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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의병 / 군번 없는 영웅
호국성 독수리유격대 안내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
1. 독수리유격대 참전 개요 안내
▣ 6.25전쟁
동족상잔으로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였고, 온 나라가 아비규환으로 휘둘렸던 6.25전쟁이 이젠 반세기의 세월 속으로 저물어 버렸습니다. 허겁지겁 남(南)으로 내닫던 피난길에는 길가 마다 죽음의 시체가 즐비했고 폭격 맞은 엄마 시체에 매달려 젖을 빨던 아이의 처절한 모습, 그게 6.25전쟁의 실체였습니다. 이렇듯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서 6.25 전쟁보다 더 잔인한 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한 발짝이라도 먼저 피난을 가려고 아우성 일 때 우리 독수리유격대는 가족을 놓아둔 채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섰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무난하게 목숨과 가족을 지켰고, 전쟁이 끝난 후 현재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회에 순응하며 잘 살고 있지만 가족을 버리고 전쟁터로 나섰던 우리 대원들은 많은 수가 전사와, 전상을 당했으며 부모 형제 가족을 잃어 심신을 함께 음지에 놓고 반세기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작열하는 포탄 속에서 피 범벅 되어 적진으로 치닫던 우리 독수리 대원들의 젊은 혈기는 이제 백발이 되었고, 비호처럼 산야를 달리든 사지도 이젠 힘을 잃어 휘청 이고 있습니다. 역전에 용사였던 우리 독수리유격대원들이 이제는 쇠잔한 모습으로 뒤안길에 물러서 있지만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가 넘쳐흐르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우리는 장한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내 부모님과 처자식을 전쟁으로부터 지키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더 크고, 더 장하게 나라를 지켰다고 자부도 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당당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바치고 흘린 피를 생각 할 때, 우리는 깊은 감회와 경건한 마음으로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에게 명복을 빌어 올립니다. 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자유평화와 풍요의 가치를 낭비와 방종과 개인주의로 팽배 시키며, 어지러워지는 질서에 대하여는 참으로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우리 함께 바르게 서서 옷깃을 여미고 저 태극기를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전쟁의 교훈을 돌이켜보고 새로운 다짐도 간직해 둡시다. 그래야 저 태극기는 내일도, 모래도, 천년, 만년을 두고 장하게 휘날릴 수 있고, 처절했던 6.25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6.25 당시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위시해서 군 당국자들이 말끝마다 북진통일을 외쳐 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 가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파티를 하겠다며, 북진통일의 승전을 호언장담하며, 정쟁(政爭)으로 밤낮을 지새우던 정부였습니다. 그 정부는 김일성 공산군이 남침을 하자 3일을 버티지 못한 채 서울을 뺏기고 풍비박산 도망가듯 한강을 건넜습니다. 모두가 국방의 실제적인 대비는 외면한 채 허풍만을 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검증하고 자신감과 국방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6.25가 일어났는지를 생각하고, 6.25전쟁의 진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 6.25전쟁의 교훈
6.25전쟁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고, 머지않아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사회 경영에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6.25의 교훈은 지금 이 시기와 이 세대들에게 절대적으로 교육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6.25전쟁의 책임을 공산주의와 김일성의 남침으로만 돌렸습니다. 그리고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 낸 것은 미국을 위시한 UN연합국의 힘으로 믿어 왔습니다. 물론 6.25는 북한 공산군의 침략이었고, 김일성이 주범이었습니다만, 우리가 이제껏 망각해 온 사실과 교훈이 있습니다.
6.25전쟁의 발발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과 교훈이 무엇인지도 따져봐야 하고, 이에 대한반성과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문단속을 하지 않으면 도독을 맞는 것이 정한 이치이며, 국방의 능력과 준비가 허술 할 때 침략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6.25남침이 그러하고 일제의 침략과 북방 민족들의 무수한 침략이 그러했습니다. 일제의 침략을 일본 놈만 탓하고 6.25남침을 김일성만을 탓하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킬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국군은 전선(戰線)을 지키고 국민은 나라를 지킵니다. 국군은 국민이라는 집합 속에 원소로서 국경과 전선에서 일차적인 국방 임무를 수행합니다. 국경이 무너지고 전선을 잃으면 군대의 능력과 가치는 상실됩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잃어버린 국가도 되세울 수가 있습니다. 앞치마에 돌을 나르고 끓는 물을 적군에게 퍼붓던 행주산성의 아녀자들이나, 의병에 가담하여 왜군에게 저항하든 무지렁이 촌부들,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든 필부(匹夫)들이 모두 반만년의 나라를 지키고, 되찾아 놓은 우리 국민들입니다. 신성한 국군의 역할을 폄하시키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국군은 막강합니다. 우리의 국군이 그 역할과 능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의 올바른 정신과 국가관이 바탕에 깔려야 되며, 국민과 국군의 연대가 국방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국민정신의 중요성은 6.25전쟁과 월남 전쟁에서 분명하게 확인이 됩니다. 월남 전쟁은 6.25전쟁보다도 엄청나게 많은 전비(戰費)와 첨단의 무장(武裝)을 투입하고서도 재래식 월맹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낸 우리 대한민국과 패망한 월남은, 바로 “국민의 정신적 바탕 없이는 군대의 승리가 어렵고, 국가를 방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6.25 전쟁에서 우리 국민들의 구국활동은 엄청났습니다. 6.25전쟁에서 깊은 산속 외진 섬을 막론하고 의용군으로 나선 이가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들의 공훈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부는 숭고했던 민간의 저항정신을 평가해 주지도 않았고, 비정규전(非正規戰) 전사(戰史)의 발굴도 외면했습니다.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나라의 전쟁 기념물 중 거의 전부가 6.25전쟁 때의 것입니다.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를 살피다 보면 영웅적인 장군(將軍)의 기록은 많아도, 영웅적인 병사(兵士)의 기록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6.25전사(戰史)를 두고 “공훈(功勳)은 과장되고, 실패는 은폐(隱蔽)되었다.”라는 꼬리표를 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와 정성으로 마련된 우리의 전쟁기념관에도 6.25전쟁에서의 민간저항사(民間抵抗史) 분야는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6.25가 이제는 반세기의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이쯤 되었으니 이제는 6.25를 재조명하여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반성하며 채워 넣어야 하며, 군(軍)과 국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국방의 성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이 글은 독수리유격대나 우리 자신들을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하여 쓰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젊었던 옛날에 이런 주장을 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나라를 위하여 장(壯)하게 싸웠다는 자만(自慢)과 자랑이 되겠지만 우리는 지금 팔순에 이르는 노년으로 인생과 사회에서 열외로 서 있습니다. 이제사 우리가 자랑을 하면 무엇하고 칭찬을 받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가 전쟁터에 나선 것은 전쟁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전쟁을 피하고 싶었고, 죽음을 전제로 하는 전쟁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무너져선 안 되겠고,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무너질 것 같아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섰던 것입니다. 독수리유격대는 일부 그릇된 무리로부터 불법총살(卽決處分)과 적진추방(敵陣追放)이라는 만행(蠻行)을 당하면서도 일념으로 구국(救國)만을 생각했고,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우리는 신념으로 구국전선(救國戰線)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오르지 국가수호의 일념으로 전장(戰場) 지켰을 뿐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지금에 와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의 자랑을 남기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후세들에게 “대한민국을 지켜내겠다.”는 주인 된 의식을 심어주고 싶고, 이 정신을 역사 속에 흐름으로 남기고 싶은 염원 때문입니다. 독수리유격대 전몰대원 16위! 그들의 청춘은 피지도 못한 채 떨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분향 할 후손들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60여년이 흐른 이제는 그들의 시신도 흙으로 잦아들고 흔적을 잃었겠지만 그들의 영혼은 아직도 격전(激戰)에 산야에서 갈피를 못 잡아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이들에게 향을 피워 명복을 빌고, 이제는 여기에 자리하고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 전쟁의 교훈은 바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일어난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을 방지하고 이기는 지름길은 민관군(民官軍)이 함께 준비하고 축적하는 힘과 국민정신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쌍아야 할 국방의 성(城)은 철통같은 정신무장과 국방태세를 확보하는 것이지 공산주의 타도의 구호를 내 걸고, 외치는 길거리 퍼포먼스에 매달려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승리의 만찬(晩餐)은 신의주에서 하겠다.”며 북진통일의 허세를 부리다가 남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남쪽 끝으로 내 몰렸던, 6.25전쟁의 실수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됩니다. 6.25전쟁의 배경과 실체를 바로 알고, 부족하고 어긋났던 부분을 채우고, 바로잡아 6.25전쟁의 반복을 막는 것이 6.25전쟁의 교훈 일 겁니다.
▣ 독수리유격대의 창설 배경
우리 독수리유격대가 정식적으로 참전의 신념을 가지고 전투부대로서 창설한 것은 1950년 11월 포천 신읍에서입니다. 대원은 포천 출신을 주축으로 하여 63명(이북 출신2명 철원 출신2명 가평 출신1명 포천 출신58명)으로 조직하고, 유격대장 부대장 작전관 교육관 보급관의 지휘부와 3개 소대를 두어 소대장, 향도, 분대장으로 편성을 하였습니다. 8.15 해방 후 미소(美蘇) 양군의 진주로 3.8선이 그어지자 우리 포천은 3.8선의 경계가 되어 남북의 대립이 첨예한 곳이었고 6.25전쟁 중에서도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산군들의 주요 공격로가 됐습니다. 인천 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의 여세를 몰아 진격하는 아군은 평양을 점령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진격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우리 포천은 양문에서 공산군 일부가 저항을 하여 교전이 있었을 뿐 국군은 국도(國道)를 따라 북 파죽지세로 북진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국군이 압록강의 초산과 혜산진까지 진격하였을 때에도 우리 관내인 내촌이나 도평리, 약사골, 등은 공산군 패잔병들이 득시글거렸습니다. “낯과 밤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교대로 바뀌어 달렸다.”는 말처럼 낯에는 대한민국 치하였고 밤에는 빨갱이들이 산에서 내려와 약탈과 살생을 일삼는 공산치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분자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우리 독수리유격대가 조직된 것입니다.
▣ 독수리유격대원의 신분 배경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찾은 우리 국민은 모두들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장래를 설계했으며 국가와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도 대단한 것이 이었습니다. 이러한 국민적 관심은 미소의 양진이 3.8선을 경계로 하여 진주하자 공산진영과 민 진영의 극한적인 대결로 증폭 되였으며, 3.8선을 안고 있는 우리 포천에서는 좌-우익 간에 생사(生死)를 거는 투쟁으로까지 대립하게 됩니다. 3.8선(영평천)을 사이에 둔 일동과 이동은 서로 간에 3.8선을 넘어 약탈과 방화, 납치, 첩보, 테러행위가 계속됩니다. 이 무렵 이북에서 반동으로 몰려 숙청을 당하거나 노동당에 반대하여, 월남한 반공청년들이 조직한 것이 서북청년회(단)였고, 이들은 타공(打共) 최 일선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한편 국군 7사단 9연대는 의정부에 주둔하고 포천은 1개 대대가 방어를 맡았기 때문에 포천의 험한 지형과 전략적 중요성에 비하여 국군의 방어력은 절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최종성(독수리유격대 창설 대장)씨와 김익수(2대 유격대장)씨를 비롯하여, 정보원으로 불리든 이들이 주동이 되어 독수리유격대를 조직하였고, 대원들 역시 가족들이 공산당(노동당)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독수리유격대의 반공정신과 복수심에 서린 대공활동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공산군들이 국군이나 경찰보다도 서북청년단을 제일 무서워했다”는 소문은 넓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독수리유격대는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았거나 피해를 당한 반공정신을 바탕으로 하여조직된 의용(義勇) 유격부대였습니다.
▣ 00연대 1대대의 합류
9.28수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한 국군은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듯 했으나 중공군의 공세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반면 북진하던 국군은 중공군의 총 공세로 전황이 크게 불리해 지자 후퇴를 거듭 합니다. 독수리유격대도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육군본부 검열을 포기하고 일동(一東)으로 본부를 옮겨, 수입리, 사내지, 낭유리, 사직리, 광산골, 백운동, 약사골 등에서 공비토벌과 수색정찰에 임합니다. 한편 후퇴하여 운담에 주둔한 국군 2사단 00연대 1대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병원(兵員)의 보충이 절실하고, 지형과 지역정보에 어두운 00연대 1대대와, 후퇴를 하게 되면 보급 조달에 어려움이 있을 독수리유격대는 서로의 보완을 위하여 합류하게 됩니다.
50년 12월 31일 22시경 수입리로 부터 기습한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시작한 1대대와 독수리유격대는 청계골. 화현. 강구남. 청평. 양수리. 양평을 거처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에 주둔하게 되며, 이 때 아군은 후퇴를 멈추고 반격을 위해 부대를 재편성하게 됩니다. 징집을 받아 피동적으로 동원된 현역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원하여 참전한 독수리유격대의 전투능력은 현역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스스로의 자존심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역 부대는 멀리 후퇴를 하여도 유격대원들은 적진에 남아 유격전을 펴기도 했고, 현역이 감당하기 어려운 작전을 도맡아 수행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유격대는 민간인 신분 이였기 때문에 현역과는 차별된 보급 지원을 받아야 했고, 독수리유격대원들은 “어려운 작전은 우리가 도맡아 수행하는데 왜 우리가 현역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는 식의 불만이 독수리유격대원들로부터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편 부대 후퇴를 멈추고 반격을 준비하던 국군은 부대를 재편성을 하는 과정에서 00연대 1대대 부대대장 김영필 대위가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32연대 3대대로 부임한 김영필 대대장은 자신의 부대 병력들이 타부대로부터 차출되거나 낙오병 등 응급으로 모집된 수준 이하의 병력이라는 판단을 하고는 전력(戰力)의 보완을 궁리하던 끝에 00연대 1대대에서 제대로 보급 지원을 해주지 않아 불만을 가지고 있는 독수리유격대를 자신의 부대로 데려 올 것을 계획합니다. 00연대는 김영필 대위(32연대 3대대장) 자신이 먼저 근무하던 부대이므로 김영필은 연대 본부와 1대대 본부에 전화를 걸어 독수리유격대의 정황과 근무 일정 등을 파악하고 32연대 본부에 승인과 차량 지원을 받은 후 휘하의 정보장교 박영식 소위를 시켜 독수리유격대를 다른 사람(00연대 1대대) 모르게 자신의 부대로 수단껏 데려 오도록 명령합니다. 독수리유격대에 대한 모든 상황 정보와 검문소 통과 증명서 차량 등을 32연대에서 지원 받은 정보 장교 박영식 소위는 160여리 떨어진 유격대 매복지로 가서 상황이 있으니 출동해 달라며 대원들을 일제 도요다 트럭 2대에 태우고 본대로 돌아와 나머지 잔류 대원을 마저 태워 32연대 3대대로 옵니다. 유격대원들이 3대대에 도착하자 김영필 대대장이 마중을 나와 환영을 하면서 “사실은 전투상황이 아니고 우리가 여러분을 1대대보다 월등하게 지원을 해 줄 테니 우리와 손잡고 일(작전)합시다. 내가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습니다.”라며 합류를 원했습니다. 독수리유격대 역시 전부터 독수리유격대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김영필 대대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쾌히 응낙하고 3-4일을 휴식한 다음 3대대 현역과 함께 작전에 임합니다. 얼마 후 00연대 1대대장 유창훈 소령은 독수리유격대가 없어진 것을 알고 수소문한 결과 자기 휘하에 있다가 전속한 32연대 3대대장이 데려 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며 3대대장 김영필 대위에게 유격대를 원위치(1대대로 복귀) 시키도록 요구 하지만 김영필 3대대장은 “유격대가 민간인신분이므로 특정 부대에 예속될 이유가 없고, 유격대원들 또한 3대대에 있기를 희망한다.”는 이유를 들어 돌려보낼 이유가 없다고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유창훈은 유격대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김영필을 문제 삼아 군법회의에 회부토록 하겠다고 위협을 했고, 김영필은 할 수 없이 유격대를 00연대로 돌아가도록 종용 하지만 유격대 측에서는 “우리가 너희들 장난감 인줄 아느냐? 너희들, 00연대고, 32연대고 다 필요 없다. 우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펴겠다.”며 대항(對抗)을 합니다. 그러나 입장이 난처해진 김영필 대대장은 00연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몹시 어려워진다며 00연대 1대대로 복귀할 것을 간곡히 요구했고 유격대는 00연대에서 보낸 G. M. C.트럭 2대를 타고 00연대 1대대로 복귀합니다.
▣ 독수리유격대 지휘부 즉결처분과 유격대원 적진추방
51년 2월 5일 저녁 10시경 00연대 1대대에 도착한 독수리유격대는 군장을 풀어놓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하여 집합하자 무장 현역들로부터 포위를 당한 후 도망병이라는 이유로 창고에 감금되고 간부진(유격대장 최종성, 부대장 안**, 작전관 최종철, 교육관 고관도 보급관 최규동)5명이 정보과로 끌려갔습니다. 1대대 측에서는 유격대원들에게 도망병이라고 추궁을 하며 처벌한다고 하자 유격대 간부들은 “32연대에서 차량과 인솔 장교까지 보내 출동을 요구해서 응했는데 무슨 도망이냐? 우리는 전쟁을 하려고 간 것이지 도망간 것이 아니다. 너희들 맘대로 해라!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 간부들이 책임을 진다. 우리 대원들에게는 절대 손대지 말라”며 항의를 했고 1대대장 유창훈은 김영필 대대장에게 배신을 느낀데다가 유격대가 조금도 굽혀 들지를 않자 총살을 시키고 맙니다. 창고에 감금되어 밤을 지새운 대원 58명은 51년 2월 6일(음력 설날)아침으로 떡국을 먹고 난 후 간부진 5명이 집총한 현역들에게 호위되어 와서는 창고 입구에 서서 자신들의 장갑과 털모자 등을 벗어 대원들에게 나누어 준 후 우리들은 이제 여러분과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들은 반공을 위하여 뭉쳤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려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절대로 흩어지지 말고 끝까지 나라를 위하여 잘 싸워 주기 바란다. 그리고 몸조심해서 전쟁이 끝나면 성한 몸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기 바란다. 이곳(00연대 1대대)에서 여러분을 받아 주지 않으면 김영필 한태로 가라. 그 사람은 여러분을 잘 도와 줄 것이다.”는 당부를 하고는 끌려 나가려다가 다시 되돌아서서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한 후 현역들에게 인도되어 나갔으며, 얼마 후 총살되는 총성이 들렸습니다. 간부들이 총살된 후 58명의 유격대원들은 밖으로 불려 나가 무장한 현역들의 경계를 받으며, [왜 도망을 갔느냐? 앞으로 우리 1대대에 있겠느냐? 아니면 32연대로 가겠느냐?”는 심문(審問)을 받았고 간부들을 총살한 현역들이 그 때까지 살기등등하게 흥분되어 있기 때문에 유격대원들은 한결같이 [매복 근무 중 차량과 인솔 장교가 와서 타라고 하기에 급하게 작전상황이 생겨서 출동하는 줄 알고 탔는데 가서 보니 32연대더라. 앞으로 여기(1대대)에 있겠다.]고 답변을 했으나- 유창훈 소령(1대대장)이 노란색 표지의 책을 들고 나와 너희들은 도망병이다. 군법에 의하여 총살을 받아야 한다.(군법 9조에 의해서 처벌한다. 라고 증언하는 대원도 있음) “그러나 간부들이 대신해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살려 준다.”고 선언을 했다. 이어서 정보 장교가 “너희들 같은 부정한 놈들은 우리 부대에 필요 없다. 우리 부대에서 즉시 떠나가라! 너희들 같은 놈들에게는 우리의 군복을 줄 수 없다. 그러니 군복은 모두 벗어 놓고 가라.”며, 팬티만 남기고 신발과 양말까지 발가벗긴 후 공포를 쏘며 강(당시에는 달래강이라고 불렸음)건너 적진(중공군 점령지였음)으로 가라 것이었습니다. 그 때가 구정(舊正)이었기 때문에 얼어붙은 강을 맨발로 건너갔지만 적지(敵地)에서 함부로 이동 할 수도 없고, 현역들이 초병을 세워 지키기 때문에 강을 되돌아 건너 갈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유격대원들은 적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바람막이가 되는 골짜기에서 모여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알몸인 채 적진으로 추방된 유격대원들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앞으로의 진로를 의논한 끝에 소대장으로서 최고 연장자였던 김익수씨가 “간부들도 다 죽고 우리가 여기서 흩어지면 인민군한테 잡혀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대장님이 말했듯이 우리가 사는 길은 싸우는 수밖에 없다. 우리 유격대를 다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김영필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김영필이를 찾아가야 한다. 32연대가 단양으로 이동을 한다고 했으니 일단 단양으로 가자.”는 주장을 했고 여러 의견들 중에서 김익수씨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그를 후임 대장으로 추대한 후 32연대 3대대를 찾아가 다시 무장을 하고,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 제천. 단양 등지를 돌며 일월산을 근거지로 하여 팔공산까지 세력을 뻗치든 인민군 10사단 유격대와 공비들을 토벌하고 양평. 청평. 가평. 백운산. 국망봉. 광덕령을 넘고 육단리. 금성지구까지 이르면서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뺏으려는 금화지구의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치렀습니다. 독수리유격대는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전과를 올려도 현역 부대의 몫이 되고 유격대원이 전사(戰死)나 피해(전상)를 입어도 근거나 기록이 남지 않아 군번 없는 용사로서의 외롭고 힘든 의병(義兵)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역이 감당하기 어려운 작전은 독수리유격대가 도맡아서 수행했고 한편으로는 대원이 전사(戰死)를 하거나 피해를 당해도 상급 부대에 보고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무리한 작전에 소모품격으로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 독수리유격대 전사(戰史) 발굴 평가(국방부 / 전사편찬위원회)
독수리유격대는 휴전이 임박하자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 부대는 해체하라는 국방부령에 의하여 해산되었습니다. 해산된 유격대의 일부는 현지 입대를 하거나 귀향 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유격대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서 간부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누명을 써야 했고 세상에 인심들도 일방적으로 국군에게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만 부각 시킬 뿐 진실과 독수리유격대의 애국 일념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수리유격대 조사와 전사(戰史) 발굴에 관여했던 국방부 조사대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는 총살사건 당시 최종성 대장 등 간부진과 유격대원들이 보인 구국신념(救國信念)에서 독수리유격대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 총살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털모자, 장갑, 외투 등을 벗어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흩어지지 말고 끝까지 나라를 위하여 싸워 달라는 당부를 한 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던 간부들이나 엄동설한에 발가벗겨져 적진으로 추방되는 극한의 수모를 당하고서도 다시 유격대를 재편하며 총을 들어 나라를 지킨 유격대원들 모두가 위대한 반공투사요, 애국자들이 아니 갰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느 곳에서 어떻게 싸웠으며, 전과(戰果)가 어떻고를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국군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면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는 지휘부의 충심(忠心)과 엄동설한(嚴冬雪寒) 속에서 발가벗겨져 적진(敵陣)으로 추방을 당하고서도 다시 총을 들어 대한민국 수호에 나섰던 독수리유격대원들의 투철한 애국정신이 증명된다는 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들의 공통된 평가였습니다.
