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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솨봐!”
염화실지에 쓰려고 법문 녹취를 하다가 ‘나를 지켜주는 호신톡’ 법성게 핸드폰 고리 디자인을 하신 박사님이 누구신지 이름을 몰라서 재무스님께 전화를 걸어봤다. 재무스님도 이름은 모르시고 ‘마니불교’라고만 전화번호를 적었다고 하시면서 번호를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연결되어 문자를 보내자 ‘저는 금난 이운정이라고 합니다.’ 하는 답장과 함께 다시 제작하신 상표텍도 보내주셨다.
‘본상품의 채색도해는 용학스님의 감수하에 제작되었습니다.’하는 문구가 반가웠다.
*
3월 첫 번째 월요일 선원 앞의 동백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용학스님은 법회 10분 전쯤에 오셨고, 나중에사 생신 축하를 오신 분들께 점심 공양을 대접하시느라 늦게 내려오셨다는 걸 알았다.
마침 관음재일이기도 해서 범어사 보제루에서 법문도 하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
지난달에 결석하셨던 석교스님이 <화엄경 과목> 책을 받고 싶다고 하셔서 복덕심보살님께 말씀드리려고 후원방에 갔다가 그 책은 지금 없고 다음달에 가져다 드리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을 전하지도 않고 ‘커피마시고 가라’는 말씀에 엉거주춤 눌러앉아 과자까지 받았다.
봉사자들을 살뜰히 챙기시는 재무스님이 법성게 핸드폰 고리도 먼저 하나씩 챙겨주셨다.
“오늘 용학스님 생신인데 준비가 안 되어서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셨다.
항상 큰스님의 차와 간식을 준비해오시다가 여전히 용학스님께도 차와 간식을 가져오시는 보살님께서 조심스럽게 전에 법회 때 용학스님이 ‘중은 그런 거 필요없다’고 하셨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알려드렸다.
“그래요? 그럼 좀 안심이다.”
하고 재무스님이 웃으셨다.
*
마침 용학스님이 오셔서 인사드리고 법성게 핸드폰 고리가 너무 멋지다고 말씀드렸다.
“오늘 법회 온 사람들 한테도 다 나눠줬어요.”
하시면서 선물목록을 이야기하시는데 떡이 있어서 “떡이요?” 했더니 “줄까?” 물으시면서 책가방에서 떡을 꺼내셨다. 뜻밖의 무지개떡을 보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첫돌에 잡귀를 막고 건강과 복을 기원하느라 입히는 색동을 어른이 늙었다는 걸 알지 못하게 하려고 자녀들이 지어 입고 잔치를 벌인다’라는 구절을 최근에 찾아본 적이 있다.
경전이 들어있는 무겁고 엄숙해 보이는 스님의 검은 가방에서 예쁜 무지개떡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와’하고 준비하신 분의 사랑이 몰려 왔다.
“잡사봐.”하고 무심코 떡을 주시는 용학스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다.
*
<유튜브 염화실TV> 화엄법회에서‘부처님의 종성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게송으로도 설하고 산문으로도 설하는 보살들의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큰스님은 두 번이나 우스개소리처럼 일본의 오래된 붕어빵 가게의 사훈을 이야기하셨다.
그 사훈은‘머리부터 꼬리까지 앙꼬’라고 하셨다.
*
연공최귀, 날마다 읽어주시는 경전 말씀이 온통 색동으로 읽히는 봄이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三
[托法進修成行分 第三]
[成行因果周]
[第八會 一品 二千行門]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一
三 . 普慧菩薩의 二百門
2024년 3월 4일 오늘은 가지고 계신 교재로 313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이세간품 보혜보살의 이백문 중에서 ‘십주의 행’할 차례다.
지난 시간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인다고 중간에 다섯째 줄 보현행법까지 하고 꺾었다.
화엄경의 주제가 안으로는 보현심(普賢心)이고, 바깥으로 행하는 것은 보현행(普賢行)이다. 보현법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목에는 맞지 않지만 제가 의도적으로 보현심과 보현행법 까지 잘라서 지난 시간에 마쳤다.
*
수업 들어가기 전에 아까 회장스님께서 대중 공양물 소개하실 때 이 핸드폰 고리를 소개하지 않으셨다.
영원한 우리 화엄 초조 의상조사의 법성게를 해인도 모양으로 도해한 것에 제가 색깔을 넣어서 다포도 만들어 여러 군데에 배포했었다.
아시다시피 법성게는 의상스님이 10년 동안 중국 유학을 가서 화엄을 공부하시고 210자로 60 화엄경의 뜻을 요약해 놓으신 글이다.
이 핸드폰 고리는 재무를 맡고 계신 대선스님께서 불교용품점을 하시는 이운정 박사님께 의뢰해서 디자인을 삼박하게 했다. 그런데 개당 가격이 조금 비싸다. 한 만원씩 한다.
발심해서 300여 개를 만들어서 여기저기 배포하고 스님들한테 공양올리신 대선스님 감사하다.
대선스님이 발의하셨는데 이 박사님이 발심해서 보시하신 것 같다.
어쨌든지 대선스님 공덕으로 여기까지 와서 범어사에서도 오늘 잘 회향 되고 해제하는 스님들께도 회향 되었다.
