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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고서원(臨皐書院)
1)임고서원
1553년(명종 8)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선조 36)에 다시 지었으며, 이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장현광(張顯光), 1727년(영조 3)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묘우 표충사, 내삼문 유정문, 강당 흥문당, 정몽주신도비, 유물 보호각 삼진각, 문루 영광루,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 등이 들어서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고서원 [臨皐書院] (두산백과)
2)정몽주 순절처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가 성헌(省憲)을 사주하여 연명(連名)으로 글을 올려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ㆍ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ㆍ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말하기를,
“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ㆍ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
“우리 공(公)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영규ㆍ조영무(趙英茂)ㆍ고여(高呂)ㆍ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ㆍ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태조실록 총서 【원전】 1 집 17 면
3)삼강행실도(세종) <포은운명>
4)오륜행실도(정조, 김홍도 그림) <포은운명>
5) 청풍당(淸風堂) 박영손(朴英孫, 1442~1486)
선생의 자는 찬경(贊敬), 호는 청풍당(淸風堂),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연이현감 순조(順祖)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 6년(1460) 19세의 약관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禮曹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하였다. 황해도에 있을 때 백성들 보살피기를 정성을 다하여 다스렸으며 향교와 서당을 잘 다스리니 백성들은 태평을 누렸다. 암행어사가 내려와 풍원군수의 정사를 보고 말하기를 “청렴하고 깨끗하며 맑아서 흠 없는 옥과 같고 티 없는 얼음 같다”고 하니 임금님께서 청풍당(淸風堂)이라는 호를 내렸다.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사적(史蹟)이 불태워짐에 선생의 문적(文蹟)도 불타고 협부사(狹賦辭) 두 편만이 세상에 남아 있다.
우고서사 마을은 박영손[1442~1486]의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청풍당은 창건 연도는 미상이나 1919년 중수하였고 1980년에 중건하였다. 우고 서사는 청풍당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수백 년 사림(士林)의 논의로 우고 서사 곁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해마다 제향(祭享)을 받들어 왔으나 협소하고 퇴락하여 철거하고 1985년 새로 짓고 현판인 ‘우고 서사(愚皐書社)’를 그대로 옮겨 달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고 서사 [愚皐書社]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6)박성세(朴聖世,1652-1705)와 석연정
본관은 밀양. 자는 호여(皡如), 호는 석연(石淵)이며, 1652년(효종 3) 5월 13일에 태어나 1705년(숙종 3) 4월 8일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박천기(朴天紀)이며, 증조는 박점(朴點), 조부는 생원(生員) 박순효(朴舜孝)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박전(朴傳)이며, 어머니는 의인(宜人)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최시번(崔是藩)의 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통덕랑(通德郞) 이기(李淇)의 딸이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박평(朴枰), 사위는 아주인(鵝州人) 신이정(申以淨), 월성인(月城人) 손시탱(孫是樘), 성주인(星州人) 도계후(都啓垕)이다.
