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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지걸(志傑), 자는 수부(秀夫), 호는 금호(琴湖),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시조 총언(悤言)은 고려 개국 공신(開國功臣)이다. 그 후로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 나왔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소재(少宰) 약동(約東)이 덕행과 청렴결백, 분수에 자족하며 물러난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3대를 지나 휘 석명(碩明)이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바로 공의 고조로서 또한 청렴한 절조가 있어 사람들이 ‘맑은 물[淸水]’에 비유하였다.
증조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조부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를 지냈고, 형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함께 모두 곧은 절개로 당시에 존경을 받았다. 선고(先考)의 휘는 련(堜)인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약관의 나이에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애통함으로 몸이 상하여 작고하였으며,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가림 조씨(嘉林趙氏 임천 조씨(林川趙氏))와 전성 이씨(全城李氏 전의 이씨(全義李氏)) 두 분인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이씨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구준(耈俊)의 따님이자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의 손녀인데, 숭정 임신년(壬申年, 1632, 인조 10) 5월 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의 집에서 자랐다. 아이 때부터 총명하고 책을 좋아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뛰어났다. 약관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정미년(丁未年, 1667, 현종 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미 평소에 큰 기대를 모았고, 과거 시험은 쉽게 급제할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여 반드시 모친이 건강할 때 급제하여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평생의 크나큰 한이 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여섯 번 옮겨서 사사(四司)를 역임하고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 9)에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되고 2년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정묘년(丁卯年, 1687, 숙종 13) 봄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고, 가을에 흡곡 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으나 공격(公格)으로 체직되고, 다시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가 되었다가 감찰(監察)로 옮기고 또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4)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고,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파직되어 체포되었으며, 경오년(庚午年, 1690, 숙종 16)에 다시 감옥에 갇혔다. 신미년(辛未年, 1691, 숙종 17)에 곤양(昆陽)으로 귀양 갔다가,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죄를 용서받고 돌아왔다.
신사년(辛巳年, 1701, 숙종 27)에 70세가 되었는데 아들이 시종신(侍從臣)이었던 은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집에서 작고하니,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 7월 8일이었다. 이해 9월 22일에 충주(忠州) 서쪽 맹동(孟洞) 율리(栗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풍채가 의젓하고 언론이 뛰어나서 당시에 동년배들이 추중(推重)하였고, 성균관에 있을 때에는 항상 사림(士林)을 위하여 논의를 주도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에 조정에서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할 때 홍득우(洪得禹), 이인혁(李寅爀) 등 제공(諸公)과 함께 천거되니, 이것은 대개 모두 당시에 인망(人望)을 얻었기 때문이다.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1) 이후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서호(西湖)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벼슬길에 들어가서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것은 대대로 녹봉을 받은 신하로서 조정의 명령을 사양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 벼슬살이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후로 내직과 외직에 있는 동안 항상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공무를 봉행할 때는 법을 준수하여 외압에 꺾이거나 굴복한 적이 없었다. 민사(民事), 군정(軍政), 학교(學校), 전결(田結), 송옥(訟獄), 진조(賑糶) 같은 일에 대해서도 마음과 힘을 다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지런히 힘썼는데, 이것들은 모두 후세의 법이 될 만하였다.
여러 고을이 진정(賑政)을 할 때에 으레 전매(轉賣)하여 취한 이익을 가지고 밑천으로 삼았는데, 공은 백성에게 돌아갈 이익을 도리어 관아에서 독점하는 것을 싫어하여 오직 스스로 의복을 덜 입고 음식을 줄여 백성을 먹였다. 고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상사(上司)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아 폄출당하였고, 영덕 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토호(土豪)를 치죄하다가 죽은 자가 세 명이었는데 그들 집에서 고소하여 심지어 재물을 탐하였다고 무고를 하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당시 소인배들의 무함을 받아 1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공의 빙벽(氷檗)의 절조가 평소에 드러난 데다가 샅샅이 조사해 보았으나 나오는 것이 없자 마침내 형벌을 남용했다는 죄목으로 멀리 유배되었다.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는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오직 옛 전적을 보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면서 천리 밖의 갇혀 있는 신세가 된 것을 잊었다.
죄를 용서받고 풀려난 뒤로 수년 동안 벼슬에 제수되지 않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들이 그의 원통함을 아뢰어야 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시에 화를 면하고 오늘날 살아 돌아온 것은 모두 성상의 은혜이다. 어찌 감히 다시 은택을 바랄 생각을 하겠는가.” 하고는 여러 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의 지키는 바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일찍 부친을 여읜 탓에 봉양을 제대로 못한 것을 매우 원통하게 여겨서, 모친을 봉양할 때에 세심하게 살피고 맛있는 음식으로 극진히 봉양하였고, 돌아가시자 시묘를 살면서 상제(喪制)를 지키느라 마침내 병이 났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묘소를 지키면서 3년 동안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절일(節日)에 성묘하는 일 또한 노쇠하다는 이유로 혹시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고조(高祖) 이상의 두 대(代)의 선영이 함께 같은 산에 있어서, 그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사철마다 고조의 묘소에 제사 지낼 적에 두 대도 함께 제사 지냈다.
