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춘선 선생은 구한말의 군인으로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한 후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1919년 용정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후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조선독립기성총회와 대한국민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국민회 지회들을 간도에 72개소 설치하였다.
구한말의 남대문 수문장으로 지내다가 군복을 벗고 만주 용정촌으로 건너가다
대한국민회장 구춘선 선생이 북로독군부장 최진동에게 보낸 서신 사본(1920년 7월 13일). 믿을만한 중국 육군 연대장으로부터 중국군이 일제의 압력을 받아 북간도에 있는 독립군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 사실을 독립군에게 알리고자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에 대해 전하고 있다. (양면 따로 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
<대한국민회장 일경에 붙잡혔다가 중경의 보호로 피신해>(동아일보 1924년 6월 9일자 기사 사본). 구춘선 선생이 둘째 아들 구자익의 집에서 요양 중이다가 6월 2일 전날부터 잠복하고 있던 일본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될 뻔 했으나 이 사실을 알고 출동한 중국 경찰의 보호로 피신하였다는 내용이다. |
구춘선具春先(1857~1944.3.20.)
구춘선은 하급 병사로 시작하여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의 일원이 되어 궁궐 수비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을미사변 후 북간도로 이주했는데 당시 북간도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간도 관리사인 이범윤이 한인들의 보호에 나서자 구춘선도 한인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여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구춘선은 북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후 캐나다 선교사 그레이슨을 만나 기독교도가 되었으며, 본격적인 민족운동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용정중앙교회를 설립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한편 북간도 지역의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간민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애국정신을 고취했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에서 설립된 민족학교 수는 약 100개에 달했습니다. 이에 따라 간도 지역은 항일운동의 인적 양성소가 되어갔으며, 그 중심에 구춘선이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북간도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습니다. 때마침 조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도 한인들과 함께 3월 13일 용정에서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이후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한국민회를 조직했습니다. 대한국민회는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자치를 돕는 북간도 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안무 장군과 함께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와의 연계투쟁을 추진했습니다. 구춘선은 계속해서 대한국민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와 연합하여 항일 무장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로 평가받는 청산리 전투입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한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야만적인 간도참변을 자행합니다. 구춘선은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으며, 자유시 참변 후에는 독립군 간부사관학교 설립과 국내 진공작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경 단체를 습격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26년을 기점으로 그는 무장투쟁에서 종교 활동과 교육운동으로 전환합니다. 만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멘토이자 스승이 되어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만주에서 순국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