박성세는 1678년(숙종 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90년 식년 문과 병과(丙科)에 11위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되었다가 학록(學錄)으로 승진되고, 1693년 학정(學正) 겸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당론이 격렬하여 회의를 느낀 그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학문 탐구에 진력하였다. 풍광이 좋은 석연(石淵)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석연정(石淵亭)’이란 현판을 걸고 그곳에서 임천을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성세 [朴聖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7)정몽주 생가
명종 9년 갑인(1554) 6월 14일(계미)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이 지방 유생들이 정몽주의 서원을 건립하려는 일을 알리다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鄭彦慤)이 장계(狀啓)하기를,
“신은 지난해 9월 명을 받고 내려와 순행차 영천(永川)에 도착하니 한 고을의 부로(父老)와 유생(儒生)들이 모두 모여 신에게 고하기를 ‘고을 북쪽 10리쯤에 부래산(浮來山)이 있는데 그 산밑에 있는 고허(古墟)는 바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생장하고 공부한 곳이다. 가묘(家廟)를 세우고 서원(書院)을 지어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후생(後生)을 격려하려고 소원해온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감사가 내려 왔으니 어찌 이 일의 성취를 꾀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중략)
금년 3월에 신이 다시 순행하여 군에 이르니 품관(品官)과 유생들이 모두 힘을 내어 가묘를 완성시키고 서원을 짓고 있는 중이었는데 군수 이의(李義)가 첩정(牒呈)하기를 ‘문충공 정몽주 가묘와 서원을 건립하는 유사(有司)인 생원(生員) 김응생(金應生), 유학(幼學) 정원량(鄭元良), 진사(進士) 노수(盧遂) 등이, 가묘의 춘추 제향(春秋祭享)과 유생들을 먹일 미면(米𥸴)과 읽을 서책 및 지공(支供)할 노비(奴婢) 등의 출처가 없으니 소수 서원의 예에 따라 전해 보내서 시행하게 해달라고 정장하였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향유(鄕儒)들이 각기 자재(資材)를 내어 선현(先賢)을 위하려고 사우(祀宇)를 건립하고 서원을 설치하고서 또 학전(學田)과 노비를 모두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의 예에 따라 수호하고 지급하게 해주기를 청했으니 학교를 비보(裨補)하려는 뜻이 가상합니다. 그리고 정몽주의 문장과 절행(節行)은 안유(安裕)에 못지 않습니다. 사전(祀典)과 학규(學規)는 나라 제도에 있어 막대한 일이니 정언각의 계청(啓請)에 응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여 정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문충공은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시조이니 그의 문장과 충렬은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이제 사우를 세우고 서원을 설치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명종실록 【원전】 20 집 208 면
8)유방선의 포은선생 옛집 방문시
訪圃隱先生舊居小賦
포은의 손제자인 유방선(柳方善)이 영천에 유배와 포은이 순절한 지 19년이 지난 24세 1411년 3월에 포은선생 옛집을 방문하고 지은 작은 시
晨興盥櫛而衣冠兮。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였네.
坐靜室以焚香。고요한 방에 앉아 향을 사루었네.
讀周易之數卦兮。주역의 몇 괘를 읽다가
奄瞌睡而憑床。문득 졸음이 와서 경상에 기대어 잠들었네.
夢一羽人頎而長兮。꿈에 헌걸차고 키 큰 한 신선
揖我告我以言之昌。나에게 읍하고 쏟아내는 말로 알렸네.
曰今天氣之方春兮。오늘 날씨 바야흐로 봄입니다.
花木滿野以紛芳。꽃과 나무 들에 가득하여 향기가 분분합니다.
固宜狂歌痛飮以自樂兮。참으로 미친듯 노래 부르고 술 마시며 즐기기에 좋습니다.
亦奚爲乎數墨而尋行。또한 어찌 몇 편 시를 짓고 행실만 찾습니까.
浮生若夢兮。떠도는 인생 꿈과 같습니다.
竟學何施。마침내 배워서 어디에 베풀려합니까.
歘焉覺而深思兮。문득 잠이 깨고 깊이 생각했네.
豈其言之我欺。어찌 그 말이 나를 속였겠는가
果已往之不可復追兮。지나가버린 것은 거슬러 갈 수 없네.
當來者之庶幾。다가올 것은 거의 해볼 수 있네.
佩僕夫以酒壺兮。종에게 술동이를 들리고
鳴石徑以筍車。대나무 가마 타고 돌길을 울렸네.
涉南川而問柳兮。남쪽 냇물을 건너고 버드나무 마을 물었네.
登東岡而尋花。동쪽 언덕을 올라 꽃 핀 촌을 찾았네.
忽中道而坎止兮。홀연히 중도에 길이 험해 멈추었네.
迺圃隱之舊家。포은 선생의 옛 집에 발걸음 닿았네.
爰回步而彷徨兮。그집에 머물며 방황했네.
心蘊憤而增嗟。마음에 분개함이 쌓이고 탄식이 늘었네.
方其坐廟堂而進退百官兮。선생은 조정에 들어가 온갖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났네.
號令馳其霆雷。호령하고 치달리기가 벼락치듯했네.
喜有賞而怒有刑兮。상찬을 기뻐하고 형벌을 노여워 했네.
陽和霜凜之迭開。따스한 봄 서리치는 가을이 번갈아 열리고
立大學以講道兮。대학을 세우고 도학을 강의하셨네.