백씨(伯氏)와 어려서부터 일찍이 함께 살았고, 중년에 이르러서는 근처에 집을 지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며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자질(子姪)들을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고 주색(酒色)과 사치에 대해서는 특히 엄하게 경계하였다.
내외종 형제뿐만 아니라 종족(宗族)과 외친(外親)에게도 극진하게 대하였으니, 가난한 시골에 사는 먼 일가라도 보첩(譜牒)에 이름이 실려 있으면 정성껏 대하였고 종회(宗會)의 법을 강론하여 친척을 친애하는 정의(情誼)를 돈독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공이 가정에서 보인 아름다운 행실이었다.
공은 자신을 지키는 데 조용하고 조촐하게 하여 평소에 하찮은 물건 하나도 남에게 달라고 하지 않았으며, 아첨하는 태도가 있는 자에게는 얼굴에 침을 뱉으려고 하였다. 마음가짐은 공명정대하고 속이지 않고자 힘써서 이 때문에 서로 속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매우 미워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편당(偏黨)’ 두 자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으며, 붕우를 권면하고 자제를 경계할 때 일찍이 이 점을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서 옷과 띠를 바르게 착용하고 반드시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으며
방 한 칸을 깨끗하게 소제하고 하루 종일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처하는 방의 벽에 쓰기를, “내 방에 들어오는 자는 남의 선악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라.” 하였다. 자제들이 남의 불선(不善)에 대해 논하면 그때마다 꾸짖기를, “남의 악행을 말하고 남의 사생활을 들추면 어찌 덕이 있는 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하객이 문 앞에 가득하자, 이에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를, “네 아비는 백발노인이 되도록 경서(經書)를 연구했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했는데, 자식이 급제를 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일단 벼슬하게 되면 곧 우환의 시작이니, 내가 마음에 기쁘지 않은 까닭이다.” 하였다.
아들이 언사(言事)로 외직에 보임되자 또 태연하게 말하기를, “직책은 내직과 외직의 구별이 없고 지방 수령은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또한 기한이 촉박한 길이라 지체해서는 안 되니 빨리 떠나도록 당부할 뿐이다.” 하였다. 아, 이 몇 가지를 보면 공의 사람됨을 대략 알 수 있다. 또한 전할 만한 다른 언행도 대부분 다 기록하지 못했다.
공은 문(文)에 대해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시(詩)에 더욱 뛰어났다. 공이 읊은 시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암송되고 있는 것이 많고, 유고(遺稿) 5권이 집에 간수되어 있는데 모두 1500여 수가 된다. 아, 이것 또한 하나의 불후(不朽)가 될 수 있다.
배위(配位)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으며, 생원 순열(順悅)의 따님이다. 5녀 2남을 낳아 길렀으니, 장남 세근(世瑾)은 지평(持平)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음성 현감(陰城縣監)에 보임되었고, 차남은 세진(世璡)이다. 장녀는 유중영(柳重榮)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어사하(魚史夏)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정만준(鄭萬準)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군수 조세망(趙世望)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유창진(柳昌晉)에게 시집갔다.
음성 현감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정주(挺柱)이다. 세진은 3남을 두었는데 정즙(挺楫), 정림(挺霖)이고 막내는 어리다. 어사하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관(有寬), 유인(有寅)이고, 사위는 이하영(李夏榮)이다. 정만준은 양자를 두었다. 조세망은 3녀를 두었는데 둘은 유씨(柳氏)에게 시집가서 후사 없이 일찍 죽었다.
공이 작고하고 1년 뒤에 음성(陰城)이 공의 사적(事迹)을 기록하여 상복 차림으로 먼 길을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칩거하여 비록 공과 종유할 수 없었지만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이미 깊었다.