▣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건립
독수리유격대는 2대 유격대장 김익수씨와 현 기념사업회장 박홍진씨, 대원 이지용씨 등 여러분이 軍 당국에 나가 애를 쓰심으로서 국방부 조사대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로부터 6.25 전쟁에 참전한 3대 민간 저항부대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아,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건립의 계기를 마련하고, 국방부와 재향군인회 포천군의 후원과 포천문화원 최종규 원장님의 주선 속에 관계 당국의 지원을 받고, 생존대원과 전몰대원 유족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정성을 모아 전적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입니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우리는 아쉽게도 이 역사를 지켜 온 전쟁 자료와 전쟁기념물이 빈약할 뿐 아니라. 거의가 6.25관련 전적비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 전적비들은 구국정신보다는 지나치게 민족상쟁의 아픔을 상징하고 있으며 때로는 신뢰하기 어렵게 전적(戰績)이 부풀려지거나 아니면 공훈의 주체보다는 전적비를 세운 사람들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주안하면서 독수리유격대전적비는 남북이 통일되어도 역사적 가치와 교훈을 남기기 위하여 독수리유격대의 구국정신을 동족상쟁이나 00연대에서 일어났던 유격대원들의 아픔보다 앞세웠습니다. 도와주신 여러 기관 단체의 후원도 고마웠고, 그 고마움을 표현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았지만 앞에 뜻을 두어 도와주신 단체명이나 고마운 분들의 존함도 새겨 넣지 않았습니다. 특히 전적비 건립에 심혈을 기우려 주신 김기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장님과 정석균 책임 전사편찬위원님, 최종규 포천 문화원장님께 지금도 깊은 감사와 함께 죄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비문
독수리유격대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포천지역의 반공 애국청년 63명이 1950년 11월 포천군 신읍에서 조직되어 국군 제 2사단 00연대 및 32연대와 합류하여 경북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 지역과 충북 제천, 단양지역에서 인민군 제 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하고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전투와 현리, 광덕산, 천불산, 734고지, 373고지 및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일사호국의 정신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중 16명이 전사하였다. 본 유격대는 민간인 신분으로 자생 조직되었으나 투철한 애국정신과 구국 신념으로 참전하였기에 그 용맹함이 뛰어났고 전과 또한 컸지만 자신들의 신분이나 전공에 따르는 상훈에는 초연하였기에 국가에서도 이를 기억하지 못 한 채 여태까지 전몰대원들의 혼령마저도 안치시키지 못하고 39년간을 잊혀져 오다가 1989년 6월 국방부 당국에 의하여 독수리유격대의 장한 애국지성과 그 명예로웠던 전적을 확인 받게 되었다. 스스로의 사명감이 강했기에 앞장서 국가와 민족을 지켰으며 임무를 다 하고서는 묵묵히 가슴에 묻은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들의 고귀한 뜻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국방부장관, 재향군인회장, 포천군수, 육군 제3070부대장의 후원과 생존대원 및 전몰대원의 유족들이 합심협력 정성을 모으고, 포천문화원이 이를 주선하여 여기 관음산 기슭에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 9 9 1 년 6 월 6 일 최 면 택 지음 김 진 동 글씨
▣ 헌 시 / 護 國 星
최 면 택
부르지도 않았는데 조국 앞에 모이고 뭉쳐 이 겨래 이 강토 지켜낸 장한 임들이여! 해와 달이 되어 이 나라 살피시고 산천초목 되어 이 강토 감싸소서!
▣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사양
위 치 : 포천군 이동면 노곡2리(낭유리) 산146번지 규 격 : 8.2 미터(화강암) 제 막 : 1991년 7월 30일(1989년 7월 착공- 1991년 6월 완공) 건립주관 : 포천 문화원 전사고증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 기금조달 : 국방부. 재향군인회. 포천군. 유격대기념사업회. 유격대전몰대원유족회. 시공지원 : 보병 제3070부대.
▣ 추념의 글 / 그리운 전우여 !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장 박 홍 진
6.25전쟁은 우리의 반만년 민족사에서 다시없는 비극이었고 형언 할 수 없는 폐허와 상흔을 남겼습니다. 당시의 우리 국군은 137,899병의 전사자와 483,580명이 전상 또는 실종되었으며, 민간인 990,968명이 학살 부상 납치되었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북한 공산군, 중공군의 피해까지 합친다면 한반도는 피로 물들고 불타는 아비규환의 전쟁터였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잔혹했던 6.25전쟁을 반세기 넘게 흘려보내고,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이곳에 모여 섰습니다. 저 밑으로 보이는 마을과 들녘은 더 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넉넉해 보입니다. 60여 년 전 그 때의 폐허된 강산은 이처럼 녹음 속에 청청하고 풍전등화였던 대한민국의 국운은 세계 속에서 선진국 대열로 당당히 나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풍요와 희망이 넘치는 현재에서 옛날을 돌이켜 보면 감개무량하고, 저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가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내 부모 형제가 학살당하고, 포탄으로 조국의 산야가 찢기며, 불 탈 때 우리 독수리유격대는 젊은 기백과 뜨거운 혈기를 가지고 구국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발짝이라도 먼저 피난을 가려고 아우성 일 때, 우리 포천의 반공청년들은 독수리유격대를 창설하고, 향토방위와 공산군 토벌작전에 나섰던 것입니다. 압록강의 혜산진과 초산까지 북진을 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며, 일동면 운담리에 주둔 했던 국군 제00연대 1대대와 우리 독수리유격대는 합동작전을 펴다가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 공세에 밀려 충주까지 후퇴를 합니다. 제천, 단양, 청송, 안동, 예천, 의성, 풍기에서 후방 깊숙이 침투해 온 공비(인민군 10사단 유격부대) 공비들을 토벌했고, 양평에서 8사단과 전후방 임무교대를 한 후 북진하면서 화야산, 청평발전소, 현리, 청계산, 백운산, 광덕산, 육단리, 천불산, 373고지, 734고지, 계웅산 등의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면서 일당백의 용맹으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50년 11월 공산군을 토벌하는 작전 중 전적비가 서 있는 이곳에서 최영찬 대원이 바로 전사를 했습니다. 저 아래 펼쳐 보이는 들녘과 산야는 우리 대원들이 치고 달리든 구국의 장이었습니다. 51년 태백산지구(의성)에서 정봉필대원이, 충주에서 최종성 대장을 비롯한 지휘부 5명이, 금화지구 373고지에서 송완희 소대장을 비롯하여 권유성, 박용달, 오삼만, 윤주회, 이강록, 임철원, 정동진, 한상준 대원이 전사하고, 이규화 소대장, 이강헌, 안윤호, 민병권, 송원섭, 이덕배, 이완진, 조용세 등 많은 대원이 전상을 입었으며, 734 고지에서 김익수 대장이 전상(戰傷)을 입고,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철원, 평강, 김화는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피아간의 공방이 가장 치열했던 곳입니다. 앞에서는 적의 포탄이 빗발치고 뒤에서는 지휘관이 권총이 뽑아들고 독전(督戰)을 하기도 했었고, 군가의 한 구절처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고지 쟁탈전을 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참혹하던 전쟁을 반세기 전으로 묻어두고,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 앞에 향을 피워 올립니다. 혈기 충천했던 우리가 이제는 지친 노구가 되어 힘겹게 이곳을 찾아 왔지만 이름 석 자 명패만 남기고 숨져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우리 대원들에게 장갑과 외투를 벗어 주시며, 끝까지 나라를 위하여 싸워 달라고 당부하시던 대장님들의 만세소리가 들리는 듯싶고, 저 건너 국망봉을 타고 넘으며 쉬엄쉬엄 고향 얘기를 나누던 한상준, 이강록, 권유성, 전몰대원들의 모습도 눈에 선 합니다. 우리는 훈장을 받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공훈을 내세우기 위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이 땅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친 것입니다. 독수리유격대 유족 여러분! 잃어버린 여러분의 혈연이 세상에서 잊혀 진다고 통곡하지 맙시다. 여러분들이 유족으로서 위로 받지 못 한다고 상심하지도 맙시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고 형제가 되는 우리 전몰대원들은 구국전선에 신명을 바친 애국자들이며, 대한민국의 장한 호국성(護國星)이시고, 위대한 영웅들이십니다. 유족 여러분! 우리가 우러러보는 저 태극기 속에 당신들의 선친이 계시고, 여러분의 형제가 계십니다. 저 태극기가 그 분들의 명예와 공훈을 담아 하늘 높이 휘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 태극기를 가슴 깊이 새기고, 지키심을 위안으로 삼으십시오. 독수리유격대 생존대원 여러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나라를 지켰습니다. 우리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은 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역사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야 할 공헌이었습니다. 지금의 장한 대한민국의 국력과, 젊은이들이 만끽하는, 이 자유는 우리들의 신명(身命)으로 지켜진 것입니다. 이렇게 높은 하늘 ! 이처럼 푸른 산야 ! 가슴 속에 차오르는 보람 !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지만 우리 스스로 독수리유격대의 자존과 긍지를 가집시다. 이름도 없이 - 군번도 없이 - 무덤도 없이 - 후손마저 남기지 못 한 채 조국에 몸 바친 전우의 영령들이여 - 당신들은 얼어붙은 강변에서 - 포탄이 빗발치는 고지에서 - 장하게 신명을 바치셨습니다. 흐르는 피 막아주는 이 없고, 찢긴 상처 싸매주는 이도 없는 외로운 고통 속에서 절명을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항상 앞장서서 진격하셨고, 뒤 따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어 진격을 하고, 앞서던 전우가 쓰러지면 우리는 다시 앞서 나갔습니다. 옆에 전우가 쓰러져도 우리는 쓰러진 전우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 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운명하는 전우의 손을 잡아주기 보다는 달려드는 적과의 백병전에 우선해야 했고- 전우의 시체를 제대로 거두어 주지도 못 한 채 진군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전우여! 그리운 전우여! 숨을 몰아쉬던 당신의 모습과 파르르 떨리던 당신의 마지막 맥박이 지금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그렇게도 멈추기 어려워하던 당신의 마지막 숨결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당신의 마지막 눈길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급박했어도 운명하는 당신의 손길마저 잡아주지 못 했던 것이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당신이 꼭 잡아 쥐던 손길을 차마 놓지 않았어야 했는데 ― 모두가 때늦은 후회요 가슴 아픈 사연뿐입니다. 전우여! 전우여! 그리운 전우여! 살아남은 우리가 합심으로 돌을 깎아 비를 세우고, 당신의 이름도 새겼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이렇게 향을 피워갑니다.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리는 곳 ! 하늘이 높고 산야가 푸른 곳! 자유와 평화가 가득한 곳! 이곳은 당신이 지켜낸 자유의 천지입니다. 오늘 이 추념의 소리를 위안으로 삼아 편히 쉬소서! 우리가 당신의 후손을 대신하며, 해마다 태극기를 높이 올리고 향도 피우리니 - 해처럼, 달처럼 영원하게 이 나라를 살피고 감싸 주소서! 전우여! 전우여! 그리운 전우여!
▣ 독수리유격대 경과보고
1. 인원 독수리유격대는 포천지역 반공청년 70여명의 민간 유격군으로 조직되었으며, 편제 교육과정(신체검사)과 참전과정(후퇴)에서 일부가 탈락 낙오, 최종 참전대원은 63명임.
2. 편제 유격대장. 부대장. 작전관. 교육관. 보급관. 서무병으로 지휘부가 구성되고, 소대장. 향도 직제와 3개 소대로 편성함.
3. 전투경과 1950년 10월 신읍에서 독수리유격대 창설(부대호출부호 신청) ⇨ 국방부 교관파견 부대 교육검열 과정 진입 ⇨ 11월 중공군 대공세로 교육검열 중단(국방부 교관 복귀) ⇨ 독수리유격대 일동으로 본부 이전, 향토방위 ⇨ 수색정찰 패잔병 토벌(최영찬 대원 전사) ⇨ 2사단 00연대 1대대와 합류(운담) 수색정찰, ⇨ 12월 31일 후퇴작전(충주 집결 목행리 주둔) ⇨ 국군 부대 재정비과정, ⇨ 32연대 3대대장(김영필 대위) 독수리유격대 유도 이동시킴 ⇨ 51년 2월 5일 독수리유격대 00연대 1대대 복귀. 6일 독수리유격대장(최종성) 등 지휘부 5명 불법총살 집행. 잔류대원 적진추방. 독수리유격대 재조직(김익수 소대장 2대 대장으로 추대) ⇨ 32연대 3대대(대대장 김영필 대위) 합류(안동) ⇨ 태백산지구 토벌작전 ⇨ 5월 보병 제8사단 보병 제2사단과 전후방 임무교대 북진 ⇨ 양평 ⇨ 청평수력발전소 접수 방어 ⇨ 청평 도하작전 ⇨ 진격 전투(현리) ⇨ 청계산 ⇨ 강씨봉(국망봉) ⇨ 백운산 ⇨ 광덕산 ⇨ 육단리 ⇨ 천불산 ⇨ 373고지 ⇨ 734고지 ⇨ 계웅산 ⇨ 금성지구 전투 ⇨ 휴전 무렵 국방부 훈령에 의하여 독수리유격대 해체 후 유격대원 일부 귀향 일부 현지입대 현역복무.
4. 기념사업회 경과 1974년 12월 독수리유격대 친목회 구성 ⇨ 87년 4월 6일 국방부청원(독수리유격대 참전사실 확인) ⇨ 87년 12월 14일 육군본부 조사회신 ⇨ 88년 4월 11일 육군 조사 거부 ⇨ 88년 12월 10일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 결성(회장 김익수) ⇨ 89년 1월 27일 청와대 재 청원 ⇨ 89년 6월 24일 국방부 회신 ⇨ 포천문화원(원장 최종규) 독수리유격대전적비 건립추진 ⇨ 90년 3월 14일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탐방조사(포천 3.8교) ⇨ 91년 2월 23일 국방부 전편위 전사(戰史) 심의 고증 ⇨ 91년 6월 6일 독수리유격대전적비 제막 ⇨ 기념사업회 박홍진 회장 취임 ⇨ 2000년 7월 4일 보병 제2사단 32연대 수색중대 자매부대 결연 ⇨ 2011년 9월 18일 국군방송[전적비순례 800] 포천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탐방 방송 60분 ⇨ 2011년 10월 15일 국군방송[전적비순례 800] 보병 제15사단 39연대 독수리유격대 373고지 전적비 탐방 방송 60분 / 2011년 12월 [호국성 독수리유격대] 발간 계획(집필/국군방송 칼럼 작가 김창주 교수) ⇨ 2012년 2월 [호국성 독수리유격대] 문헌발간 지원신청 1,500만원 ⇨ 2012년 5월 2일 [호국성 독수리유격대 문헌발간 지원]승인(국가보훈처 600만원 포천시청 400만원) ⇨ 2012년 6월 6일 현충일 행사(22회차 독수리유격대 전몰대원 추념식 ⇨ 2013년 1월 31일 [포천의 의병 / 군번 없는 영웅 / 호국성 독수리유격대] 발행 1,300부 / 배부 ⇨ 군 장병 [호국성/독수리유격대] 독후감 경연대회(2사단 32연대, 8사단 수색기갑대대, 8사단 19전차대대)
▣ 독수리유격대 대원 명단
지휘부 11명 유격대장 : 최종성(창설대장/전사), 2대대장 : 김익수(전상/포로귀환), 3대대장 : 민영태, 부대장 : 안 0 0(전사), 작전관 : 최종철(전사), 교육관 : 고관도(전사), 보급관 : 최규동(전사), 소대장 : 박홍진(화랑무공훈장), 소대장 : 이규화(전상), 소대장 : 송완회(전사), 소대장 : 조성장,
대 원 51명 고복동, 권유성(전사), 김동호(전상), 김완기, 김종운, 민병권, 박관운, 박용달(전사), 송만복, 송원섭, 송준옥, 신주승, 안윤호(전상), 오득환, 오부환, 오삼만(전사), 윤기호, 윤수현, 윤주희(전사), 이강록(전사), 이강헌(전상), 이경재, 이기명, 이기운, 이기재, 이기철, 이덕배, 이병하, 이봉학, 이영덕, 이영운, 이완진(전상), 이재천, 이제영, 이제용, 이지용, 임철원(전사), 정동진(전사), 정봉필(전사), 정은섭, 조용세, 차상길, 천영복, 최덕남, 최면수, 최영찬(전사), 최원순, 최종석, 한상준(전사), 한준석, 홍재도,(미확인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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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수리유격대 관련 증언록
본 증언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6ㆍ25당시 민간단체의 저항활동을 발굴하기 위하여 독수리유격대 대원들의 증언을 받고, 이들의 활동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독수리유격대를 00연대 1대대에 편입시키고 32연대 3대대와 수색중대로 이동시켜 373 고지전투까지 지휘했던 김영필 대대장이 전사편찬위원회 측에 제출한 증언의 사본임을 밝혀둔다.
32연대 현역편 1
성 명 : 김 영 필(261122-xxxxxxx) 주 소 :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34 삼호아파트7동105호 (02-555-3819) 당시직위 : 보병 제00연대 1대대 부 대대장(1950년 대위) 보병 제32연대 3대대장(1951년 대위) 보병 제32연대 정보 주임(1951년 소령)
가. 1950년 6ㆍ25동란은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깊은 골을 만들었고 가장 아픈 동족상잔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너 나 할 것 없이 총을 잡고 나섰던 구국의 신념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근본이 되었다고 봅니다. 독수리유격대는 민간인 신분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앞장섰던 애국단체였습니다. 이제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버렸고 본인의 나이도 60을 넘겨 기억이 흐려지고 자료가 멸실되어 유격대의 참전 상황을 근거 있게 다루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도 자신 있게 밝힐 수 있는 것은 독수리유격대가 정신적으로 확고하게 무장되어 있었으며 책임감이 강했고 자기들 스스로 “우리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겠느냐?”는 긍지가 대단했던 점입니다.