우리가 화엄 초조 의상조사의 유훈과 의지를 받들어서 이 시대에 화엄산림을 해나가려는 의지가 이렇게 ‘나를 지켜주는 호신톡’이라고 하는 상징으로 잘 정리되어 세상에 공양 되어서 너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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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염화실지를 보면 여기에 QR코드가 있다. Q라고 하는 것은 퀵(quick) 빨리, R은 리스펀스(response) 응답하다, 합쳐서 QR은 ‘퀵 리스펀스(quick response)’ 빨리 응답한다는 뜻이다.
여기 염화실지 표지에 QR코드가 있는데 이 QR 코드하고 지난달 표지의 QR 코드는 같은가? 다른가? 아니면 석 달 전의 것인가?
용학스님 :QR 코드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회장스님 :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이 QR 코드가 움직이는가? 안 움직이는가?
용학스님 : 이 QR 코드를 전에 제가 만들어놨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어른스님께서 방송하신 것은 여기 없겠지요?
회장스님 : 있겠지요.
하하 이러면 안 되는데, 코드를 가만히 보면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계속 움직이는 바 없이 움직인다.
이 안에서 자료가 왔다 갔다 한다.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오늘 아침에 어른스님 강의하신 것이 여지없이 여기 찍어 보면 나온다. 지난달 것을 찍어 봐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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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세간품을 배울 때 원만한 삼세간이라고 배운 바가 있다. 지난 시간에 기세간이 원만하고 지정각세간이 원만하고 중생세간이 원만하다는 내용이 나왔다.
화엄경의 세주묘엄품 주제가 삼세간 원융이다.
융삼세간(融三世間)이 어떻게 가능한가?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기 때문이다.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다. 본제에 있어서는 본래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다 있다. 그리고 계속 변한다.
지금 봄이 되어 나무가 이렇게 자라면서 이파리가 새로 나지 않는가? 그런 것처럼 계속 계속 변한다.
QR 코드가 가만히 있는 것인데, 회장스님께서 한 방에 못 맞추실 줄 알았다. 구닥다리 스님이신데 맞추셨다.
하하하.
그러면 또 한 가지 문제를 내보겠다.
여러분 여기 염화실지 12페이지 한번 보시기 바란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유인물로 나눴던 프린트가 있고, 18페이지에도 유인물 사진에 QR 코드가 붙어 있다.
이 코드는 복사해 놓은 거라서 찍으면 그 내용이 나오겠는가?
용학스님 : 나옵니까? 하하 재미가 없습니다.
그거 찍어서, QR 코드 화면 여기에 갖다 대보시면 밑으로 20페이지 30페이지 또 다른 내용들이 다 딸려 나온다. 필요하신 분들은 그걸 컴퓨터나 폰으로 다운받아서 얼마든지 활용해서 쓰시면 된다.
지난 시간에 안 받으신 스님들께서는 당장에 QR 코드를 찍어보면 유인물 내용이 싹 다 떠오른다.
화면에 이렇게 떠올라온 것은 잡을 수 없다. 그것은 이판(理判)이다. 그런데 그걸 프린팅해서 사판(事判)으로 내면 얼마든지 큰 종이 작은 종이에 인쇄하여 나온다.
이판에서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대소가 끊어지고 원근이 끊어진다. 그렇게 해서 이(理)가 원융하다.
이가 원융하니 지금 여기에서 미국 사람하고 같이 통화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事)가 옆에서 받침이 안 되면 이(理)는 절대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사득이융(事得理融)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고 왕복서에서 이야기했다.
체용(體用)이 불이(不二)다. 몸에는 생노병사 변화가 따르고, 몸의 바탕인 신체가 있고, 신용(身用) 몸의 작용이 있다.
그런데 마음에는 심체가 없다. 불생불멸이다.
그 마음의 작용은 있다. 그 작용은 희로애락을 따라간다.
마음이 번뇌로도 왔다가 맑아지기도 한다. 희노애락을 따라간다. 그런데 그런 것은 마음의 본체가 아니다. 성정본각이 아니다. 마음의 자성청정의 본각은 절대 아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왔다면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헛그림자다.
심체는 텅 비어 있다. 불생불멸이고 무안이비설신의다. 심체가 그렇다. 그것을 조동종에서는 이미(離味)라고 한다.
이세간품이라고 할 때의 이(離)라고 하는 것, 떠났다고 하는 것은 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간(世間)이라고 하는 것은 작용이다. 이미(離味)라고 하는 것은 반야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묘용은 묘유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공이라고 하는 것은 본체, 이(離) 떠났다. 완전히 이념(離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념(離念)이 조금 더 발전하면 무념((無念)이 된다.
이념 위에 무념이라고 본다. 그런 것들이 QR 코드라든지 살림살이라든지 사람을 볼 때도 다 나온다.
물체도 그렇다. 물체의 체가 있으면 물체의 작용이 있다. 물건의 작용이다. 그런 작용을 흔히 색성향미촉법이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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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간품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본래 없다는 것이 이세간품의 전제다.
오온이 개공하다는 전제하에서 보현행원을 써야 된다는 내용이다.
오늘 읽을 부분들은 설명을 안 해도 지난 첫 시간에 구구절절 공부한 내용들이다.
묘한 깨달음이 원만하여 거기서부터 공부를 하는데, 그 묘한 깨달음이 원만하다고 하는 것이 요지일체법의 자성하면 그 자성이 본래 없다는 본체를 이야기한다.
본래 없기 때문에 다 있다.
