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알리는 징조가 삼포왜란, 사량진왜란, 을묘왜변 세 번의 외환이 있었다. 여기에 내우도 있었다. 바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다.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기축옥사도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평화의 시기’라고 말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정여립 역모 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 10월이 밝혀졌다. 피해자가 무려 1천 명이나 되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본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 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을 고변함으로써 사건이 드러났다. 이 고변에서 정여립의 역모 죄상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 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
정여립의 행적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자료도 있다.
불만을 품은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학문을 강론한다고 위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았다.
정여립은 황해도에서 예전에 임꺽정과 같은 도적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곳으로 가서 처음에는 황해도 도사 자리를 청탁했으나 여의치 않자 변숭복·박연령·지함두 등 불만 세력을 포섭하였다.
정여립은 지함두 등과 황해도 구월산을 구경하고 충남 계룡산을 유람하고, 어느 폐절에 들어가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였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 /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 / 고개 돌린 용이 조산을 돌아보는 형국이니 /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 /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 /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 / 태평세월을 이룩하기 무엇이 어려우리오.」
정여립은 당대에 떠돌던 참언 곧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를 목판에 새겨서 떠돌이 승려 의연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후일에 우연히 얻은 것처럼 하라는 것이었다. 그 참언은 파자(破字)로 ‘이(李)씨는 망하고 정(鄭)씨가 흥한다.’라는 뜻이다
정여립은 다음과 같은 말도 떠벌리고 다녔다.
“내가 요동에 있을 때,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전주 남문 밖에 있다.”
전주 남문은 정여립이 태어난 곳이었다.
비밀스럽게 가졌던 반역의 뜻이 세상에 공공연하게 퍼지자 다급하게 여긴 정여립은 반란을 결심했다.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규합한 군사들을 일으켜서 서울을 침범하려고 했다. 그 사실이 승려 의연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 안악의 교생 조구의 자백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했다. 그 소식을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이 정여립에게 알렸고,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자결하였다.
이상이 정여립 역모 사건의 전모이다.
정여립 역모 사건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은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이 죽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를 이조판서 자리에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적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해 보였다. 그런데 역변이 일어난 후에는 갓을 털고 일어나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들이 그 자리에 올라서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기에 꺼리는 바가 없었다.”
조사 책임자는 서인 정철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가혹하게 처분했다. 처벌된 인물은 이발·이길 형제, 정언신, 백유양, 최영경, 정개청, 김빙, 이언길, 유덕수, 윤기신, 유종지, 김창일 등 대부분 동인이었다. 그 희생자가 무려 1천 명 혹은 2천 명이라고 소개한다. 신각이 목을 벤 일본인의 수급이 70여 두였고, 박진이 의주로 보낸 수급은 111두였다. 이에 비교하면 기축옥사의 희생자는 엄청난 숫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병조의 고위 간부는 ‘평화의 시기’라고 말한다. ‘눈 감고 아웅’ 하는 격이다.
정철(鄭澈)은 학창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만난 인물이다. 그의 시조는 어린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런데 정여립 역모 사건을 다룬 그의 행적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가 노래한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와는 전혀 딴판이다. 임을 향한 그의 뜨거운 마음도 순수한 충성심이 아니라, 더러운 권력욕이었음을 느낀다.
이 사건은 전라도를 반역(反逆)의 향으로 만들고 말았다. 4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갖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그 후유증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