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
흑산도 노래비
사촌서당
돌담길섶의 우물터
흑산도 본당 사리 공소
-광야에서 30-
흑산도의 정약전 이신웅
올 여름, 다섯 분의 은퇴 장로님들이 흑산도에 가기 위해 목포항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배편이 막힌다고 해서 못 가고 9월 들어 재도전을 했다. 아침 7시 30분 목포 연안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비가 좀 내렸지만 정시에 홍도행 배는 출발했고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2년 동안 해외여행을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어서 노인들이 국내 여행이라도 열심히 다닌다. 홍도 흑산도 여행을 몇 번씩 다녀오신 분도 있지만 나는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섬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김훈이 쓴 장편소설 ‘흑산’에는 흑산도에 가는 뱃길을 묘사하며 ‘어물장수들이 내지른 토사물과 똥오줌에 정약전은 뒹굴었다. 배가 치솟고 가라앉을 때마다 의금부 형틀에서 매를 맞을 때, 하얗게 뒤집히던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배가 가라앉을 때 정약전은 의식을 잃었다’라고 쓰고 있다. 사공 문풍세가 몰고 가던 돛배는 하루 낮, 하루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도초도를 지나 흑산도에 도착하지만 우리가 탄 고속 훼리는 도초도 흑산도를 지나 홍도에 도착하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홍도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하선했다. 코로나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여 30여 명의 승객만 내렸다. 짐을 가게에 맡기고 홍도 1구의 마을길을 따라 언덕을 넘자 반대편에 한적한 해안이 나오고 네댓 식당이 보인다. 인적은 드물지만 식사는 훌륭했다. 언덕을 다시 넘어와서 12시 30분부터 2시간 반 동안 홍도 일주 유람선 여행을 한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멎고 해가 비친다. 해안의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여러 이름의 바위섬과 바다로 꽂히는 붉은 암벽과 동굴들이 절경이다. 그래서 이름이 홍도일까?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흑산도로 가는 배 시간을 기다리며 바닷가 노점에서 삶은 홍합을 먹는다. 섬도, 항구도, 다니는 배도 극히 편리하고 깨끗하고 아름답다. 배를 탄지 30분 만에 흑산도 예리항에 도착했다.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섬을 육로로 일주하며 구경하는 것이다.
상라리 열두굽이 길을 오르자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있다. 가수 이미자씨가 이곳을 방문하여 남겼다는 핸드프린트도 곁에 있다. 섬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의도가 도처에 보인다. 일주 도로에는 적어도 세 군데 가파르게 구불거리는 도로가 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벨트를 확인하시고 의자 앞 손잡이를 붙잡으세요. 잘못하면 튀어나갑니다.” 익살맞은 버스 기사가 너스레를 떤다.
“이곳이 정약전 선생 유배지입니다. 가보실라요?” 나는 이곳을 보기 위해 흑산에 왔다.
정조 대왕이 승하하자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노론 벽파가 시파와 남인세력을 몰아내려 벌인 천주교 박해사건이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다. 사옥은 1월부터 연말까지 계속되었다. 정약종(若鍾)은 참수 당하고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를 간다. 그 해 음력 9월 맏형 정약현의 사위(약전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이 충청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중국으로 보내려던 백서(帛書)가 압수되어 황사영은 능지처참 되고 약전과 약용은 다시 소환되어 문초를 당하고 약전은 흑산도의 우이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1779년(정조 3년)에 천주교인이 된다.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세운 교회에 약전, 약종, 이백 등이 주일 미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사옥 때 죽지 않고 유배 가게 된 일 자체가 배교했음을 증명한다 해서 공식적으로 가톨릭 사에서는 배교자로 생각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약종이 문초를 당하며 약전과 약용은 심지가 굳지 못하여 죽음으로 신앙을 지킬 수 없다고 발고하여 살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어서 그들이 배교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약전은 우이도에서 현지처를 얻어 두 아들을 낳게 되나 생계가 어려워서 1807년쯤 흑산도로 가게 된다.
사리마을의 돌담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유배문화공원이 나온다. 고려 때부터 조선조까지 130여 명의 중죄인이 흑산도로 유배 온 것을 기념하는 곳이다.
처음 만나는 곳이 유배문화체험장이다. 초가지붕에 붉은 흙벽의 작은 집들을 지어놓고 유배의 종류를 설명하는 게시판이 있다. 고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이웃과 어울릴 수 있고 가족이나 제자가 동행할 수 있었다는 본향안치(本鄕安置), 죽이기 전에 임시 가두어 두는 곳으로 돌 웅덩이로 만들고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로 격리시켰던 중죄인의 위리안치(圍籬安置), 왕족이나 고위관리를 본인 혼자 절도에서 유형생활을 하게 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등이다. 정약전의 유배는 절도안치인 셈이다.
