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구글 지도
하회마을, 병산서원, 서애산소, 수동재사, 서애(西厓)가 자라고, 묻히고,
배향(配享)된 곳은 모두 구불구불 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 보고 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산소
이날 답사는 재사 건물 보러 왔지, 산소 자리 풍수가 아니라서,
서애 산소는 마을에서 그냥 바라보며 사진만 찍었다.
사진: 마을에서 본 서애(西厓) 산소.
사진 중앙 전봇대와 전선 사이로 보이는 봉분이다.
어딜 가나 사진 좀 찍으려면 전깃줄과 전봇대가 거치적거린다.
이번에 끝나는 대통령이 5년 전 취임할 때 ‘전봇대 뽑겠다’ 고 했는데,
물론 다른 의미로 말한 거지만, 그 동안 얼마나 뽑았는지?
수동재사(水洞齋舍)는 다른 골짜기에 있는데 산소와는 거리가 제법 멀다.
사진: 구글 지도-서애 산소와 수동재사
이런 훌륭한 분 산소에 ‘천하의 명당’ 이라는 이야기가 왜 없겠나?
그런데 서애 산소에 관해서 뒤져 보니 다음과 같은 소리가 또 있다.
“……….정신을 집중해 묘터를 감정한바 결론은 자리가 안 좋다.
수맥이 몇 개가 묘터를 겹쳐 지나가고 있다.
산소 주변을 둘러보니 산소 가까운 몇 미터 지점에,
엎드리면 코 닿는 장소에 좋은 기운이 발견이 되었다.
발견된 장소로 가서 터를 감정하니 명당 길지 터 이다.
몇 시 방향에서 흘러 온 생기 맥이 뭉쳐 있다.
필자의 터 감정이 실수 하였기를 바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명당 음택 터를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점지해 주셨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고인 당사자는
안 좋은 자리에 모셔 드렸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운운……”
명당 찾는 건 결국 발복(發福)하여 후손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인데,
서애가 살아 생전 중하게 쓰이고, 죽고 난 뒤 해가 지날수록 추앙 받고,
그 후손들이 수백 년 동안 안동 아니 영남 일판에서 떵떵거렸으면,
명당 충분한 거지, 무슨 발복이 더 필요하다고 수맥이 어떻고,
코 닿는 장소에 진짜 명당이 따로 있는데…. 가 나오나?
풍산 유씨 대통령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음, 대통령 비서실장 지낸 유우익 씨가 서애 후손이라던데,
그럼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나왔네. 그 일인지하가 사실 천양지차지만.
옛날부터 풍수들 삼신은 남이 한 건 일단 나무라고 본다.
임금의 왕릉이야 나라 제일 풍수-국풍이 정성을 다해 골랐을 텐데,
일껏 정하면 거기 정말 못 쓰는 자리라는 소리가 거의 매번 나왔다.
서울 정도(定都) 할 때도 풍수가 다 달리 이야기 하는 통에 괄괄한 태조가
성질이 나서 볼기를 치게 했는데, 그렇게 맞고 나도 별로 나아진 건 없었다.
수동재사(水洞齋舍)
재사(齋舍)는 서애 산소가 보이는 마을에서 나지막한 산을 돌아가야 나온다.
산소가 원래 재사(齋舍) 바로 뒤 언덕에 있었는데 나중에 이장(移葬)을 한
덕분에 재사와 산소가 상당히 떨어지게 된 것이다.
사진: 수동재사(水洞齋舍) 전경.
먼저 글에서 다룬 두 재사-능동, 금계보다 규모가 아담하다.
풍산 유씨 문중에서 서애(西厓)가 가장 유명한 현조(顯祖)이긴 하지만,
‘맞’이 아닌 ‘기차(其次)’-작은 아들이니 본가 재실인 금계재사 보다야
규모가 작을 수 밖에 없다. 작지만 귀곡산장 분위기는 없다.
언덕과 들, 집, 모두에 양명(陽明)한 기운이 있고, 거무칙칙한
두 재사에 비하여 황토 담벼락이 화사(?)하게 느껴 진다.
문이 잠겨 있고, 관리인과 연락은 되지 않고 하여 밖으로 돌며
사진이나 찍을 수 밖에 없다.
사진: 대문 틈새로 카메라 넣어 찍은 내정과 본채.
대청에 상로재(霜露齋) 현판이 붙었다.
