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 편에서 · 5
―떠날 때면 눈물 난다
권 옥 희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봄이 온다고 노란 황사 몰고 온 겨울 끝자락에서 묶인 발목을 풀며 바람은 말했지
내 앞에서 어느 날 문득 사라진 고향, 구두굽이 다 닳도록 돌고 돌은 길이 어느새 하늘에 닿았다
생생한 굽을 갈아 끼우며 발자국에 묻혀 여기저기 박혀 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고향으로 꿰어 차면 그 땅은 불쑥불쑥 어린 날 동무들 한 명씩 손잡고 나와 보이냐, 보이느냐 소리치고
새 굽으로 단단해진 구두를 신고도 길 어디에 발 못 붙여 어질어질, 허공에 떠 있는 그리움 그 그리움 밑을 서성이며 나, 이제 고향땅을 밟는 건 목매는 일이 되었다.
「그리운 고향」전문
어쩌자고 우리를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지 봄을 기다리는 마음 아랑곳없이 꽃샘추위에 황사에 기지개켜려던 마음이 절로 움츠러드는 날씨가 계속된다. 뼈 속을 파고들 만큼 시베리아 어디쯤에서 날아온 것 같은 찬바람, 파리하게 떨고 있는 내 입술과 달리 때를 놓칠 세라 돋아날 것은 너도 나도 앞 다투어 파릇파릇 보드라운 잎을 틔우고 세상 밖으로 속속들이 나온 봄기운들은 그깟 추위 아무것도 아니라며, 제자리에 있을 것은 있게 한다.
답답한 땅 속 보다는 그래도 햇살 눈부신 세상이 좋아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고 연두 빛 뽀얀 얼굴들은 우리 눈길을 기어코 봄으로 안내한다. 이 작은 것들의 길 안내를 받으며 4월 둘째 주 일요일 내 고향 임동초등학교에서는 2010년 총 동창 체육대회 어울 한마당이 열린다. 올해는 내 동생이 48회 주관기수로 참가하기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향에 가야 한다. 혹여 갈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제발 별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기를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늘 몸도 마음도 바빠서 친구들도 잘 안 만나고 사는 내 동생, 고향의 동생들과 내가 연결되는 바람에 서로 연락이 닿게 되고 2학년 때 떠나 겨우 8년 밖에 살지 못한 고향이 무슨 마음에 닿을까만 그래도 손만 잡으면 놓지 못하는 게 고향이고 고향의 친구인 것을 동생도 알았는지 친구들과 함께 아침 일찍 내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서울에서 함께 내려갈 우리 동기가 한 명도 없다. 작년에는 자동차 세 대로 나눠 타고 갔는데 공교롭게도 올해는 은희가 시아버지 제사여서 함께 가지 못한다고 했다.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고 빠질 수 없는 일이니 봐 줘야지 했는데 웬걸, 은희 못 가는 이유처럼 다른 친구들도 다들 일이 있거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못 간다고 했다. 어쩜, 너무했다. 남자 애들 몇은 전날 볼일이 있어 먼저 내려가고 나는 은희한테 전화했다. 나 혼자 어떻게 가냐고. 하지만 향우회에서 준비한 버스가 롯데월드 너구리 상 앞에서 토요일 1시에 출발하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래? 그런데 내가 탈 자리가 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없으면 언니, 오빠 무릎에라도 끼어가지 뭐. 더구나 무실 살던 45회 우리 화순이 고모도 처음 버스 타고 간다 하니 친구 없으면 오랜만에 만나는 고모하고 말벗이 되어 가야지 하고 부랴부랴 준비해서 잠실로 향했다. 잔뜩 흐린 하늘에 일기예보에는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행사를 준비하는 우리 주관기수들은 얼마나 속이 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향으로 갈 버스에는 먼저 온 사람, 나중에 온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반갑고 내 맘 같은 설레임으로 부풀어 있었다. 언제나 아버지처럼 푸근한 류필휴 회장님과 김용진 대선배님은 바쁜 일이 있어 못 오시고 43회 재경산우회장님인 김희수 선배님이 오늘은 제일 어른이시다. 우리 화순이 고모를 비롯하여. 류인섭, 류기헌, 강호원, 김재수, 김해동오빠 후남이언니, 태연이언니, 시학이, 필현이, 기중이 동생 등 이미 산행에서나 향우회 행사 때 얼굴을 익혀 친숙해진 사람들과의 동행은 친구들과 고향 가는 재미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닮은 사람끼리 모두 한마음으로 고향에 갑니다 물에 잠겨 볼 수 없는 집이며 골목이며 맡을 수 없는 흙냄새지만 마음 안에는 언제나 그대로 우리를 머물게 합니다
그래서 고향에 갈 때면 그리움이 먼저 따라붙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사랑은 고향이기를 기대하는 우리는 그 그리움 하나에 붙들려서 없는 고향도 목이 메어 찾아갑니다
솟는 눈물을 감추며 우리의 영원한 길 내 어린 날의 마을을 찾아 이렇듯 절절한 마음으로 찾아갑니다.