투명한 색깔이기 때문에 8만 4천 색깔이 같이 동시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오고 감이 없다. 무거무래(無去無來)이기 때문에 완전히 오고 간다.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다.
동정(動靜)이라고 해서 흔들렸든지 부동이든지 동(動)이나 부동(不動)이나 똑같다.
진망 승속이 따로 없다. 진속불이(眞俗不二)다.
이세간품을 쭉 읽고 넘어가더라도 일단 그 전제조건을 깔고 가야 된다. 안 그러면 자꾸 바깥 외변에서만 뱅뱅 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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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범어사에서 이세간품을 준비하다 보니 너무 좋은 구절이 있어서 유인물을 만들어 왔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이세간품은 이와 같은 것을 공부한다는 미리보기다.
유인물 p.1
보살은 열 가지 불법을 내는 길이 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내는 길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① 선지식을 따르는 것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착한 뿌리를 함께 심는 연고며 ②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함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부처님의 자유자재함을 아는 연고며 ③ 큰 서원을 세움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그 마음이 너그러운 연고며 ④ 자기의 착한 뿌리를 인식함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업이 잃어지지 않음을 아는 연고며 ⑤ 온갖 겁에 수행하되 만족하지 않음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하는 연고이니라.
⑥ 아승지 세계에 모두 나타남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중생을 성숙시키는 연고며 ⑦ 보살의 행을 끊지 않음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큰 자비를 증장하는 연고며 ⑧ 한량없는 마음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한 생각이 모든 허공계에 두루 하는 연고며 ⑨ 훌륭한 행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본래 닦은 행을 잃지 않는 연고며 ⑩ 여래의 종족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고 모든 착한 법으로 도와 부지하는 연고며,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대장부(大丈夫)의 칭호를 얻느니라.”
-갑진년 정월 관음재일법문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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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 답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보살은 열 가지 불법을 내는 길이 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내는 길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1. 선지식을 따르는 것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착한 뿌리를 함께 심는 연고다.
2.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함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부처님의 자유자재함을 아는 연고다.
3. 큰 서원을 세움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그 마음이 너그러운 연고다.
4. 자기의 착한 뿌리를 인식함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업이 없어지지, 잃어지지 않음을 아는 연고다.
5. 온갖 겁에 수행하되 만족하지 않음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하는 연고이다.
6. 아승지 세계에 모두 나타남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중생을 성숙시키는 연고다.
7. 보살의 행을 끊지 않음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큰 자비를 증장하는 연고다.
8. 한량없는 마음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한 생각이 모든 허공계에 두루 하는 연고다.
9. 훌륭한 행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본래 닦은 행을 잃지 않는 연고다.
10. 부처님의 종족, 여래의 종족 여래 종자라고 한다. 그들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고 모든 착한 법으로 도와 부지하는 연고다.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그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대장부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리살타를 대장부라 한다. 마하살타를 대장부라 한다.
제일살타를 대장부라 한다. 무상살타를 대장부라 한다.
상살타를 대장부라 한다. 최고의 최승살타를 대장부라 한다.
방금 읽었던 선지식을 따라가고 깊은 마음으로 신행을 하고 서원을 세우고 선근을 제대로 알고 끝없이 수행을 하고 끝없이 중생을 자비롭게 하고 보살행을 끊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대장부다.
대장부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똥폼 잡고 자기가 대장부라 해봤자 대장부는 아니다.
불교에서 대장부는 전형적으로 대승보살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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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의 이름이 나오고 난 뒤에 유인물 2페이지를 보면 아차 싶은 내용들이 나온다.
섬뜩하다 싶을 정도로 이세간품에서 정확하게 우리의 속마음, 수행하는 속마음을 드러낸다. 세상 살면서 우리가 타협하기 쉬운 마음을 여지없이 꼭꼭 찝어 놓는다.
이세간품은 따로 설명을 안 해도 쭉 읽어버리면 자기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은 고쳐지고, 모르는 건 다시 바로 알아지고, 저절로 밝아지는 것 같다.
저 멀리 등대만 쫓아가면 항구에 도착하는 것 비슷하게 이세간품은 구조가 2천 가지 답이 그렇게 되어 있다.
200가지 질문은 ‘어디로 가야 됩니까?’ 하는 것이고 그 답은 ‘저기 등대 보이지?’ 그것만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다.
가야할 길은 이정표로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세간품은 ‘몇 미터 남았다 몇 미터 남았다’ 알려주는 이정표와 똑같다.
유인물 p.2
보살은 열 가지 불법을 잃는 일이 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잃는 일이 있으니,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① 선지식을 가벼이 여기고 불법을 잃으며,
② 생사의 괴로움이 두려워 불법을 잃으며,
③ 보살의 행을 닦기가 싫어서 불법을 잃으며,
④ 세간에 있기가 싫어서 불법을 잃으며,
⑤ 삼매에 젖어들어 불법을 잃으며,
⑥ 착한 뿌리에 집착하여 불법을 잃으며,
⑦ 바른 법을 비방하고 불법을 잃으며,
⑧ 보살의 행을 끊고 불법을 잃으며,
⑨ 이승(二乘)의 도(道)를 즐기어 불법을 잃으며,
⑩ 보살들을 싫어하고 불법을 잃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 법을 멀리 여의면 보살의 생사를 떠나는 길에 드느니라.”
