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로 가득 찬 가을 아침이다 너무 일찍 깨어 머뭇대다가 지난밤을 보낸 일성콘도에서 성큼성큼 큰길 쪽으로 걸어 내려와 본다
그렇게 세상 한 번 둘러본다
온통 뿌옇다 이미 망해버린 크라운 온천호텔의 입간판도 뿌옇다 뿌옇기는 어젯밤을 보낸 일성콘도도 마찬가지다
생각하면 어떤 것인들 뿌옇지 않으랴 물어보고 따져보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뿌옇다
한때는 신혼여행을 온 젊은 부부들로 들끓었을 크라운 온천호텔……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이 호텔 입구에 붙어 있는 쬐그만 입간판도 한 손에 잡힌다
거기 좌우로 늘어서 있는 쇠사슬에 붙어 있는 좀 더 쬐그만 ‘출입금지’ 표시라니!
표시를 어기고 조금조금 이 낡은 폐허 가까이에 다가가 본다 안개로 가득 찬 폐허의 주둥이가 까맣다
저 까만 폐허의 주둥이라니! 오래된 것들은 다 까맣다
무너지려면, 흙으로 돌아가려면 까만 제 주둥이부터 헤벌쩍 벌어져야 한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아직 해는 뜨지 않고, 아직 이슬은 마르지 않고, 아직 거미줄은 젖어 있다
주변을 지나가는 자동차소리들 우르르 들린다 자동차 소리에는 멧새들 지지골대는 소리도 섞여 있다
한 걸음 옆에는 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도둑고양이가 제 몸에 묻은 이슬을 털고 있다
한 걸음 더 옆에서는 밭에서 훌쩍 튀어나온 명아주와 쇠비름이 늙고 지친 얼굴로 졸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가는 누구도 부곡의 아침을 깨우지 못하리라
부곡의 아침을 깨운들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으니 무엇하랴
발걸음만 종종대다가 안개로 가득 찬 이 까만 폐허, 마음 깊이 저장해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