「 고향 가는 길」전문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해동오빠가 마이크를 잡기 시작하면서 부푼 마음은 이미 고향에다 부려놓고 어느새 누그러진 마음에는 흥겨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참이슬이 몇 순배 돌고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낚시해서 잡았다는 회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아침도 안 먹은 빈속에 소주는 당연히 써야 하건만 오늘따라 소주 맛이 왜 그렇게 달게 느껴지는지 다음날 운동장에서 펼쳐질 나의 흥겨움과 끼는 이미 여기서부터 예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안동이 가까워올수록 걱정된다.
5시에 도착하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남선동 영자네 집으로 가야 하는데 옥례의 7시 퇴근시간에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해놓은 터라 어디 가서 시간을 메워야 할지 이럴 땐 서울 친구들 생각 절로 난다. 종착지인 안동 터미널에 가기까지 이미 같은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임 장소 가까운 곳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부럽다! 혼자 터미널에 남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눈에 띈 미용실에서 아침에 바빠 미처 하지 못한 머리를 손질했다. 창밖으로 환한 목련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고향에 왔다는 즐거움에 내 긴 머리도 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옥례가 퇴근했다는 연락을 받고 안동초등학교 앞에서 만났다. 우리의 만남과 내일 행사를 위해 새벽 4시에 나가서 일을 했다니 얼마나 피곤할까? 집에 들려 땀 흘린 몸을 씻고 화장하는데 단 20여분! 아유, 대단하다. 나였다면 아무리 적게 걸려도 한 시간은 잡아야 하는데 그러니 우리의 대모요, 무슨 일이든 척척해내지. 친구지만 우리 옥례 화이팅! 이 절로 나온다. 상쾌한 옥례의 마음과 친구와 함께 해서 든든해진 내 마음을 실은 옥례의 차는 드디어 영자네 집으로 향했다.
해마다 열댓 명씩 가던 서울 친구들이 몇 명 안 되니 혹여 다른 친구들도 일이 있어 많이 참석하지 않아 썰렁하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은 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에서, 대구에서, 포항에서, 그리고 멀리 순천에서 국희까지 40여 명 친구들이 방안 가득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마 전 순희의 둘째딸 결혼식에서 만나 회포는 풀었지만 그래도 돌아서면 그리운 얼굴들. 보고 또 봐도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숙명이었다. 여전히 석순이만 떴다 하면 거시기 단속하느라 바쁜 머스마들! 목 디스크가 있어 절대로 뛰면 안 되는 분자! 그 새 그걸 까먹고 마이크를 들면서 우리 46회의 체육대회 전야제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지금쯤 낑낑 거리며 장을 봐서 나물 다듬고 있을 은희가 안 봐도 비디오인 양 우리들의 흥겨움은 휙~휙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몸은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온통 이곳에 와 있을 은희 돌아가신 시아버지께 왜 하필 오늘 세상 떠나셨냐고 원망하진 않았을까? 내 동생네 48기는 고향 임동 아랫동네에서 잔치를 하고 있다 하고 40회 상연이 언니와 가을(류수만)선배님은 가랫재 어디 모텔에서, 화순이 고모네는 옥동 어디쯤에 있는 호프집을 통째로 빌리고, 그리고 57회 기중이네는 안동 시내 어디의 나이트에서 논다고 했는데 고향을 찾은 정겨움에 모두가 시끌벅적한 오늘은 안동 시내 어디를 가도 내일 행사에 참석할 우리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아이구, 벌써 밤 11시가 넘어섰는데 참 체력도 좋지. 노래와 춤 모두가 그칠 줄을 모른다. 이렇듯 우리들의 놀이 문화는 멍석만 깔아지면 누가 말리지 않는 한 쉽게 끝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뚝심 좋은 형동이가 마이크를 끔으로 해서 겨우 흥을 잠재운 우리는 모두 ‘사랑해요!’를 외치며 단체사진을 찍고 날 내버려두고 먼저 가버린 옥례 때문에 분자와 인술이, 광웅이, 영한이랑 함께 옥례네 집으로 향했다.