-갑진년 정월 관음재일법문 범어사-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혹시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니, 얼마나 경전에 자세하게 설명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듯이 이렇게 써 놓았다.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해놓고 열 가지를 이야기한다.
1. 이른바 선지식을 가벼이 여기고 불법을 잃으며, 자기가 조금 똑똑하면 우쭐대고 촐랑거리고 그냥 끓지도 않았는데 넘쳐서 빈 깡통이 좀 요란스럽잖은가.
2. 생사의 괴로움이 두려워 불법을 잃으며, 세상 살다 보니까 아프기도 하고 돈도 없고 짜증도 나고 사람도 마음에 안 들면 불법을 포기하는 수가 있다.
‘아, 만사 귀찮다’하고 도망가버린다. 어떻게 제 마음을 그대로 다 표현해 놓았는지 모르겠다.
불법 읽는 것마다 다 제가 써놓은 것 같다.
3. 보살의 행을 닦기가 싫어서, 자리이타행이 아니고 사촌 논 사면 배가 아파서 나는 정로환 사러 가고 이런 식으로 된 것 같다.
4. 세간에 있기가 싫어서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하고 도저히 살기가 싫다. 그러니까 무문관 들어가 버리고 그러지 않는가.
5. 삼매에 젖어 들어 불법을 잃으며, 선방에 딱 들어가서 좌복에서 나 혼자 즐기는 것
6. 선근에 집착하여 불법을 잃으며, 온갖 세상에 좋은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가야 될 길을 잊어버리는 것
7. 바른 법을 비방하고 불법을 잃어버린다. 할 일이 없어서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화엄경을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쭙잖게 ‘니까야’ 같은 것을 좀 읽고 어떻게 비파사나 같은 것을 좀 하다가 남방이다 북방이다, 남방이지 서방이지 하다가 ‘화엄경을 좀 읽어 봤는가?’ 하면 한 번도 안 읽어 보고 화엄경 뭣도 모르면서 막 비방한다.
얄구리하게 양은 냄비같이 해서 무쇠솥이 뭔지도 모르고 정법을 막 비방해 버린다.
솥뚜껑에 지짐 구워 먹으면 맛있다.
양은 냄비는 눌어 버린다.
8. 보살의 행을 끊고 불법을 잃으며, 자리행을 절대 하지 않고 아주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까 스님들한테 조심해야 될 대목이 그 뒤에도 나온다.
9. 이승(二乘)의 도(道)를 즐기어 불법을 잃으며, 사성제나 십이연기 이런 정도를 즐기다 불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10. 보살들을 싫어하고 불법을 잃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 법을 멀리 여의면 보살의 생사를 떠나는 길에 든다.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이세간품을 배우는데 대표적으로 이와 같은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이세간품은 설명을 안 해도 쭉 읽으시면 그냥 스님들께서는 저보다 더 훨씬 더 숙지를 잘하실 것으로 믿고 쭉 진도 나가도록 하겠다.
지금은 십신 질문에 대한 것을 보혜보살이 한다.
보혜, 보(普)자라고 하는 것은 지혜가 광대무변하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보현보살한테 묻는 이유는 보현행원과 보현심이 우리의 ‘화엄의 기치다’라고 볼 수 있다.
2. 十住의 行
何等이 爲發普賢心이며 何等이 爲普賢行法이며 以何等故로 而起大悲며 何等이 爲發菩提心因緣이며 何等이 爲於善知識에 起尊重心이며 何等이 爲淸淨이며 何等이 爲諸波羅蜜이며 何等이 爲智隨覺이며 何等이 爲證知며 何等이 爲力이며 何等이 爲平等이며 何等이 爲佛法實義句며何等이 爲說法이며 何等이 爲持며何等이 爲辯才며 何等이 爲自在며何等이 爲無着性이며 何等이 爲平等心이며 何等이 爲出生智慧며何等이 爲變化며
“무엇이 보현의 마음을 냄이며, 무엇이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무슨 연고로 큰 자비를 일으키며, 무엇이 보리심을 내는 인연이며, 무엇이 선지식에게 존중한 마음을 일으킴입니까?
무엇이 청정함이며, 무엇이 모든 바라밀다며, 무엇이 지혜가 따라 깨달음이며, 무엇이 증득하여 아는 것이며, 무엇이 힘입니까?
무엇이 평등이며, 무엇이 불법(佛法)의 진실한 뜻의 구절이며, 무엇이 법을 말함이며, 무엇이 지님[持]이며, 무엇이 변재입니까? 무엇이 자유자재며, 무엇이 집착 없는 성품이며, 무엇이 평등한 마음이며, 무엇이 지혜를 냄이며, 무엇이 변화입니까?”