扶斯文於敗頹。쓰러진 유학을 붙잡으셨네.
聘異域而諭義兮。이역 만리 사신 가서 도의를 알게하셨네.
椎䯻稱臣而咸來。오랑캐도 신하라 하며 모두 따랐네.
吾東方禮樂典章賴以大備兮。우리 동방 예악 문물 선생에 힘입어크게 갖추었네.
信王佐之偉才。진실로 왕을 보좌한 위대한 인재이셨네.
天何不弔而遽隕兮。하늘은 어찌 슬퍼하지도 않고 선생은 급히 운명하셨네.
志士碩人莫不爲社稷而肝摧。지사 석유가 사직을 위하다 목숨 잃었다 하지 않음이 없네.
今歲月之幾何。이제 세월이 얼마나 지나갔는가
令人思慕之益深。사람으로 하여금 사모하는 마음 더욱 깊게 하네.
宅舍沒於榛蕪兮。집은 잡초에 묻혀 있네.
獨梅竹之蕭森。선생이 손수 심으신 매화 대나무만 쓸쓸하여라.
羌覽物而興懷兮。아! 사물을 보니 일어나는 감회여
終日攀撫而悲吟。종일토록 오르고 어루만지며 슬피 읊조리네.
瀉椒漿而奠一杯兮。술을 따라 한 잔을 올리네.
諒貞魂之必歆。곧은 혼령은 헤아리고 반드시 흠향하시라.
哀今之爲仕兮。오늘날 벼슬하는 슬픔이여.
誰爲雌而誰雄。누가 잘나고 못난 것이뇨
食君之祿恐不隆兮。임금의 녹을 먹으니 융성치 않을까 두렵네.
實未效於寸功。실로 한마디의 공도 이루지 못하었네.
徼君之爵患不崇兮。임금의 벼슬을 구하고 높이 오르지 못할것만 걱정하네.
顧有闕於飭躬。부족한 것을 돌아보고 몸을 경계해야 하리.
唯知趍利而避害兮。오직 이익만 쫒아가고 손해만 피하네.
何蠢蠢之足攻。어찌 미욱하다고 비난 받지 않으랴.
嗚呼死生亦大矣。오호라!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 일이로다.
孰不惡死兮。누군들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랴
君子樂死於忠。군자라야 충에 즐거이 죽네
孰不欲生兮。누가 살기를 바라지 않으랴
丈夫且恥其苟容。장부라야 또한 구차한 것을 부끄러이 여기네.
能殺身以成仁兮。몸을 죽여 어짊을 이룰 수가 있네
世有幾其如公。세상에 공과 같은 분 몇이나 있으랴
慨九原之不可作兮。저승에 가서 선생 뵙지 못함을 슬퍼하네.
余將曷從。나는 장차 누구를 따라야 하리.
自註。자주
先生手種梅竹尙存。선생이 손수 심은 매화나무 대나무가 아직 남아 있다.
故篇中及之。그래서 시 가운데서 언급한 것이다.
