당연히 아저씨께 은혜를 입어서 그런 거고요. 그리고 저도 궁금한 건 돌아가신 아저씨 재산을 왜 자꾸 저한테 이야기를 하지요?”
“아 그건 다른 친척도 없고 아가씨가 끝까지 곁에 있었으니까 처리 과정을 알거라는 짐작에서 일 거야.”
“사장님은 그 내용을 아세요?“
“나야 알고 있지. 전번에 왔을 때 사실은 그것 때문에 왔었거든. 좀 전 미장원은 내용을 알거고 사실은 모든 유산은 아가씨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 나도 자식에게 조금 나누자고 했더니 죽어도 못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원하는 대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뭐라고요? 어째 그런 일을...그럼 아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그래. 나도 그게 좀 걸려서. 그런데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는 없어. 어떻게 보면 유산을 넘기는 건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어떤 의민데요?“
“예를 들면. 그 유산으로 살아가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그러 거면 처음부터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되잖아요.“
“그건 아니다. 그 친구는 아가씨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는 거요. 그래서 아들이 어떻게 나오든 그 유산을 아들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그 친구가 바라는 뜻이요.”
“너무 어렵네요. 제가 감당하기엔.“
“힘든 일이 있으면 아무 때나 나한테 연락을 해요. 내가 나서서 처리하마. 그 친구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고맙습니다. 사장님!“
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의 섬진강 물은 어쩌면 수많은 슬픈 사연을 안고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구례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 날 하동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하동과 구례의 토지와 주식, 현금통장 등 몇 억 원에 달하는 유산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장차 자신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미장원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미장원에 딸린 아담한 방과 부엌이 있는 혼자서 살림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미장원 아가씨도 경미와 동갑내기로 성격이 좋아 손님들을 상냥하게 대하며 경미에게도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미장원에서 사오일정도 일을 배우고 있을 즈음 서울의 아들내외가 미장원을 찾아왔다.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 유산의 상속자를 추적하다보니 경미가 이곳에 주소가 되어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경미는 자신을 찾아 온 그들을 미장원에서 나오게 하여 근처 다방으로 갔다. 다방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 경미에게 그들은 사정없이 폭언을 퍼부었다.
“야! 이 나쁜 여자야! 처음부터 아버지와 짜고 우리 집 재산을 빼돌리려고 작당을 했지?’ 그렇지?”
“누가 누구하고 작당을 해요. 당신들 아버지하고요. 구례 선생님 말씀 안 들어 보셨어요? 저도 늦게 알았어요.”
“아니 이 여자가 무슨 큰 소리야. 잔소리 말고 우리 재산 내놔!“
“저도 당신들 재산 한 푼도 안 바라지만 저도 저 맘대로 못해요. 이젠.”
“우리 재산 우리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되지. 무슨 잔소리야.”
“아드님 재산 아니잖아요. 저도 돌아가신 아저씨 유언대로 해야 해요.“
“갈수록 태산이네. 이 여자 정말 웃기네.”
“어째든 제 마음 대로 못해요.“
경미가 호락호락하게 자신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자 두 내외는 다방 안 사람들이 다 쳐다보도록 고함을 질러댄다.
“이년이! 정말 웃기는 년이네. 여보! 이 걸 경찰에 넘길까?”
“당신은 좀 있어 봐. 그런 애긴...“
“그래요. 사모님 말씀 잘 하셨네요. 경찰 오라고 하세요. 이러면 저도 법대로 해야겠어요.”
보다 못해 다방 아가씨가 다가와 이야기를 한다.
“손님들 여기서 이러심 안 돼요. 이렇게 싸우실 거면 나가 주세요.”
다방아가씨가 나가 달라는 말에 목소리가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서로간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툼은 계속되었다. 경미는 이러다가는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아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말았다. 구례의 친구 분이 언젠가 한번은 진통을 격어야 할 것이라며 필요하면 경찰의 힘을 빌리라고 하였었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서 경미는 아들내외와 함께 경찰서로 불려갔다. 서로간의 주장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찰관이 물었다.
“그럼 아가씨는 누가 등기를 하였고, 등기와 관련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예! 알아요. 처음부터 듣지는 못 했고요. 뒤에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사람들 어디 살아요?“
“구례에 삽니다. 한분은 회사 사장님인데 돌아가신 아저씨 친구 분이고, 다른 한 사람은 법무사라고 하던데요.”
“등기부 등본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아저씨 돌아가시고 장사 치른 뒤 구례에서요.”
“여기 아드님은 왜 이 등기가 사기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사기라고는 이야기 안 했고, 다만 우리 집 재산이니 아들인 나에게 상속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요. 아드님이 이 사건을 사기라고 주장을 하고 증거를 내놓아야 저희들이 사건으로 인정을 할 수 있고요. 안 그러면 민사소송으로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왜 신고를 하였습니까?“
“이분들이 자꾸만 유산을 내어 놓으라고 협박을 하지 뭐예요. 저도 간접적으로 아저씨가 저에게 남기신 유언이 있거든요. 그걸 지켜야 하는데...”