나. 현재 생존해 있는 유격대원의 증언을 보면 상당히 자세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부대 이동 상황이라든지 작전 상황, 전과 등을 세밀하게 밝히고 있으나 본인으로서는 누가 어떻게 포로를 잡았고 누가 어떻게 전사를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격대가 00연대 1대대 및 32연대 3대대와 연대수색대 등에 편입 시키고 지원을 했던 것은 본인이었지만 관리와 통제는 본인의 부하 장교들에게 맡겼기 때문이었고 본인은 유격대원들 보다는 유격대 간부들과 주로 접촉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울러 독수리유격대의 올바른 평가는 32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을 하던 박영식 소위가 해줄 수 있겠으나 그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얘기뿐 연락이 닿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 독수리유격대가 00연대 1대대에 합류된 것은 포천에서였습니다. 정확한 인원수는 인수 없으나 한 50명이 넘을까 말까 하는 사람들이 유격대라고 하면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따발총, 장총, M-1소총 등 구구 각색으로 무장을 했었고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무기들은 적군과 아군들에게서 주워 모은 것이거나 경찰에서 얻은 것으로 생각 됐습니다. 옷은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민간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쪽 국군인지 공산군 쪽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공산군 소탕작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고 애국적인 활동이 인정할 만하다고 판단하고는 1대대에 편입 시켰습니다. 1대대에서 다른 사람들은 유격대에 대하여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본인이 어떻게 해서든지 유격대의 보급과 장비 등을 지원하기 위하여 애를 썼으며 00연대 본부와 협조해서 나중에는 유격대원이 일보에도 올라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라. 독수리유격대는 항상 1대대와는 거리를 두고 따로따로 있었는데 유격대 간부들이 종종 본인의 숙소를 찾아와 지원관계나 상황 등 이런 저런 애기도 하고 술좌석을 마련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격대는 최 대장(최종성)이라는 사람이 지휘를 했는데 그 사람 별명이 38박사 또는 38 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유격대장이 38선을 수도 없이 넘어 다녔기 때문에 38선에 대한 지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서 그런 별명이 생겼던 것이고, 유격대의 작전관(최종철)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한테서 우리 대장님은 몸에 따발총 자국이 열여섯 개 인가 열여덟 개가 있다는 애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38선을 넘어 다니면서 인민군에게 따발총을 그렇게 맞았다는 것인데 내가 직접 총 자국을 확인 한 것은 아니고 얘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또 한 번은 “우리가 이렇게 후퇴를 하다가 부산까지 밀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얘기가 나오니까 최 대장 얘기가 “우리는 그렇게 되면 부산으로 가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겠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우리끼리 모여 멋지게 싸우겠다.”는 얘기도 합디다. 그 사람들의 정신무장이라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현역을 능가하는 대단한 것이었고 자기들 스스로 우리가 최고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 유격대가 다시 32연대로 찾아 왔을 때는 본인의 3대대에 배속시켜서 안동, 의성 등에서 공비 토벌 작전에 임했고 현역과 똑같이 군장검사를 받던 기억이 납니다. 공비 토벌작전에서 현역과 똑같이 행동을 했으며, 본인이 연대 정보주임이 된 후에는 다시 유격대를 연대 수색중대에 소속을 옮겨서 보좌관 박영식 소위가 통제를 하도록 전권을 주었습니다. 유격대는 어떤 명령이 주어지면 틀림없이 그 일을 해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들의 책임을 완수하였기 때문에 “유격대한테 시키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본인으로서도 유격대를 특별하게 아껴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373고지 전투에서의 유격대의 희생은 많았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373고지는 연대 자체의 작전이었는데 연대의 전투 병력이 부족하니까 유격대(수색대)라도 투입 시키라고 하면서 연대장(조재미 대령 육사2기80.6.26.사단장)이 권총을 뽑았던 기억도 납니다. 거기서 정보주임이던 본인도 유탄에 부상을 입고 대구 육군병원까지 후송이 되었는데 유격대원 2명이 나와 함께 대구까지 후송 되었습니다.
바. 독수리유격대의 애국정신과 전공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본인은 주장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근거가 멸실되었고 본인의 기억 또한 불분명함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진실은 항상 남겨지게 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엔가는 유격대에 대한 자료와 흔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제 늦기는 하였으나 유격대의 업적을 되찾아 보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은 진실로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본인은 독수리유격대의 명예를 되찾는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누란의 위기에서 의연하게 나섰던 국민으로서의 애국정신과 구국활동을 발굴하고 후대에 표본으로 남기는 보람된 일이라고 믿습니다. 본건을 다루시는 당국자 분께 감사드리고 독수리유격대 전몰영령께 명복을 빌며 생존해 계시는 대원 여러분께서도 건녕(建寧)하시길 빕니다.
1951년 2월 당시 보병 제32연대 3대대장 김 영 필
본 증언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박영식(예비역 육군대위)씨가 독수리유격대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국방부 조사대 담당 조사관(박재운사무관)과 최면택(최종성 유격대장 子)에게 서면으로 우송한 내용이다
32연대 현역 편 2
성 명 : PARK, YOUNG SIK (박 영 식) 주 소 : 13884 EUCLID AVE. #B-5 ARDEN GROVE, CA92643 (WESTMINSTER ARMS APTS) U. S. A. 당시직위 : 보병 제32연대 3대대 정보장교 보병 제32연대 정보주임 보좌관
국방부 조사대 박재운 조사관 귀하
귀하께서 발송하신 89년 4월 21일자 공문을 며칠 전(본인의 주소가 변경되어 여러 곳을 거처 배달되었음) 득견(得見)하고 이제야 회신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즐거웠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나 괴로웠고 악몽 같았던 회상은 인간에게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귀하께서 간곡히 당부 하셨으며 또한 요즈음 보기 드문 효성이 지극한 유가족의 열화(烈火) 같은 집념을 감안 할 때 그대로 묵살 한다는 것이 도리가 아니 여서 또 다시 괴로운 기억을 더듬어 가며 회신에 임하 고자 합니다. 단, 본 사건이 근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본인도 육순을 훨씬 넘고 보니 아련히 떠오르는 그 당시를 정확히 술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나 혼신의 기력을 경주하여 가급적 확실을 기하고자 진력 하겠습니다.
질문사항
1. 가, 나, 다, 유격대원의 인솔은 그 시기(년 월 일)는 불확실하며 장소는 포천이었다고 기억하며 당시 대대장 김영필 소령으로부터 수령하였음. 대대장의 명령 내용은 00연대 1대대장 휘하에 있는 유격대원이 “현역 군인을 능가하게 활약하는데 비해 제반 군 장비 및 보급품이 현역과 현저히 차가 나는 대우를 받고 있어” 타 부대로 이동 하였으면 하고 전전긍긍 하고 있던 중 그네들 하고 긴밀히 약속되어 있으니 은밀히 그네들을 인솔해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음.
2. -가 유격대원 이동수단은 전후 보상책의 일환으로 일본국으로부터 미군에게 납품한 일본제 도요타 트럭 2대 임.
2. -나 상술한 바와 같이 유격대원의 이동지점은 불확실 하나 포천에서 대대본부라고 기억됨.
2. -다. 유격대 간부 등과의 사전 의사타진은 본인이 타진할 필요성이 없었음. 왜냐하면 이미 대대장 김 소령과 사전에 협의가 이루어 졌다기에 말임.
2. -라 유격대장 “고(故)최종성”이 이동사실을 전연 몰랐었다면 그렇게 쉽게 이동에 응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음.
3. -가 이동 당시 대원들은 사전에 연락을 받았으므로 본인이 그들에게(집결지) 도착 하였을 때는 이미 이동준비가 완료 상태에 있었음.
3. -나 00연대 1대대 간부들과 합의 하였는지는 본인은 알 수 없었음.
4. -가 당대에 도착한 후 그네들의 임무는 현역 수색대원을 측면에서 지원수색에 임하였다고 기억함.
4. -나 대대장 김영필 소령 지휘 하에 있었음.
5. -가, 나, 본 사항에 대하여는 본인은 전연 모르고 있었음. 그 당시 본인은 명령에 의하여 정보학교(육군 7훈련소 대구소재)에 입교(1951년 9월 1일에서 1951년 10월 20일까지 이 일자는 본인의 비망록에 있음)중이었음.
6. -가 본인이 정보학교를 수료 후 원대복귀 하였을 때 누구라고는 기억되지 않았으나 유격대 간부 등이 총살되었다고 들었음.
6. -나, 다 모름
7. -가 유격대원 임무는 상술한 바와 같이 현역 수색대원과 협조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 하였다고 사료되나 본인은 그 무렵 전투 중 부상으로 후송되어 군병원에 입원 중이었다고 기억됨.
8. 본건에 관계되는 참고사항 진술은 본인의 사견을 겸하여 귀하의 질의에 대한 본인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을까 함.
사견(私見) --
유격대 간부 등에 대한 총살형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군법과 인도를 무시한 순전한 사적 감정에서 야기(惹起)된 처사라고 사료됩니다. 00연대 1대대 책임관으로 하여금 자기 휘하에 있었던 대원 등이 사전에 승낙도 없이 타부대로 무단이탈 하였다면 물론 열화와 같은 분노를 느꼈겠지요. 그러나 좀 더 냉철한 책임관이었다면 그네들을 극단적 방법으로 총살을 감행하기에 앞서 그네들(유격대원)을 유인(?)한 김영필 소령과 그의 하명을 받고 실행한 본인에 대한 조치를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하여 그에 해당하는 처벌을 꾀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 우국충정에 불타고 있는 그네들을 단순한 사감으로 손쉽게 처단하였다는 것은 심하게 말해서 천인공노할 사건입니다. 본인이 알고 있는 그들은 반공청년들로 철두철미한 반공의식 속에서 불같은 복수심과 우국하는 참다운 마음으로 뭉쳐진 사조직체로서 이네들에게도 현역 군인법이 과연 적용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네들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은 언제 어디서나 군 작전에 도움이 되고 반공청년으로 젊음을 불태울 수만 있다면 그네들이 갈망하는 “복수”는 소기에 원을 이루며 대국적으로는 조국에 대한 충정을 다 한다고 자부 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소속된 부대를 탈출하여 이적 행위를 자행 하였다면 그러한 단죄는 가능 하겠지요. 단지, 그 당시 전시에만 적용되는 이른바 분대장 이상에게 부여된 즉결 처분권을 그릇되게 적용하여 총살형을 집행 하였다 함은 실로 전율을 금 할길 없습니다. 기억조차 아련한 당시를 더듬어 가며 미냉(未冷)한 진술이 되여 죄송합니다마는 귀하가 본건을 처리 하시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본인은 더 없이 다행한 일이며 또한 유족들로 하여금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억울하게 산화한 영령들의 넋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멀리 이국에서나마 보람을 느끼는 바입니다. 끝으로 본건을 다루시는 귀하와 귀하 가정에 영롱한 무지개의 서광이 아낌없이 내려 비추기를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바입니다.
1989년 5월 23일 당시 대대정보장교 예비역 육군대위 박 영 식
본 글은 김영필 대대장의 명을 받아 00연대 1대대 소속중인 독수리유격대를 32연대 3대대로 유도 이동시킨 32연대 3대대 박영식 정보장교가 최면택씨에게 보낸 증언 임.
친애하는 최면택씨 그리고 형제분들에게
귀하의 뜻밖인 서신을 받고 이제야 회신하게 됨을 미안하게 여깁니다. 귀하의 사연을 읽어 가는 동안 귀하의 형제분들의 지극한 효심에 진심으로 감복함과 아울러 멀리 이국에 있는 나의 거처를 탐문한 그 집념 놀랍기 그지없소이다. 귀하의 서신을 1월 20일에 받고 이제야 회답하게 된 것은 나의 거처를 어떤 경로로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점이 몹시 궁금하였으며 이에 대한 경유해명을 서신으로 연락하여 준다는 귀하와의 약속을 이 늘어질 정도로 기다렸던 것과 거의 40개성상(星霜)이 흘러가 버린 아득한 옛일을 회상하기가 몹시 힘에 겨웠던 관계에 기인되었소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토록 오랜 세월이 꿈결처럼 흘러간 옛일을 정확히 되새긴다는 것은 무리이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더욱이 이곳 재미교포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곳 생활은 한가롭게 감상에 젖을 만큼 여유 있는 생활 양상이 아니기에 그 어려움은 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 형제분들의 “안타까운 기다림”을 상상할 때 다급한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옛날의 처절하였던 전장의 광경을 더듬기에 이르렀습니다. 주마등처럼 명멸하는 살벌한 참경 속에서 나는 문제의 유격대의 환상을 더듬습니다. 군번 없는 군인 진정한 애국 투사들! 전선 없는 전야를 누비며 신출귀몰 종횡무진으로 타공(打共)에 헌신하였던 그들! 귀하의 엄친 최종성 고인의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접하였던 것은 내가 소속하던 2사단 32연대에서가 아니고 부상하여 후송된 야전병원의 간이 침대였다고 기억합니다. 귀하가 여러 증인들로부터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시피 나는 직속상관이었던 김영필 대위(당시계급)의 명령에 의하여 유격대원을 우리 부대로 인솔하여 복명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비록 추상같은 군령을 받아 온 사자(使者)이지만 엄연한 소속된 병력을 상대방 부대장과 아무런 사전 타협도 없이 빼낸다는 것이 몹시 주저되며 불법인줄 알고 망 서렸으나 “유격대 간부들과 그 부대 몇몇 장교(이름은 기억 없음)와도 은밀히 상의된 것이니 귀관은 여러 눈에 띄지 않게 기술적(?)으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는 김 대위 귀 뜸에 실행하기에 이르렀고 출발에 앞서 여러 유격대 간부들의 의견을 타진도 하였습니다. 그네들의 한결같은 불평은 당시 00연대에서의 처우(군장 및 보급품)가 현역에 비하여 심한 열등에 있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나의 출현으로 대원 이동에 전폭적인 찬동으로 실행하기에 이르렀다고 나는 당시를 회상합니다. “어디까지나 자의에 의하여 조직된 반공 투사들! 소속이 어덴들 어떻리! 민족의 공적인 그 무리들을 물리치는데 있어 소속 따위가 무어냐?”하는 소속 의식에 얽매어 있지 않고 원대한 목적 실행에 단안을 내렸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나는 얼마동안 (얼마나 그들과 고락을 같이 했는데 기간은 기억 없음) 반공정신에 투철한 유격대원을 내 휘하에 있는 현역병보다 월등한 대우로 감싸 안았으며 비록 나이(年齡) 어린 대원에게도 존칭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전상에서 신음하면서 들은 비보는 나로 하여금 놀라움과 분노를 참을 길 없었습니다. 전신을 엄습해 오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네들(00연대의 누군지는 몰라도 즉결처분한 집행자)의 총살형은 확실한 위법이다! 이는 분명히 사감에서 자행된 비겁한 망동 이다!” 나는 병상에서 외쳤습니다. 나의 짧은 군법 상식으로는 당시의 즉결처분은 천인공노의 비인도적인 군법이며 이는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독전을 위한 수단으로 창출해낸 악법으로 분대장 이상 전시에만 적용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즉결처분”이란 군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막대한 손실을 안겨 주었으며 이적 행위로 단정 되었을 때 일벌백계로 타 군인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비상수단으로만 감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재론하건대 그 집행자는 자기를 배신하여 타부대로 가 버린 유격대원에 대한 사감의 발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엄청난 비극을 자행하였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엄청난 과오”의 단정에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사유가 있은 즉 당시 유격대는 반공정신이 투철한 우국지사들로 구성된 사조직체로서 군 작전에 협력하는 이른바 지원체로서 국가 병역법에 의한 응소된 징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고로 그네들에게는 추상같은 군령이 적용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관대한 처우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내가 최종성 고인 외 희생 된 몇몇 간부의 영혼에 對하여 몸 둘 바 없이 후회스러운 것은 내가 좀 더 정의감에 입각한 군인이었던들 사후 약방문격이지만 신명을 내걸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고인들의 시비를 가려 집행자를 만나 준엄한 책임 추구와 이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안겨 주어야 마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옹색한 변명으로 나는 당시 부상이 완쾌되어 계속되는 군 복무와 보직 이동에 따른 분주한 군 생활(군 정보 학교 입교, 수도 사단 전속, 미8군 사령부, 한국군 의장대장 등)로 전전하다 보니 대단히 송구한 말로 나의 뇌리에서 그 엄청난 망각의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귀하의 글월 중 김영필 소령에 대한 오해(섭섭함, 실수)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귀하의 엄친 최종성 고인 이하 전 대원은 한결같이 김 소령을 따랐으며 존경하였음은 물론 인간적인 대우에 극히 만족 하였다고 기억합니다. 김영필 소령은 국군 창설당시(국방경비대 시절) 한국군으로서는 처음 제정된 계급 특무상사 출신으로 두뇌가 명석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유격대원들의 소속 이동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천명합니다. 김 소령으로 하여금 유격대를 우리 부대로 유치한 것은 그 자신의 공명심에서가 아니고, 대국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도 우국충정의 발로에서였다고 해야 옳겠지요. 다만 김 소령이 “즉결처분”의 기미를 사전에 알았다면 신명을 걸고라도 제지 했어야 하였고 사후에 알았다면 그릇된 사감에서 자행된 비극에 쐐기를 박았어야 했겠지요. 그러나 그의 성품으로 보아 그랬을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근 40년이 흘러가 버린 작금 누구를 원망한들 고인이 다시 소생하는 기적은 없을 것이며 귀하들이 간곡히 원하는 불명예를 깨끗이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효의 의의는 달성 되리라 믿습니다. 6ㆍ25가 안겨다 준 슬픈 동족상쟁의 소산이 어찌 귀하의 엄친의 억울함에 한정 되리요. 이름 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저간 가련한 넋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나는 60이 넘은 인생의 황혼 길을 힘없이 걷고 있는 자로서 이 사회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을 개탄 하다가 “그대들의 참다운 효심에 아직도 그 뿌리는 남아있구나”하는 기쁨에 멀리 이국땅 한 모퉁이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바올시다. 나의 짜임새 없는 이 증언으로 고인들의 명예의 일부가 되살아났으며, 그대들의 효심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훗날 이 자가 꿈에도 그리워하는 나의 조국의 땅을 밟게 될 때 고인들의 영전에 부복할 기회가 있기를 갈망하는 바입니다.
1988년 2월 18일(구정 초하룻날) 미국에서 박 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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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 편 3
본 증언록은 국방부조사대와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가 독수리유격대에 참전 사실과 공훈을 조사 발굴하는 과정에서 당국에 출석하거나 또는 조사관과 편찬위원들이 기념사업회를 방문하여 생존대원들로 부터 증언을 채록 함. 특히 전사편찬위원들과 34명 생존대원들이 대담 형식으로 증언이 이루어짐. 여러 대원의 증언을 대표적이고 모둠 발언한 몇 명의 대원이름으로 정리한 것임. 증언 일시 : 1990년 3월 14일 장소 : 포천 만세교 금주가든
독수리유격대편 3
성 명 : 김 익 수 (220215-xxxxxxx) 주 소 :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549 직 위 : 독수리유격대 제2대 대장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 초대회장
▢ 창설과정
6ㆍ25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경기도 포천에는 여러 청년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주로 대공 활동을 하면서 경찰서와 군인 부대에 소속을 두고 정보 계통의 일을 하였습니다. 국방부였는지 육군본부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앙의 직할 정보 부대가 포천에 파견되어 있었고 7사단 정보과(9연대)와 포천경찰서에서도 서북청년단을 내세워서 38이북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나도 이 부대와 임무를 받아서 38선을 넘어 다녔습니다. 그 당시 포천 경찰서장이 이해진이였고 중앙에서 파견됐던 정보부대는 최각균(?) 대위가 책임자였으며 9연대 정보과 파견대장은 김00 상사였습니다. 최종성대장과는 정보 부대나 포천경찰서에 드나들면서 안면이 있었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최종성씨가 서북청년단 지역 단장을 하면서 포천 전기회사 사택에 살고 있었고 나하고는 별도로 대원을 모아서 정보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서로 비밀을 지키던 때었고 6ㆍ25가 터지자 나는 대구로 피난을 갔습니다. 대구에서 서북청년단을 조직한 김성주씨가 옛날의 서북청년단을 다시 모집한다고 하여 나도 지원했습니다. 남산 국민학교에서 1주일정도 훈련을 시키고 영천 쪽으로 강을 건너가서 가다구찌공장 이라는 곳에서 다시 훈련을 받다가 6사단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계급장은 이등병을 달아 주었는데 완전한 정식 군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나는 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였고 진격을 해서 초산까지 올라갔다가 포위가 돼서 우리 부대 전체가 완전히 녹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져서 초산을 빠져나와 서울까지 내려왔고 9ㆍ28수복이 되자 포천으로 와서 최종성씨를 만난 것입니다. 옛날에 안면도 있고 서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하니까 최종성씨가 먼저 유격대를 하자고 합디다. 9ㆍ28수복이 됐다가 다시 밀리는 중이니까 그때는 서로 먼저 피난을 갈려고 야단들이고 또 국민방위군을 모집 할 때었거든요. 또 방위군에 가면서 자기가 먹을 쌀을 한 말씩 지고 갔어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유격대에 들어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 있었습니다. 6ㆍ25 전에 내가 정보활동 하던 것을 최종성대장님이 잘 아니까 소대장을 시키더군요. 내가 데리고 간 유격대원 중에 서너 명이 전사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내가 데려다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독수리유격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사람들이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청해서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 보병 제00연대 1대대 배속 당시
나는 소대장을 하였지만 어떻게 해서 32연대로 갔다가 00연대로 다시 오게 되었는지 그 속사정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은 3대대장 김영필 대위 한데 있다고 생각했고, 00연대에서 쫓겨날 때도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장님과 간부들이 총살당하고 대원들은 입고 있던 군복은 모두 뺏기고 어떤 대원은 양말까지 뺏겨 맨발에 팬티만 입었던 대원도 있고, 어떤 이는 내복 바람에 쫓겨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군복 속에 민간 내복을 껴입었던 사람은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음력설날(구정)인데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그런 때에 옷을 벗기고 적진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지요. 1대대에 배속되어 있어도 우리 유격대는 현역과 똑같은 보급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식으로 영장을 받아서 군대에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군대에 자원한 것이니까 전쟁하는 것이 무섭다거나 싫다고 도망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대대에서 필요 없다고 내 쫓았을 때도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싸웠으니까요. 간부들이 어떤 경우를 택했더라도 도망은 아닙니다. 또 도망을 갔다고 하더라도 다섯 명이 책임을 졌다면 우리 대원들은 쫓아내지 말아야지요. 쫓아내더라도 옷은 뺏지 말았어야지요. 00연대에서는 절대적으로 잘못한 겁니다. 00연대에서 우리를 적진으로 쫓아낸 것은 빨갱이들에게 잡혀 죽든가 빨갱이가 되어 가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강둑에 모여앉아서 의논을 했는데 그때 내가 이렇게 얘길 했습니다. “여기서 각자 흩어져서 개인행동을 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대장님께서도 돌아가시면서 당부한 얘기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는 흩어지지 말고 뭉쳐야 하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체 행동을 해야 한다.우리가 이렇게 된 모든 책임은 김영필(32연대 3대대장)에게 있다. 그러니 김영필 대위를 찾아가면 그 사람은 우리를 지원해 줄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다른 대원들도 찬성을 하여 단체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대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뭉쳐서 잘 싸우고 흩어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풍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00연대로 올적에 부대가 제천으로 이동을 한다고 들었으니까 32연대를 찾아서 제천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00연대에서 쫓겨나면서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00연대 놈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강을 타고 쭉 내려오다가 배를 타고 남쪽(아군 지역)으로 건너와서 32연대로 향했습니다. 옷은 빈집(民家)에 들어가서 바지저고리 짚신 등 되는 대로 주워 입었습니다. 신분증도 없고, 복장도 엉망이니까 패잔 공비로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단양에선가 철도 경찰에게 신분 확인이 안 돼 곤욕을 치르고 나서 나중에 그들의 협조를 받아 열차를 타고 32연대 3대대로 갔습니다. 32연대 정문에 가서 김영필 대대장과 전화를 하니까 첫마디가 “어떻게 됐느냐? 누구누구 죽었느냐?”고 묻습디다. 서로 마음이 격해지니까 얘기도 못하겠더군요. 김영필 대대장이 차를 보내 줘서 3대대와 합류 했지요.