-泰齋集, 圃隱先生集附錄
9)정몽주 효자비
功臣贊成事大提學 鄭夢周 庚午封 益陽郡 忠義君,
洪武己巳(공민왕 원년 1389) 三月中頃 永守鄭有立碑
10)포은선생연보고이(발췌)
至元 三年丁丑(1337)
十二月戊子日。先生生於永川郡東愚巷里。初。妣卞韓國夫人有娠。夢抱蘭盆驚墮。寤而生公。因名夢蘭
五年乙酉 先生九歲。卞韓國夫人晝夢黑龍升樹。出視之。乃先生也。因改名夢龍。旣冠。改今名
十五年乙未 先生十九歲。正月。丁考日城府院君憂。廬墓
二十年庚子 恭愍王九年。先生二十四歲。政堂文學金得培知貢擧。樞密直學士韓邦信同知貢擧。先生連魁三塲。擢第一。
二十五年乙巳 移典農寺丞。正月。遭妣卞韓國夫人憂。廬墓。
二十六年丙午 時喪制紊弛。獨先生廬墓。哀禮俱盡。事聞。㫌表其閭。
二十七年丁未 先生服闋。拜通直郞典工正郞不就。尋拜禮曹正郞兼成均博士。時兵革之後。學校荒廢。至是新創成均館。選碩儒兼學官。以李穡兼大司成。先生講說發越。超出人意。諸儒嘆服。穡亟稱之曰。達可論理。橫說竪說。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
洪武 二十二年己巳 恭讓王元年(1389)
六月。拜藝文館大提學。十一月。拜門下贊成事。
二十三年庚午 八月。賜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號。拜重大匡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領書雲館事,益陽郡忠義君。十一月。拜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益陽郡忠義伯。時國家多故。機務浩繁。先生爲相。不動聲色。而處大事决大疑。左酬右答。咸適其當。時俗凡喪祭。專尙桑門法。忌日齋僧。時祭只設紙錢。先生請令士庶倣朱子家禮。立廟作主。以奉先祀。禮俗復興。且選擇守令。以參上有淸望者爲之。仍遣監司。嚴其黜陟。疲瘵復蘇。置都評議使司,經歷都事。籍其金穀出納。內建五部學堂。外置鄕校。至於整紀綱立國體。汰冗散登俊良。革胡服襲華制。立義倉賑窮乏。設水站便漕運。皆其畫也。
二十四年辛未 十一月。先生爲人物推辨都監提調官。十二月。加賜安社功臣之號。
二十五年壬申 二月。先生進所撰新律。王命知申事李詹進講。凡六日。屢嘆其美。及我聖朝將受命。先生伏節而終。實四月初四日也。是年七月。高麗亡。
建文三年辛巳 太宗大王命贈先生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謚文忠。
永樂四年丙戌 烏川鄭氏族譜云。先生初葬于海豐郡。至是年三月。遷于龍仁縣治之東曬布村。夫人李氏。封敬順宅主。與先生合葬焉。
宣德七年壬子 世宗大王命撰三綱行實。以先生列於忠臣傳。
嘉靖三十四年乙卯 永川士人盧遂等創書院于浮來山下。卽先生舊居也。事聞。
明宗大王賜額曰臨皐書院。又賜四書五經通鑑宋鑑。仍置位田。春秋修祀事。
隆慶四年庚午 開城府士人建書院于花園。此亦先生舊宅也。越五年
萬曆乙亥。上敎曰。文忠公以東國儒宗。矧其節義可貫日月。今旣新建書院。予欲遣官致祭。於是遣承旨往祭之。賜扁曰崧陽書院。又賜朱子語類。是年。都事李敞以公遺像奉安。
宅
一在永川郡東十五里許古川村愚巷里。今生員鄭琚仍居焉。
一在開城府花園北。
墓在龍仁東面曬布村。
碑
一孝子碑。在永川舊宅㫌門之下。洪武己巳。太守鄭宥所建。題曰孝子里。厥後頹仆。成化丁未。孫舜孝按節至境。夢遇先生。從里老得此碑於田畒中。復立之。架屋以庇之。
一忠臣碑。在開城舊宅。留守李壽童所建。
畫像
一在南部樂善坊別坐鄭震家。
一在臨皐書院。
一在崧陽書院。
書院
一在永川浮來山。嘉靖癸丑。士人盧遂,金應生,鄭允良等所建。賜額臨皐書院。○萬曆壬辰。燬于倭冦。越十年壬寅。鄕人鄭世雅,李喜白,鄭湛等重建于道一洞。爲先生先壠在此洞。故移卜焉。 事聞。復賜額臨皐書院。
一在開城宅址。隆慶辛未。經歷具忭等所創。賜額崧陽書院。
11) 題圃隱先生孝子碑閣[孫舜孝]
文丞相,忠義伯。문승상, 충의백
兩先生肝膽相照。양 선생 간담이 서로 비추시네
忘一身立人極。한 몸을 잊고 사람의 윤리를 세우시니
千萬世景仰無已。천만세토록 우러러 그침 없네.
惟利所在。오직 이익이 있는 곳으로
古今奔走。고금의 사람들 바삐 달려갔지만
淸霜白雪。맑은 서리 하얀 눈 속에
松栢蒼蒼。솔과 잣 푸르고 푸르네.
