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6월 12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교회창립 10주년 기념예배 * 홍지훈 목사
히브리서 13:7-9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기독교의 역사를 2000년이라고 말합니다. 유대교는 이보다 더 오래되었고, 불교도 기원전 6 세기경에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그 뿌리를 유대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불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입니다. 그렇게 오래 된 종교가 우리나라에는 두 가지나 존재합니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적 가치에서 제외된다면, 기독교, 즉 크리스트교는 이름을 바꾸어야할지 모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독일어 성서번역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에서 그리스도를 제외시켜보라, 무엇이 남는가?”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지워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루터는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도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성경도,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없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 없는 성경이나, 교회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실제적으로 2000년 역사 속에서 “예수 없는 성경”, “예수 없는 교회”는 존재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의 정신을 상실한 성경이해와 교회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해악이 적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서를 읽으면서 복수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빼고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용서할 생각이 들지 않고 여전히 분심이 가득해서 하나님이 징벌하기를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라진 성경읽기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 속에는 원수에 대한 분심과 보복을 바라는 시편기자의 기도문이 산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면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는 그 속에 예수가 상실된 것이 분명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는 언제나 소수였고 변두리 신세였습니다. 물론 소수라는 이유가 무조건 예수의 정신대로 살기 때문이라는 역방향은 성립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3장 8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찬송가 135장이 이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작사(1890년)되었습니다. 작사가인 알버트 심슨(Albert Benjamin Simpson, 1843-1919)목사는 캐나다 토론토 출신으로 녹스칼리지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31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서 뉴욕에 살았는데, 병원, 형무소 등등에 복음을 전하는 목사였습니다.
어느 날 빈민가에 사는 이탈리아 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회심하는 것을 경험한 심슨 목사는 자기의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무척이나 병약했던 자신이 이렇게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 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세상은 지나가고 변할지라도 주님은 불변하신다. 허물 많은 인간도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인간도 용서하신다. 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한결 같으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변하시는데,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기독교 교파들이 난무하고 있을까요? 한 그리스도를 믿는데, 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을까요? 종교개혁의 시기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런 질문이 등장합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의 불변하시는 예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신약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을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오리지널 예수의 모습은 예수를 만났던 처음 제자들의 증언들이 구전으로 전해져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서가 4개로 전해진 것도 당연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중심으로 모인 예수의 제자들의 증언전승 속에는 유사한 것도 있고 서로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런 전승들이 복음서로 기록되어 전해졌고, 유사한 수많은 복음서들 중에서 그 4가지 복음서만 성경으로 채택이 된 것이 주후 397년입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복음서가 기록되지는 못하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달라져 왔습니다. 신약성경 안에서도 예수를 랍비, 예언자, 제사장, 왕, 메시아 그리스도, 그리고 주님 등등 당양한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 역시, 보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르게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분일까요?
히브리서라는 성경은 유대인 출신이면서 헬라어에 능통한 저자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문체가 다른 바울 서신과 달라서 저자가 바울이라는 오래전의 주장은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주후 70년-90년 사이에 이방지역에 존재한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3장에서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유대교의 율법에 문자적으로 수용하여 음식규정에 얽매이는 것을 탈피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는 점이 대표적인 당시의 문제였습니다.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여러 가지 규정들을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았던 분으로 복음서는 그려내고 있습니다. 슬퍼하며 금식하는 대신에 제자들과 음식을 먹었고, 비난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신랑을 빼앗길 때가 되면 금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에 손을 땐 다윗을 예로 들면서 그 중요한 안식일 규정도 허물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 원수를 미워하고,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문자적 규정까지도 뒤집어서 원수를 사랑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는 “바꾸어야 할 것을 바꾸시는 한결같음”을 지닌 분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한결같으심” 즉, 항상성(恒常性)을 말할 때는 그분의 외모나, 위치의 항상성이 아니라, 그분의 정신의 항상성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결같은 예수”란 이런 의미입니다. 2000년의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과 모든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습을 그 시대, 그 지역, 그 문화에 맞게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각각의 시대는 예수에게서 자기들의 사상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영원히 살아있는 예수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의 말입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된 예수상은 화석화된 모습입니다. 지나간 옛 것일 뿐입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문화마다 자기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다시 살려내었기 때문에, 예수는 영원히 살아서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 가운데 묶어 놓으면, 그는 교리의 그리스도일 뿐이지, 내의 삶 속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올해로 평화목 교회가 창립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명칭은 지역이름을 따르는 것이 과거의 통례인데, 이제는 지역중심적인 교회구성이 그 한계를 넘어가 버렸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예배당이 위치한 지역에 사는 교인이 훨씬 더 적을 정도로 먼 지역에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물론 요즈음 “마을목회”라는 개념이 도입되어서, 지역사회와 함께 상생하는 교회개념도 등장합니다. 