재종제(再從弟) 택(擇)은 단아한 선비로 공과는 내외형제(內外兄弟) 사이로 생전에 일찍이 공을 칭찬한 말이 적지 않았고, 규(揆)는 공의 조카사위로 항상 공의 행의(行義)를 매우 자세하게 말했으며, 또한 상주(喪主)의 애달픈 간청을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노쇠하고 비루한 신세를 잊고 대략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의 처세는 / 士之處世
자기 몸에 얻는 것이 귀하니 / 貴得於己
실상이 우세하면 신임을 받으나 / 實勝則孚
이름이 우세하면 치욕이 된다네 / 名勝爲恥
공의 평생은 / 惟公本末
문장과 덕행을 겸했으나 / 有文與行
자랑하지도 구차하지도 않으며 / 不衒不苟
얻고 잃는 것을 운명에 맡겼도다 / 得喪惟命
가슴속 회포는 맑고 트였으며 / 襟懷淸曠
운치는 속세를 벗어났기에 / 韻致脫俗
또한 조정의 품평이 있어서 / 亦有朝評
지란옥수(芝蘭玉樹)에 비유하였네 / 比之蘭玉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 官不登顯
장수도 누리지 못했으니 / 壽未到遐
덕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 視德雖歉
내가 무엇을 탄식하겠는가 / 在我何嗟
어진 아들이 있어서 / 有子克賢
그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려고 하니 / 思顯厥懿
나의 문장이 화려하지 않지만 / 我筆非華
거짓이 아니어서 거의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 唯庶無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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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소재(少宰) :
이조 참판의 별칭이다. 소재는 춘추 시대에는 태재(太宰)를 보좌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이부 시랑(吏部
侍郞)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소재(小宰)와 통용된다.《春秋左氏傳 宣公2年》《傳習錄 中 答羅整庵小宰書》
[주02] 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으로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이다.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
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國朝寶鑑 卷23 明宗 21年 5月》
[주03]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 :
이인(李𡐔:1608~?)을 가리킨다.《韓國系行譜 碧珍李氏》
[주04] 사사(四司) :
조선 시대 형조(刑曹)에 소속된 상복사(詳覆司), 고율사(考律司), 장금사(掌禁司), 장례사(掌隷司)의 네 관아를 말한다. 《經國大
典 吏典 京官職 刑曹》
[주05] 빙벽(氷檗) :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뜻으로,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주06] 하나의 불후(不朽) :
불후는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의 삼불후(三不朽)를 말하는데, 이 세 가지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
에 불후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말을 남긴 것이 하나의 불후가 된다는 뜻이다.《春秋左氏傳 襄公24年》
[주07] 음성 …… 정주(挺柱)이다 :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지명에는 세 아들의 이름이 정주, 정해(挺楷), 정재(挺材)로 기록되어 있다.《明谷集 卷26 僉知中樞府
事李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54輯》
[주08] 자기 …… 귀하니 :
자기 몸에 얻는 것이란 학문이나 수양 등을 말하며, 이와 반대로 밖에서 얻는 것이란 부귀, 영화 등을 말한다.
[주09] 지란옥수(芝蘭玉樹) :
훌륭한 자손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일찍이 여러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