構屋一間。한 칸 집을 지어서
將以蔽風。비바람을 가리게 했으니
公靈安兮。공의 영혼 편안하시고
我心安兮。내 마음 안도가 되도다.
-圃隱先生集附錄
성화22(1486)년 병오 12월 초1일 후학 관찰사 손순효 칠휴 배 계수
恭惟我 (중략)
가정43년(1564) 갑자 2월 上澣
姓裔 생원 鄭琚謹跋
12)重修圃隱鄭先生碑閣記
廵相柳公永詢按嶺之翌年冬。余適忝玆郡。公囑余曰永之學徒。旣新文忠公祠宇。又新書院。其意固盛矣。獨先生本集板刻若碑閣。一㨾兵燹。尙未遑。非志不篤。顧力不贍耳。子其卒之。吾且資之。余聞公言。慨然卽鳩工鋟梓。舊有數本。互有詳略。與院諸生。更加讐校補入。遂成完集。又令有司兼掌修閣。稍增舊制。棟而瓦之。垣而門之。纔閱月而訖之。自是集布乎中外。碑蔽乎風雨。先生道德名行。表裏相照。與之同長而不朽。庶乎承廵相之惠而成學徒之美矣。嗚呼。君親一體也。忠孝一源也。未有忠君而遺其親者。亦未有孝親而後其君者。古人移孝爲忠者。槩可見矣。世徒知先生忠於所事。死於當死。凜然若秋霜烈日之不可犯。不知先生有以能盡臣節者有自來矣。先生一言一行。在行狀年譜者。亦足以竦動興起。况履先生遺墟。瞻先生㫌表。其親炙而激感。淑人心而敦風化者。爲如何耶。不幸時世變遷。是碑沉沒荒穢中。莫有知者。至七休公夢遇而得之。復立焉。七休亦孝子也。味其先生安我心安之語。則謂七休能以孝感孝。非直以夢感公。亦奇矣哉。又不幸壬癸倭亂。棟宇俱燬。片石獨存。閱幾行人星使。而至吾廵相。又命新之。碑出於前。閣出於後。此則可謂感七休之感。而先生忠孝能使後人相感於無窮者乃如是。彼不孝不忠陽堯陰跖之輩。亦能來敬公碑。隱然泚顙而不自知者。獨何心歟。噫吾黨之所以自省而當盡者。其不在玆乎。萬曆三十五年丁未(1607년)五月日。永川郡守黃汝一記。
-海月先生文集卷之七
13)祭文忠公圃隱鄭先生故里碑前文
正德乙亥(1515, 중종10년) 四月二十日。先生以永川守。冒雨往祭。
懿歟先生。生東方兮。生當衰季。以身將兮。河流旣潰。側手防兮。身存國存。國亡亡兮。忠貫日月。植綱常兮。魂兮儻來。寔居鄕兮。誰其立碑。用意強兮。祀典不擧。我心傷兮。七休一酹。吾道光兮。今讀其文。凜秋霜兮。愧余駑質。守此疆兮。高山景行。跂余望兮。齋心薰沐。薦一觴兮。靈其不昧。照我腸兮。碑在永川舊宅旌門下。洪煕乙巳。太守鄭宥所建。歲久顚仆。成化丁未。孫公舜孝按節至境。夢遇先生。從里老得此碑於田畝中。復立架屋以庇之。因題其碑閣曰。文丞相忠義伯兩先生肝膽相照。忘一身立人極。千萬世。景仰無已。唯利所在。古今奔走。淸霜白雪。松柏蒼蒼。構屋一間。將以蔽風。公靈安兮。我心安兮云云。七休。孫公別號也。
-冲齋先生文集卷之一
6. 선원리 철불
1)선원리 철불좌상
해방 전 농부가 밭을 갈다가 출토하였다는 말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일찍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다면 이만한 수준과 크기의 불상이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자료에 실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점과 동네 청년의 증언을 근거로 1968년 이 불상의 존재가 학계에 보고될 때도 이렇게 추정하였으며, 현재 불상의 관리를 맡고 있는 할머니의 증언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다시 나왔지만 버려지다시피 한 채 마을사람들에게 미륵불로 불리던 철불이, 어느 날 자신은 미륵이 아니라 석가이며 천수(天水)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선몽을 하여 동네에서는 작은 초가를 짓고 안치한 뒤 해마다 한 차례씩 당산나무 아래서 고사를 지내며 받들었다. 그뒤 훈련차 마을 가까이에 주둔한 적이 있던 일본군 부대로부터 마을에서 식사를 제공한 대가로 받은 보리쌀 한 트럭을 팔고 마을사람들의 추렴을 보태어 절이 이루어졌고, 보물로 지정된 뒤에는 국가예산으로 보호각이 지어져 지금처럼 모셔졌다는 게 관리인 할머니의 말씀이다.