▢ 보병 제 32연대 3대대 및 연대 수색 중대 배속 당시
날짜와 시간 장소 같은 것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32연대로 간 후에도 김영필 대대장이 우리 유격대를 잘 도와주었고, 연대 정보 주임으로 발령이 나니까 우리 유격대를 연대 수색중대로 배속을 시켰으니까 대우를 잘해 준 폭입니다. 우리 유격대가 대우를 잘 받았기는 하였지만 고생도 그만큼 많이 했고 역할도 많이 했습니다. 풍기역에 도착해서 대대장 한데 전화를 거니까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요. “누구누구 돌아가시고 우리들끼리 이렇게 와 있다.”고 하니까 사실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으니까 자기도 말도 못하고 나도 울음이 터지고 서로 말을 못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의복 등 우선 다른 것이 급하니까 내가 차를 보내 줄 테니 빨리 본부로 오라는 것이지요. 나도 자세한 것은 들어가서 말하겠다고 하고 조금 있으니까 차를 보내줘서 타고 갔는데 무슨 광산 사택 이예요. 우리가 도착 하니까 현역들이 잠을 자다 말고 배낭과 군장을 들고 내려오면서 “젠장! 뭣들이 오는데 이렇게 야단들이야?”며 투덜대면서 내려갑디다. 자다가 우리가 오니까 (현역들이) 쫓겨나는 거지요. 현역들이 군복을 두벌씩 가지고 있었는데 옷도 한 벌씩 반납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 유격대가 옷이 없으니까 현역한테 뺏어서 우리를 입힌 겁니다. 거기서 며칠을 푹 쉬니까 총이고 군장이고 모두 준비를 해주고 나서 5-6명씩 각 지서로 파견을 나갔어요. 내가 파견을 나간 곳이 월암산(?) 같기도 한데 여하튼 충주 가까운 곳이었어요. 이렇게 충주 가까운 곳에 왔을 적에 우리 유격대 간부들이 처형된 목행리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누군지 우리 대원 한 사람을 데리고 갔어요. 동네에 가서 군인들 다섯 명이 죽은 곳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알더군요. 당시에는 군인들의 말이라면 잘 듣던 때여서 동내 주민들을 몇 명 데리고 가서는 아무렇게나 묻혀있는 다섯 분을 대장님부터 계급 순서대로 다시 묻었습니다. 그 때가 봄이 아니었는데도 파리가 보였던 생각이 납니다. 다시 잘 묻어 드리고는 이분들이 우리 대장들인데 이분의 성씨가 최씨니까, 이다음에 자손들이 찾아오더라도 알아 볼 수 있게 표시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주민들이 “최씨라면 혹시 우리 최씨일지 모르니 잘 돌봐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32연대로 와서는 파견을 다니기도 했고 모이기도 하면서 계속 공비토벌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북진을 하면서 여러 곳에서 전투를 했는데 나는 373고지전투 후 우리가 점령한 고지에 근무를 나갔다가 갑자기 적군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처음 포탄이 날아오면서 공격을 하더니 중공군이 밀고 올라 왔습니다. 나는 처음 포탄에 허리를 부상당한 후 거동을 할 수가 없어서 포로가 됐습니다. 그 당시 내가 부대 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9638부대(?) 도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9638부대가 2사단인지 32연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유격대원들이 외지에 나가게 될 때 내가 증명서를 만들어 주던 도장이었고, 9638부대 도장이 2사단 관내에서는 통과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되니까 우선 그 도장이 문제가 될 것 같아 땅에 묻었습니다. 가지고 있으면 내 신분이 밝혀지게 되겠고,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고 해서 나중에 다시 찾는다는 생각으로 묻었는데 도망 올 기회도 없고, 그대로 포로가 되어 중국까지 갔던 것입니다. 포로는 됐지만 나는 부상 포로니까 후송이 됐는데 같이 후송되는 중공군 통역 장교가 다리가 잘렸는데 내가 그 사람 시중도 들어 줬지만 그 통역 장교가 나를 잘 봐줬습니다. 내 이름을 자기가 데리고 있다가 죽은 중공군의 이름으로 바꿔 준 것입니다. 전사한 중공군의 이름이 표광인데 나를 대신 표광으로 바꿔 준 것입니다. 그 통역관 얘기는 표광이라는 이름으로 후송을 갔다가 상처가 치료되면 다시 이승만이(남한) 한태로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중공군이 환자를 수송하는데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갑디다. 꽤 오래 걸려서 길림성 까지 갔는데 진짜 표광의 어머니가 면회를 왔어요. 표광의 어머니가 나를 보니까 이름은 표광인데 자기 아들은 아니거든요. 탄로가 났지요. 그렇게 되니까 통역관 장교도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포로가 돼서 길림성까지 가는 기간이 있고 또 길림성에서 두 달 정도 있었으니까 꽤 오래 되었는데도 상처에는 계속 고름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놈이 나를 인솔 하더니 남포 내무서로 넘겨주었습니다. 길림이라는 곳이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시내가 있는데 기차역도 크고 상당히 큰 도시더군요. 우리는 거기서 밖에도 맘대로 나다녔는데 길림에서는 더 이상 못 들어가게 해요. 왜 그러냐고 물어 보니까 중국에서는 남한을 점령했다고 했는데, 부상자들이 중국 본토에 많이 흩어져 들어가면 반란이 일어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압록강을 건너오는데 보니까 다리가 끊어진 것을 나무를 엮어서 다시 놓았더군요. 남포 내무서에서 감방에 며칠 있다가 문초를 받았는데 이름은 그대로 김익수라고 했고 노무자 인데 포탄을 날라주다가 포로가 됐다고 하니까 너는 이마에 철모자국이 있는걸 보면 틀림없이 국방군 이라는 겁니다. 이북 놈들한테는 항상 외골수로 얘기를 해야지 왔다 갔다 하면 죽는 겁니다. 나는 6ㆍ25전 정보활동을 할 때부터 빨갱이들을 많이 상대 해 봐서 그놈들 속을 잘 알거든요. 나는 피난 다니다가 노무자로 잡혀 와서 포탄 운반한 죄 밖에 없다고 하니까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철조망 밖으로 세우는데 발밑이 낭떠러지고 그 아래는 강입니다. 문초를 하던 놈이 미제 권총을 꺼내더니 나보고 마지막 소원이 뭔지 말하라기에 똑같이 나는 노무자였고 마지막으로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했더니, 땅! 하고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내가 그대로 서 있는 거예요. 내가 그대로 서 있으니까 그놈은 “야! 이 새끼 봐라! 간뎅이 크다.”고 하면서 다시 땅 하고 또 쏩디다. 나는 진짜로 쏘는 줄 알고, 죽는가 보다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가만히 서 있으니까 그때서야 그놈이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면서 내 어깨를 탁 치더니 배짱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나보고 인민군 하라는 겁니다. 인민군에 가면 소대장은 할 수 있으니까 인민군 하라고 꼬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글씨도 쓸 줄 모르고 아는 것도 없어서 그런 거 못 한다고 했지요. 거기서 다시 인민군에 넘겨져서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판문점을 거쳐서 3차 포로교환 때 넘어 왔습니다. 포로 교환이 돼서도 거제도로 갔다가 밀양으로 해서 석방이 됐습니다. 포로 때는 인민군들보다도 더 겁나는 것이 같은 포로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만약에 나도 아는 사람을 만났으면 6ㆍ25 전의 일이나 6사단 때와 유격대 때 일을 일러바치게 되면 곧바로 죽는 거지요. 같은 포로들끼리도 서로 일러바치게 되면 처음에는 밥도 잘 먹고 편하게 해 주지만 나중에는 일러바친 놈도 같이 죽이는 건데 그걸 모르니까 서로 일러바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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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편 4
성 명 : 박 홍 진 (291001-xxxxxxx) 주 소 :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야미리440 직 위 : 독수리유격대 소대장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총무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2대 회장
▢ 창설 과정
해방이 되기 전에 본인의 선친(박성순)께서는 함경도 웅기읍에서 운수업을 하시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철원군 영평읍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당시에 본인은 4년제 중학교에 다니다가 영평으로 왔지요. 해방 후에 38선이 생기고 영평은 이북 땅이 되니까 영평에서 다시 이사를 하려고 했는데 집안 친족들이 만류해서 월남을 못했습니다. 영평은 온통 공산당 세상이었는데 아버님께서는 노동당에 대항을 해서 민주당에 입당을 하셨어요. 노동당이 좌익이고 민주당이 우익이었는데 청우당이라는 정당도 있었지만 노동당과 민주당이 주로 대립을 했고 대세는 노동당 쪽이었습니다. 선친께서는 조만식 선생 계통인 민주당의 철원군당 조직부장을 하시면서 노동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나는 부르주아(BOURGEOISIE.여기서는 지주 계급)를 도왔습니다. 본인은 1945년 영평 국민학교 선생을 하다가 이동국민학교로 전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민주당 조직 부장이고 본인도 민주당원이니까 이동 국민학교에서는 반동으로 낙인이 찍혀있는 상태였습니다.
국민학교 선생들이 모두 노동 당원인데 나와 여선생 두 사람만이 민주당원이니까 항상 외톨박이가 되고 반동으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선생들이 모여서 세포위원회를 하는데 나와 여선생만 빠졌어요. 6ㆍ25가 터지고 인민군이 이남으로 밀고 내려가니까 이동 국민학교 선생들이 경상도의 무슨 학교 교장 또는 경상도 무슨 면장 등으로 감투를 쓰고 부임했는데 공산군이 다시 밀리게 되니까 제일 먼저 선생들이 쫓겨 오고 다음에 내무 서원들이 쫓겨 오더니 나중에는 인민군이 쫓겨 오더군요. 9ㆍ28로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이 북진을 하면서 포천을 지나 성동 쪽으로만 진격을 하였기 때문에 국군이 통과하지 않은 지역은 빨갱이들이 그대로 설치고 있었습니다. 이동국민학교 교장 선생이 함경도 사람이었습니다. 국군이 진격을 하니까 교장은 선생들을 다 데리고 이북으로 밀려갔어요. 아버님과 나는 미리부터 그런 눈치를 채고는 빠져서 도망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국군이 진격해서 북쪽으로 올라간 후에도 이동면 도평리와 백운동쪽에는 빨갱이 소굴이었습니다. 결국 나의 선친께서는 도평리 덕배에서 빨갱이들에게 체포되어 희생되셨는데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의 경우는 6ㆍ25 이전부터 반공 사상을 가졌고 공산당의 치하를 체험했을 뿐 아니라 선친마저 공산당에게 잔악하게 희생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반공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최종성 대장이 유격대를 만들고 향토를 지킨다기에 적극적인 동감을 가지고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향토를 지킨다기에 적극적인 찬성을 했습니다. 9ㆍ28 서울 수복 후 국군이 진격할 때 포천은 성동에서 전투가 치열했고 그 외는 별다른 전투 없이 대로로만 진군을 했기 때문에 동내마다 빨갱이가 모여 있었고 이동면 특히 도평리 지역은 그대로 적 치하에 있던 것을 지역 청년들이 치안대 청년방위대 등을 조직하여 토벌했던 것입니다. 포천에서 민간인들로 조직됐던 저항 단체로는 특히 유봉열씨가 청년 부대를 조직하여 이동에서 공비들을 토벌했고 임찬호씨의 소리봉 부대와 최종성씨의 독수리유격대등이 있었습니다. 최종성, 최종철 형제들은 6ㆍ25 이전부터 월남해서 반공 활동을 했으며 6ㆍ25때에는 피난을 했다가 9ㆍ28수복 후 고향에 돌아와서 유격대를 조직 하였던 것입니다. 독수리유격대도 처음의 취지는 향토를 지키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었고 주로 일동 이동지역에서 작전에 임했으나 규모가 63명으로 커지고 현역 부대와 합류하게 되자 체계를 갖추고 전국적인 활동을 폈던 것입니다. 독수리유격대는 6ㆍ25 당시 어느 유격대보다도 용감하고 대규모적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국군으로 부터 안타까운 사건(간부 5명의 총살 및 대원의 적진 추방 사건)을 거치고도 끝내 애국정신을 잃지 않고 각종 전투에 임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 보병 제 00연대 1대대 배속 당시
우리 유격대가 창설 되어서는 자체적으로 도평리 장암리 사직리 일동 등지에서 향토를 방위하고 지방 빨갱이와 패잔병들을 토벌하다가 일동면 화대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00연대 1대대 부대대장 김영필 대위의 주선으로 1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활동한 것이 한 달 정도 되었고 1대대에 배속된 것도 한 달 정도가 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1대대에서는 군복이나 장구류를 지원하여 주었고 우리 유격대에서는 현역과 같이 수색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 유격대원들은 거의가 포천지방 청년들이었으므로 일동에서 수색 정찰 임무를 잘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1950년 12월 31일 저녁 중공군들이 수입리 방면에서 부터 공격 시작했습니다. 중공군 일부는 수입리 쪽으로 해서 강을 끼고 현재 일동 중고등학교 쪽으로 공격을 했고 일부는 현재 삼거리에 검문소가 있는 화대리의 1대대 본부를 공격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1대대 본부에 있었는데 우리 유격대가 2개조인지 3개조인지 제비울(社稷里)쪽으로 수색 정찰을 나갔다가 채 돌아오기도 전에 우리 부대가 후퇴를 했습니다. 중공군이 조명탄을 쏘고 듣던 대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공격을 해 왔습니다. 대대 본부는 먼저 후퇴를 하고 정찰을 나갔던 유격대원들은 몇 갈래로 흩어져서 후퇴를 했는데 청평을 지나고 양평에서 다시 집결을 하니까 충주까지 후퇴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충주에 도착해서는 수색 정찰과 과수원 옆에 있던 비행장을 경계 근무했습니다. 남한강을 건너다니며 수색 정찰을 했는데 그 곳이 당시에는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었습니다. 00연대에서 32연대로 갈 적에는 날짜를 기억할 수가 없고 우리가 근무를 나갔는데 트럭 2대가 스몰 라이트만 켜고 왔으며 그 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32연대로 간다는 얘기만 나온 것 같습니다. 32연대로 가서는 얼마 안 있다가 (본인 생각으로는 1주일 정도 머문 것으로 생각되나 다른 대원들은 10여일 이였다는 주장도 있음)부대 전체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 군장을 하고 풍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헌병이 인솔을 했고 00연대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우리가 잡혀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군장 한 그대로 돌아왔고 인솔한 헌병들 역시 잘못된 듯 한 언행이나 표시가 전혀 없었으며 그때까지 우리가 00연대에서 도망 왔다는 얘기도 없었고 그저 32연대로 배속이 바뀌었다가 다시 00연대로 배속이 바뀌는 줄만 생각을 했습니다. 00연대 1대대에 돌아와서 하차를 하니까 무장을 해제시키고 담배 건조장으로 집어넣을 때서야 잘못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고에 갇혀 있을 때는 대장과 간부들을 본 기억이 없으므로 다른 창고에 갇혔던 것으로 알았으나 후에 알고 보니 대대 본부로 데려 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대장과 간부들이 와서 얘기를 했는데 우리들은 3열 횡대로 서고 그 앞에 간부들이 섰으며 주위에는 집총한 현역들이 1개 분대 정도 서 있었고 우리 주위도 현역들이 여기저기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너희들은 군법 제 몇 조(9조 라고 한 것 같음)에 의하여 처벌한다.”고 선언했던 생각이 납니다. 마당에 우리가 서 있고 그 앞에 초가집이 있었는데 조금 높은 툇돌 위에서 유창훈 소령이 올라서서 선언을 했는데 그때 유창훈 소령이 들고 있던 책의 표지가 노란 색이었던 기억도 나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한테 공갈 때리거나 겁을 주려고 그러는 것으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장들이 만세를 부른 것은 갇혀있는 상태에서 만세 소리도 듣고 총소리도 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 32연대 3대대 및 수색 중대 배속 당시
1951년 1월 12일 보병 제00연대 1대대 부대대장인 김영필 대위가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속되었고 독수리유격대가 32연대로 이동했다가 00연대로 되돌아 와서 대장과 간부들이 총살을 당했으며 그 때가 1951년 2월 6일입니다. 그러므로 32연대 3대대로 가서 며칠정도 쉬었고 10여일 정도 파견도 나갔었다는 대원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00연대에서 32연대로 간 것은 51년 1월 20일에서 25일 경이 될 것입니다. 2월 3-4일경 32연대에서 00연대로 돌아왔고 2월 6일 간부들의 처형 사건이 발생되었으며 (간부들은 음력설날에 처형되었으며 환산을 하면 51년 2월 6일이 음력 정월 초하루임) 다시 32연대 3대대로 김영필 대대장을 찾아간 것은 2월 9-10일경으로 추정이 됩니다. 32연대 3대대로 배속이 되서는 계속 공비 토벌을 했는데 우리 유격대는 충북 단양, 경북 의성, 청송, 의흥, 안동, 풍기 등에서 토벌 작전을 했고 이중에는 4-5명씩 파견을 나가서 잔당을 소탕하기도 했습니다. 그 기간이 2월에서 3월 중순이나 말까지였던 것 같고 그 다음 양평으로 올라와서 전ㆍ후방 교대를 하면서 32연대 3대대에서 바뀐 것은 3대대장이던 김영필 소령이 32연대 정보주임으로 전속 되면서였습니다. 당시 김영필 소령은 우리 유격대에게 상당한 관심과 배려를 해 주었던 것이며 또 우리 유격대 역시 공비토벌이나 수색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발휘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정예 부대로서 인정을 받고 연대 수색 중대로 배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수색 중대로 배속이 바뀐 우리 유격대는 북진을 하면서 제일 먼저 화야山 전투를 했고 가평군 설악면, 청평 발전소, 현리, 하판리와 상판리 샛말, 청계산, 강씨봉, 도성고개, 백운산 광덕산, 하오고개(복주산), 도덕동 육단리, 사곡리, 천불산, 373고지와 734고지 전투를 하고 계웅산을 지나 김화까지 전진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가 모두 한곳으로만 진격을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서로 갈라지고 합치면서 진격을 했으니까 통과 지명은 다르게 기억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유격대는 맡은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지만 373고지 전투에서는 희생이 많았습니다. 373고지에서 희생은 우리 유격대뿐만 아니라 수색 중대나 연대 본부 현역들도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본인은 유격대원이면서 연대 본부 작전과에 근무를 했습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373고지를 탈환 하면서 아군의 피해가 극심했던 것은 무리한 작전을 지휘관들이 강행했기 때문이며 고지를 탈환 하였어도 그것은 실패한 작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연대장 명의에 귀향증을 가지고 포천엘 나왔다가 가족을 찾지 못하고 다시 32연대에 복귀하여 현지 입대를 했습니다. 다른 대원들도 현지 입대를 하거나 귀향했던 대원들은 유격대 복무 기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재차 영장을 받고 군복무를 마쳐야 했습니다.