바로 위에 사촌서당 沙邨書堂 (복성재 復性齋)이 있다. 사리에 자리 잡은 약전은 유배 중의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복성재를 만들었다. 성리학을 다시 세운다는 뜻이 있을까? 인재를 양성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유배생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대여섯 아이들을 가르쳤고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복성재라 간판이 붙은 문을 들어서면 석축 위에 사촌서당이란 현판이 붙은 단아한 집이 나온다. 1998년 신안군에서 복원한 집인데 현판에는 ‘다산 정용 서’라는 낙관도 있다. 강진의 다산초당의 다산동암처럼 다산의 글자를 모아 현판을 만든 모양이지만 다산 관련 문헌에는 沙村書室이라 쓰고 있고 약용이 직접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낙관을 붙인 것도 옳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이 건물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천주교 광주 대교구의 한 선교사가 사촌서당에 기거하며 사촌서당과 사리 공소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손암이 유배 중에 남긴 유명한 저서는 우이도에 있을 때 홍어장수 문순득이 폭풍으로 표류하여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을 떠돌다 3년 2개월 만에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쓴 ‘표해시말’,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하고 대책을 말하는 ’송정사의(松政私議)‘ 조정에서 벌목을 금했기 때문에 섬사람들이 죽어도 관을 만들지 못했다. 손암은 벌목을 금하는 것보다 식목을 주장했다.
1814년(순조 14년)에 펴낸 흑산도 근해의 155종의 어류와 수중식물을 분류, 설명한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우리나라 최초의 바다생물 백과사전일 것이다. 현지 청년 창대(張德順 昌大)의 도움을 받아서 어류를 관찰하고 연구하여 책을 완성했다.
“나는 그를 초대하여 잠을 재우면서 함께 연구하고 궁리하여 차례를 매기고 책을 만들어 ‘자산어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의 말대로 같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 공저라고 할 만하다.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약전은 “자산은 흑산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 왔다. 흑산이란 이름은 어두워서 두려울 만하다.(黑山之名 幽晦可怖) 집안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흑산을 玆山이라고 썼다. 玆는 흑과 같은 뜻이다”라고 썼다. 근래에 玆山을 자산으로 읽는 것에 반대하고 현산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玆를 ‘검다’는 뜻으로 사용할 때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담길을 내려오면 바로 작은 성당이 나온다. ‘광주대교구 흑산도 본당 사리 공소’. 몽돌로 벽을 쌓고 맞배지붕에 함석을 얹은 소박한 성당이다. 1957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돌담길섶에 예사롭지 않은 오래된 우물터가 있다. 거친 돌과 붉은 진흙으로 만든 우물터가 씻기고 마모되어 있고 정자 같은 건축물이 우물을 덮고 있다. 섬에는 우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약전이 자주 이용했다는 우물터일 것 같다.
길가에 정자가 하나 나온다. 손암정(巽庵亭)인 모양인데 마을 사람들이 참깨 단을 세워놓고 말리고 있었다. 이어서 ‘자산어보원’. 흑산도에 유배 온 사람들과 바다생물을 소개한 돌비석이 열 지어 서있다. 무엇인가 볼 것을 만들어 놓으려는 신안군청의 노력일 것이다.
다시 버스에 올라 일주관광을 마친다. 예약한 흑산도 문화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조용한 호텔이다. 로비에 화환이 있고 이 호텔이 바로 며칠 전 가톨릭 ‘피정의 집’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텔에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겼던 모양이다.
흑산도에 가톨릭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약전이 우이도나 흑산도에 있을 때 문순득이나 창대에게 어느 정도 가톨릭 신앙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가 배교한 것이 아니었다면 절해고도에서 가느다란 신앙의 끈이라도 의지하지 않았을까?
알려진 대로 1951년에 조수덕(마리아)가 고향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여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1958년에 아일랜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흑산도에 들어와서 선교하며 주민들을 위하여 큰일을 했다. 당시 전국의 모든 성당이나 교회에서 했던 것처럼 미국에서 원조한 분유, 옥수수가루, 밀가루 등을 나누어주어 기아를 면하게 했고 도로를 정비하고 다리를 놓았다. 중학교를 세우고 특히 진요한(,Sean Brazil) 신부는 발전소와 조선소를 세워 섬 주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그래서 흑산도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 현재 주민의 25%가 가톨릭신자여서 광주대교구 안에서 신자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밤늦도록 은퇴 장로들이 호텔 밖 벤치에 앉아서 밤바다를 바라보며 삶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