어떻든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게다가 모든 동리 사람들의 보살핌과 우러름을 받게 된 것은 고맙고 다행한 일이겠으나 그 다행 중 불행한(?) 일도 몇 가지 함께 생겼으니 이 점은 불상이나 우리들에게나 마뜩찮고 딱한 노릇이겠다. 불상을 일별하면 몇 가지 아쉽고 안타까운 게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선 목 부분의 때운 흔적이 문제인데, 목을 빙 돌아가며 땜질한 것으로 보아 어느 땐가 고의로 목을 절단하여 방치한 것을 아마도 발굴 후에 보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표면에 금박이 입혀져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좀더 세심한 보수가 이루어졌다면 지금보다 나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다음은 양쪽 팔과 손이 실망스러운 상태다. 어깨 아래부터 떨어져 나간 오른쪽 팔과 왼손을 발굴 이후에 나무로 깎아 보완했으나 그 솜씨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보는 이가 이리저리 그 모습을 그려보는 여백이라도 있으련만 그조차 들어설 틈을 없애고 말았다. 불상을 위하는 정성이야 갸륵할지 모르나 불상 본래의 위엄이나 자세를 손상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 점은 불상 전체를 번쩍거리는 금으로 덮어씌운 것도 마찬가지다. 금을 올린 솜씨가 시원치 않아 오래 된 불상의 맛은 간 곳이 없고 어제 만든 불상처럼 생뚱스럽고 이질감이 느껴진다. 특히 얼굴은 천박한 화장으로 본래의 아름다움조차 잃어 원형을 많이 그르치고 있지 않은가 의심스럽다.
이런 점들을 미리 감안한다면 우리는 그런대로 우수한 불상을 만날 수 있다.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붕긋하게 솟은 얼굴은 크기가 알맞아 몸체와 조화를 이루나 치뜬 눈에 길게 찢겨 올라간 눈꼬리, 짧은 인중 아래 가장자리가 쏙 들어가도록 다문 작은 입이 만드는 인상은 온화함보다는 근엄함에 가깝다. 두 무릎 사이가 지나치게 넓다 싶을 정도로 안정된 결가부좌의 앉음새에 잘록한 허리, 자칫 육감적으로 보일 만큼 발달한 앞가슴, 그리고 넓고 당당한 어깨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몸체는 대단히 젊고 강건하지만 다소 유연성이 떨어지고 과장된 느낌이다. 몸매를 남김없이 드러낼 정도로 얇은 법의는 오른쪽 어깨와 가슴을 드러낸 채 아래로 흘러내려 양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몸에서는 몇 개의 융기선으로 처리된 반면, 왼쪽 팔에 늘어진 무늬는 평행계단식으로 촘촘히 표현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새로 보완한 오른팔과 두 손은 애초 수인이 지금처럼 항마촉지인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으나, 오른팔의 손상이 심한데다 지나치게 몸체에 밀착되어 부자연스럽게 드리워진 왼팔의 손목이 오른발 끝에 놓이는 점을 볼 때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주저스럽다.