▢ 독수리유격대 활동을 증언 하면서
본인을 포함하여 우리 생존 대원들은 항상 스스로의 행적이 장한 애국 행위였다고 자부하며 왔습니다. 아울러 00연대에서의 사고는 사실대로 밝혀져 우리 유격대원의 명예가 되찾아져야 하며 사고로 희생된 지휘관들이나 구국 전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전몰 대원들에게도 위로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40년이라는 참으로 긴 세월이 흘러 모든 기억이 흐려지고 자료마저 인멸되었지만 국방부 당국에서 사고의 진실을 밝히고 독수리유격대의 전공을 확인하여 주셨으며 전사편찬위원회에서 까지 자료를 확인하여 전사의 기록으로 남겨 주시려는 노력에 실로 진실 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생존 대원들은 오래전부터 6월이 되면 모임을 갖고, 전몰대원의 명복을 빌며, 위로하여 오던 중 국방부로부터 독수리유격대의 공훈이 확인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친목회를 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하고 전적비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본 사업에 도움을 주시는 국방부 재향군인회와 포천군청, 포천문화원, 보병 제8사단사령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유격대원들은 이제 60-70세의 연륜이 되었으며 40여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유격대의 정신과 업적을 내세워 자랑하지도 않았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분명했던 우리의 애국정신과 자취에 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들 자신을 위하는 명예가 아니고 올바른 역사와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애국의 근거를 남겨 주기 위해서도 독수리유격대의 행적과 정신이 바르게 평가되길 바랍니다.
가.
국민이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국민 된 사람이면 누구나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구국 전선에 나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는 국가의 부름이 있기 전에 스스로 앞장서 나섰던 것이며 진실로 우국충정 하는 우리에게 00연대 1대대에서는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잔혹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 유격대로서는 참으로 기막힌 일 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대한민국 국군에게 총살과 적진으로 추방되는 엄청난 배반을 당했음에도 또 다시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뭉쳤던 정신이 얼마나 고귀한 애국이었습니까? 대한민국 국군에게 총살을 당하면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그들의 정신이 엄동설한 속에 발가벗겨져 적진으로 추방되는 만행을 당하고서도 다시 뭉쳐 대한민국을 지켰던 애국충정과 40년을 두고도 소리 내지 않았던 그 침묵이 바로 독수리유격대의 정신이었습니다. 이제는 독수리유격대의 장한 애국정신이 평가되고 명예로서 전몰 영령과 자나는 후대들의 심중으로 전해지길 바랍니다.
나.
00연대 지휘관의 만행은 실로 천인공노할 죄악이었습니다. 민간인들의 구국 활동을 올바르게 평가하여야 할 군인들이 유격대의 전공을 제 몫으로 하려는 다툼 속에서 만행까지 저지른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러한 우가 범해지지 않도록 군 당국은 본 사건을 통찰하여 교훈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다.
보병 제00연대 1대대에서 사고에 관련했던 관계자들은 스스로 뉘우침으로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 바랍니다.
라.
본 기록은 국방부 조사대의 조사 과정에서 조사 되였던 내용과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장님과 여러 위원께서 우리 대원들과 면담하셨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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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 편 5
성 명 : 이 강 헌 (221210-xxxxxxx) 주 소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 505 직 위 : 독수리유격대원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부회장
▢ 창설과정
우리 유격대는 9ㆍ28 서울 수복이 되고 국군이 다시 북진하였을 때 포천군의 청년들이 모여서 조직한 것입니다. 우리 국군이 밀려 내려갔다가 다시 북진 하였을 때 큰길로만 북진을 했지 구석구석마다 완전히 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빨갱이들이 산속이나 외진 골짜구니 마을로 숨고 우리 아군은 북쪽으로만 쳐들어가고 해서 이동 도평리 백운동 쪽으로는 빨갱이들이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걸 우리 이동 청년들이 방위대를 조직해서 토벌한 것입니다. 그 때는 지서에 경찰들도 있고 소방대도 있었지만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고 우리 이동 청년들이 합세를 해서 토벌을 했는데 포천군에서는 우리 이동이 제일 잘 했다고 상금 40만환을 받았어요. 그 40만환으로 군복을 한 벌씩 사서 입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중공군이 나오니까 국군이 다시 밀려 내려옵디다. 바로 그 무렵에 우리 유격대가 창설 되었어요. 포천에서 이동 지서로 전화가 왔는데 최종성씨가 이강헌이를 찾는다고 해요. 전화를 받으니까 최종성씨가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하고는 우리 지서엘 찾아 왔어요. 그래서 만났더니 “유격대를 조직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뭘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은지 네 생각을 말해 봐라!”하고 물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는 첫째 향토를 지켜야하고 또 공산당에게 갖은 고통을 당했으니까 목숨을 걸고 공산당을 처 부셔야 합니다.”하고 내 생각을 분명하게 주장 하니까 종성이 형님(최종성씨)이 “좋다! 그만하면 됐다. 유격대에 들어와라!”하고 오케(O.K.)를 합디다. 그래서 내가 같이 있던 청년방위대를 데리고 유격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서로 먼저 피난 갈려고 아우성치던 때입니다. 또 젊은이들은 인민군이든 국방군이든 전쟁터에는 잡혀가지 않으려고 산이나 굴속에 숨어서 지내든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원들은 모두 이북(공산당)의 학정을 받아 본 사람들이고 또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모두들 자진해서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유격대의 총무(기념사업회)를 보고 있는 박홍진도 그 사람 부친께서 민주당 위원장을 하다가 빨갱이한테 희생되고, 최면수대원의 형인 최면복이도 정보원을 하다가 조치미에서 빨갱이한테 희생 됐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고 친척들입니다. 최종성 대장과 최종철 작전관, 최종석대원이 친형제이고 최면수는 같은 집안입니다. 이강록이도 내 동생인데 373고지에서 전사 했고, 이기재와 이경재, 오득환 과 오부환, 이제용과 이제영이 똑같은 형제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유격대를 조직하게 된 목적이나 취지는 첫째 우리 향토를 지키겠다는 것이고 둘째가 반공입니다. 지금 우리가 늙어 버렸다고 해도 지금 김일성이가 다시 쳐 내려오면, 우리는 또 나가 싸울 것입니다. 말로 하기 쉬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런 각오와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 이동 청년들이 먼저 유격대를 조직하자는 모의를 했고 이어서 영평 포천 내촌 일동 사람들이 모여서 독수리유격대를 조직했는데 포천 국민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일동으로 들어 왔어요. 무기는 구구식 소총, 따발총, M-1 등 각양각색으로 노획하거나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것들이고 의복은 구해 입은 사람도 있고 사복을 한 대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패잔병이나 빨갱이들을 소탕하고 있다가 00연대 1대대가 화대리에 주둔하면서 부대대장 김영필 대위가 우리 유격대를 보고 주선을 해서 1대대로 배속을 받은 것입니다. 1대대 하고는 손을 잡은 까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유격대는 일단 장비가 필요했고 1대대 역시 우리 유격대를 이용해서 수색 정찰을 하거나 병력 보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합작을 했을 거로 생각합니다.
▢ 보병 제00연대 1대대 배속 당시 활동
우리 유격대가 조직돼서 일동으로 들어 왔는데 그때는 계속 수색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1대대로 와서도 똑같이 수색을 다녔습니다. 앞에서 말 한대로 포천이 수복됐을 때는 우리 국군이 포천 양문을 거처 운천 쪽으로 진격을 하였기 때문에 이동이나 도평리 쪽에는 인민군이 몰려들었습니다. 도평리 백운동 약사골 등은 빨갱이 소굴이 됐어요. 이것을 우리 향토 방위대가 토벌 했던 것이고 우리 유격대가 조직돼서도 계속 토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토벌한 것이 한 달 정도 됩니다. 그러다가 양력으로 그믐날(50년 12월 31일) 중공군에게 당했는데 12월 28-29일쯤 우리 유격대가 정찰을 하면서 중공군이 나오는 것을 확인을 하고 대대 본부로 와서 보고를 하니까 대대 본부에 있는 놈들이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29일에는 제비울(燕谷里) 먼두둑(遠坪)에서 중공군을 발견하고 거기서 내가 다리까지 삐었습니다. 쩔뚝거리면서도 대대 본부에 도착해서 보고를 하니까 믿지를 않아요. 그런 나쁜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사방을 다니면서 고생을 하고 정탐을 해서 보고를 하면 믿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망할 놈들이 믿지를 않고 있다가 아니나 다를까 그믐날 저녁 중공군이 덮쳐 오니까 우리보다도 먼저 줄행랑을 쳤어요. 보고 할 때는 믿지도 않던 놈들이 중공군이 덮치니까 정찰 나간 우리가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도망을 친 겁니다. 우리는 전쟁이 나기 전부터 공산당하고 싸우던 사람들 아닙니까? 또 우리가 포천 사람들이니까 일동이나 이동의 지리와 여러 사정을 거울 속처럼 훤하게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입수한 정보는 정확한 거니까 믿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인데 기습을 당했으니 한심한 일 이였습니다. 우리는 1대대에서 장비 지원을 받을까 해서 같이 일을 한 것이고 1대대는 우리에게 정보를 얻고 협조를 받으려고 서로 손을 잡았던 것인데 그렇게 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괘씸한 것은 1대대에서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이 없어서 얻어먹으려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이 아니고 갈 곳이 없어서 1대대에 빌붙어 다닌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처자식 내버려 둔 채 나라 지키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도망 갈 리가 없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근무를 나가니까 차가 왔어요. 3대대 보좌관 하던 박(朴) 뭐시기(정보장교 박영식)가 왔어요. 그래서 갔는데 그게 왜 도망입니까? 도망이라고 하면 총 놓고 적군과 싸우지 않겠다고 뺑소니치는 게 도망입니다. 아니 그때 우리가 공산군이 무서워서 도망을 칩니까? 적군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쫓아가는 게 우리 유격대입니다. 지금 김일성이가 다시 처 내려와도 나는 다시 나가 싸울 생각이 있습니다.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뼛속에 박혀 있는 각오입니다. 32연대로 간 과정을 우리 대원은 모릅니다. 우리대원은 시키는 대로만 했으니까 최종성 대장이 우리를 데리고 도망을 갔는지 김영필 대대장이 거짓말을 해서 데려 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성 대장이나 유격대 간부들이 32연대로 가고 싶은 생각은 있었을 것이고, 김영필 대대장이 인솔 장교와 차를 보내서 오라고 하니까 가게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근거는 대대장(김영필)이 우리 유격대를 좋아했어요. 나는 최종성 대장하고 형님동생 하면서 가깝게 지냈는데 그 양반(최종성 유격대장)이 우리를 부르더니 “김영필 대대장이 우리(유격대)를 현역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유격대원들은 하사 계급을 주고 간부(소대장)들은 상사 계급을 준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고 해요. 그래서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하자고 싸우는 것이지 그까짓 계급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계급을 바라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 대원들 모두가 같은 뜻일 줄로 압니다.”하고 대답을 하니까. “옳다! 네 얘기가 옳다! 우리는 유격대로 족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영필 대위가 1대대 부대대장으로 있을 때 그런 계획을 세웠다가 32연대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김영필 대대장은 32연대로 가서도 우리 유격대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데려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 갔던지 아니면 스스로 갔던지 간에 잘못된 것은 분명하고 32연대에서 차와 인솔 장교까지 보내서 다른 부대의 병력을 훔쳐가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까지 사람을 죽이고 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 유격대원(민간인)이 아니었고 1대대의 현역 군인들이 32연대로 갔다가 다시 돌아 왔다면 그렇게 책임자를 죽이고 옷을 뺏어서 적진으로 쫓아냈겠습니까? 또 현역들이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적진으로 내 쫓겼다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 했겠습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 안 된다는 것이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이제는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하늘 아래서 어떻게 이 일을 덮어 둘 수도 없는 것이고 지울 수도 없잖아요.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도 아니고 덮어 버린다고 그게 덮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 32연대 3대대 수색 중대 배속 당시
화야산에서 입니다. 미군하고 같이 수색을 하다가 미군이 우리에게 인계를 하고 내려간 후 우리 유격대가 더 올라가서 전투가 시작 됐습니다. 비행기 지원을 받으며 전투를 하다가 나중에는 수류탄 공격에 육박전까지 하게 됐습니다. 나도 중공군하고 육박전을 했지요. 전투가 뜸해질 때인데 현역 하사가 죽어 가드라고요. 죽었나 하고 건드려 보니까 목숨이 붙어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병권이(민병권 대원)하고 나하고 이걸 살려줘야지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하면서 끌고 내려와서 의무대에 갖다 놓으니까 금방 죽어 버리더군요. 그 걸 연대장이 보고는 “이놈에 새끼들 누가 이걸 끌고 오랬냐?”면서 호통을 치는 겁니다. 우리는 그래도 고맙다는 얘기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연대장이 야단을 치니까 욕만 먹고 다시 올라갔는데 해가 저서 캄캄하니 부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길을 잃고 얼마를 헤매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서 잤어요.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니면서 중공군 항복하라고 다니고- 아침이 돼서 잠을 깨보니 우리가 잔 방에 시체가 다섯이나 있습디다. 그 때는 부대에서 완전히 낙오가 된 겁니다. 부대를 찾아 가려고 사방으로 헤매다가 지처서 “이렇게 고생을 할 바엔 죽어 버리겠다.”고 총을 목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니까, 병권이가 보고는 “형님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총을 냅다 빼고는 여지껏 고생하고 왜 죽느냐고 야단을 쳐요. 또 광덕리하고 화학산 경계에 수밀리라고 있는데 거기서는 중공군에게 우리가 포위되고 또 중공군이 우리 아군에게 포위가 됐습니다. 이틀 동안 찐쌀(대만米)을 먹고 일주일 정도는 비행기로 보급을 날라다 먹었는데 거기서 수색 정찰을 나갔습니다. 그 지역은 민간인도 없는 지역인데 민가에서 소리가 나요. 그래서 봇도랑으로 가니까 중공군이 마늘을 씻어요. 냅다 들이치니까 두 놈이 손을 드는데 혼자 어쩔 수가 없어서 뒤에 오든 병권이를 불러서 두 놈을 잡고는 민가로 가니까 세 놈이 총 소제를 하고 있어요. 몽땅 다섯 놈을 잡아서 병권이하고 정보과에 갔다 줬지요. 우리는 잡아서 갖다 주면 그만이지 이렇구 저렇구도 없었어요. 우리들이 갖다 주면 전과야 현역들 앞으로 올라갔겠지요. 확인 할 수야 없지만 그길 말고는 없잖아요. 우리 한데 돌아 온 것도 없고 전과를 그냥 내버리지는 안았을 것 아닙니까? 373고지는 말입니다. 우리 유격대는 원래가 적진에 들어가 수색 정찰을 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373고지가 크지도 않으니까 “너희들이 한 번 해봐라!” 하고 연대장이 명령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색중대하고 우리가 명을 받았는데- 사실 373고지 공격 명을 받고 우리 유격대에서는 그 날 저녁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고지보다도 373고지는 올라가기가 어려운 고지였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공격이 아니고 그냥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거든요. 우리가 새벽에 나가서 작전을 했는데 임철원이가 우리 분대장이고, 이강록이도 무슨 책임을 맡았습니다. 임철원이가 제일 앞에 올라가다가 앞에 뭐가 걸리니까 옆으로 돌고 내가 뒤를 따르다가 제일 앞에 나서게 됐어요. 적이 있는 곳과는 불과 20M정도에서 나도 모르게 내 몸이 거꾸로 처박혔습니다. 바로 내 철모위에서 수류탄이 터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눈을 부상당해서 내려 왔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강록(이강록)이가 내 동생이 되니까- 자기 형이 제일 먼저 부상을 당해서 내려가니까 이놈이 불끈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냥 앞으로 치닫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겁니다. 내가 부상당하고 불과 10분도 안 돼서 강록이가 죽은 겁니다. 강록이는 서울서 대학을 다니다가 6ㆍ25가 났는데 저도 유격대 한다고 지원했다가 죽었지요. 나는 부상당해서 정신이 없는데 이봉학씨가 오더니 죽으면 안 된다고 웁니다. 후송됐다가 3개월 만에 퇴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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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편 6
성 명 : 이 규 화 (310701-xxxxxxx) 주 소 : 수원시 세류동 950-57 직 위 : 독수리유격대 소대장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감사
▢ 창설과정
나의 본 고향은 포천군 어룡리 입니다. 6ㆍ25가 일어날 때는 내가 철원 고급 중학교를 졸업하고 철원군 전기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에 영장이 나왔지만 마침 전염병인 옴에 걸려서 인민군에는 안 가게 되였습니다. 그 후 국군이 진격(9ㆍ28수복)을 하게 되었고 철원 고급 중학교 2년 선배인 고관도씨가 고향에 돌아와서 유격대장을 했습니다. 그 때 고관도씨는 “국방부 학생유격대 북강원도 유격대장”이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0년 10-11월경이었는데 00연대 본부가 연천에 주둔했고, 1대대는 철원에 주둔했습니다. 철원은 패잔병이나 빨갱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고관도씨가 이끄는 학생 유격대는 패잔병들을 소탕했습니다. 철원에 거주하고 있던 젊은 사람들이 주동이 돼서 조직한 유격대는 00연대 1대대와 같이 작전을 했는데 낮에는 아군 1대대가 철원 시내를 점령했고 야간에는 공산군이 판을 처 밤과 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00연대가 다시 가평군 북면으로 후퇴를 하게 되니까 유격대는 해체가 되었고 고관도 대장과 나는 1대대에서 같이 가자고 권유해서 1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1대대는 북면에서 10-15일 정도 주둔하다가 다시 일동면 화대리로 이동을 하게 되었고 민간인 신분이었던 우리는 독수리유격대가 다시 1대대와 손잡게 되자 독수리유격대에 합류했습니다. 철원에서 유격대장을 하던 고관도씨는 독수리유격대에서 교육관이라는 참모직을 맡았고 나는 처음 향도직을 맡았다가 충주에서 최종성 대장과 간부들이 희생된 후 2소대장을 했습니다. 왜 유격대를 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유격대원들 중에서도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당시에 나로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목숨을 바쳐서 애국을 해야 하며 내 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키겠냐는 절대적인 주장과 논리로서 유격대를 들어갔고 유격대를 끝까지 지켰던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 보다는 민주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을 더 마음에 두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서는데 나도 나서야 되지 않겠느냐는 평범한 양심과 평범한 용기로 유격대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제천 경찰서에 파견을 나가 있을 때 경찰서장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너희들은 신분 보장도 되지 않는 유격대에 따라 다녀 봤자 별 볼 일 없는 것이고 죽어도 명분 없이 개죽음하는 것이니까 북진 하지 말고 경찰서에 남아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정식 경찰관으로 만들어 주고 앞날도 책임져 준다는 겁니다. 사실 전쟁터에서 벗어나는 것은 누구나의 소원이기도 했지만 나 혼자서 동료를 저버리고 안일을 택할 수가 없더군요. 서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1대대에 복귀해서 다른 대원과 함께 북진을 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싸우느냐?"는 영웅심은 아니었다 해도 모두가 같이 싸우는데 내 힘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작은 참여 바로 그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었고 국민 된 자로서의 애국이었다고 믿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내가 지녔던 생각과 내가 취했던 행동은 자랑스러운 것이었다고 믿어집니다. 군인이 훈장을 받기 위해 전장에 나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훌륭하게 싸운 군인에게는 훈장이 주어집니다. 우리 유격대는 군번도 계급도 없이 열심히 싸웠습니다. 훈장을 받은 군인처럼 그렇게 열심히 전쟁을 했습니다. 훈장을 받으려고 싸웠던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내세우기 위해서도 아니기 때문에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알아주는 이 없다고 섭섭해 한 적도 없고, 스스로 내세워 자랑한 적도 없습니다. 이제서야 옛날에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고 처음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전장에서 산화한 독수리유격대원들! 그들은 이제 한 점의 흔적도 남김이 없습니다. 육신은 흙이 되어 푸른 숲을 키우고 그들의 정신은 별이 되어 높은 곳에 빛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 보병 제 00연대 1대대 배속 당시
우리 독수리유격대와 00연대 1대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지역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창설됐던 독수리유격대가 00연대 1대대와 합동함으로서 활동 범위가 포천 지방뿐 아니라 전국적인 활동 범위를 갖게 됨으로서 국가 방위에 좀 더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어떤 연유였던 간에 유격대 간부 5명이 희생되었고 국가를 지키려고 나섰던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군에 의하여 적진으로 추방되는 잔혹행위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독수리유격대에 가담하기 전에 연천에서 고관도씨가 대장을 하던 학생 유격대 활동을 했던 것은 창설편에서 밝혔습니다. 그 당시에도 우리 유격대를 지원해 주고 나중에 배속시켰던 것이 김영필 대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유격대와 관계를 맺고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대대장인 유창훈 소령이 아니라 김영필 대위가 주관한 것입니다. 32연대로 갈 때에 간부들이 과연 몰랐겠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간부들이 32연대로 갈 의사가 전혀 없는데 김영필이 보낸 인솔 장교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거든요.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전기한 바와 같이 김영필 대위가 우리 유격대를 잘 도와주던 사람이었는데 32연대로 가 버리니까 유격대 간부들로서는 00연대에서 지원도 해 주지 않고 현역과 차별대우를 하는 1대대(유창훈 소령)측에 대한 불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김영필 대위 측에서 인솔 장교가 차량까지 가지고 와서 32연대로 가자고 했으면 정당한 것은 아니더라도 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 갔건 저렇게 해서 갔건 간에 남의 부대 병력을 빼 간 사람도 잘못이고 이유야 어찌됐던 소속부대의 연락도 없이 인솔 장교를 따라간 우리(유격대)도 잘못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친 것이거나 아군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서 이적 행위를 한 것이라면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잖아요. 도망이 아니라 좀 더 소신껏 전쟁을 하자고 했던 일이고, 이동 방법은 정당치 않았다 해도 독수리유격대의 정신이 어떻다는 것은 00연대(1대대)에서도 충분히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돌아온 사람들을 죽이고 발가벗겨서 적진으로 내 쫓아야만 했느냐는 것입니다. 00연대 1대대 측에서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 유격대를 되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죽여 버리고 쫓아 버리기 위하여 독수리유격대를 되돌려 받았다는 감정도 나옵니다. 32연대와 00연대는 그렇다 치고 2사단 헌병대에서는 지휘 계통과 명령에 의해서 유격대원의 신변을 32연대에서 인수받고 00연대에 인계했을 텐데 그들이 5명이나 총살을 당하고 58명이 추방되는 사실을 과연 몰랐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민간인 신분의 유격대가 아니었고 현역 군인들이 우리와 똑같은 연유로 이동 했다가 되돌아 왔다면 그렇게 처형되고 추방 됐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유격대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했고 추방을 당했던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고 나무라자는 것이 아닙니다.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당하고 추방당했던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민간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처형하고 추방해 버린 사실을 당자들과 함께 오늘의 군 당국도 반성을 해야 합니다.
