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6월 항쟁에서 주력부대는 대학생이었다. 이것은 4, 19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자유 의사로 학교를 안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인은 점심 시간에 잠시 시위를 할 수는 있어도 직장에 가지 않고 시위를 할 수는 없다. 그런사람들은넥타이 부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40대였던 나는 넥타이 부대도 아니고 이를테면 민간인들 속에 숨어 있다가 적의 후방을 교란 시키는 것이 목적인 게릴라 같은 처지였다. 왜냐하면 나는 당시 철거민들을 위한 빈민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이 가까워지면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변 아파트 주차장의 차 유리창에 에 선전물을 끼어 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낮에는 혼자서 때로는 동료 목사들과 시위현장으로 출근을 했었다. 대부분의 날들은 쏟아지는 최루탄가스에 눈알이 빠질듯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듯이 고통스러웠지만 고문으로 죽어간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인도에 서있던 시민들도 최루탄 가스 속에서도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을었었다.
한 번은 전경들을 피해서 골목으로 들어 섰는데 맞은 편에서 대학생 조카가 뛰어오고 있어서 “조심해라!”라고 한 마디 던지고 서로 반대편으로 향했던 일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의 추격을 피해 남대문 시장 골목으로 몰려 들어온 학생들을 향하여 욕을 퍼 붙는 노점상들도 있었다. 어떤 때는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쓴 학생이 가게로 뛰어들어와 떡살을 담가둔 고무다라에 머리를 그대로 처박는 경우도 있었다.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장사에 지장을 받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니 충분히 그럴 수가 있을 것이다.
어느 한 날은 부산에서 올라온 60대의 조창섭 목사님과 함께 거리로 출근했다가 몇 명의 경찰이 대학생 한 명을 집중 구타하는 것을 보고 경찰들에게 달려들어 항의를 했다. 그런데 경찰들이 "넌 뭐야?' 하더니 머리가 하얀 노인을 때릴 수 없으니까 당시 40대인 나에게 뭇매를 가했다.
내가 맞는 것을 말리던 조 목사님이 "어떻게 민주 경찰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고 나를 때리고 돌아가는 경찰을 붙잡고 늘어지니까 한 경찰이 방독면을 벋으면서 "저희도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 입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니 이해를 좀 해 주세요 "라고 했는데 50대는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회부에 전화를 걸어서 신고를 했다. 동아일보에는 한 줄 기사로 보도가 되어서 기사를 본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 오기도 했었는데 조선일보에서는 "우린 그런 사건 취급 안 해요."라고 했었다.
때로는 대학가를 찾아서 학생들을 격려해야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역곡에 있는 성심여대에서 하는 행사에서 강연을 해야 할 일이 있어 학교에 들어가면서 보니까 이미 전투경찰 중대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집회라고 해봐야 가두 진출은 생각도 못 하는, 얌전한 가톨릭계 여대생들의 교내, 그것도 실내 집회에 혹시나 노심초사하며 경찰이 출동해서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한가한(?) 상황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학교 뒷 산에 있는 문으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총학생회 간부 몇 명이 내가 염려가 되어 정문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문에서 지휘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잡더니 주민등록증을 좀 보자고 했다. 나로서는 '옳다구나'하고 배웅을 하러 나온 총학생회 간부들에게 경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현장 교육을 시킬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신분증 좀 보여 주시죠?"
"뭐야? 감히 경찰 보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
"가짜 경찰인지 어떻게 압니까?"
몇 시간 동안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상황의 변화가 생겨서 긴장하게 된 전경들은 나와 지휘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중대 병력 앞에서 이런 질문을 당하고 보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 앞에서, 지휘관은 부하들 앞에서 벌리는 기싸움이기에 피차 밀릴 수 없는 처지였다. 표정을 보아 생전 처음으로 말도 안 되는(?) 반박을 당한 것 같았던 지휘관을 눈을 부라리며 "당신 지금 누굴 놀리는 거야?"하고 언성을 높였다. 내친김에 나는 '억지가 사촌 보다 낫다'는 원칙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댁들이 가짜 경찰인줄 어떻게 압니까? 이런 장비들은 청계천에 가면 다 살 수 있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경 중에서 몇 명이 감히 자기 지휘관을 모욕하는 듯한 건방진 나의 태도에 대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뒤에서 욕을 했다. 이에 질세라 여학생들이 전경들을 향해서 대거리를 했다.
