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趙芝薰씨와 그 주변 /조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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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왕학수·정한숙·황산덕·한태연·정비석·한창우·이관구·민재정·오종식·김광주·유호·
안의섭·박기원·김진찬·이한직·조영암·이하윤·이헌구·이명온·조경희·조애실·양주동·김광섭·
김환기·박연희·한노단·이봉구·이해랑·윤용하·이진섭·박인환·이인범·전봉초·김광수·김송·
박재삼·정한모·백철·이무영·한무숙·정종화·천상병·주요섭·김성한·전숙희·송지영·오영수·
조풍연·박계주·모윤숙·김동리·조연현·곽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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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씨(1920.12.3.~1968.5.17.)와 그 주변, 이렇게 쓰고보니, 맨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왕학수(王學洙)씨이다. 왕학수씨는 그 당시 조지훈씨와 같이 고려대학교의 교수로 나가고 있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상지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철학과 교수로 있다고 했다. 물론 조지훈씨는 국문학과 교수로 있었다. 소설가 정한숙(鄭漢淑)씨는 부산 피난시절까지 정음사(正音社)에 있다가 수복 후 역시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이렇게 조지훈씨는 고려대학교에 적이 있는 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 그의 주변에 고려대학교 교수들이 많았다. 아마 지금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교수들이 술을 많이들 했다. 문인은 아니지만 서울 법대의 황산덕(黃山德) 교수와 한태연(韓泰淵) 교수는 단짝으로 명동 출입이 많았다. 그것도 주호급(酒豪級)으로, 내가 가는 곳마다 그분들도 있어서 많은 술 신세를 진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특히 황산덕 교수는 그 시절 정비석씨의 인기소설 자유부인自由夫人의 논쟁으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논객이었다. 자유부인은 당시의 한국사회의 변모를 그려낸 대인기소설이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았던 톱 클라스의 신문이었다. 사장은 한창우(韓昌愚, 작고) 선생, 주필은 이관구(李寬求) 선생, 편집국장은 민재정(閔載禎)씨 혹은 석천(昔泉) 오종식 선생, 문화부장은 김광주(작고) 선생, 차장은 유호(兪湖)씨, 역시 문화부 기자에 안의섭(安義燮, 만화)씨, 박기원(朴基媛, 소설가)씨, 그리고 김진찬씨 등이 있었다. 대단한 활기였다.
그런데 이 인기연재소설 자유부인이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황산덕 교수의 글이 신문에 나타났다. 그것에 대한 반박문으로 필자 정비석씨의 글이 즉각 나타났다. 그 필자의 반박문에 대한 반박문이 다시 황산덕 교수의 글로 나타났다. 그 황산덕 교수의 반박문에 대한 필자의 반박문이 또 즉각 나타났다. 이렇게 황산덕 교수와 필자 정비석씨 간의 논쟁이 또한 장안의 독자들의 흥미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이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한 제삼자들의 글들이 또 나오기 시작을 했다. 심지어는 본격적으로 문학평론가들의 글도 나타나기 시작을 했다. 가정부인·학생·회사원·노동자·농어민, 온 한국이 떠들썩할 정도로 소설은 소설대로 열기를 더해가고, 논평은 논평대로 번져나가고, 드디어 영화까지 제작, 상연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황산덕 교수는 장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명동가에서 대인기교수였다. 물론 나는 깊이 그 글들을 읽은 일이 없기 때문에 황 교수는 무엇을 주장했고, 필자 정비석씨는 무엇을 변호했는지, 상세한 것은 모른다. 또한 설사 그런 글을 읽었다 해도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고, 그런 걸 따질 내 성격이 못 된다. 옛날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모든 것이 큰 강, 대하처럼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생관에 너무나 나는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내 자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내 자신, 나를 살아가는 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씨도 문인들하고만 얼려다니는 게 아니라 학자 교수들하고 얼려다니는 수가 많았다. 그 단골 손님이 왕학수씨였다. 왕교수는 코 밑에 굵은 까만 수염을 한일자로 깎아 기르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갈 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나중에 고함소리로 변한다. 노래도 나온다. 독일어도 나온다. 하나도 악의가 없는 그 천진난만한 학생 기분, 아 지금도 그 청춘들이 그립다.
어느 술집에서나 술에 취해 들어갈수록 입에서 큰 소리로 터져나오는 그 철학, 그 문학, 그 예술, 그 인생, 그 노래, 그 뜨거운 생명에 주석의 모든 친구들은 도취해 들어가곤 했다.
조지훈도, 이한직도, 조영암도, 이하윤도, 이헌구도, 이명온 여사도, 조경희 여사도, 조애실 여사도, 때론 양주동 박사도, 김광섭 시인도. 때론 김광주·김환기·박연희·한노단·이봉구·이해랑·윤용하·이진섭·유호·박인환도, 때론 이인범·전봉초 김광수도.
이러한 장면이 저녁마다, 밤마다, 명동 구석구석 술집마다 벌어졌던 1950년대의 한국 예술가들의 황금시대, 지금도 꺼지지 않는 먼 추억의 등불들이다. 돈은 없었어도.
실로 그것은 술집이 아니라, 고급한 예술 토론장이었다. 그 세미나 장소였다. 그리고 외로운 존재들의 생존의 아지트들이었다. 문인들 화가들 음악인들 연극인들 영화인들, 모두가 함께 모이던 그 명동, 그 술집들, 지금은 그 자리들이 모두 신발가게, 아니면 옷가게, 아니면 화장품가게, 아니면 증권회사들로 우글거리고 있다. 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