*
십주(十住)의 행(行)
*
하등(何等)이
위발보현심(爲發普賢心)이며
하등(何等)이
위보현행법(爲普賢行法)이며
*
이하등고(以何等故)로 : 무슨 연고로
이기대비(而起大悲)며 : 큰 자비를 일으키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발보리심인연(爲發菩提心因緣)이며 : 보리심을 내는 인연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어선지식(爲於善知識)에 : 선지식에게
기존중심(起尊重心)이며 :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청정(爲淸淨)이며 :청정함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제바라밀(爲諸波羅蜜)이며 : 모든 바라밀다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지수각(爲智隨覺)이며 : 지혜가 따라 깨달은 것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들이
위증지(爲證知)며 : 증지 제대로 아는 것이고 확실하게 아는 것이며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력(爲力)이며 : 법력인가. 어떠한 것이 힘이냐,어떠한 것이 정도와 사도를 가려낼 수 있는 법력이냐 삼매의 힘이냐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평등(爲平等)이며 :평등한 것이고 공평한 것이냐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불법실의구(爲佛法實義句)며 : 불법의 진실한 뜻이냐
*
지금 여기서는 설명을 안 하고 쭉 넘어갔다가 나중에 답을 할 때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그때 같이 한번 되짚어보도록 하겠다.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설법(爲說法)이며 : 설법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들이
위지(爲持)며 : 몸에 뼛속까지 골수까지 스며 지니는 것이냐.
잠시 설명하자면 지가 되려고 하면 아주 생각이 깊어야 된다.
념(念)이 되어야 지(持)가 된다.
염두에 둬서 까먹지 않아야 된다.
이런 것은 우리가 앞에 십무진장(十無盡藏)에서 잘 배웠다.
하등(何等)이 : 또 무엇이
위변재(爲辯才)며 : 변재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자재(爲自在)며 : 자유자재한 것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무착성(爲無着性)이며 : 집착이 없는 성품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평등심(爲平等心)이며 : 평등한 성품이 되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출생지혜(爲出生智慧)며 : 지혜를 출생하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변화(爲變化)며 : 변화입니까?
이세간품 맨처음 십신에 관한 질문이 끝나고 200가지 질문이 이어지는데 여기는 십주의 행에 관한 질문을 보혜보살이 보현보살에게 한 것이다.
3. 十行의 行
何等이 爲力持며 何等이 爲得大欣慰며 何等이 爲深入佛法이며 何等이 爲依止며 何等이 爲發無畏心이며 何等이 爲發無疑惑心이며 何等이 爲不思議며何等이 爲巧密語며 何等이 爲巧分別智며何等이 爲入三昧며 何等이 爲徧入이며 何等이 爲解脫門이며 何等이 爲神通이며 何等이 爲明이며 何等이 爲解脫이며 何等이 爲園林이며 何等이 爲宮殿이며 何等이 爲所樂이며 何等이 爲莊嚴이며 何等이 爲發不動心이며 何等이 爲不捨深大心이며 何等이 爲觀察이며 何等이 爲說法이며 何等이 爲淸淨이며 何等이 爲印이며 何等이 爲智光照며何等이 爲無等住며何等이 爲無下劣心이며 何等이 爲如山增上心이며 何等이 爲入無上菩提如海智며
“무엇이 힘으로 지님이며, 무엇이 큰 위안을 얻음이며, 무엇이 불법에 깊이 들어감이며, 무엇이 의지함이며, 무엇이 두려움 없는 마음을 냄입니까?
무엇이 의혹 없는 마음을 냄이며, 무엇이 부사의며, 무엇이 교묘하고 비밀한 말이며, 무엇이 교묘하게 분별하는 지혜며, 무엇이 삼매에 들어감입니까?
무엇이 두루 들어감이며, 무엇이 해탈의 문이며, 무엇이 신통이며, 무엇이 밝음이며, 무엇이 해탈입니까?
무엇이 동산의 숲이며, 무엇이 궁전이며, 무엇이 즐기는 것이며, 무엇이 장엄이며, 무엇이 동하지 않는 마음을 냄입니까?
무엇이 깊고 큰 마음을 버리지 않음이며, 또한 무엇이 관찰함이며, 무엇이 법을 말함이며, 무엇이 청정이며, 무엇이 인(印)입니까?
무엇이 지혜 광명이 비침이며, 무엇이 같을 이 없이 머무름이며, 무엇이 못났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이며, 무엇이 산처럼 더 올라가는 마음이며, 무엇이 위없는 보리에 들어가는 바다 같은 지혜입니까?”
*
십행(十行)의 행(行)
*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력지(爲力持)며 : 힘으로 지니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들이
위득대흔위(爲得大欣慰)며 : 큰 위안을 얻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심입불법(爲深入佛法)이며 :불법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며, 심입하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의지(爲依止)며 : 의지함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발무외심(爲發無畏心)이며 :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까.
화엄경 십지품에 보면 두려움이 있는 마음에 대해 나왔다.
다섯 가지의 두려움을 사람들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남에게 욕 들어 먹을까 하는 것, 내 몸이 아파서 언제 죽을까 말까 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있다.
겁나는 게 없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든지 아니면 깨쳤든지 둘 중에 하나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다.
무외심이며, 무엇이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이냐?
탐욕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일단은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두려움이 없다.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발무애혹심(爲發無疑惑心)이며 : 의혹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부사의(爲不思議)며 : 부사의가 되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교밀어(爲巧密語)며 : 교밀어 아주 알맞게 말재주 있게, 딱 맞는 말로서 비밀한 말이 되느냐?