▢ 32연대 3대대 및 수색 중대 배속 당시
우리 유격대는 수색 정찰을 주 임무로 해서 활동을 했습니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공비토벌을 했는데 그것이 1951년 3-4월경입니다. 태백산 소백산 지역에서 토벌 작전을 하느라고 단양, 의성, 의흥, 청송, 안동, 제천, 신녕 등지를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3-4명씩 파견을 나갔는데 고복동 대원하고 나를 제천 경찰서장이 붙잡는 데도 그것을 뿌리치고 32연대로 복귀해서 동료와 같이 북진을 했습니다. 양평에서부터 전투 임무를 수행 하면서 북진을 했는데 청평 발전소가 후퇴하는 적으로부터 폭파되지 않도록 적군을 유인 공격하라는 명을 우리 유격대가 맡았습니다. 발전소가 폭파되지 않은 채 화야산 공격이 끝나고 현리를 지나 상판리 하판리에서 중공군 2명을 잡고 그놈들한테서 권총 한 자루를 뺏어 내가 차고 다녔습니다. 옛날 마적단이 차고 다니든 자루가 기다란 권총이었는데 나중에는 정보과에서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하기에 반납을 했습니다. 우리가 포로를 잡거나 노획한 장비는 많지만 정보과에 후송시키는 것으로 끝나 버렸고 우리에게는 보상이나 상훈이 일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묻혀 버렸을 리는 없고 적당한 선에서 현역들의 몫으로 처리 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섭섭한 점은 많았습니다. 내가 373고지에서 부상을 당하고 서울 육군병원에 후송이 되니까 민간인 신분이라고 을지로의 무슨 시립 병원으로 쫓겨났습니다. 시설도 엉망이고 약도 없어서 내가 스스로 약도구해 바르고 치료를 했습니다. 완쾌된 후에 육군병원에서 군속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다시 영장이 나와서 재 입대를 하고 30개월의 군 복무를 했습니다. 32연대에서 전투 중 부상을 당하고 육군병원까지 후송을 했는데도 근거가 될 만한 서류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60여명이 각종 전투에 참전을 했는데 그 명단마저 챙겨 놓지 않은 것도 잘못된 것이고 미루어 생각하면 제천 경찰서장 말대로 별 볼일 없고 죽어도 개죽음으로 처리 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현역 지휘관들의 인식이었는지 모릅니다. 상판리 하판리를 지나 국망봉, 광덕산, 사창리, 금화쪽으로 진격을 하면서 373고지에서 내가 부상으로 후송이 됐습니다. 373고지는 별로 높지 않은 고지였는데 연대장의 명을 받아 수색 중대와 연대 본부 요원만으로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끄는 유격대 2소대는 옆으로 우회를 해서 진격을 했고 다른 소대와 현역들은 정면공격을 했습니다. 그 곳에 지형이 엄폐나 은폐를 할 나무나 구릉이 없고 평평한 능선인데다가 적(敵)은 요상하게 생긴 바위를 근거지로 해서 방어를 하기 때문에 아군 측에서는 공격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아침 6시부터 공격이 시작 됐는데 능선 8부쯤 되는 곳에 바위가 있고 중공군이 방어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면과 측면에서 모두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궁리 끝에 소대장인 내가 앞장을 서고 7명의 특공 조를 편성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특공조가 8부 능선의 바위를 점령해서 올라서자마자 정상부에 있던 적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아 7명 전원이 부상 하거나 전사를 했습니다. 한상준이는 머리에 송완희는 배를 맞아 전사했고, 정동진이도 그 자리에서 즉사 했습니다. 내가 연대 의무대에 후송되어 있는 중에도 계속 부상자가 내려 왔는데 그들 얘기는 작전에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였습니다. 우선 연대 요원들만 가지고 작전을 하니까 전투 경험이 없거나 비전투 행정 요원들이 자꾸 뒤로 빠지는 바람에 연대장까지 직접 나서서 독전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373고지가 얼마나 중요 했는지는 몰라도 꼭 점령을 해야 할 고지라면 연대 병력이 아니고 충분한 병력을 지원 받았어야 했으며 지형상으로 보아도 보병 주축의 공격을 할 것이 아니라 중화기를 충분히 보충하든가 지원 받아서 했어야 했는데 당시의 지휘관들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고 너무 조급하게 전과(점령)만을 올리려는 욕심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 합니다. 어쨌든 무리한 작전으로 아군의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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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편 7
성 명 : 이 지 용 (350401-xxxxxxx) 주 소 : 서울 동작구 사당4동 138-7 직 위 : 독수리유격대 본부 대원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회원
▢ 독수리유격대 참전 경위
우리는 이동(3ㆍ8선 이북)에 살다가 몰수를 당하고 6ㆍ25때 일동면 길명리로 피난을 나왔습니다. 보병 제 00연대 1대대가 일동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나는 일동 헌병파견대에서 쑈리(심부름하는 소년)로 일하고 있다가 최종성씨를 만나서 독수리유격대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내가 심부름하고 있는 헌병대에 최종성씨가 유격대 간부 몇 명을 데리고 왔는데 최종성씨가 나를 보시더니 “어떻게 여기(헌병대)에 왔느냐? 가족들은 어떻게 됐느냐? 동네(정보관) 누구누구는 어떻게 됐느냐?”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물어보기에 우리 집 사정에서 부터 동내 사정까지 내가 아는 대로 다 말씀을 드렸더니 - “유격대를 조직해서 고향에 들어가 치안도 하고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하면서 따라 나서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너는 여기 헌병대에 일을 하였으니 네 맘대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하셔요. 그래도 같이 가게 해 달라고 매달렸죠. 어떻게 해서였는지 나를 헌병대에서 데리고 나오셔서는 조치미 지서로 왔습니다. 조치미 지서에서 포천 내촌 등으로 전화를 하니까 여러 사람들이 조치미로 왔습니다. 이동에서는 이강헌씨, 이봉학씨 등이 임시 치안대를 하다가 왔는데 이동 쪽에서 온 사람들은 총으로 무장을 했는데 포천 쪽에서 온 사람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유격대는 정탐(수색)활동과 빨갱이 소탕하는 일을 하다가 얼마 후 1대대와 합류를 하게 됩니다. 유격대에 참여한 사람들은 6ㆍ25전부터 노동당에 반대하던 사람들과 공산당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유격대원은 전부가 반공 사상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와 최면수 등 어린 나이의 사람들도 많았는데 최면수 대원의 형 최면복씨는 6.25이전에 월남해서 육군 정보대 포천파견대(6ㆍ25이전 조치미 소재)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가 공산당에게 희생됐습니다. 모두들 이러 저러한 연유를 가지고 반공활동에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경험과 연륜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학식이 많은 계층도 아니었으니까 체계적으로 반공 사상이나 애국관은 내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에 반대하고 전쟁에 나서서 싸우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자세는 확고했습니다. 그런 정신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00연대에서 억울하게 쫓겨나서도 흩어지지 않은 채 다시 유격대를 조직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 보병 제 00연대 1대대와의 상황
유격대가 조직되어 처음에는 일동 정미소 부근에 주막집이 있었는데 그 옆에 민가를 사무실로 쓰고 사방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유격대 사무실 바로 옆에는 00연대 1대대 의무대가 있었습니다. 1대대 하고는 따로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1대대 측에서는 현역병이 우리 사무실에 연락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서로 협조를 하다가 1950년 11월 13일(11월 18일 인 것 같기도 함)에 1대대하고 합류를 해서 일동면 화대리(양조장 자리)에 옮겨갔습니다. 12월 28일에서 29일경에 이동면 도평리 여우고개에 중공군이 진출했다는 정찰 정보가 있었고 1대대 본부에 보고했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에 1대대 본부는 운담 삼거리(화대리)에 주둔했고 연대 본부는 가평군 현리에 있었습니다. 12월 31일 저녁(10시경)중공군이 수입리에서 곰뱀이로 해서 일동중학교 쪽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후퇴를 해서 일동고개(싸리고개)를 넘으려고 하니까 아직 후퇴 명령이 없다고 통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화대리 안동내로 해서 청계골짜기를 지나 일동지서자리(1대대에 합류하기 전에 유격대가 주둔했던 곳)에 와서 배치를 하고 경계 근무를 하는데 일동고개의 포병진지가 함락됐다고 하면서 헌병들이 후퇴를 알렸습니다. 그 때가 밤 12시쯤 되었습니다. 1대대 본부와 우리는 먼저 후퇴를 했고 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은 뒤따라와서 현리를 가니까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합류를 해 가지고 피난민과 섞여서 양수리 강을 건너 충주로 집결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중공군은 현리에서 가평 쪽으로 진입을 했고 우리 유격대는 충주까지 후퇴를 했는데 우리가 주둔했던 곳이 충청뷱도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 입니다. 과수원 자리에 유격대 사무실을 두고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부터 유격 대장의 연락병을 했습니다. 거기서 영월지역에 적군이 진입 했다는 정보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낮에는 비행장 경비와 수색 정찰을 했으며 밤에는 잠복근무를 나갔습니다. 평상시에는 우리 대원의 1/3정도만 근무를 나갔는데 32연대로 가던 날 저녁에는 어찌해서 인지는 모르나 유격대원 거의 전부가 근무를 나갔고 막사(민가)에는 취사병과 약간의 대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암호가 “책상 연필”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저녁 식사 후에 근무를 나갔는데 - 그날 저녁에는 언제 나갔는지 왜 그렇게 많이 나갔는지 모릅니다. 밤 중(새벽 1시쯤으로 추정)에 밖이 웅성웅성 하고 이상스러워 나가 보니까 대원들이 차에 타고 있었고 자대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차에 타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기습 상황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대장님께 사실을 보고했더니 최종성 대장이 나오셔서 “무슨 일이냐? 어디로 출동하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가 떠나 길래 내가 먼저 차에 타고 최종성 대장은 어떻게 된 것인가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이 차가 출발하자 뛰어와 차에 매달렸으며 뒤에 탔던 사람들이 대장의 손을 잡아 당겨 주었습니다. 차는 계속 가다가 어느 검문소에서 오랫동안 지체를 했고 32연대에는 이른 새벽녘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00연대 1대대에서는 내가 대장 당번을 했고 이기재씨가 유격대 서무계를 보았으며 유격대에서는 대원이 직접 대대 본부에 들어가서 연락을 취했습니다.(일동에서는 한상준이가 연락을 했으나 충주에 내려가서는 다른 사람이 했던 것으로 기억 됨) 우리 유격대는 대대 본부와 따로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화는 가설되지 않았습니다. 32연대에 도착해서는 아침에 김영필 대대장을 보았으며 며칠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쉬다가 몇몇은 다른 곳으로 파견도 나간 것 같습니다. 얼마를 있다가 부대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 역전에 집결을 하였는데 열차를 대기하고 있는 중에 00연대에서 우리를 데리러 왔으니 00연대로 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들렸습니다. 헌병이 2명인가 보였고 정복한 군인, 김영필 대대장, 유격대간부들이 먼 곳에서 얘기하는 것이 보였는데 대화의 내용은 우리 대원들이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의 행동이나 모습으로 보아 유격대 간부들이나 헌병들은 김영필 대대장에게 따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김영필 대대장은 헌병과 유격대 간부들에게 무엇인가 설명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 이였습니다. 00연대에는 저녁 무렵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대원들은 창고에 가두고 대장과 간부들은 대대 본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까지 우리 대원들에게는 무엇이 잘못 되었다거나 왜32연대로 갔느냐는 질문도 없었고 아무런 조사도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은 못 얻어먹고 창고에서 눕지도 못한 채 쪼그리고 앉아서 지샜습니다. 밖에는 못 나가게 현역들이 지킨 것 같습니다. 아침에 떡국을 줘서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날이 음력으로 설날이었으니까요. 떡국을 먹고 나서 9-10시쯤 되었을 때 간부 5명을 현역들이 집총하여 호위하고 우리가 갇혀 있는 창고 앞으로 와서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도망죄에 해당한다거나 죽는다는 얘기는 비추지도 않고 현역들도 그런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말이 없고 최종성 대장이 주로 말을 했는데 문 앞에서 말을 했기 때문에 뒤편에 앉은 사람은 못 알아들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때의 대장 목소리는 목이 잠기는 낮은 목소리였고, 얘기의 주된 내용은 “우리는 이제부터 자네들과 같이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반공을 위해서 뭉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섰으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흩어지지 말고 한데 뭉쳐서 끝까지 싸우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성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길 바란다.”는 내용을 얘기하고 당부를 하는 중에 현역들이 옆에서 짧게 얘기하라고 제지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일 나중에 대장과 간부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는데 “우리 대원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듣다가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됐다.”는 섬뜩한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32연대로 갈 때나 00연대로 올 때도 그저 소속이 바뀌나 보다 했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우리를 인솔했던 헌병들도 그런 기색은 일체 없었습니다. 대장과 간부들이 만세를 부르고 나자 집총한 현역들이 간부 다섯 명을 인도해 갔으며 우리는 그대로 창고 속에서 있다가 총소리를 들었고 얼마 후 군인들이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발자국 소리를 집총 했던 군인들이 총살 집행 후 돌아가는 소리로 추측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긴장하기 시작했고 대장님과 간부들이 총살당한 것으로 단정을 하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우리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등 당황하고 있던 중에 현역들이 다시 와서 우리 대원을 밖으로 집합시켰습니다. 2과(정보과)앞에 집합을 시키고 정보장교(보좌관)가 툇돌 위에 올라서서 “너희들은 군법 제9조에 의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간부들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일단 살려준다. 우리 부대에는 너희들처럼 부정한 사람은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에서 지급한 군복을 일체 벗어라!”하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유창훈 1대대장도 있었고, 1대대 간부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지시는 정보장교가 했습니다. 분위기는 아주 살벌했습니다. 군복을 빼앗긴 유격대원들은 무장된 현역들에게 인솔돼서 강변(우리는 그 강을 달래강으로 불렀음)으로 갔고 강을 건너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강 건너는 적진이기 때문에 우리가 건너가기를 망설이자 무장한 현역병들이 건너가라고 강요를 하여 적진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건너간 강은 마침 얼어붙은 곳이 있어서 얼음 위로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날이 음력설날이니까 무척 추웠습니다. 옷을 모두 뺏기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얼음 위를 건넜는데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고 적지역이기도 하니까 바람막이가 되는 곳에 모여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을 했습니다. 소대장을 하던 민영태씨와 김익수씨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강력하게 주장하더군요. 김익수씨 주장은 “우리가 아무런 신분증도 없으니 여기서 각자 흩어져 개인행동을 하면 공비에게 잡혀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대장님도 돌아가시면서 흩어지지 말고 단결해서 끝까지 싸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단체행동을 하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김영필에게 책임이 있다. 김영필이를 찾아가면 그 사람도 우리를 지원해 주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원들이 모두 찬성을 하고 32연대로 갔습니다. 우선 옷을 뺏겼으니 비어 있는 민가에 들어가 신발과 옷을 주워 입고 추위를 모면했습니다.
우리가 건너간 강 언덕에는 민가가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인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러 이러한 사정이라고 말하며 옷을 얻어 입었지만 우리의 얘기를 믿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되는대로 짚새기(짚신)고 고무신이고 주워 신었으니 꼴(차림새)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00연대로 돌아올 때 32연대가 제천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제천TMO에 가서 32연대 3대대 위치를 확인할 생각이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00연대 1대대가 북쪽은 적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적진으로 쫓겨났으니까 제천 쪽으로 한참을 내려오다가 적지를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남쪽으로 강을 건너왔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장정들이 떼를 지어 다니니까 민간인들이 봐도 수상하다고 신고를 하고 현역들에게 발견이 돼도 조사를 받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00연대 1대대로 신분 확인이 갑니다. 그러면 1대대에서는 자기들이 쫓아 버리고도, 도망병이라며 혼을 내 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00연대 작전지역을 벗어나려고 쉬지도 않고 걸었던 생각이 납니다. 1대대하고 합류해서는 우리 유격대가 크게 전투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동에서 후퇴하기 전에 최영찬 대원이 노곡리에서 최초로 전사를 했고 충주로 내려와서는 의성인가 월봉산에 공비 토벌을 하러 나갔다가 얼마간의 전투를 했습니다. 월봉산에 나와 있던 전투경찰의 대장이 김주원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최종성 대장과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나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왜정 때 이동면 면직원을 하면서 보국대를 담당하던 사람이었고 친일적인 사람이었는데 월봉산에서는 전투경찰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종성 유격대장과 김주원 전투경찰대장은 상당히 반가워하고 서로 격려해 주던 생각이 납니다.