앉은키 151㎝, 머리 높이 48㎝, 어깨너비 77㎝, 무릎너비 101㎝의 크기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 굴곡이 분명한 신체, 반듯한 자세가 퍽 강한 인상을 풍기는 당당한 불상이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그 자세에서 멀리 석굴암 본존불의 여운이 간취되기도 한다. 얼마간 경직되고 형식화되어 있으나 비교적 좋은 신체비례나 양감 있는 체구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편단우견에 촉지인을 한 불상형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5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로 주조한 위에 금박을 입히거나 호분 따위로 칠을 하여 만든 철불은 사람에 따라서는 그 발생을 신라 불교미술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이전까지로 올려 잡기도 하지만 대체로 통일신라 말기에 등장하여 고려 초기까지 유행한 양식으로 보고 있다. 왜 이런 철불이 만들어지게 되었는가는 뚜렷하지 않지만 불상의 재료로 많이 쓰인 구리의 부족이 한 원인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철불은 거의 예외없이 지권인 또는 항마촉지인을 한 불상들로서 특히 비로자나불이 다수를 차지하고 그것도 주로 선종사찰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철불의 발생과 유행을 통일신라 말기 선종의 발달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초기 선종의 보급과 확산에 힘쓴 선승들이 대부분 화엄교학을 익힌 이들로서 화엄경의 주존불이 바로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선종은 새로 흥기하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따라서 그 중심 사찰들도 지방에 주로 위치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철불들 역시 강원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 등 수도를 벗어난 지역에 남아 있어 선종과의 관련성을 뒷받침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선원동 철불좌상은 다소 의외로운 불상이다. 우선 지역적으로 철불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이 아닌 경상도 지역에다 수도 서라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수인 또한 항마촉지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여 철불의 주류는 아니다. 불상이 있던 굉귀사(宏歸寺)라는 절은 불국사나 은해사보다도 먼저 생겨 이곳에 있다가 임진왜란 때 없어졌다고 하는데, 아무런 자취도 남은 게 없어 그 성격을 알 수 없으니 선종과의 관련 여부는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이곳에 이만한 철불이 전해져 흥미와 의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불상이 모셔진 선정사와 담을 맞댄 아래쪽에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가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수 정세아(湖叟 鄭世雅)와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栢巖 鄭宜藩) 공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어 그 유지에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원동 철불좌상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흥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2)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贈承旨鄭公忠孝閭記
天之道。陰與陽而已。地之道。剛與柔而已。人受天地之精以爲生。其所以爲人者。亦惟曰忠與孝而已。然陰陽也剛柔也。其理雖一。其用則隨遇而見。不可合而爲一。雖忠與孝。顧安得不爾也。况人一死耳。死不可以再焉。則死孝者死於孝而止。死忠者死於忠而止。人之於忠孝死得其一。則固可爲卓絶之事。今有以一人之身而辦一死而兼有其二者焉。則雖謂之千古罕有之行。非過也已。栢巖鄭公諱宜藩。字衛甫。贈判書湖叟公之子也。當宣祖壬辰。奉父母避兵山中。負米以供。俄聞廟社播遷。湖叟公涕泣起義兵。公竭力贊畫。身未嘗不在軍中。時年三十三。遇賊朴淵上。殺獲過當。已又因風縱火。殺永川賊無遺。永遂復。已又與左節度朴晉兵合。擊慶州賊。湖叟公挺身居前。麾兵殊死戰。賊死者過半。俄而。賊出奇兵襲晉軍。軍大潰。諸義士多力戰死。賊圍湖叟公急。公見父急。躍馬突圍。射賊必洞胷。賊大亂。父賴以脫。公卒惶急不知父已出。橫突遍求。出而入者三。身被數十創。所騎馬中丸。卒爲賊所執。脅以刃。竟憤罵不屈死之。實八月二十一日也。右廵使金公誠一聞之朝。上嘉歎者屢。贈度支員外。賊退。湖叟公求輓語實之棺虛。堋於先壠側。世謂之詩塚云。英宗壬子。加贈左承旨。今上甲辰。從六世孫上舍生夏濬又上言白公事。上特命旌閭。於是禮部覆啓。請刻之以忠臣孝子鄭某之閭。上曰可。嗚呼。公之死。未始不爲國而謂之非死於孝。不可也。未始不爲父而謂之非死於忠。亦不可也。忠者謂之忠。孝者謂之孝。禮部之必欲以忠孝並書者。豈不以公之辦一死而兼有其二者矣乎。忠孝本無二致。若公者。講學明理。隨所在而得盡其分。非有所爲而爲者。後世聲光之泯不泯。在公何與焉。雖然。上所以表忠奬孝綽楔於數百年之後者。欲使人之過是閭者。感發興起。各循其秉彝當然之則。納一世於忠孝之䡄也。人若但知式其閭而不知夫見賢思齊之義。於忠而苟焉。於孝而粗焉而已。豈聖上所以樹風聲勵世敎之意也哉。余於此抑有所慨恨者。方公之三突賊圍也。顧其奴億壽曰。父死於賊。吾當死。若宜去。奴曰。主旣決死。奴安之。遂控馬馳入死同時。何其奇也。公之閭。旣煥焉有旌。則不以忠奴之旌旌之於其側。其可乎哉。姑書此以俟。
樊巖先生集卷之三十五
7. 함계정사(涵溪精舍)
1)함계정사
유학자 정석달(鄭碩達, 1660-1720)이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 정석달은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가행(可行), 호는 함계(涵溪)이고, 부친은 대호군(大護軍) 정시심(鄭時諶)이다. 문집으로는 『함계집(涵溪集)』 5권이 전한다.
