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의 연혁
▲강화산성
하점면 장정리에서 수습된 구석기시대의 쌍날찍개, 화도면 동막리와 하점면 삼거리 등지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와 고천리 고인돌군(인천기념물)을 비롯한 청동기시대의 유적 등 선사시대부터 강화 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였던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된다.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지방으로서 마니산의 강화 참성단(사적)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쌓은 제단이라고 전하며, 길상면의 강화 삼랑성(사적)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성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먼저 백제에 속하여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렀다. 475년(장수왕 63)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강화 지역에 혈구군(穴口郡)을 설치하고, 강화도에 수지현(首知縣)과 동음내현(冬音奈縣)을, 교동도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을 속현(屬縣)으로 두었다. 551년(성왕 29)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회복하였으나 553년(진흥왕 14) 신라가 백제를 축출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으며, 신주는 이후 북한산주(北漢山州)·남천주(南川州)·한산주(漢山州) 등의 변천을 거쳐 757년(경덕왕 16)에 한주(漢州)로 개편되었다. 한주에 속한 혈구군은 해구군(海口郡)으로 개편되었으며, 속현인 수지현은 수진현(首鎭縣 또는 守鎭縣)으로, 동음내현은 강음현(江陰縣) 또는 호음현(冱陰縣)으로, 고목근현은 교동현(喬桐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844년(문성왕 6)에는 강화도에 군사조직으로 혈구진(穴口鎭)이 설치되고 아찬 계홍(啓弘)이 진두(鎭頭)로 임명되었다.
고려가 개국한 뒤, 940년(태조 23) 해구현은 지금의 지명인 강화현으로 개편되었고, 수진현은 진강현(鎭江縣)으로, 강음현은 하음현(河陰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 전국 행정구역이 5도양계로 재편되면서 강화현은 양광도(楊廣道)의 영현(領縣)이 되어 지방관으로 현령(縣令)이 파견되었으며, 진강현·하음현·교동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1172년(명종 2)에는 교동현에도 지방관으로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1231년(고종 18) 몽골군이 침입하자 이듬해에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강화군으로 승격되었고, 강화를 강도(江都)라 칭하여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강도시대'가 지속되었다. 강도시대에 지금은 강화 고려궁지(사적)로 터만 남아 있는 궁궐과 관아 건물들을 비롯하여 강화산성·강화외성(이상 사적)과 강화중성(향토유적) 등이 축조되었다. 이후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일시적으로 인주(지금의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1377년(우왕 3) 강화군이 강화부(江華府)로 승격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양광도에 속하였던 강화·교동 지역이 경기우도에 편입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 1413년(태종 13) 8도제가 시행되면서 강화부가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로 승격되어 교동현과 함께 경기도의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소속되었다. 세조 대에는 지방 군사조직 체계인 진관제(鎭官制)가 시행되어 강화·교동은 풍덕·삭녕·마전·연천 등과 함께 장단진(長湍鎭)에 소속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교동현에 유배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인 1618년(광해군 10)에는 강화 지역이 전란이 났을 때 왕실이 피신하는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선택되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강화되었으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627년(인조 5) 강화부가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로 승격되었고, 1629년(인조 7) 수영(水營)이 교동현으로 옮겨져 교동부로 승격되었다. 1678년(숙종 4) 해상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진무영(鎭撫營)이 창설되어 강화유수부에 본영이 설치되었고, 강화유수가 최고 지휘관인 진무사(鎭撫使)를 겸임하여 5영(營)을 통솔하였다. 1777년(정조 1)에는 교동부가 극적(劇賊)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교동현으로 강등되었다. 1866년(고종 3)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1871년(고종 8) 미국이 셔먼호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강요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발생하는 등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1871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 침투하여 수교통상을 강요하며 운요호사건을 일으켰고, 이듬해에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강화부와 교동현은 각각 강화군과 교동군으로 개편되어 인천부에 편제되었으며,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강화군은 다시 강화부가 되어 교동군과 함께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06년에 강화부는 다시 강화군으로 개편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교동군의 삼산면이 강화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교동군이 강화군에 병합되어 14개 면(부내면·선원면·불은면·길상면·양도면·내가면·하도면·하점면·송해면·양사면·화개면·수정면·삼산면·서도면)으로 편제되었으며, 강화군에 속하였던 신도·시도·모도·장봉도 등 4개 섬이 부천군에 이속되었다. 1934년 화개면과 수정면이 교동면으로 병합되어 13개 면으로 재편되었고, 1938년에는 부내면이 강화면으로, 하도면이 화도면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8·15광복 후에도 기존의 행정구역이 유지되었으며, 1970년 강화면 갑곶리와 김포군(지금의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잇는 강화대교가 개통되어 강화도가 육지와 연결되었다. 1962년 서도면의 볼음도를 관할하는 볼음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에 강화면이 강화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의 1읍 12면 체제가 갖추어졌다. 1995년에는 강화군이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지금에 이른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읍(강화읍) 12면(교동면·길상면·내가면·불은면·삼산면·서도면·선원면·송해면·양도면·양사면·하점면·화도면) 1출장소 188행정리 96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10-2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