“일단, 우리 경찰에선 사건 접수를 이 단계에선 안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아가씨가 말한 대로 협박이 있거나 폭력이 오가면 그 때는 사건으로 정식 접수 할 겁니다. 이만 가들 보세요.”
“감사합니다.“
“갑시다. 여보!”
경찰서 문을 나오며 두 내외는 마치 경미를 어떻게라도 하겠다는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이런다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줄 아나 봐라. 도저히 그냥은 못 넘어간다. 누가 이기나 보자. 나쁜 계집애.”
“편하게 잘려면 우리재산 빨리 내놔라!“
“.......”
경미는 그들의 눈초리를 피하여 잽싸게 경찰서 문을 나섰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지만 그들과 맞서기는 매우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미장원에 돌아오니 주인 아가씨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며 경미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경미는 어차피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않고 미장원으로 전화가 왔다. 그들이 미장원의 전화번호를 적어간 모양이었다. 전화가 와서 주인이 받으면 경미에게 바꾸어 주고 경미가 받으면 이내 끊어 버리지만 그것도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미가 미장원 일을 끝내고 쉬려고 하는데 낯선 남자 두 명이 다짜고짜 경미를 미장원에서 끌어내서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 여자 맞지?”
“그럴 거야. 이리 따라와 이년!“
“읍 흡 누...구”
“알 것 없고 신고하면 그냥 안 놔둔다.’
억센 사내들에 붙잡혀 소리를 못 지르게 입을 틀어막고 있어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욕지거리를 남기며 어둠속으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경미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가까스로 지나가는 행인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찰에서는 폭행자를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어두운 저녁에 일어난 일이라 용의자를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경미는 병원에서 일주일간의 치료를 받고 가까스로 퇴원을 하고 집에서 누워있었다.
“경미씨! 괜찮아? 어째 이런 일이! 전 번에 그 인간들이 시킨 것 아니야? 그렇지?”
“모르겠어요. 당분간 밖에 안 나가고 싶어. 괜찮아요?“
“그건 걱정 하지 말아요. 어차피 나 혼자서 하던 일인데 뭘.”
“미안해요. 오자마자. 일만 저질러서.“
“어디 경미씨 잘 못인가? 그 인간들 잘 못이지. 혼자 사는 것도 힘든데 그런 인간들이 있어.”
“그 사람들도 많이 서운 할 거야. 아마도.“
“그건 자기네들이 부모를 잘 못 모시니 그렇지. 그게 경미씨 때문이야? 나라도 그럴 수 있겠다.”
미장원 주인 아가씨가 죽을 만들어다 주었지만 경미는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상을 물리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지나 온 세월들이 너무나도 자신에게는 힘든 시간이었다. 유년기 시절 고향에서 철없이 뛰놀던 시절과 의신에서 아저씨와 잠시나마 즐겁게 지내던 시절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또 다시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아들은 경미가 병약한 아버지를 꿰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민사소송을 통하여 유산을 돌려받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경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젠 서울에까지 불려 다녀야 할 지경이 되었다.
경미는 많은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몸이 시들시들 아파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잠을 못 이루어 수면제를 복용하여야 했다. 이젠 자신의 주위엔 자신을 보호해 줄 언덕이 없었다. 미장원 주인 여자는 너무 어리고 약하며, 구례의 친구 분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의지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서울의 아들로부터 전화를 받던 날 경미는 군청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되어 있는 전 재산을 불우시설에 기증하기 위한 등기절차를 밟았다.
군에서는 경미에 대한 인적사항을 파악하려 했으나 경미는 단호하게 밝히기를 거부했다. 다만 자신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만 했다. 경미는 기분이 홀가분했다. 날아갈 것 같았고 지하에 계신 아저씨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이해를 해 주실 것만 같았다.
저녁 무렵에 다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언제까지 버틸 거야? 다음에 어차피 법원에 불려와 창피당할 건데 이쯤해서 끝을 내시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고 있다.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다시 물어 볼 거다. 뭐가 진실인지.”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소리는? 말 그대로지. 너 한 테는 한 푼도 못준다.”
“이 놈의 여자가 미쳤나?“
“그래! 나 미쳤다. 네가 날 미치게 했다. 어디 젊은 놈이 맨 날 욕지거리나 하고 불쌍하다. 네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이런 아들이 태어났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게 완전히 미쳤네. 내가 내일 내려간다. 기다려라.“
“와서 다 가져가거라. 가져 갈 수 있으면.”
