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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요즘 자주 서평 들고 인사하게 되네요.
제가 카페 사서로 활동하며 2번째로 받은 대리 독서 신청, 그 기회로 읽은 책의 감상이자 서평을 남기려고 합니다.
ID 회오리 씨가 신청하신 <카인의 후예>입니다.
지난 8월 1일에 황순원문학관 소나기마을에 다녀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그때 찍은 사진도 감상문에 첨부해봤습니다.
도서명: 카인의 후예
저자: 황순원
* 이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통신망 아이프리에 데이지도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도서관 0번 전체자료실을 통해 검색해서 찾으면 편합니다.
* 소개글 서평
나는 단편소설 <소나기>를 통해 황순원 작가를 접했다. 산골 소년과 서울 소녀의 풋풋하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그 외에 <독 짓는 늙은이>나 <학>, <목넘이 마을의 개> 등을 통해서도 황순원 작가의 세계관을 엿보았다.
사실 문학적인 성찰이나 즐기면서 독서한 건 아니고, 현대문학 수능 필독서라서 읽은 거였다. 그래도 <소나기>만큼은 그 여운이 진했다.
이번에 신청을 받아 읽은 작품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의 장편소설 중 하나로 북한이 배경이다. 일제 해방 후 지주로 살던 박씨 집안이 공산주의 형성 및 수립 과정에서 몰락하고 내쫓기며 일어나는 갈등을 그렸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짧게 소개함과 동시에 대략적인 줄거리도 요약하겠다.
등장 캐릭터와 함께 보는 《카인의 후예》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어떤 민족의 역사건 상고루 올라가면 신화시대와 전설시대가….”
이야기는 박훈이 등장하며 시작한다. 그는 술에 취해 있고, 박훈이 이토록 알코올을 들이부은 이유는 그가 운영하던 야학을 공산당원들이 반동 모임이라며 폐쇄했기 때문이다. 박훈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죽자 지주가 된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농민들을 교육하며 계몽에 애쓰지만, 과단성이 부족하고 관조적인 성격을 가졌다.
공산당의 기세가 점점 확산되는 가운데,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을 맡은 남이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단지 위에서 시키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 자리를 맡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차츰 마을의 갈등이 심화되고 농민과 지주 사이에 불신이 싹 트게 된다. 그리고 가락 마을 사람들의 변화와 함께 훈 또한 손에 칼을 들기로 작심한다. 박훈을 요약하자면, 책상물림의 서생 느낌.
“옳소! 반동 디주 박용제를 타도하자! 옳소오! 악질 반동분자, 박훈을 타도하자아!”
한편 지주와 가장 격렬하게 반목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덕을 보며 살아온 중간 관리직 마름들이었다. 소설 내에서는 그 선봉장으로 도섭 영감을 내세웠다. 그는 이 글 전체에 걸쳐 양심을 내버린 기회주의자로 나온다. 원래 부유한 집 아들이었지만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면서부터 떠돌아다니다가 훈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마름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뭐랄까, 기회만 주어지면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 군상으로 보인다. 자기보다 아랫사람인 소작인에게는 폭행을 서슴치 않으며 박씨 집안 어른에게 굽실거린다.
해방 후 토지개혁에 앞장서서 은혜를 입은 지주 집안을 배신하고 자신의 이득을 추구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치기에는 그의 행실이 너무 나갔다. 도섭 영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인간성 상실의 대표적인 캐릭터.
“예, 그 데수디 말입니다. 그 데수디만은 냉게주십시오.”
마침내 회의 같지도 않은 농민회의, 차라리 ‘선동 공작’이라고 해야 옳을 모임 끝에 숙청의 대상자들이 정해진다. 그 가운데는 훈의 삼촌인 용제 영감도 끼어 있었다. 그는 글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지하는 인물이다. 용제 영감 역시 지주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이때 지주의 품행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도덕적인 성품이었건 인정머리가 없었건 그저 ‘지주’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고 죄도 없이 끌려가야 했다.
용제 영감은 광산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미련이 남은 저수지 공사 때문에 광산에서
탈출해 마을로 돌아온다. 하지만 도섭 영감 일땅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잡혀 호송되던 중 자살한다.
그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에 몰입하는 ‘장인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용제 영감의 죽음은 소설 내에서 민족의 전통과 혼마저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단편소설 <독 짓는 늙은이>에서도 그랬지만 이런 장인들이 애꿎게 스러지는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용제 영감에 대해 정리하면, 비운의 장인 캐릭터.
“나는 다 알고 있다! 너어 간나 아새끼들이 야학이라구 시작한 것부터가 일종 반동 결사다! 농민들을 꾀이려 한 수작이다. 그래 아직두 농민들을 놈들으 노예루 만들어보려는 거냐?”