나는 더욱 냉정하게 "주민등록법에 범죄 혐의가 없이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시겠지요?"라고 했다. 경찰 지휘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자주 볼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물론 협박을 당하면 두렵다. 그러나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어 갔던 그 시절에 그런 협박을 당할 때마다 겁이 나는 것 보다 오히려 더 마음이 굳어졌었다.
한 번은 부천 YMCA 황주석가 전화를 해서 낮은 목소리로 "당분간 조심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내용을 알고 보니 형사들이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지성수 목사! 이 놈 이 번에 한번 혼을 내주자."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음식점 주인이 형사들의 입에서 내 이름을 듣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하다가 YMCA 생각이 나서 혹시나 하고 황 총무에게 전화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식당 주인이 아들을 아기스포츠단에 보내고 있어서 YMCA를 들락거리다가 YMCA의 이사이었던 내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 총무에게 전화를 받은 다음 날 나는 즉시 부천경찰서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서장님! 부하들 입조심 좀 시키셔야 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서장님 부하가 몇 명입니까? 기껏해야 400명밖에 더 됩니까? 정보는 경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천에 노동자 청년 학생 빈민이 몇 명인 줄 아십니까? 우리가 만일에 부천에 있는 모든 경찰들을 감시하려고 결정을 내리면 눈이 몇 개가 되겠어요? 아마 경찰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일단 이 쪽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는 표시로 엄포를 놓고 사태를 처음부터 설명을 했다. 서장은 알았다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했다.
나중에 황 총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지 목사님 경찰서장 되었다가는 큰일 나겠네. 공갈까지 치고." 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는 그 사건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타고 있던 봉고차가 좌회전에서 꼬리 물기를 하다가 애매하게 교통 위반을 했다. 의경이 차를 세우더니 운전사에게 목에 깁스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면허증을 내라고 했다. 죄를 지은(?) 운전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면허증을 내주었는데 옆에 있던 내가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래? 앞 차 따라가느라고 좌회전 신호등이 바뀐 것을 못 본 건데 그런 것까지 딱지를 떼면 가난한 서민들이 어떻게 살겠어?" 하고 거들었다. 각 잡고 엄숙한 표정으로 공무를 집행하던 의경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아저씨는 뭐요? 신분증 좀 내봐요!" 하고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전경이 떫은 표정으로 내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지... 성수?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혹시 목사님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요?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어보니까 "언젠가 조회 시간에 서장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더니 "에이! 그냥 가세요.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민주경찰(?)이었다.
나중에 잘 아는 형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서장이 내가 다녀가고 난 다음에 직원 조회 시간에 "어떤 놈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고 다니느냐?"고 성질을 부렸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서울신학대학에서 지역 연대집회가 있어서 원혜영과 같이 가는데 경찰이 정문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순서를 맡은 우리는 들어가야하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길을 막고 있는 전경들의 뒤쪽에 60도 경사의 언덕이 보여서 양복을 입은 채로 손과 발을 이용해서 기어올랐다. 그런데 앞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전경 한명이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서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다음 순간 전경들 몇 명이 달려오더니 우리를 잡으려고 밑에서 기어 올라왔다. '잡히면 망신이다'싶어 정신없이 능선을 기어 올라가는데 밑에서 올라오던 원혜영이 "알았어!! 알았어!! 내려갈게."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혜영이 바짓가랑이를 붙잡힌 것이다. 나는 거의 다 올라갔지만 할 수 없이 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전경들에게 양팔을 잡혀서 끌려 온 나를 보고 경찰지휘관이 했던 말이 정말 걸작이었다.
"목사님이 이게 뭐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지."
결국 그날 또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취조를 받는데 형사들이 돌아가면서 들어와서 물은 것을 또 묻고 또 묻고 하더니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나갔다. 나는 그 새 피곤해져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디서 "지 목사! 자지 말아요. 여관방에 온 줄 알아?"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나 했더니 벽에 조그만 스피커가 달렸고 벽에 유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한 쪽에서만 볼 수 있는 유리였던 것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싸움에서는 무엇보다 기싸움에 져서는 안 되는 법, 상대방이 부당하게 나올 때는 되받아쳐야하는 법이어서 나는"자는 거 아니요! 기도 하는 거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80년대 나와 경찰의 사이는 “톰과 제리’와 같은 사이였다. 당시 나의 직책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천대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