1702년(숙종 28)에 안락재라는 이름으로 초창한 후 1779년(정조 3) 정석달의 손자인 일찬공이 중창하여 함계 정사라 했다. 선원마을에서도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앞으로 펼쳐진 넓은 들과 선원천을 조망하도록 했다. 방 전면과 측면으로 설치된 창호 구조와 전면 툇기둥 좌·우측으로 설치한 홍살 형식의 가림벽 부분은 여타 다른 정사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함계 정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영천연정고택(永川蓮亭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07호. 넓은 대지에 연당이 있는 이 집은 1756년(영조 32)에 지었다고 전한다. 일심당(一心堂)은 그 때 붙여진 정침의 당호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곳간채 등이 직각으로 결합하여 □자집을 구성하였고 서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개울 옆의 연정(蓮亭)은 별당으로서 사랑채 마당가에 뚝 떨어져 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안채는 안방이 2칸이고 대청이 4칸인데 안방의 뒤쪽에는 골방과 툇마루가 있고, 안방의 아래는 3칸 크기의 큰 부엌이 있다.
안방 아래로 부엌이 가로 길게 굽어나가는 ㄱ자집 형식은 영남지역의 대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또 부엌 끝으로는 3칸의 긴 광채가 이어져 있다. 2칸의 안방은 가운데에 장지를 두어 아랫방·윗방으로 구분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대청의 건너편에는 한 칸이 좀 넘는 크기의 건넌방이 있는데 이 집에서는 작은방이라 부른다. 이 작은방 아래에서 직각으로 꺾어 붙인 외양간과 방앗간, 광을 가진 아래채가 부엌밑 광채와 마주하였으며 방앗간에는 디딜방아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一자집이며 사랑방·대청·대문·광·작은사랑·마루방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랑방은 한 칸의 온돌이며 전퇴를 제외한 대청에는 3면에 분합을 달아서 사랑방의 협소함을 보완하였다.
대청의 전퇴 마루 끝에는 긴 평난간이 갖추어져 검소한 가운데 운치를 더하고 있다. 외양간과 여러 광채의 벽은 판재(板材)로 탄탄히 꾸민 판벽이다. 사랑채 단하 마당 끝에는 대략 3칸 크기의 마판이 있었으나 철거된 지 오래다.
연정은 마당 밖을 굽어 흐르는 작은 계변에 있는데 건너편 급준한 언덕 위에 오래된 소나무와 잡목들이 들어차 있으며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조용히 소리 내어 흐르므로 깊은 산골과 같은 정취를 돋운다.
계류는 부정형으로 크게 넓혀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인공의 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정자는 3칸의 온돌방과 5칸 크기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못가 동변에는 네 개의 퇴기둥을 내세워서 기와지붕을 덧달아 내었다.
이것은 차양으로 처마를 깊게 드려서 일조와 더위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작은 계류를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준다. 이 집은 조선시대 향원(鄕園)유적으로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 연정 고택 [永川蓮亭古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