경미는 전화를 끊었다. 이게 마지막 밤이라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별로 의미기 없을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좋은 일을 하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아저씨가 주신 것만이라도 지키는 게 도리라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심경을 알리고 싶어 구례의 아저씨 친구 분에게 편지를 써서 상위에다 올려 놓았다. 언젠가 보여지 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탔다. 화개장입구에서 내려 의신을 향하여 걸었다. 여름철이라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하다. 더위를 피해 일찌감치 계곡을 향해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혼자 걸어가는 경미를 쳐다보곤 한다.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쌍계사 입구 아래 계곡물이 많이 불어났지만 반쯤 벌거벗은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려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쌍계사를 벗어나면서 부터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적게 보인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계곡 구석구석마다 사람들이 들어찰 것이다.
의신 마을에 도착했다. 간밤에 이슬비가 왔었는지 나뭇잎이 촉촉하게 젖어 있고 마지막 안개가 산허리를 감고 있다. 집 앞을 지나다 보니 대문간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커다란 열쇠가 채워져 있다. 서울 아들이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고 열쇠를 바꾸어 달았나 보다. 경미는 시간이 지나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짓는다.
건물을 지나 아저씨의 무덤 앞에 도착했다. 시간에 쫓겨 제대로 단장되지도 못한 무덤이 애처롭다. 경미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울지 않고 애써 담담하려 마음을 먹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모도 없고 일가친척의 소재도 모른 채 떠돌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정을 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쩌다 그 소중한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서로가 헤어졌다 같은 길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도록 슬펐다.
얼마를 무덤 앞에서 그렇게 넋을 잃은 듯 앉아 있던 경미는 삼정마을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시원한 물소리와 매미소리가 고요한 계곡의 적막을 깨우지만 이젠 경미의 귀에는 그런 것 마저 들리지 않는다.
옛 고향마을에 다다를수록 부모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어려운 시절 화전을 일구고 나무를 해다 팔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겨운 생활을 하시던 부모님이 경미를 반기며 두 팔을 내 뻗지만 경미의 모습엔 그것이 왜 그렇게 서글퍼 보이는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모님의 산소는 지난번 아저씨와 함께 가꾸어 놓아서 그런지 제법 보기가 좋았다. 경미는 무릎을 꿇고 절을 마치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왜 이렇게도 빨리 데려가 버리는지? 그러나 경미는 신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경미는 빗점골로 올라왔다. 어질 적부터 오르내렸던 곳이지만 오늘따라 나무하나 바위하나가 다 슬퍼 보인다. 지리산자락 형제봉과 벽소령을 머리로 하고 긴 세월을 지켜오며 이유야 어떻든 가난과 서러움을 가슴속에 간직한 사람들이 계곡을 그 안타까움의 핏물로 바위와 골짜기를 적셨던 그날들. 불쌍한 부모님의 영령들이 작은 오두막집 굴뚝 연기를 타고 올라 이 골짜기에 소리 없이 스며들었을 그곳. 어려서 전해 듣고, 아저씨가 이야기 하던 이현상이라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마지막 삶을 다한 이 바위틈.
경미는 마지막 하늘을 보기 위해 높은 바위능선으로 올라갔다. 철모르는 산새는 경미의 마음을 읽은 듯 구슬프게 울고, 먼 하늘 구름도 고개를 돌리려는 듯 빠르게 흘러가 버리고 있다.
건너편 덕평봉과 칠선봉이 안개 속에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지점. 경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올라 눈을 감고 높은 절벽 바위위에 섰다. 어머니, 아버지와 아저씨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한참 후에 메아리가 돌아 왔을 때에는 경미의 육신은 바위 아래로 떨어져 내린 꽃잎이 된 후였고, 그녀의 영혼은 어느 새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경미의 머리에선 붉은 선혈이 흘러내려 바위와 풀숲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만큼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긴 한과 빗점골에서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핏물과 눈물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마파람 부는 언덕/‘빗점골의 눈물’ 중에서)
* 이현상은 1905년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장을 지냈고, 면내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소유했다고 한다. 이현상은 보성전문(현 고려대 전신) 법학과를 다니다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다 체포 투옥되었고,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일행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지산이 되었다. 그들의 세력들이 소멸되어 가던 중 1953년 9월 18일 화개면 의신 빗점골 합수내 흐른바위 근처에서 토벌대에 의하여 사살(자살이나 북한에 의한 타살이라는 주장도 있음)되어 그 시신은 20일간 서울의 창경원 등지에서 전시된 후 화개장터 옆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되어 뿌려졌다.
이후 북한에서는 영웅칭호를 받아 평양 선미동 애국열사릉 1호에 추서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쿠바의 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에 비유하며 철학이나 인간성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도 가지지만, 이유야 어떻든 동족상잔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주변 지역민들의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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