내일 운동장으로 가져갈 음식 장만을 위해 장을 잔뜩 봐 놓고도 직장일 때문에 아직 손질이 안 돼 있는 걸 봤기 때문에 모두 함께 가서 일을 하기로 했다. 친구들 온다고 연분홍 꽃 벽지로 새로 도배까지 예쁘게 해 놓은 옥례네 집. 더 놀다 오라고 먼저 왔는데 왜 벌써 오냐고 한다. 그렇게 할 일이 걱정이 되어 먼저 가버린 탓에 우리 단체사진에 옥례 얼굴이 없다.
부랴부랴 야채를 다듬어 씻을 동안 아이구야! 도토리묵을 쑤는데 한 솥으로 모자라 둘로 나누어 쑨다. 냉장고에는 옥례표 식혜가 한들통, 얼음도 살짜기 덮혀 있다. 아우! 이 생강 맛 깊이 배인 식혜, 한국자만 떠서 먹어도 속이 쑥 내려가는 것 같은데 뭘 잘못 먹었는지 체 끼가 있는 옥례는 식당에서도 기하한테 두들겨 달라고 하더니만 연신 속이 쓰린가 보다. 우리 대모 아프면 안 되는데... 12시가 다 됐는데 철현이가 막차를 타고 왔다.
고단한 일 끝나고 이 먼 곳까지 바로 날아온 게 분명할 터. 병아리 혼자 내려 보내서 마음이 안 놓였다나, 어쩌나, 그래. 친구가 좋고 친구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이다. 금새 옥례가 된장찌개 바글바글 끓여 차린 밥상에 배가 고팠던 철현이 어찌나 달게 먹는지 우리도 맥주 한 잔씩 하며 된장찌개를 안주로 떠먹었다. 그런데 고향은 파 맛도 달랐다. 토종 파라는데 된장찌개에 넣은 파 맛이 그렇게 향긋하고 달큰한 줄 처음 알았다.
거기다 푹 익은 파김치! 배 부르게 먹었건만 식욕이 절로 돈다. 그래서 밥은 이미 철현이가 다 먹었고 그래서 광웅이와 공모한 게 라면 끓여 먹기. 찬장을 뒤져 찾아낸 라면 두 개에 파 듬뿍 넣고 옥례가 마늘과 고춧가루도 넣어서 정말 제대로 된 라면을 광웅이와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먹었다. 분자는 살찐다고 침만 삼키더니 목 아프다고 징징 거린다. 안방과 건넛방에서 우리는 주방 겸 거실을 오작교인 양 사이에 두고 보일러 빵빵하게 돌려 뜨끈해진 방에서 꿈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 여섯 시, 팅팅 부었을 줄 알았던 얼굴이 말짱하다.잘 먹어서 그런가? 아님 마음이 넉넉해서 그런가? 어쨌든 좋은 일이야. 우리는 일어나는 순서대로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하늘은 잔뜩 내려앉았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또 추울 것 같은 예감대로 쌀쌀한 바람이 목을 휘감았다. 그 바람 속으로 모두들 해장국 먹는다고 우르르 영자네로 가버린 뒤 나는 옥례와 함께 운동장에 가지고 갈 음식들을 싣고 또 새로 사야 할 품목들을 하나하나 적어 완벽하게 준비했다. 뭐니 뭐니 해도 잔치에는 기름 냄새가 풍겨야 한다며 힘든 데도 불구하고 도토리 전을 부친단다.
운동장에는 어느새 선후배들의 천막이 즐비하고 여느 때처럼 입구에서는 방명록을 적고 이를표를 받는다. 내 이름을 적는 걸 보고 누군가 “영대 누나야!” 그런다. 으잉? 내 동생이 벌써 스타가 됐단 말이야! 나는 괜히 으쓱해서 “내 동생은 어디 있는데?” 하고 물었다. 저쪽 본부석에서 사진 찍고 있다는 말에 그래도 낯설다고 겉돌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밴드도 준비되어 있고 커다란 통돼지 두 마리도 빙글빙글 돌면서 숯불에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트럭 안에 주방을 차린 우리 46기 천막 안에선 구수하고 향긋한 미나리 맛이 어우러진 도토리전이 인술이의 손에서 연신 구워지고 영란이가 해온 겉절이의 환상적인 맛에 벌써 소주잔이 오고 갔다. 작년에 우승했던 우승기를 반납해야 하는데 보관하고 있던 성희가 해외여행 가는 바람에 사무실 문이 잠겨 있어서 우리 순희 회장 정말 애가 탈 뻔 했다. 다행히 개회식 직전에 도착했지만 그 우승기가 다시 우리 손에 올 줄 알았다면 그렇게 조바심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여튼 무슨 일이든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안다니까.