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비유하건대, 지란옥수가 자기 집 뜰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
다.”라고 대답했던 데서 온 말이다.《晉書 卷79 謝玄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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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志傑, 字秀夫, 號琴湖, 星州人。 上祖怱言, 高麗開國功臣。 其後金紫蟬聯。 入我朝, 少宰約東以德行、廉白、恬退著名, 諡平靖。 三傳而至諱碩明, 郡守, 乃公之高祖, 亦有廉操, 人比之淸水。 曾祖諱喜善, 以經行薦, 授童蒙敎官; 祖諱尙伋, 兵曹參知, 與兄忠肅公尙吉俱以直節重一世。 考諱堜, 有美質, 弱齡以毁歿, 後贈左承旨。 妣嘉林趙氏、全城李氏俱封淑夫人。 李氏, 儀賓都事耉俊之女, 淸江公濟臣之孫, 以崇禎壬申五月六日生公。
三歲而孤, 養於季父承旨公家。 自兒時, 聰穎嗜書, 不煩提諭, 文藝夙茂。 弱冠, 陞上庠。 丁未, 遭內艱。 公旣雅負雋望, 科第, 自謂可以俯拾, 必欲及高堂無恙時, 以爲一悅, 而竟不及, 遂爲終身至恨。 庚申, 除義禁府都事, 六遷歷四司, 陞工曹佐郞。 癸亥, 除高山縣監, 二年而罷歸。 丁卯春, 除司僕主簿。 秋, 除歙谷縣令, 以公格遞。 復內資主簿, 遷監察, 又轉工曹佐郞。 戊辰, 除盈德縣令。 己巳, 罷被逮。 庚午, 再繫。 辛未, 謫昆陽。 甲戌, 宥歸。 辛巳, 年七十, 以子侍從恩加通政資, 授僉知中樞府事。 明年, 考終於第, 壬午七月之八日也。
是年九月二十二日, 卜葬于忠州西孟洞栗里負酉原。
公風姿粹雅, 言論英發, 一時儕輩咸推重。 在館學, 常爲士林主論。 甲寅, 朝廷擧名行之士, 公與洪得禹、李寅爀諸公同登薦剡, 蓋皆一世人望也。 乙卯以後, 謝擧屛跡西湖, 爲終老計。 及入仕路, 至赴縣, 以世祿之臣, 不欲謝朝命, 而非其所好也。 前後居中外官, 常廉潔自律, 奉公守法, 無所撓屈。 至如民事、軍政、學校、田結、訟獄、賑糶, 亦無不盡心力, 恪謹詳勤, 皆可爲後法。 列邑當賑政, 例轉販取贏以爲資, 公嫌反榷民利, 唯自削衣貶食以哺之。
在高山時, 以不從上司非法之令見黜。 在盈德時, 治土豪致斃者三人。 其家訴之, 至誣以近膩。 遂爲時輩所搆陷, 經年在縲絏。 公氷蘖之操素著, 窮査而無所得, 終只以濫刑遠配。 在謫, 闔戶靜坐, 唯以墳典自娛, 忘其爲千里外羈管。 受環後數年, 恩敍久靳, 議者謂“廷臣宜白其冤”。 公曰: “當時之脫禍, 今日之生還, 皆聖恩, 何敢復爲干澤計?” 禁諸子使不得開喙。 公之所守, 於此可見。
公孝友出於天性。 以早孤不及致養爲至痛, 奉慈夫人, 極其溫淸甘旨之養。 及歿, 廬墓秉制, 仍成羸疾。 外除後, 猶守而不忍去者三年。 節日上塚, 亦不以衰老而或廢。 高祖以上二代先塋同在一山, 在邑時, 於四節祭高祖墓也, 輒幷祭二代。 與伯氏少嘗同居, 至中年, 築室於側近, 每昕夕相從, 未嘗相離。 敎諸子侄, 必以義方, 尤嚴於酒色侈忕之戒。 非但於中表, 睦、姻備盡, 寒鄕疎族, 苟名在譜牒, 便披悃款款。 講宗會之法, 以篤親親之誼。 此皆公家庭之懿行也。
公守己靜拙, 平生無一介求乞於人, 人之有夏畦態者, 欲唾其面。 立心務明正不欺, 以此人有相欺者, 必深惡痛斥。 至於偏黨二字, 不唯不置於心, 亦不一挂于口。 勉朋友, 戒子弟, 未嘗不在於此。 每日晨起盥濯, 整攝衣紳, 坐必正席, 淨掃一室, 終日無惰容。 題所居堂壁曰: “入吾室者, 勿言凡人善惡、時政得失!” 子弟論人不善, 則輒責之曰: “言人之惡, 發人之私, 豈有德者乎?” 及子之登第也, 賀客盈門, 乃愀然曰: “乃翁白首窮經, 終不能做, 而兒能做得, 豈不嘉哉! 而一許其身, 便作憂患之始, 吾所以不悅於心。” 及其言事外補也, 又夷然曰: “職責無內外, 民社無大小。 且以嚴程不可留, 戒使遄行而已。” 嗚呼! 觀此數者, 公之爲人, 槪可知矣。 且他言行可傳者多, 不能盡載。 公於文無所不通, 而尤長於詩。 其所吟詠, 多爲人所傳誦, 有《遺稿》五卷, 藏于家, 總一千五百餘首。 噫! 此亦可爲一不朽矣。
配安東權氏, 封淑夫人, 生員順悅之女也。 擧五女二男: 男長世瑾, 以持平出補陰城縣監: 次世璡。 女長適柳重榮: 次適進士魚史夏: 次適鄭萬凖: 次適趙世望, 郡守: 次適柳昌晉。 陰城三男: 曰挺柱。 世璡三男: 曰挺楫、挺霖, 餘幼。 魚有二男一女: 曰有寬、有寅、李夏榮。 鄭有繼子。 趙有三女: 二柳氏, 無嗣而夭。
公歿之期年, 陰城述公事行, 縗絰遠來請墓銘。 拯自少屛蟄, 雖不得從公遊, 而世誼旣不泛。 再從弟擇, 雅士也, 與公爲內外兄弟, 生時嘗稱道公不少。 揆公之從女壻也, 亦常言公行義甚詳。 且孝子之哀懇, 有不可終辭者。 玆忘其衰陋, 略撮其狀, 而繼以銘曰:
士之處世, 貴得於己。 實勝則孚, 名勝爲恥。 惟公本末, 有文與行。 不衒不苟, 得喪惟命。 襟懷淸曠, 韻致脫俗。 亦有朝評, 比之蘭玉。 官不登顯, 壽未到遐。 視德雖歉, 在我何嗟? 有子克賢, 思顯厥懿。 我筆非華, 唯庶無愧。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