한편 용제 영감을 숙청한 공산당 일파는 박훈에게까지 손을 뻗는다. 그것을 이끄는 인물이 바로 개털오버 청년이다. 전형적인 공산당 조직의 하수인으로, 용제 영감과 박훈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모른다. 근데 대사를 보면 광신도 끼가 좀 많이 보이는 것이, 이 인물이 대체 어디 나라 사람인가 의심이 들 지경이다. 돈 없어서 온갖 천대를 받았고 그로 인해 피해의식이라도 생겼나 싶을 정도로 소설 속에서 과하게 정신이 나간 언동을 보인다. 꼭 공산당에서 높은 자리쯤 하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실상은 단순한 졸개에 불과하다는 점이 혀를 내차게 만든다. 스탈린을 만나본 적도 없을 양반이 스탈린을 영웅시하는 꼴을 보자니 그냥 비행기 수화물에 실어 러시아로 보내버리고 싶어졌다. 이 인물에 관한 총평은, 참 심하게 맛이 간 캐릭터라는 거.
“여보! 왜 그런 허튼소릴 덕었소? 해방이구 뭐구 다 일없소. 어서 집으루들 돌아가시오.”
결론부터 적자면, 박훈은 무사했다. 도섭 영감의 딸 오작녀가 개털오버 청년 무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공산당에 꼬리치며 적극 협력해 토지개혁에 앞장서는 부친과 달리 그녀는 훈의 편에 서며 부친과는 다른 노선을 취한다. 오작녀는 어린 시절부터 훈을 연모했으나 신분 차이로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부친의 권유로 훈의 집안 살림을 돌보는데, 마음을 준 박훈을 위해 헌신하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 용기를 내는 여인이다. 오작녀에 관한 단상, 위협에 굴하지 않는 들풀 같은 여자.
“어제 산에 혼자 남았을 때두 생각해보구, 밤에 자리에 누워서두 생각 해봤이요. 아무래두 난 내일 이리루 와서 누굴 하나 퀵에 없애구 떠나갔이요.”
결국 지주 및 지식인들은 박해와 핍박을 피해 월남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소설 속에서 그것을 주도하고 행동에 옮기는 인물은 박훈의 사촌 박혁이다. 그는 용제 영감의 아들로, 돌아가는 상황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 성격의 인물이다. 38선이 완전히 막히기 전에 친구의 협력을 얻어 배를 통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예나 지금이나 국경 넘는 건 밀항이 제일인가?
아무튼 박혁은 아버지가 애꿎게 끌려가자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아버지가 죽자 그를 가장 심하게 모욕한 도섭 영감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박훈이 먼저 그 일을 결행하기로 나서는 바람에 그는 나중에서야 박훈이 남긴 쪽지를 전달받는다. 박혁에 대해 요약하자면, 박훈과 대조적으로 행동력 있는 배운 학생.
“이제라두 곧 여겔 떠나십쇼. 다시는 이놈의 피를 묻히디 않두룩…. 그리구 불쌍한 누이를 대리구 가주십쇼.”
하지만 박훈의 살해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는 백면서생이다.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농사로 단련된 도섭 영감을 제압할 깜냥도 안 되는 것이다. 훈이 휘두른 칼날은 도섭 영감의 옆구리만을 상처 입혔을 뿐 그를 무력화하지는 못했다. 전세가 역전되고 도섭 영감에 위협이 훈을 덮친다. 그때 그를 구한 것이 삼득이, 도섭 영감의 아들이다. 오작녀의 동생으로 말이 없고 우직하다. 하지만 항상 박훈을 지켜주려고하는 착한 청년이다. 부친의 극단적인 폭행을 막는 인물로 지주와 농민 사이의 갈등, 공산당의 폭압 속에서 직접 나서서 저항하지는 않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선이 있어 폭압만은 저지한다. 삼득이에 관해 정리해보면, 소설 내에서 휴머니티한 인물 포지션.
이 외에도 건달인 오작녀의 남편 최씨, 어린애를 돈으로 구슬려 염탐을 시키는 치졸한 공산당원 흥수, 칠성 아범과 목수 강씨 등의 농민 및 노동자들, 인도주의를 표방해야 하는 의사임에도 정치색에 물들어 의사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김 의사,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살아온 당숙이 할아버지 등의 인물들이 소설 《카인의 후예》를 이끌어간다.
《카인의 후예》, 작가의 경험을 투영한 인간 윤리의 실종을 고발한 작품
이번에 독서한 《카인의 후예》는 단행본이 아니라 일종의 작품집에서 읽었다. 전체 도서명은 <한국 현대문학 전집 11: 황순원 작품선 카인의 후예>이다. 장편소설 외에도 단편작 <목넘이 마을의 개>, <독 짓는 늙은이>, <소나기>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작품집에 있는 해설 및 작가 연표를 통해 황순원 작가의 일생을 엿볼 수도 있다. 이번에 알게 된 건데, 황순원 작가가 북한이 고향이고 월남한 이력이 있었다. 아마 소설 속 배경이 된 토지개혁 무렵 지주 및 문인층에 대한 견제 때문에 남쪽으로 오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된 셈이다.