비가 올까봐 애를 태웠다던 유연진 48회 총회장의 말처럼 잔인한 4월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날씨로 사람 속을 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외였다. 물기는 잔뜩 머금고 있지만 우리의 잔치가 끝날 때까지 왠지 빗방울이 기다려 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 간단한 개회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체육대회가 진행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짜임새 있는 게임으로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계속 이겨서 그랬겠지만... 처음 윷놀이에 분자가 함께 나가자고 해서 나갔다가 웬지 더 잘할 것 같은 석순이에게 넘겨주고 난 응원만 했다. 첫 상대는 우리 바로 앞의 45회, 선배에게 이기면 안 되는데 미안하게도 가볍게 이겨버렸다.
그래서 가뿐한 마음으로 우리 아지트로 가 축배의 소주잔을 들려는데 바로 공굴리기에 나가자고 희덕이가 손목을 끈다. 희복이 공을 차고 쌩 달려 나가고 나는 가볍게 뒤쫓아만 가도 우린 가볍게 이겼다. 그 사이 윷놀이는 준결승, 49회 시학이팀에게 졌다. 추위와 아침도 안 먹은 허기를 채우려고 소주 한 잔에 고기 한 점 입에 넣었는데 우린 또 공굴리기 준결승에 나가야 해서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달려나갔다.
이번엔 영한이와 한팀, 나는 그냥 또 뒤에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가볍게 이겼다. 우와, 우리 이제 결승이다. 와 이리 좋노오~ 흥겹게 돌아와 또 소주 몇 잔, 그렇게 먹으면서 힘을 보충하는 사이 나대신 누가 나갔는지 45회 선배를 이기고 우리 친구들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아유, 나 안 나가길 잘했지. 태연이언니, 후남이언니, 해동오빠 올라갈 때 한 버스 안에서 얼굴 어떻게 봐. 그렇지만 얘들아, 잘 했어. 게임은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이기고 보는 거야. 그래야 짜릿한 맛을 느낄 수 있지.
그래서 줄다리기도 승승장구로 이겼다.
합천 허굴산의 힘 있는 산적 준희와 버터로 키운 근육의 상만이, 산행으로 다진 뚝심의 사나이 철현이, 막걸리 사업을 하면서 막걸리의 효모에 속살마저 단단할 것 같은 광호가 앞장서고 힘쓰는 여걸 옥례, 정분이, 석순이는 뒤에 선 뒤 힘없는 나와 자칭 엉덩이가 백만 불짜리라는 시택이는 그냥 곁다리로 이 잔치 분위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싶어서 어중간쯤에 자리 잡고 46회 팻말을 든 채 열심히 영차~를 외쳐준 분자와 다른 모든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우승했다.
열 명이서 넘는 단체 줄넘기게임도 할 수 있는데 그건 50회 이후 젊음의 몫이었고 그 대신 우리가 한 게임이 공굴리기란다. 아직 발표는 안 났지만 채점판을 보니 우리 기수, 임동초 역사상 처음인 연속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선배들과 후배들께 욕심을 내어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46회 이렇듯 모든 일에 단합이 잘 되고 무엇을 하든 아직 힘이 넘친다는 것을 모든 동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흐뭇했다. 그 때부터 우리 기수 천막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잔치. 연신 소주병이 비워졌다. 대구의 의리의 사나이 동책이도 왔으면 좋았을 걸.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있는 바람에 참석을 못 했단다. 그 친구를 생각하며 대구 친구들은 행사 끝나고 가는 길에 동책이에게 들러 고향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식혜와 도토리전과 묵무침을 정성껏 포장했다.
사람 입은 무서워서 어느덧 그 많던 식혜며 도토리묵, 부침반죽도 비워져 간다. 내 동생도 불러다 맛보여 주고 40회 가을선배님께도 44회 기헌오빠네도 옥례와 함께 인사 다니며 그 꿀맛 같은 도토리 전 맛을 보여 드렸다. 그동안 향우회에서 얼굴 익힌 탓인지 먼저 찾아와 인사하는 후배들과 운동장에서 사진도 찍고 이 기수 저 기수 천막을 기웃거리며 인사하는 재미도 쏠쏠해졌다. 먼저 내려왔던 서울 친구들은 아침에 벌써 올라가 버리고 나와 철현이 뿐이지만 오늘은 서울로 올라갈 시간 걱정 안 하고 행사 끝나는 거 다 보고 느긋하게 갈 수 있어 무엇보다도 좋았다. 그래서 동생 택건이가 격려도 안 해주고 가버린 나쁜 형을 찾는 것도 먼저 간 택상인 몰랐을 거다.