▢ 32연대 3대대 및 수색 중대 배속 당시
우리 유격대가 32연대로 가서는 의성, 청송, 의흥, 신령 일대에서 공비 토벌을 했습니다. 전선은 북쪽에 있었지만 공비 등이 일월산에서 팔공산까지 상당한 세력으로 밀고 내려왔기 때문에 항공지원(호주기)까지 받으며 상당한 기간을 상당한 규모로 토벌작전(육군, 해병, 미군 공군 합동 작전)을 했습니다. 공비토벌이 끝나고는 안동에 집결해서 차량 편으로 양평까지 이동을 했습니다. 양평에 도착하던 날 0시를 기해서 보병 제8사단과 전ㆍ후방 임무 교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동에서 양평으로 올 때는 완전군장으로 왔는데 양평에서 부터는 전투 무장으로 군장을 바꾸어 주더군요. 진격을 하면서 가평군 설악면 운악산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했습니다. 양평에 도착 하면서 부터는 우리가 3대대 소속에서 연대 수색 중대로 배속이 변경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운악산 전투부터 수색대 소속으로 한 것입니다. 운악산 전투에서 밀린 중공군이 청평 수력발전소 건너편에 진지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청평 발전소를 건너기 위한 전투가 치열 했습니다. 청평 발전소 도하작전에서는 공군과 기갑부대의 지원도 받았는데 아군의 피해가 많았던 이유는 우리 아군의 일부가 강을 건너가서 절벽에 붙었는데 중공군의 저항이 심하니까 전진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공군과 탱크가 포 지원을 했기 때문에 도강해 있던 우리 아군의 피해가 심했던 것입니다. 청평 발전소 지역은 원래 6사단 소관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2사단도 이곳 발전소를 통해서 강을 건넜거든요. 같이 강을 건너서 6사단은 화천 쪽으로 빠지고 우리 32연대는 가평, 현리 명지산(목동), 광학산(광덕령), 국망봉, 백운동 하오고개, 육단리(금화군 근남면), 사곡리, 오성산(천불산) 373고지를 연결하여 금성까지 진격을 했었습니다. 내가 처음에는 최종성 대장의 연락병을 하다가 32연대의 양평에서 부터는 연대 정보과 OP에 근무를 하면서 전투 상황을 무전 받아서 정보장교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전투를 크게 한곳이 대체로 청평, 현리, 광덕령, 국망봉, 백운동 하오고개, 천불산, 734고지, 373고지 등인데 그 중에서도 734고지 373고지 천불산전투가 제일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373고지 전투 때는 수색중대장이 부상을 당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박영식 중위(정보장교)가 유격대를 지휘한 것으로 기억 합니다. 연대장이 전투현장까지 나갔었고 박 중위도 어딘가 부상을 해서 내려 왔습니다. 나는 연대 OP에서 강** 일등중사와 무전기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아군과 적군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군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도 궁금해서 전투 중에 전방 구호소엘 내려가 보니까 부상자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기명 안윤호 대원이 후송되어 왔길래 어떠냐고 물으니까 지금 다들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끝내 373고지가 점령은 되였지만 그건 우리 유격대가 점령한 것이고, 사실 전술면에서는 무모한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유격대는 자발해서 싸운 것이니까 이제 와서 이러니저러니 해서는 안 되겠지만 군 당국(지휘관)에서는 어떻게 해서 T.O. 마저도 잡아 주지 않았는지 사실 섭섭하기보다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훈장을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이름은 기록돼 있어야 전사를 했어도 기록이 남는 것 아닙니까? 다른 건 다 제쳐놓아도 전사로만은 처리를 해 주었어야지요. 그것이 지휘관의 책임이고 인간의 도리일 것입니다. 우리 생존 대원들이 정성을 모아서 전몰 대원의 추모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이라도 전몰 대원의 명예는 국가가 찾아 주어야 하고 명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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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편 10
성 명 : 고 복 동 (310403-xxxxxxx) 주 소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만세교리 313 직 위 : 독수리유격대원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회원
▢ 창설 과정
나의 고향은 영중면 성동리였지만 우리는 해방 후 일찍 월남을 해서 청량리에 살다가 6·25를 만났습니다. 우리 아군이 수복을 해서 밀고 올라갔다가 채 한 달이 안돼서 후퇴를 한 것 같아요. 그 때 후퇴를 한다고 야단들인데 고향 사람인 김익수씨가 유격대 얘기를 해요. 그래서 유격대엘 들어갔습니다. 김익수씨는 반공 활동도 하고 이북을 넘어 다니던 반공투사로 유명하던 사람입니다. 그 양반의 권유로 독수리유격대를 했습니다.
▢ 00연대 1대대 합류 당시
00연대에서 기억이 남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격대 간부들이 총살을 당하고 우리들은 옷을 뺏기고 쫓겨난 일입니다. 충주까지 후퇴를 해서는 전쟁은 하지 않고 주로 수색 정찰만 다녔습니다. 밤에는 잠복근무를 2개조로 나갔습니다. 32연대로 가던 날 저녁에도 2개조로 나갔는데 어떻게 해서인지 2개조가 한군데로 모이게 되더라고요. 2개조가 차 두 대에 타고 우리 유격대 본부엘 왔는데 거기서 타느니 안타느니 하며 얼마를 지체 했다가 떠났습니다. 32연대로 간다는 사실은 몰랐지요. 우리로서는 그저 어디론가 가는가 보다 했지 작전을 나가는지 이동을 하는 건지 따져 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32연대로 갈 때는 영문을 모른 채 가서 보니까 32연대 3대대라는 사실을 알았고 반면에 00연대로 돌아 올 때는 알았죠. 헌병이 안내를 했고 차도00연대 차를 타고 왔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도망병 이어서 잡혀 온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얘기도 없었고 완전군장 한 채로 돌아 왔으며 헌병들도 우리를 도망병으로 알고 안내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2사단 전체가 이동하기 위해서 제천역(제천인지 확실치는 않음)에 집결해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00연대 추럭이 왔으니까 00연대로 소속이 바뀌어 가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00연대에 도착한 것은 밤이 아니고 오후 늦게였던 것 같습니다. 도착하자 말자 담배 창고(담배를 건조시키는 헛간)에 넣었는데 무장을 해제하고 창고에 넣으니까 뭔가 잘못 됐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때 까지도 도망병이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저녁도 주지 않고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니까 뭔가 이상하다고 우리끼리 수군거리기는 했지만 별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이 구정 날입니다. 아침에 떡국을 주어서 먹었습니다. 떡국을 먹고 난 후에 대장과 간부들이 와서 마지막 얘기를 하고 만세를 부르고 나간 후에 한참 있다가 우리를 집합시키더니 그때부터 너희들은 도망병이라는 겁니다. 너희들도 다 죽여야 하는 건데 간부들이 책임을 졌기 때문에 살려 준다는 것이었고 정월 초하룻날이 상당히 추운 날이었는데 옷을 모두 뺏었어요. 어떤 대원은 팬티만 입었던 이도 있었는데 그때 분위기는 대장들이 총살을 당했으니까 우리도 뭣하면 죽일 참이었거든요. 우리는 이러니저러니 말 한마디도 못하고 칼빈 총을 멘 현 역들이 강까지 인솔을 해서는 건너가라고 하는데 그 강이 물살이 센 곳은 얼지를 않고 잔잔한 곳만 얼어 있었어요. 얼은 부위도 좁아서 여럿이 함께 건너가면 깨질까 봐 한 줄로 서서 조심스럽게 건너갔습니다. 강 건너는 적 지역이니까 맘대로 갈 수도 없고 해서 웅성거리고 있으니까 강 건너서 지키고 서 있던 현역들이 우리들 보고는 거기서 웅성거리지 말고 빨리 딴 곳으로 가라는 겁니다. 그러는 중에 소대장을 하던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데 의견이 여려 가지가 나왔어요. 나는 김익수 소대장이 얘기를 해서 유격대에 들어갔고 거기서도 김익수씨의 의견을 찬성했습니다. 김익수씨는 그 때에도 배짱이 참 좋았거든요. 김익수씨를 다시 유격대장으로 뽑고 우리가 흩어지는 것 보다는 32연대로 가서 유격대를 계속 하자는 의견을 모아서 제천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신분증이 없으니까 철도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데 고생 많이 했습니다. 우리들의 신분을 모르니까 공비들이 아니냐고 문초를 받았는데 대원들이 매를 엄청나게 맞았어요. 그 때도 김익수씨가 “내가 책임자 이니까 내가 책임을 진다. 이 사람들은 공비가 아니니까 때리지 말아라!”하고 배짱 있게 얘길 해서 나중에는 그 사람들(철도경찰)이 열차도 태워 주고, 도와줘서 32연대로 왔습니다.
▢ 32연대 3대대 및 수색 중대 배속 당시
우리는 적군과 직접 전투를 하는 것 보다는 수색 정찰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32연대가 북진을 하면서부터는 전투에 참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포천에서와 안동, 의성, 청송 등지에서 공비 토벌 할 때는 최영찬과 정봉필 대원이 죽었는데 금화 쪽에 북진해서는 많은 대원이 전사를 했고, 김익수 대장도 포로가 됐습니다. 청평을 지나 화야산으로 가면서 정말 치열한 전투를 했습니다. 적에게 우리가 포위당했고 적군이 또 아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아군이 포위를 당하니까 우리 수색 중대 보고 그걸 뚫으라는 겁니다. 그 때 이틀 반나절 동안을 꼬박 굶으면서 작전을 했지요. 이틀 반을 굶으니까 나중에는 지쳐서 적군이 총을 쏴도 움직여지지가 않더군요. 거기서 죽을 고생을 했고 천불산과 373고지에서도 고생을 했습니다. 373고지 전투 때는 현역병 수색 중대 3개 소대와 우리 유격대 2개 소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전투가 끝나고 난 뒤에는 현역과 우리 유격대가 합쳐서 짬뽕으로 2개 소대를 편성했으니까 아군의 피해가 엄청났던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부상자가 아주 많아 나왔고 셋째 날이 돼서야 373고지를 점령했습니다. 첫째 날은 유격대 일부와 현역들은 정면으로 공격하고 내가 소속해있던 소대는 옆으로 돌아서 측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고생을 하다가 오후 늦게 쯤 되서 누군가가 먼저 바위 위로 올라가니까 중공군이 따르륵 하고 갈겼거든요. 내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바위 위에서 총을 맞았는데 끌어 내릴 수가 없어요. 머리만 들면 위에서 갈겨대니까 손만 위로 뻗쳤더니 그 사람 손이 잡히는데 손이 부르르 떨리더군요. 끌어내려 가지고 보니까 배를 맞았는데 그 친구는 자꾸 뒤에서 저를 쐈다고 하더군요. 당가를 만들어서 대원들 넷이 들고 내려오다가 집결지에 다 와 가지고는 한 사람이 또 총에 맞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못 데리고 오고 나중에 총 맞은 사람만 데리고 왔지요.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계속 공격을 하다가 우리 측의 희생만 났거든요. 셋째 날인데 꼭대기에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의지하고 중공군이 버티는 겁니다. 373고지가 지형적으로 우리 아군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곳이었습니다. 보기에는 별것이 아닌데 꼭대기는 바위가 있고 올라가는 능선이 나무가 없고 몸을 가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노출이 되니까 올라가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렵게 해서 바위 밑까지 올라갔을 때는 우리 측 인원이 몇 안됐습니다. 일단 적이 있는 바위 밑에 바싹 붙어 버리니까 적의 직접 사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점심에 반찬이 소금에 절인 감자였는데 그걸 먹어서 그런지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햇볕도 상당히 따가웠고 포탄이 하도 많이 떨어져서 흙먼지가 무릎까지 빠지고 갈증이라는 것이 말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머리 위에는 적군이 있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갈증을 못 참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그 경우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의 생각이고 또 그 경우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도 안 될 것입니다. 평범한 때의 평범한 사람들은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까워하고 적을 무서워하면 그런 군인은 분명히 적군에게 먼저 당하고 맙니다.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고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해서 공격과 점령하려는 욕심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누군가 물을 가지고 오니까 서로들 물을 먹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을 먹느라고 목을 뒤로 젖히니까 따르륵하고 공격을 해서 대원 하나가 목에 총을 맞았는데 피가 그냥 쫙- 하고 뻗칩디다. 그때 소위 한사람이 있었는데 팔에는 부상을 당했는지 처매고는 죽을 각오였는지 그냥 서서 얘기를 해요. 그 사람 얘기가 연대장이고 높은 사람들이 전부 다 부상당해서 내려갔는데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이 고지는 뺏어야 하니까 마지막 돌격을 해 보자는 겁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우리 유격대원 하나가(나는 이름은 모르고 우리 유격대원 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예기로는 송만복 대원이라고 함) 바위 위로 먼저 올라갔어요. 우리가 바위 밑에 붙어 있고 적은 바로 바위 위에 있는 상태였거든요. 적은 수류탄을 던질 필요도 없이 지붕 위에서 마당에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냥 핀을 뽑아서 놓기만 하면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터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소총이고 수류탄이고 포탄이 비 오듯 퍼부었는데 마지막으로 우리가 공격을 할 때는 우리가 움직임을 보일 때만 응사를 했거든요. 나중에는 적군도 실탄 보급이 딸렸던 모양입니다. 바위들이 한길에서 두길 정도였는데 한 사람(송만복 대원)이 올라가서 “없다!”하고 소리를 치니까 우리 아군이 왈칵 덮쳤습니다. 우리는 소위까지 합쳐야 7-8명 됐습니다. 올라가서 보니까 저항하던 놈들이 총도 내 버린 채 맨몸으로 저만큼 뛰어 내려가는데 우리들 서넛이 집중사격을 해도 맞지 않더군요. 그 놈은 살아서 도망을 했지요. 나는 전날 공격을 했다가 내려간 곳에 우리 대원 시체를 그냥 두고 간 생각이 나서 확인하려고 내려가는데 호 속에서 중공군이 손만 보여요. 호 속에 숨어서 손만 들고 있는 겁니다. 그 놈을 잡아서 때리려고 하니까 우리보고 총을 달래요. 그러면 제가 그 아래로 중공군 쪽에다 쏘겠다는 겁니다. 물론 말은 통하지 않고 시늉만으로 아부를 하는 것이지요. 전날 우리 아군이 죽은 곳엘 가보니까 총이고 시체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우리 아군 같으면 노획이라고 해서 총이나 장비를 전부 가져갔을 텐데 그냥 내버리고 갔더군요. 내가 알기로는 373고지 점령 때 적군은 두 명이 살아서 도망을 쳤고 포로를 두 명인지 세 명인지 잡고 포탄지고 올라오던 놈이 몇 명 죽었다는 예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보면 373고지는 적군도 몇 명 없었던 것을 못 뺏고 그렇게 고생을 했습니다. 373고지는 결국 점령은 했지만 우리 아군 측의 피해가 더 많았습니다. 높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도 없고 작전상으로도 그 고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몰라도 꼭 점령을 했어야만 했는가? 의문이 갑니다. 전투를 시작할 때 현역 3소대 우리 유격대 2소대 합쳐서 5개 소대가 공격을 했는데 3일후 최종으로 점령을 했을 땐 현장 인원이 7-8명뿐이었습니다. 고지를 점령하고 나서 현역과 우리 유격대를 통합해서 3개 소대로 편성을 했습니다. 373고지 전투뿐만 아니고 어느 전투에서나 전사한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들이고 앞서 나가 싸우던 사람들입니다. 또 373고지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현역과 우리 유격대의 차이점입니다. 현역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현역병들은 겁이 많았습니다. 마지막 공격조 7-8명 중에 유격대원이 5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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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조사대 회신
국 방 부 조 사 대
조사 23110-448 (736-7161) 1989. 6. 24.
수신 최면택 귀하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벽산빌라 2동 103호)
제목 진정 회신
1. 안녕하십니까? 귀하께서 89. 1. 27 청와대로 제출하신 진정서에 대한 회신입니다.
2. 귀하의 부친 최종성. 삼촌 최종철 형제는 6.25사변이란 엄청난 조국의 국난 시대에 우국충정에서 반공 애국 단체(유격대)를 조직하여 불철주야 반공 전선에서 투쟁타가 뜻하지 않게 고귀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이제 조국의 하늘 아래 산화하신 영령에게 명복을 빌고 그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하며 귀하의 진정 내용에 의거 진실을 올바르게 밝히고자 89.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 간 현재까지의 수사 기록을 검토하여 피 진정인 유창훈에 대한 조사 생존 대원 및 기타 참고인 증언 청취. 총살 현장 답사. 관계 법령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회신하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3. 조사 내용
가. 고 최종성 및 최종철 형제의 활동 사항에 대하여 ○ 진정인의 부친 최종성 및 삼촌 최종철 형제는 6.25사변 이전 3.8선 이북 본적지인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노곡리 966에서 월남하여 서북 청년단에 가입.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약 2년 동안 대동 청년단 및 대한청년단 등 지역 단을 조직하여 경기도 포천군 일동 지역에서 군부대(7사단 예하부대) 및 경찰의 협조 하에 3.8선을 넘어 다니며 적의정보 수집 및 월남민의 길잡이 활동을 하던 중
○ 1950년도 6.25사변이 발발하자 단원을 인솔하고 후방 지역으로 일시 후퇴하였다가 9.28 수복 후 귀향하여 동년 11월경 지역 청년을 증원하여 최종성이 유격대장. 최종철은 작전관. 그 외 부대장. 행정관. 교육관등 간부 5명과 대원 58명. 총 63명으로 구성된 애국 반공 단체인 유격대(독수리 부대)를 재조직하여
○ 1950년 11월 일자 불상 경 당시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화대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 2사단 00연대 1대대 부대대장 대위 김영필의 주선으로 동 부대 유격대로 편입하여 수색. 정찰활동으로 군부대 작전에 동참하고 있던 중
○ 1951. 12월 말경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아군 부대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게 되자 유격대원도 부대와 함께 청평. 양평을 경유 충북 충주시 목행동(당시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까지 후퇴하여 부대는 정비 중에 있었고, 유격대원들은 동 지역에서 적 유격대의 후방 침투에 대비한 수색 정찰 활동을 수행하였음.
나. 유격대 간부 총살 집행 경위에 대하여
○ 1951. 1. 12. 경 유격대원의 부대 편입을 주선한 제 2사단 00연대 1대대 부대대장 대위 김영필이가 소령으로 진급과 동시 동 사단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속하게 되자 자신이 지휘하게 될 부대의 전투력 증강을 목적으로 유격대원을 데리고 갈 것을 계획하고 유격대원들 역시 평소 장비 및 보급품 등에서 현역 군인과 차별대우를 받고 있어 김소령을 따라 갈 것을 희망하고 있던 중
○ 김소령은 제 32연대 3대대장으로 부임 후 부하 참모들과 유격대원 63명을 데리고 오는데 따른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져 소속 대대 정보 장교 소위 박영식에게 제 00연대 1대대에서 유격대원 63명을 은밀히 데려 오도록 지시하여
○ 1951. 2월 초순경 소위 박영식이가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군용차량(일본산 도요다) 2대를 동원하여 유격대원 63명 전원을 제 00연대 1대대(충주)에서 제 32연대 3대대(경북 영천 감천)까지 집단 이동시켜 제 32연대 3대대 소속의 유격대원으로 편입시키자.
○ 1951. 2. 5. 경 유격대원의 집단 이동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제 00연대 1대대장 소령 유창훈이가 헌병 4명을 시켜 유격대원 63명 전원을 제 00연대 1대대로 복귀케 하고 이들을 대대 지휘소 앞 연초 건조실 2개소에 분산 수용(간부 5명은 별도 장소의 감금) 시켰다가
○ 익일인 1951. 2. 6(음력 설날) 10 : 00경 유격대원 63명 전원을 대대 지휘소 앞 공터에 집합 (간부 5명은 앞줄에 별도로 세워 놓음)시켜 놓고 대대장 소령 유창훈이가 직접 유격대원들에게 제 32연대로 집단 이동한 경위를 추궁하면서 군법에 회부하여 전원 처형 하겠다고 하자 유격대장 최종성이가 “유격대원들에게는 책임이 없고 간부 5명이 책임을 지겠다.”고 대답하자 앞줄에 서 있는 유격대 간부 5명에게 “무단이탈 및 도망죄를 적용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 후
○ 유격대원 58명은 연초 건조실에 재차 수용하고 유격대장 최종성을 비롯한 간부 5명은 약 1개 분대의 무장 현역병에 의해 연초 건조실 뒤편으로 연행되면서 연초 건조실 출입문 입구에서 자신들이 착용하고 있던 장갑을 벗어 대원들에게 나누어주고 “대한민국을 위하여 잘 싸워 달라”는 말을 남기고 즉석에서 대한민국 만세 3창을 제창한 연후 동소에서 서쪽 약 150미터 떨어진 남한 강변 언덕 기슭에서 총살을 당하였으며,
○ 유창훈 소령은 과거 자신의 휘하 부대대장이었던 김영필 소령이 자신을 배신하여 하등 협조 없이 유격대원 63명을 부당하게 집단 이동시킨 감정 때문에 군법 피 적용자가 아닌 유격대 간부 5명을 불법 총살시키고 잔류 유격대원 58명을 추방한 행위는 국방경비법 제 49조(살인죄)에 해당되나 공소시효 15년 경과로 공소권이 소멸된 사실임.
다. 잔류 유격대원 추방 과정에 대하여
○제 00연대 1대대장 소령 유창훈은 유격대 간부 5명을 총살 집행한 당일 잔류 대원 58명에 대하여 “너희들은 이제 필요 없으니 갈 곳으로 가라”고 하면서 부대에서 지급하였던 피복 일체를 회수하고 (유격대원들은 각자 사복 위에 군용 방한복 등을 착용하고 있었음) 적 게리라 주둔 지역인 남한강 건너편으로 공포를 발사하면서 추방하자 부대에서 추방된 잔류 유격대원 58명은 남한강 강둑에 모여 앉아 자신들의 진로를 궁리 끝에 대원 중 김익수(현 생존자 : 67세)를 대장으로 새로운 유격대를 조직하여 당시 충북 단양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제32연대 3대대장 소령 김영필을 찾아 가 동 부대 유격대로 편입하였음.
라. 잔류 유격대원 활동 사항에 대하여
○잔류 유격대원 58명은 제 2사단 32연대 3대대의 유격대로 편입된 후 1951. 3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후방 지역에서 공비 토벌 작전(경북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 및 충북 제천. 단양)에 참가하고 2사단이 8사단과 전방 임무교대 후 수행한 각종 전투(경기 가평 설악면 전투. 청평 수력발전소 도하 작전. 가평. 현리. 국망봉 및 광덕령 전투. 강원 화천. 사창리 하오고개전투. 금화 천불산 373고지 전투 등)에 참가하여
○동 전투 기간 중 유격대원 이강록 등 8명 전사, 5명 부상을 당하고 유격대장 김익수는 중공군에게 포로(휴전 후 귀향)가 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1953. 7. 27 휴전 이후 제 32연대장의 귀향증을 받고 각자 고향으로 귀향(대원 중 일부는 현역으로 입대)하여 현재 포천을 중심으로 23명이 생존하여 독수리유격대 기념 사업회를 조직 활동하고 있음.
