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순교 성인
37.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허계임(막달레나)과 함께 순교한 사람들 중 당시 교회의 회장으로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들이 두 명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이 남 세바스티아노였다.
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회장, 1780~1839)은 1780년(정조 4년) 양반 집안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님들은 18세기 말엽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세도가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이었던 모친은 젊어서 세상을 떠나고, 부친 남필용(南必容)은 1801년(순조 1년)에 고발되어 5월 10일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20세가량 되었던 세바스티아노는 경상도 단성 땅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결혼을 하였다. 부인은 그를 따라서 19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성녀 조증이(바르바라)이다.
아직 성세도 받지 못하였던 그가 단지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매일 저녁 빠뜨리지 않고 외우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밖에 없었다. 자녀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첩을 얻었는데, 그것이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40세에 이르러 병을 앓고 있던 중, 어떤 교우의 가르침을 받은 후부터 그는 첩을 멀리하고 성세를 받아 비로소 교우다운 생활을 하였다.
회개한 후에 세바스티아노는 그 동안의 허송세월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외척간인 정하상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義州)까지 가서 유방제(파치피코) 신부를 모셔왔으며, 신부를 자기 집에 영접하여 모든 시중을 들었다.
박해 시초에 세바스티아노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利川) 고을에서 숨어 있었는데, 어떤 냉담 교우가 포청에 밀고하여 체포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후, 포졸들에게 주뢰를 틀리고 고문을 당하였음에도 그의 신앙심은 확고부동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영광스러운 국사범(國事犯)으로 다루어져 의금부(義禁府)의 옥으로 이송되기에 이르렀다.
의금부에서 문초를 세 번 당하면서 그는 곤장을 수없이 맞았으며, 마침내는 참수의 선고를 받게 되었다. 형장에 가기 위하여 수레에 오르면서 세바스티아노는 하인으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 있는 아내에게 “우리는 같은 일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는 말을 전하였다. 그런 다음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 당하였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 발췌문헌 : 김옥희, {103위 성인전}, 도서출판 순교의 맥, 2004,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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