우선 <소나기>를 떠올리며 《카인의 후예》를 독서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하고 싶다. 아름다운 풍경, 풋풋한 소년 소녀의 마음, 애잔한 상실, 변덕스러운 가을 소나기처럼 왔다가 떠나간 사랑으로 잔잔한 울림을 낳은 <소나기>와 달리 이 《카인의 후예》는 막 숫돌에 갈아낸 낫의 날처럼 섬뜩하고, 꾸덕꾸덕 말라붙은 핏자국인 양 칙칙하게 붉고, 인간 환멸이 들 만큼 답답하기 그지없으니까.
작품은 북한에서 벌어진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농민과 지주 계급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당시 북한 사회를 긴장감있게 그려냈고, 사상이나 이념 갈등 이전에 눈앞의 이익에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또 조금은 짠하게 묘사되었다. 급변하는 상황에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토지와 재산에 눈이 멀어 행동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내 눈살을 절로 구기도록 만드는 한편 가난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싶어 애석한 심정이 들게 했다. 넉넉한 인심은 풍족한 곳간에서 난다고 하지 않던가.
실제 용제 영감의 관을 짜기 위해 온 목수 강씨는 이렇게 독백한다. 내가 의리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그저 용제네 집에서 슬쩍한 대패를 써보고 싶어 왔노라고, 단지 그뿐이라고.
하지만 그 문장 안에는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토지개혁으로 지주에게 고함을 치고, 전답 좀 얻어보겠다고 숙청에 가담하고, 어제까지 이웃으로 지내던 이의 세간을 뒷주머니에 챙기는 짓을 했지만, 그래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간된 도리로 관을 짜주러 온 게 아닐까. 그러면서 애써 자기는 대패를 써보고 싶었을 따름이라고 합리화를 한 게 아닐까.
한편 과거 자신들의 소행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지주를 숙청하는 것에 앞장서는 마름의 모습은 한마디로 인간 환멸이 들게끔 만들었다. 지주보다 더 무서운 건 마름이었다던 옛말이 하나 그르지 않았구나.
그래도 이런 혼란의 시대에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어 《카인의 후예》가 마냥 답답하지만은 않았다. 오장녀가 그렇고, 특히 당손이 할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공산당원들이 지주계급을 숙청하고 반동분자로 몰아가는 것, 농민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선동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유일한 농민이다. 그는 비록 힘이 없어 크게 저항을 하지는 못하지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바르게 보려하는 서민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카인의 후예》는 북한의 급진적인 토지개혁, 기득권의 무자비한 숙청을 잔인하고도 참혹하게 그리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사상이나 이념 갈등 이전에 ‘인간 윤리의 실종’을 고발하고 있는 소설 같다. 10명의 사람이 있으면 가치관도 10개가 되는 법인데, 그게 다르다고 칼부림을 하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광복 전후, 정말 우리나라는 남북이 양극단으로 치달아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의 비열함이, 다른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의 잔혹함이 우리 국민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38선은 아직도 건제하고, 우리는 휴전국이지 종전국이 아니니까.
사실 내 친할아버지께서 북한에서 월남을 하셨다고 한다. 평산 신씨, 실향민인 셈이고, 남한으로 피난을 오신 거 보면 북한에서는 지주였던 모양이다. 물론 내 아버지 세대는 남한에서 태어났고, 나도 이 이야기를 아버지한테서 전해 들은 게 전부라서 자세한 디테일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집안사 덕분에 황순원 작가의 《카인의 후예》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창세기 4:8”
소설의 제목 모티브가 된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성경 창세기에서 기원한다. 당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계몽과 구민에 맞물려 활발히 활동했다는 방증이다.
카인은 친족의 피를 땅에 뿌려 인류 최초로 살인자가 된 인물이다. 자신이 바친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고, 동생 아벨이 받친 제물만을 흡족하게 여긴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살인의 원인이 됐다. 그는 농경 사회를 상징하고 도시 문명과 인류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동생 아벨은 형에게 죽임당한 인류 최초의 피해자요, 목동으로 자연과 가능성의 상징, 영적인 소통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우리 역사는 말한다. 같은 친족을, 같은 핏줄을, 같은 땅에 태어난 이웃을 서로 미워하고 죽이려 달려들었노라고. 그리고 마침내 지울 수 없는 선을 긋고 여직것 살아가고 있노라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진실로 ‘카인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느님은 카인에게 형벌만 주지는 않았다. 땅에서 난 모든 것을 수확할 수 없고 땅이 거부하며 유리된 존재가 되는 벌을 주었지만, 다른 누군가가 카인을 해할 수 없도록 표시를 남겨서 최소한의 구제는 해주었다고 하니까.
이런 대목을 보면 우리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황순원 작가의 《카인의 후예》는 그런 점을 돌리고 돌려서 완곡하게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성의 상실을 경계한다면, 언젠가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사상이나 정치 이념보다 중요한 건 생명윤리와 인간성이니까. 그게 정말로 사람다운 거니까.
첫댓글 목마름에 샘물을 만난 느낌?
지금도 이 세상은 카인의 후예처럼 미쳐 돌아가고 있다.
물질과 권력의 살육속에서, 견제와 제거의 홍수에서 나를 찾아보는 계기의 글이 되었다.
사서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