모든 게임이 끝나고 본격적인 잔치는 이제부터다. 김희수 산악회장님의 선창으로 노래자랑은 시작되고 우리 임동인은 모두 노래 잘 한다고, 노래 못 하면 임동인이 아니라고 하셨던 류필휴 향우회장님의 말씀이 아니어도 모두들 진짜 가수 뺨치게 노래 잘한다. 밴드의 쿵쾅거림에 나는 절로 몸이 근질거려 그냥 있을 수 없었다. 형동이가 간고등어 선물상자를 받아와서 주길래 동생에게 건네주며 누나 위신도 세웠겠다, 놀 때는 확실하게 놀아야 하는 법. 막춤으로 내 정신 아니게 놀았다. 그래서 이번엔 직접 무대로부터 상황버섯선물세트를 또 받았다. 아이구~ 웬 횡재야! 모두가 언니고 오빠고 동생인 것을, 나 운동장에서 춤 춘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석순이가 자꾸 자리에 앉으라고 잡아당겨도 나는 내 동생이 있어 더욱 잔치 분위기 돋우게 놀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맘 안 형동이가 부추기고 석순이, 희복이 또 누굴까? 같이 논 사람. 아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한 덩어리 되어 어우러진 그야말로 어울 한마당이었다. 우리 기수 행사할 때도 이렇게 흥겹진 않았는데 이번 행사 주관하느라 고생하고 애썼지만 48회는 복도 많다. 날씨도 도와주지. 참여한 동문들도 도와주지. 삼박자가 하나로 어우러져 정말 짧은 봄날 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순희와 옥례가 우승기를 휘날리며 우리의 우승을 축하하는 것을 끝으로 동문 어울 한마당 축제의 바톤은 이제 49회로 넘겨졌다.
후배들이 또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여 고향을 찾는 많은 선후배들이 기꺼이 고향을 사랑하고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순희와 안동 친구들, 그리고 각자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친구들과 옥례에게 고생했고 또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철현이와 나는 서울로 가는 향우회 버스에 올랐다.
비가 오리라던 예보로 잔뜩 웅크린 고향 하늘 그 하늘 내 몫으로 떼어서 품에 안고 가는 길
항상 떠남은 만남보다 먼저 준비되어 있었다
다시 또 보자는 희망을 먼 물결에 풀어놓고 빨리 가자는 바람 따라 발목까지 차오른 그리움을 못 잊은 듯 다시 삼키면
내 가슴 여러 갈래에 너를 보낸 길이 나고 어울 한마당 잔치가 굴려간 바퀴자국 몇 개 또 추억으로 받으며 나는 입이 얼얼하도록 친구야, 친구야를 부르고 있었다.
「너를 보내고」전문
버스가 막 출발할 무렵, 한줄기 물결로 일어서는 임하호 호수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아직도 술기운이 가라앉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언지 모르게 뜨거운 것이 가슴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올 때는 들떠서 왔어도 떠날 때는 눈물 나는 고향은 정말이지 몹쓸 병 같다. 그래도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하는 병, 내 마지막 사랑이 고향이기를 나는 오늘도 품에 안고 간다.
언제나 고향을 떠날 때는 눈물 난다 웃고 떠들고 춤추고 노래하고 반가운 사람 만나 그리움을 풀어내는 시간도 잠시 고향을 떠날 때는 풀어낸 그리움 때문에 그 그리운 추억 때문에 더 더욱 눈물 난다
내 고향을 다 안은 채 저 홀로 물의 세상을 만들어 아리랑 가락을 타는 물결, 저 물결 속에서 나 태어나고 나 자랐으니 고향 왔다 가는 마음은 늘 쓰리고 아리다
지금쯤 저 물 속에서도 내 집 앞마당 홰나무 물올라 연두빛 잎 틔웠을까 푸른 기억 한 조각 베어내 절절해지는 아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고향 없는 설움은 돌아서는 발길 위에 절로 눈물 떨구게 한다.
「떠날 때는 눈물 난다」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