*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교분별지(爲巧分別智)며 : 교묘하게 제대로 딱딱 맞아떨어지게 분별하는 지혜냐, 잘하는 지혜냐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입삼매(爲入三昧)며 :삼매에 들어감이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변입(爲徧入)이며 : 두루 들어감이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해탈문(爲解脫門)이며 : 해탈문이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신통(爲神通)이며 : 신통이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명(爲明)이며 : 밝음이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해탈(爲解脫)이며 : 해탈인가. 아까는 해탈문이고 여기는 해탈이라고 나왔다.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원림(爲園林)이며 : 원림이며, 원림이 뜻하는 즉사표법(卽事表法) 뜻이 있을 것이다.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궁전(爲宮殿)이며 :궁전인가, 궁전이라고 할 때 궁전이 가진 뜻이 있을 것이다. 화엄경에는 궁전이 너무 많이 나오지 않는가. 우리 입장에서는 문수강당 여기도 그 뜻이 문수궁전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법왕들이 살기 때문이다.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소락(爲所樂)이며 : 제대로 즐기는 것이냐.
즐긴다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고통에 휘말리지 않는 것’을 이미 즐거움이라고 한다.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고통을 넘어서 버리고, 견디고 고통을 즐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엄홍길씨가 히말라야를 정복하면서 그 추위 속에서도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고통은 잊어버리고 오직 그 성취로 가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마찬가지다.
법화경 안락행품에 ‘이것이 안락이다’ 하면서 일러주는 안락은 세속적인 안락하고는 다르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아니라 괴로움 속에서도 괴롭지가 않다. 사지가 다 잘려나가더라도 오온이 개공하기 때문에 안락을 즐길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차원 높은 안락이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할 때는 쫄쫄 배고프고 힘들고 하더라도, 6년 장좌불와라 하더라도 거기서 또 느끼지 못하는 마음의 희열이 있다.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장엄(爲莊嚴)이며 : 장엄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발부동심(爲發不動心)이며 : 부동심을 내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불사심대심(爲不捨深大心)이며 : 깊은 대심, 심대심을 불사 버리지 않음이니까?
심대의 전제 조건은 직심(直心)이 있어야 된다.
곧은 마음, 심심(深心) 깊은 마음, 광대한 마음.
믿음이 성취된 상태를 그렇게 흔히 이야기한다.
공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일단은 정직하고 두 번째는 깊이 받아들이고 얄팍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포괄적으로 널리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안 드는 사람 반대편까지도 전체로 끌어안는 광대함이 있다.
거기서는 방편이 무궁무진하다.
광대심이 나중에 방편심으로 자라난다.
하등(何等)이 : 하등이 무엇이
위관찰(爲觀察)이며 : 관찰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설법(爲說法)이며 :설법이 되고, 반복이다.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청정(爲淸淨)이며 :청정이라고 말하는가.
불교에서 궁금하다는 것은 이 200가지 질문에 다 나온다.
답은 2천 가지로 해놓았다.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인(爲印)이며 : 인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지광조(爲智光照)며 : 지혜 광명의 비춤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무등주(爲無等住)며 : 같을 이 없이 머무르는 것이냐. 이 이 주자라고 하는 것은 여기 10주도 되겠지만 제대로 잘 이해하는 것을 주라고 한다.
불교 수행에서 수행 점차는 무엇인가?
신(信) 해(解) 행(行) 증(證) 하듯이 다른 말로는 교(敎) 리(理) 행(行) 과(果)라고 한다.교리행과( 敎理行果).
교 이치에 머무르고 이치를 잘 이해하는 것을 주라고 한다.
그다음에 오는 행은 수(修)라고 한다. 닦는다고 한다. 수 행이 닦아서 증득된 것을 금강경 같은 데서는 항복이라고 한다.
조복 받았다, 항복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조묵이 있다.
묵언을 할 때도 상묵이 있고 조묵이 있잖은가.
조묵은 ‘예 아니오’ 정도만 대답하고 ‘군말은 하지 마라’ 공부시킬 때 어른스님들이 그런다.
‘니는 하도 말이 많으니까 이제 예 아니오만 하고 다른 말 하지 마. 말 섞지 마. 변명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탐진치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항상 묵언을 많이 시킨다.사고뭉치들은 묵언패를 달게 한다. 그것이 사마타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말을 조절하도록 조묵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다가 상묵에 들어가면 아예 아무 말도 안 한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삼매의 힘을 기르는 것, 말 조절하고 음식 조절하고 잠 조절하고 이런 것들이 수행할 때 제대로 그 분량을 아는 걸 주(住)라고 하는데, 여기는 완전히 너무나 확실하게 잘 알기 때문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빠삭하게 아는 것을 무등주라고 해놓았다.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무하열심(爲無下劣心)이며 : 무하열심이며 어떠한 것이 못났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인가.
못났다는 하열심을 다른 말로는 교만 중에서도 비만이라고 한다. 낮출 비(卑)자 자기 자신을 ‘나는 이런 거 못해’ 이러면서 적당하게 타협해가는 사람들 그걸 비만이라고 한다.
교만 중에서도 아주 지저분한 교만이다.
우쭐대는 교만이 아니고 뺑소니치는 교만 있잖은가.
도망가려고, ‘나는 가진 것도 없는데’ 하면서 옆에 보태지도 않으려고 하는 얍삽한 거 있잖은가.
좀 추잡한 것, 지져분한 것, 그것을 교만심 중에서 하열심이라고 한다.그 밑에 정반대로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여산증상심(爲如山增上心)이며 :여산증상심이냐. 이것은 지 잘났다고 우쭐대는 것,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냥 교만이 치솟아가지고 위로 올라가 있는 증상심(增上心)이다. 증상만인이라고도 한다.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입만 떼면 거짓말하는 사람들이다.