마. 유격대 간부 5명 시체 처리에 대하여
○ 유격대장 최종성 등 유격대 간부 5명이 총살당한 약 1개월 후 제 32연대 3대대가 충북 단양 지역에서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시 후임 유격대장 김익수 외 2명이 충주 목행리에 임하여 부락민에게 수소문 끝에 연초 건조실에서 서쪽 약 150미터 떨어진 남한 강변 언덕 기슭에 유격대 간부 5명의 시체가 한곳에 매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각자를 분리 매장시켜 놓았다가 휴전 후 귀향한 유격대원의 전갈로 유격대 간부 5명중 유격대장 최종성 및 작전관 최종철 형제의 시체는 1958년 4월 7일 후손과 친지. 옛 동지들에 의해 포천 고향으로 이장되어 선산에 안장되었으나 잔여 3명(인적 불상)은 연고자가 없어 현재까지 동 장소에 매몰 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됨(89. 4. 26 충주 총살 현장 답사 출장 수사 시 충주시 목행동 665-7 최창손(83)외 1명이 총살 사실 및 시체 매몰 장소. 이장사실 등을 증언)
○ 끝으로 조사 내용을 상세히 회신하였으나 궁금한 문의 내용이 있으시면 성심 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사오며, 고인들의 명예회복과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 국방부 장관의 지휘 위로금 (300만원) 및 재향군인회 회장 위로금 (200만원)을 전달하며, 국방부 장관의 휘호는 타 국가유공자들에게 전달한 유래가 없음을 알려 드리고 고인들의 명복과 유족에게 행운이 있기를 거듭 기원합니다.
국 방 부 조 사 대 장
3. 독수리유격대 문헌 독후감경연대회 우수작
제8기계화보병사단 19전차대대 호국성독수리유격대 독후감 경연대회
1 등
소 속 : 본 부 중 대 군 번 : 12-72006087 계 급 : 일 병 성 명 : 김 한 슬
6.25전쟁의 [의병] 독수리유격대를 만나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껏 생각해오던 ‘의병’은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일으켰던 민간인으로 조직된 군대, 혹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무너져가던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마을 단위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군대처럼 옛날 옛적에만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6․25 전쟁 때 조직된 ‘의병’이라는 이 책의 주인공들은 나에게 신선한 반적을 주었고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오로지 흥미로 시작된 나의 독서는 한 장 한 장 쪽수를 더할수록 나를 경건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군인 정신과 애국하는 마음을 느낄 때 마다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6․25 전쟁 때의 숨은 영웅들, 그들의 업적과 고충을 알 수 있었고 전쟁의 산 증인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증언들을 통해 6․25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낄 수가 있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조국을 사랑했던 63인의 독수리유격대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누벼왔던 전쟁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했다. 나라를 사랑하여, 포천을 사랑하여 참여하게 된 6․25전쟁 참전 동기부터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간부 5인, 그리고 그들이 거두었던 성과와 노고들을 후세의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독수리유격대의 활동 상황을 잘 보여주는 신문기사도 첨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기록, 6․25전쟁의 전반적인 진행 내용, 독수리 유격의 활동 내용, 마지막으로 32연대 현역들과 독수리유격대원 본인들의 증언록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독수리유격대의 슬프도록 찬란한 비상
1950년 11월, 소중한 자신의 자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하여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을 오르던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포천을,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북으로 총을 겨누며 달려간 63인의 용사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완전한 애국정신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정신만으로 무장된 독수리유격대였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힌 남한의 진격에 발맞춰 남한 도처에 암약하고 있는 공산군 패잔병들과 월북하지 못한 철원지방의 공산당원들을 토벌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긴 의병이었다. 유격대를 모집하던 최종성 대장을 중심으로 그들은 “타공! 승공! 멸공!”을 외치며 철저한 정신무장과 애향심으로 똘똘 뭉쳤고 공산군 격멸의 선봉장이 되었다.
의병이라고 해서 모집 과정이 허술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원 조회 및 면접을 통해 신원의 진위여부를 가려 대원으로 받아들였고 적과 아군, 경찰에서 얻은 따발총, 장총, M-1 소총 등의 구구각색의 무기로 무장을 했다. 비록 남루하고 통일이 되지 않은 모습 때문에 국군인지 공산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정신력 하나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조직된 그들은 00연대 1대대의 김영필 부대대장의 주선으로 육군에 배속되게 되었다. 00연대는 전투 간에 타 연대에 비해 행군속도가 빠르고 전과획득도 많이 하여 강한 부대로 유명하였는데, 이에 포천 일대의 지형에 전문가인 독수리유격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 제대로 된 보급품과 전투장구류가 절실했던 독수리유격대도 군인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전투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00연대 1대대에서 독수리유격대는 포천 주변의 지형지물에 밝았기에 수색정찰에서의 첨병 역할을 도맡아 했다. 독수리유격대는 그 이름처럼 재빠르고 날샌돌이였다. 허나 반대로 그 덕에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적이 몸을 숨기로 있는 적진의 무명고지를 차상길 대원은 단신으로 재빠르게 올라 정찰의 임무를 마쳤는데 오히려 방심 아닌 방심을 해버린다. 적들도 그가 워낙 빠르고 한 순간에 올랐기에 발포보다는 몸을 숨기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듯 했다. 그리하여 적군이 없다고 오판을 하게 된 수색정찰대는 무명고지를 의심 없이 오르다가 집중 사격을 받게 된다. 그 곳에서 현역 수색대원과 독수리유격대의 최영찬 대원이 안타깝게 전사를 하게 되고 그렇게 독수리유격대는 전우를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이처럼 1대대는 독수리유격대를 소흘하게 대접했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포천 일대를 훤히 꿰뚫고 있는 그들에게 정찰대의 임무를 주고 보고를 믿지 않을 정도니 말 다 했으랴. 독수리유격대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 최선을 다하여 그들이 주는 정찰의 임무를 수행하고 목숨을 바쳤으나 1대대는 마치 갈 곳이 없어 자신에게 빌붙은 군대 마냥 취급을 했다. 독수리유격대가 1대대의 여타 군인들과 다른 점은 군번이 없다는 것이었다. 애국과 구국의 정신으로 모인 자유군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그들은 00연대 1대대의 태도에 실망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자유군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았건만, 자유군인이 적용받지 않는 군법에는 강제적인 적용을 받아 억울한 죽음까지 맞이하게 된다.
억울한 죽음, 그러나 나라를 위해 또다시 바친 목숨
독수리유격대는 중공군의 진격으로 인하여 충청도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로 부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임무 또한 경계근무를 동반한 수색정찰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차별 대우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현역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활약에 준하는 포상은커녕 군 장비와 보급품조차도 현역 군인들과 현저히 차이가 날 정도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어렵고 목숨이 위태로운 수색정찰의 임무를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보고를 무시하고 인색하게 대하는 00연대 1대대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고 그들의 소모품정도로 여겨지는 현실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좀 더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 00연대 1대대 부대대장을 지냈던 김영필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이 되며 동 사단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속되게 되었는데, 그동안 눈 여겨 보았던 독수리유격대를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혁혁한 전과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차별만 받던 독수리유격대 또한 이 제안이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장소가 다른 곳이긴 하지만, 좀 더 나나은 조건을 갖춰 싸우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응하게 되었고, 이는 처참하리만큼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1951년 초순경, 박영식 소위는 김영필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2대의 군용차를 대동하여 독수리유격대를 00연대 1대대가 있는 충주에서 32연대 3대대가 있는 경북 영천까지 비밀리에 집단이동을 집행한다. 00연대 1대대장은 자신의 휘하 부대대장이었던 김영필 소령에게 느낀 배신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오르지 나라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부대에 소속되어 싸웠던 5인의 목숨을 그렇게 허무하게 앗아가 버렸다.
그렇게 5인의 간부가 총살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대원들 또한 00연대 1대대에서 추방되었다. 그 추방과정 또한 너무나도 모질었다. 그 춥디춥던 설날에 대원들은 보급 받은 군용의복을 모두 빼앗긴 채 강 건너 적진으로 추방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대장과 간부들이 총살당한 것이 억울한 마음에 함께 죽을까, 귀가를 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일단 적지를 벗어나는 데에 주력했다. 그리고 모질고 힘든 걸음 끝에 32연대 3대대에 닿았고, 그곳에서 슬프도록 찬란한 두 번째 비상을 시작하게 된다.
새로운 32연대에서의 정착, 그리고 계속되는 전투
슬픔을 잊고, 구국의 마음을 다잡아 32연대 3대대로 복귀한 독수리유격대는 그곳에서도 수색정찰의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공비토벌 임무를 맡았다. 이즈음 중공군의 공세가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고, 전선이 다시 북상하게 되었다. 양평에서부터 전투를 시작해 국망봉을 넘어 김화까지 진격했다. 이때부터 독수리유격대는 연대 수색중대로 배속되었는데 이는 수색정찰의 임무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는 것을 의미 했다. 천불산지구 전투는 지리상으로 그리고 전쟁 흐름 속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투였다. 그래서 32연대는 국군의 최정예의 중요 연대로서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선봉에는 항상 독수리유격대가 있었다. 기상 조건의 악화로 기상조건의 악화로 보급품 공중투하 계획이 실패함에 따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찰의 임무를 수행했을 때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들은 허기진 배를 쥐고도, 중공군 5명을 단신으로 잡아 오는 등 몸을 사리지 않고 전과를 세웠다. 목숨 내놓고 싸우는 독수리유격대와 32연대의 진격으로 중공군 3병단 예하 60군 189사단과제 9병단 소속 20군 59사단을 격퇴하는 성과를 올렸고, 전진진지 확보 작전의 목표인 Ermine선(백암산으로부터 금화를 연결한 선)에 한걸음 다가가게 되었다.
1951년 6월 중순, 제2차 춘계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Ermine선에 이르면서 미군은 전쟁을 그 시점으로 부터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더 이상의 공세보다는 현재 확보한 지점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고, 휴전 본 회담이 시작되고 나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반면 중공군은 Ermine선 방어에 실패하고, 아군이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게 되자 주진지 방어에서 유개진지를 구축하였고 능선들을 교통호로 연결하며 진지 고수 태세를 취하며 진지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수리유격대의 무한한 가치와 존재의 의의
이 책의 주인공인 독수리유격대원들의 존재의 의의를 살펴보면 -
첫 번째로 오르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자생적인 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누가 쉽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 뛰어 들 수 있으랴! 그러나 독수리유격대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에 듯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구국신념의 유격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억지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괴군을 마주하는데 두려움이 없었고,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임무를 수행했기에 그 어떤 임무가 주어지더라도 묵묵히 수행했다. 그래서 어떤 전투에서나 선봉역할을 했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신출귀몰 활약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독수리유격대원 존재의 의의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이것을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것이다. 00연대 1대대에서 군법이 적용되지 않는 의병임에도 불구하고 간부 5인은 무단이탈 및 도망죄로 억울하게 총살 처형을 당했다. 유격대장 최종성을 포함한 간부 5인은 총살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대원들에게 “흩어져서는 안 된다. 끝까지 싸워 달라”는 말로 당부를 했을 정도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컸다. 나머지 대원들 또한 한 겨울날 군복 및 의류를 빼앗긴 채 팬티바람, 맨발, 내복바람에 적진으로 내쫓겼다. 이것은 북괴군에게 잡혀 죽거나, 북괴군이 되라는 의미였을 터인데 누구라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다시 똘똘 뭉쳐 나라를 위해 싸우러 32연대 3대대로 복귀 했다. 그들의 목적은 나라를 지키는 것. 오르지 하나였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분단의 과정을 경험한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점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용감하게 목숨을 걸고 싸워 주었기에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아직까지 생존하여 있기에 그들에게 직접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고, 6.25전쟁을 되새기며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독수리유격대의 무한한 가치와 존재의 의의는 이를 제외하고도 한 없이 많을 것이다. 필자의 표현력과 지식이 부족한 탓에 이들을 모두 일일이 글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이것 하나 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적어도 포천에 몸담고 있는 군인으로서 꼭 알아야 할 것은 이동갈비도 산정호수도 아닌 독수리유격대라고.
지금도 날개 짓 하는 독수리유격대의 정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지금껏 지내온 군 생활을, 더 크게는 지나온 인생의 걸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먼저가 아닌 나라를 먼저 생각하여 행동한 적은 있었는가?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며 무심하고 우둔했던 내 마음을 채찍질 했다. 어쩌면 독수리유격대를 비롯한 수많은 구국장병들의 회생 덕에 우리가 평안과 행복을 현재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세태가 만연해지고 있는걸 아닌지 이 책을 읽고 깊은 생각과 반성을 할 수 있었다.
날이 밝기 위해서는 길고 긴 어두운 때를 거친다. 그러나 그 밝음에 익숙해져 어두운 때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해선 결코 안 될 것이다. 북한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한반도 적화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노동당 규약에서 밝혔듯이 그들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체제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서는 핵실험, 미사일 실험 등으로 비대칭 전력개발에 힘을 쏟고 있음은 물론, 실질적 도발능력 또한 겸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북한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격차에 자만하며 그들의 위협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독수리유격대의 값진 희생을 허투루 보내는 처사일 것이다. 포천의 영웅, 독수리유격대의 정신을 본받아 일전불사의 자세를 견지하고 확고한 안보의식을 겸비하여 언제나 승리 할 수 있는 전투준비태세를 나 먼저 갖춘다면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또 하나의 독수리유격대가 될 것이다.
보병제2사단 32연대 [호국성독수리유격대] 돇독후감 경연대회
1 등
소 속 : 보병 제32연대 4중대 군 번 : 계 급 : 일 병 성 명 : 김 민 수
포천하면 대부분 막걸리와 갈비를 떠올릴 것이다. 너무 유명해 조금은 식상할 법도 한 이 먹거리들에 관한 소문은 이곳에 위치한 많은 군부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적비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고 많은 군부대가 위치해 있는 포천에 전적비가 하나 쯤 있다고 해서 크게 신기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적비가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전적비라고 한다면, 수많은 전국의 전적비들 중 가장 거룩하고 위대할지 모르는 전적비라고 한다면 아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의 집중을 모을 것 같다. 포천시 이동면에 위치한 이 전적비는 바로 독수리유격대를 기리기 위한 비이다.
독수리유격대라고 말한다면 아마 대부분 ‘특수부대인가?’ 또는‘수색대 같은 개념인가?’라고 생각 할 것이다. 이들은 민간인이다.
이 글을 맺으며 나는 여행을 마친 셈이 될 것이다. 여행 마지막 밤이 유난히 평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 여행 중에 보았던 독수리유격대원들의 깊고, 듬직한 눈빛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떠올려본다. 머리 위로 그분들의 존재가 느껴진다. 환한 별이 되어 우리를 내려 보시는 그분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북녘을 향해 그날의 함성을 외치고 계시는 그분들의 충정이 느껴진다.
호국성. 살아선 이 땅에서 나라를 위해 일어나시고 이제는 저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이 나라의 아들들이여. 독수리유격대여! 화려한 날개를 펴고 상공을 매섭게 날아올라라! 애국이란 이름의 바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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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기게화보병사단기갑수색대대 [호국성독수리유격대] 독후감 경연대회
1 등
제8기계화보병사단 기갑수색대대 일병 박진태
6.25 전쟁은 북한이 불법적이고 기습적인 남침으로 일차적으로 우리나라의 영토를 빼앗고 더 나아가 우리들의 존재감과 사상을 뒤바꿔버리고자 시행한 전쟁이다. 그들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로 우리나라를 공략했고, 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우리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 3일 만에 함락 당했으며 점점 뒤로 밀려나 후엔 경상도를 제외한 모든 땅을 내주고 말았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1시간여 정도 걸리는 포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울이 3일 만에 함락 당했으니 서울보다 더 위에 있는 포천은 북한의 남침 후 삽시간에 빼앗겨 버렸을 것이다. 6.25 발발 전 포천의 일부가 북한에 속해있었으니 남침 후 몇 시간 되지 않아 땅을 내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 곳엔 북한에 맞설 수 있는 군인도 그들에게 대적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포천의 땅을 지키고 다시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다해 북괴군과 싸우며 자신들의 땅을 다시 되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결성된 민간인들의 단체인 군번 없는 영웅, 독수리 유격대의 탄생은 이러하였다. 독수리 유격대는 포천 신읍에서 반공 애국 청년 63명이 50년 11월에 창단한 민간인으로만 구성된 조직이다. 처음엔 국군 제 2사단 17연대와 합류하여 경북의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 지역과 충북의 제천, 단양 지역에서 인민군 제 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하고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63명 중 16명이 전사하였고 이 중 5명은 도망병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군 수사 당국에 의한 조사에 의해 누명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독수리 유격대는 자신들의 의지로 만들어낸 조직이여서 엄청난 애국심과 구국신념의 정신으로 참전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맞서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명예나 상훈에는 초연했다. 말 그대로 흔들리는 나라를 세워보고자 총을 들었다는 뜻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공로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국가에서도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세월 속에 잊혀 지다가 유가족들과 전우들의 집중적인 노력과 희생의 결과 1989년 국방부의 전적과 사연을 인정받아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앞서 말했듯이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북한의 불법 남침에 의해 위태로운 나라와 고장을 보고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다. 군번 없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도 없었고 대우도 없이 적들과 싸웠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혁혁한 공을 세웠고 많은 군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난 그저 이들의 희생과 용맹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63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라를 위해 싸울 목적을 가지고 조직을 만든 것부터 정말 대단하다. 그들은 많은 개개인의 사연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나왔다. 그들에겐 나라가 곧 가정이고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부끄러웠던 것이 전쟁이 끝나고 몇십년이 흐른 1989년에서야 그들의 공이 인정받아졌다는 사실이다. 하늘에 계신 순국선열이 보면 정말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이런 것들까지 각오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독수리 유격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 자신에 대한 많은 반성도 하게 되었다. 첫째로 내가 지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포천이라는 곳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그들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그저 포천에 대해선 많은 군부대들로 인해 갈비와 막걸리가 유명한 지역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이번 계기를 통해 독수리 유격대의 희생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참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로 애국이라는 것에 너무 수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군인으로써 국방의 의무를 잘 이행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세금 잘 내고 투표만 꼬박꼬박 잘 하면 그게 애국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수동적인 애국이라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나라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줄 알아야 한다. 독수리 유격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북괴군에 맞섰다. 현 시점에서 목숨을 걸면서 까지 자신의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주변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잘못된 대적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대해 올바르게 일깨워 주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에 대해 그에 합당한 예의와 존경을 갖춰야한다. 더 발전해서는 애국 활동에 자금을 지원해 줄 수도 있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위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 활동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곳에 있든, 어느 자리에 있든 적극적이고 자율적으로 애국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순국선열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과 독수리 유격대원들이 겪은 이야기들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들의 심정과 마음가짐들이 내 마음에 더욱 깊이 와 닿았다. 우리들은 그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였다고 했지만 그들에겐 희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그저 나라를 위한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라를 지키고자 군인도 아니었던 63명의 민간인들이 총과 검을 잡고 북괴들의 무리 속에 뛰어 들었다. 군인은 아니었지만 군인 정신은 그 어떤 군인들보다도 위였다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이야기와 훗날 공로를 인정받아 독수리 유격대 비석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 안 내 ------- 본 자료는 문헌 [포천의 의병 군번 없는 영웅 / 호국성 독수리유격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본 독수리유격대 관련 사실 및 자료의 제공, 요청, 문의와 문헌[호국성 독수리유격대]의 원문 자료를 필요로 하시는 분께서는 commando63@hanmail.net로 신청하시면 전자문서(pdf-Adobe Reader)로 보내드리고자 하오니 많은 활용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후면 페이지
호 국 성 최 면 택 부르지도 않았는데 조국 앞에 모이고 뭉쳐 이 겨래 이 강토 지켜낸 장한 임들이여! 해와 달이 되어 이 나라 살피시고 이 강토 감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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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차 스크랩하신 497번 글 삭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자녀회2013년 6월호 소식지 이달의 호국인물 김갑태 중령 보도란에 572고지(독수리고지) 기록이 수록되어있습니다.독수리고지는 나도국민님의 부친과 동지들의 6.25전쟁사 기록이기도합니다.
관심 고맙습니다. / 고 김갑태중령과 독수리고지는 소재와 시제 소속이 독수리유격대와는 다릅니다. / 독수리유격대는 조금 좌측인 오성산과 대성산 사이 금화지구(철의 삼각지)이고, 김갑태 중령께서는 조금 우측인 인제쪽인것 같습니다. / 우리 유자녀중에서 남달리 많은 자료를 축적하시는 이종영님 선견이 부럽습니다. / 그래서 자주 방문 하고, 많은 지식을 얻어 갑니다. / 이번 현충일 [독수리유격대] 보도자료 중에서 하나 골라 옮겨 놓습니다. / 거북하면 지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