교회가 그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경우에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평화목 교회는 시작할 때에 사회비 예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도 자기의 분명한 직업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였습니다. 교단에서는 이제 와서 다른 직업을 가진 목회자 양성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개척교회가 스스로 자립하기 불가능한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목교회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있으려면, 물질이 중심이 되지 않아야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방식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자립이 교회존립의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을 꾸미려고 발버둥질 치는 기간 동안에, 예수 정신은 그 그릇인 교회 안에서 점점 희석되어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끌어 모으고, 교회건물 짓고, 넉넉한 재정 확보하고, 자리를 잡는 동안에 교인들은 지쳐갑니다. 사람이 지치면 평화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넉넉한 사회비 예산으로 이웃을 도우면서도, 스스로 쉼을 회복하도록 평화목교회는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각각의 시대마다 한결같으신 예수의 모습을 우리 시대에도 찾아내려면, 사실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2000년 동안 잘못 그려진 예수상이 어떤 것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된 예수상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십자군 전쟁의 선봉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전통은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되면서 시작하였고, 훗날 유럽의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식민지 경쟁 때에 심하게 반복되었습니다. 19-20세기에 들어서도 기독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막기는커녕, 협조한 사실이 심각하게 있고, 여전히 종교는 전쟁에 이용당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왜곡된 모습을 지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살려내려면, 교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믿음 안에만 붙잡아 두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만의 주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님입니다. 한국인만의 주님이 아니라, 온 세계인의 주님이십니다. 인간들에게만 주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자연의 주님이 되십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 평화목교회를 거쳐 간 교인들이 꽤 많습니다. “거쳐 갔다”는 표현 속에 들어있는 의미는 긍정적인 면도 그리고 부정적인 면도 그리고 무의미한 의미도 있습니다. 물론 10년 세월동안 평화목교회의 날개 아래에서 쉼을 얻고 평화를 느끼는 교우들이 계셔서 우리교회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가끔 예배당 문을 조금 열고 묻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교회 문을 열고 있었으면 그런 일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입니다. “이 교회는 아무나 다녀도 되나요?” 질문이 이상하지요? 밖에서 보기에 무언지 모르게 독특하다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많은 질문은 “수요일에는 예배가 없나요?” 또는 “이 교회는 새벽기도 안 하나요?” 같은 질문들입니다.
사실 평화목 교회를 “거쳐간” 교인들은 다른 교회가 하는 일들과 다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평화목 교회에는 “행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 다니는 재미가 적습니다. 매일 출근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아마 목회자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 아이들도 북적거리고, 공간도 좀 넓어서 놀고 쉬고 노래도 부르고 하는 여러 일들이 진행되어야 “교회 다니는 맛”이 납니다. 그래서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평화목 교회는 주일 하루 오전에 모든 것을 하다 보니, 보통 다른 교회의 오후 예배에 하던 것들을 성경공부로 이어서 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인도하던 성경공부가, 기독교 역사 공부가 되기도 했고, 교우특강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교우특강”은 저의 소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선생입니다. 자신은 자신의 신앙에서 나온 삶을 즐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교우 간에 관심도 많아지고, 서로에게 배우는 것들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우특강 시간에 “독서특강”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내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성당이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다릅니다. 오늘 예수는 나에게 어떤 분입니까? 사람마다 다 자신이 생각하는 독특한 예수의 상이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붙잡아야하는 예수 상을 저는 우리교회의 이름에 담았습니다. 바로 “평화의 예수”, “예수의 평화”입니다. 길지 않은 공생애 동안 험난한 세월을 보낸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분이 남긴 어록들을 읽다보면, 예수에게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평화의 모습입니다.
평화목 교회라는 이름의 의미도 다양합니다. “평화의 나무”라는 뜻도 있고, “평화와 화목”을 합친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이 요즘에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산책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 “평화의 눈”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평화로운 시선으로 보며 살자”는 뜻입니다.
지난 10년간 목사인 저는 그 어느 때 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저에게는 말씀을 더 읽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교회와 맞지 않아서 정착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볼 때 섭섭하기도 하였지만,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다양하고 신앙양식도 다양하기에 그리 크게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화목 교회 교우들의 예배 때 공동기도의 내용이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참 행복했습니다.
물론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모이는 일이 약화된 것이 가슴 아픕니다. 둘러보면 몇 달 째 얼굴을 못 본 교우들도 있습니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우들 간의 공동예배와 사귐도 신앙의 일부라는 점에서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언제나 한결같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뿐입니다. 교회에 얽매여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반대로 스스로의 신앙이 확고하게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우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느끼고, 그 모습을 교회 안에서 보여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한결같으신 우리 주님의 축복이 평화목교회위에 영원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댓글 우리 교회가 벌써 10년이 되었군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여기 까지 온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기 까지는 겸손한 목사님의 리더쉽과 다른 교회와의 차별성이 근간이 된것으로 생각 됩니다
지금 까지만 이라도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