산보다 더하는 교만한 마음이고 앞에 거는 ‘내 주제는 못 깨닫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고 뒤에 거는 ‘나는 다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입무상보리여해지(爲入無上菩提如海智)며 : 위 없는 보리에 들어가는 바다 같은 지혜입니까?
그다음 넘어가겠다.
4. 十廻向의 行
何等이 爲如寶住며 何等이 爲發如金剛大乘誓願心이며 何等이 爲大發起며 何等이 爲究竟大事며 何等이 爲不壞信이며 何等이 爲授記며 何等이 爲善根廻向이며 何等이 爲得智慧며 何等이 爲發無邊廣大心이며 何等이 爲伏藏이며 何等이 爲律儀며 何等이 爲自在며 何等이 爲無礙用이며 何等이 爲衆生無礙用이며 何等이 爲刹無礙用이며 何等이 爲法無礙用이며 何等이 爲身無礙用이며 何等이 爲願無礙用이며 何等이 爲境界無礙用이며 何等이 爲智無礙用이며 何等이 爲神通無礙用이며 何等이 爲神力無礙用이며 何等이 爲力無礙用이며 何等이 爲遊戱며何等이 爲境界며 何等이 爲力이며 何等이 爲無畏며 何等이 爲不共法이며 何等이 爲業이며 何等이 爲身이며
“무엇이 보배처럼 머무름이며, 무엇이 금강 같은 대승의 서원하는 마음을 냄이며, 무엇이 크게 발기(發起)함이며, 무엇이 구경의 큰 일이며, 무엇이 무너지지 않는 믿음입니까?
무엇이 수기(授記)이며, 무엇이 착한 뿌리를 회향함이며, 무엇이 지혜를 얻음이며, 무엇이 그지없이 광대한 마음을 냄이며, 무엇이 묻힌 갈무리[伏藏]입니까?
무엇이 계율과 위의(威儀)며, 무엇이 자재함이며, 무엇이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중생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세계의 걸림 없는 작용입니까?
무엇이 법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몸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소원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경계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입니까?
무엇이 신통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신력(神力)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힘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무엇이 유희며, 무엇이 경계입니까?
무엇이 힘이며, 무엇이 두려움 없음이며, 무엇이 함께하지 않는 법이며, 무엇이 업이며, 무엇이 몸입니까?”
*
십회향(十廻向)의 행(行)
*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여보주(爲如寶住)며 : 보배처럼 머무름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들이
위발여금강대승서원심(爲發如金剛大乘誓願心)이며: 절대 무너지지 않는 금강 같은 대승의 큰 원력이 서원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대발기(爲大發起)며 : 크게 마음을 발심해서 일으키는 것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구경대사(爲究竟大事)며 : 구경에 완벽하게, 끝까지 퍼펙트하게 대사(大事) 불사를 짓는 길이냐? 구경대사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불괴신(爲不壞信)이며 : 무너지지 않는 신심이냐? 절대 신심이냐?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수기(爲授記)며 : 부처를 예약하는 것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선근회향(爲善根廻向)이며 : 선근의 회향이 되는 것이냐?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득지혜(爲得智慧)며 : 지혜를 얻는 것이 되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발무변광대심(爲發無邊廣大心)이며 : 무변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냐? 또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복장(爲伏藏)이며 :복장이며, 엎을 복(伏)자다.
보현행원품 항순중생편에 평등요익일체중생(平等饒益一切衆生) 영득복장(令得伏藏)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갈무리 되어있는 잠복 되어 있는 창고냐?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율의(爲律儀)며 : 계율과 위의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자재(爲自在)며 : 자재함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무애용(爲無礙用)이며 :걸림 없는 작용이냐? 이래놓고 걸림 없는 작용에 대해서 쭉 설명해놨다. 걸림 없는 작용을 쓰는 사람을, 무애(無碍)를 다른 말로 부처님이라고 한다.
보살문명품인가? 거기 현수장에 보면, 삼국유사에 원효스님에 대해 쓰면서 인용한 구절이 나온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은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도(一道) 한 길로 출생사(出生死)라. 생사를 벗어났다’
그것을 흔히 일도장이라고 한다.
또 각림보살의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것도 하도 많이 쓰는데 이것은 유심게라고 한다.
유심게 일도장 이런 것은 화엄경에서 아주 소중하게 다루는 화엄사상 중의 하나다.
*
여기 무애도 많이 나온다.
하등(何等)이 :하등이
위중생무애용(爲衆生無礙用)이며 :중생을 위한 무애용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찰무애용(爲刹無礙用)이며 : 세계를 위한 찰무애용이 되고
그러니까 중생세간 찰무애용은 기세간이다.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법무애용(爲法無礙用)이며 : 법에 걸림이 없는 작용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신무애용(爲身無礙用)이며: 몸에 걸림이 없는 작용이고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원무애용(爲願無礙用)이며 : 원력에 걸림이 없는 작용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경계무애용(爲境界無礙用)이며 : 경계의 무애한 작용이며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지무애용(爲智無礙用)이며 :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인가.
지(智)도, 지혜 지(智)자 하고 지혜 혜(慧)자를 6조 혜능스님은 금강경 서문에서 딱 구분해놓았다.
지(智)라고 하는 것은 혜시지체(慧是智體)요, 혜(慧)라고 하는 것은 지혜의 본체가 되고, 지시혜용(智是慧用)이라. 지(智)라고 하는 것은 혜의 작용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혜(慧)라고 하는 것은 빗자루 혜(彗)자 밑에 마음 심(心)자를 쓴다. 깨끗하게 지저분한 것을 쓰는 것이다.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하듯이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그것이 혜(慧)다.
삼매를 통해서 혜(慧)가 돋아나 깨끗해졌고 거기에서 그 깨끗한 혜체(慧體)의 바탕 위에서 혜(慧)의 원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낸다. 마치 금덩어리 하나가 있으면 금덩어리가 혜체(慧體)가 되고 거기에서 병반차천(甁盤釵釧)이라. 귀걸이 목걸이 만들어 내면 전부 지(智)의 작용이다.
지(智)라고 하는 것은 혜시지체(慧是智體)요, 지(智)는 혜의 작용이라고 6조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도인들 말씀, 성인들의 말씀을 내 마음에 좀 답답하더라도 부합해서 한 번씩 써먹는 것도 좋다.
그를 통해 여기 지혜가 뭔지, 지(智)자가 나오든지 혜(慧)자가 나오든지 무턱대고 보는 것보다는 꼭딱스럽게 근거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이다 이렇게 해놓고,
지(智)의 걸림 없는 작용 또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신통무애용(爲神通無礙用)이며 : 신통의 걸림 없는 작용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정신이, 우리가 신경 ‘몸에 신경이 끊어졌다’하면 신경(神經)은 그것이다. 신은 정신 마음을 얘기하고, 경은 마음으로 가는 길이잖은가.
생각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 버리면, 마취를 시키든지 마비가 되어 버리든지 여기 육체에 마취주사를 놓아버리면, 신경이 마비되어 몸이 아픈 것을 못 느끼잖은가.
어디로 가는 길이 막혀버리는가? 뇌로 가는 길이, 뇌로 전달하는 신경이 끊어져 버린다.
사람을 마취시켜 버리면 그렇잖은가?
골치 아프게 아뢰야식 말라식 유식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 되겠지만, 제일 쉽게 ‘신경이 뭐고?’ 이러면 일반 의사들은 그냥 ‘신경은 신경’ 이라고 하겠지만, 구체적으로 육체가 고깃덩어리에서 연결되어 정신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신경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가 눈구멍 콧구멍 입하고 귀 일곱 개를 갖다가 육체를 주관하는 마음이라 해서 삼혼칠백(三魂七魄)이라 하잖는가.
삼혼묘묘귀하처(三魂杳杳歸何處) 칠백망망거원향(七魄茫茫去遠鄕) 칠백이 육체를 주관하는 마음이잖은가.
눈코입귀, 육체를 주관하는 마음이 여기 다 있다.
이 고깃덩어리가 아뢰야식하고 연결이 다 되어있다.
눈이 뭘 보고 그것이 컵인 줄 안다. 눈이 보려고 해도 아홉가지 조건이 형성 돼야 한다.
눈이 아홉 가지 조건이 형성이 돼야, 아뢰야식까지 조건이 형성이 돼야, 제6 의식까지도 다 조건이 붙어야, 6의식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도 눈알도 있어야 되고, 신경도 있어야 되고 그렇잖은가.
제가 볼 때는 그 신경이 거의 제7 말라식하고 같이 붙어있다. 제6 의식하고 말라식하고 붙어있다.
아뢰야식 속에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야 컵인 줄 알지 않는가.
그러니까 뭘 한 가지 보려고 해도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의식의 상황과 무의식이 동시에 쭉 나와서 알아차린다.
귀가 들으려면 몇 가지 조건인가?
유식에서는 여덟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냄새를 맡든지 맛을 보든지 촉감을 느끼든지 이것은 일곱 가지 조건이 충족이 돼야 분별사식으로써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하잖는가.
그 뒤에 안 보이는 무의식이 이렇게 여기 앉아있는 제모습을
보면서 누구라고 인지하는 것까지도 아뢰야식이 같이 무의식이 작동을 하면서 분별의식이 같이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지 그런 것은 놔두고, 지저분한 얘기로 제가 넘어가서 미안하다.
*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신력무애용(爲神力無礙用)이며 :신력의 걸림 없는 작용이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력무애용(爲力無礙用)이며 : 역의 무애한 작용이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유희(爲遊戱)며 : 유희가 되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경계(爲境界)며 : 경계가 되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력(爲力)이며 : 힘이 되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무외(爲無畏)며 : 두려움이 없음인 무외가 되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불공법(爲不共法)이며 : 부처님의 불공법이 되고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업(爲業)이며 : 업이라고 하는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뭐냐? 저 뒤에 가면 답을 다 설명해 놨기 때문에 그냥 쭉 읽는다. 이정표처럼, 우리가 수행하면서 이제까지 절에 와서 배우면서 인생의 목적이 이세간품에 다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세간품을 좋아하시는 스님들이 굉장히 많다.
저도 화엄경에서 이세간품을 최고 좋아한다. 어른 스님께서도 최고로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세간품만 읽으면 우리가 화엄경 그 메마른 글자 공부하다가 삶의 지향점이 쭉 나타난다.
마치 난초에 물 주고 키우듯이, 그러니까 꽃을 보는 것과 같다. 이세간품을 읽으면 하루하루의 생활의 지침서가 된다.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신(爲身)이며 : 10신 10주 10행까지 끝났잖은가?
10회향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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