상로(霜露)는 서리와 이슬이니, 예기(禮記)에 ‘봄에 이슬이 촉촉이 내리거나
가을에 서리가 내릴 때마다 그리워한다’ 는 구절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옛날 선비들 이런 식으로 문자 쓰니, 글자 안다고 해도 (글자 아는 것도
결코 쉽지 않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그리워 하다’의 대상은 당연히 조상-여기서는 서애 선생일 테니,
금계재사 영모루(永慕樓)나, 능동재사 추원루(追遠樓)와 역시 같은 발상이다.
사진: 수동재사 평면도
능동이 서원, 금계가 절 양식이라면 이곳 수동재사는 살림집 형태다.
사진: 수동재사 뒤안
서애(西厓)가 가난했을까?
서애, 수동재사의 자료를 뒤지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영의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 왔으나, 가세가 빈한하여 도토리와
나물죽으로 연명하였다 ……..이듬해 3월 초가 삼간(弄丸齋)을 마련하였고…
….사후에도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으니…
같은 구절이 여기 저기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누구 한 사람이 쓴 걸
계속 퍼 날랐던지 무슨 수가 났을 것이다.
서애가 유능, 공정, 사심 없고, 청렴 강직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 가난했을 것으로 연상하기 쉽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서애(西厓)에겐 세전(世傳)-물려 받은 재물이 있었다.
분재기(分財記)
사진: 1594년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 분급문기(分給文記)
한국학자료센터 영상을 캡춰. 원본은 하회마을 양진당과 충효당에서 소장.
양진당은 겸암 유운룡의 종택, 충효당은 서애 유성룡의 종택이다.
저런 화면이 5장인데, 한문에 영상 상태라 읽어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연구한 사람이 있어 그 자료를 인용하면 된다.
‘영남 사림파의 형성’을 저술한 이수건 씨 분석에 의하면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는 서애의 모부인(母夫人) 안동 김씨로,
1594년 연만(年晩)하여 자손들-곧 겸암 유운룡, 서애 유성룡 형제와
세 딸에게 재산을 나눠 주는 내용이다.
딸 아들 장 차남 구별 없이 다섯 자녀 골고루 나누는데, 봉사위(奉祀位)
-쉬운 말로 위토(位土) 조로 조부모, 부모, 양조부모, 양부모 별로
얼마간 따로 떼는 데 이거야 종손-겸암이 관리하지 않았을까?
노비는 모두 146명인데, 서애 몫은 26명이었고,
전답은 모두 1200 마지기인데 서애 몫은 235 마지기였다.
평야와 산골이 차이 있겠지만 산업화 이전 시골에서 열 댓 마지기면
그런대로 살아가지 않았나 싶은데, 서애 몫은 거기에 20배 가량이다.
그런데 서애 재산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가(妻家)가 종실(宗室)로서 광평대군 후손이었다.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데,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죽은
무안대군 방번의 뒤를 이어 주는 양자로 갔다. 광평대군 또한 밥 먹다
목에 준치 가시가 걸려 일찍 죽었지만 양자로 해서 가계는 이어 간다.
서울 수서 대모산 아래 광평대군과 그 후손의 묘역이 있는데, 그게 또 뭐
학익포란형(鶴翼抱卵形)-천년 학이 커다란 날개로 알을 품는다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보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나. 동네 이름이 ‘궁말’이다.)
조선조는 종실들에게 관직에는 일정 제약을 두었지만, 재산은 충분하게 주었다.
당시 딸 아들 구별 없이 나누는 관습에 그 처변(妻邊) 재산이 상당했을 것이다.
처변(妻邊)재산은 처분이야 남편이 함부로 못하지만, 가용(家用)으로 쓰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세가 빈한하여 도토리와 나물 죽으로 연명하였다’는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분석할 필요도 없이 하회 마을 가 보면, 그런 집들 지니는 게
가난해서 될 일인가? 사대부 집 후손들이 그 뒤 무슨 큰 돈벌이를
한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었을 테니, 다 내려 오는 재물 아니었겠나?
‘초가 삼간(弄丸齋)’을 지었을 수는 있겠지만 가난해서가 아니라,
원래 옛날 선비들은 삼간 모옥(茅屋)에서 책 읽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례 조촐하게 치르라고 유언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촐’의 기준이 문제다.
옛날 영남 산골 장례가 부자 집이라고 특히 사치하고 그러는 것은 없는데,
몰려 든 사람 여러 날 퍼 먹이는 게 제일 문제다.
서애 장례면 문상객 구름같이 몰렸을 텐데, 조촐하다고 선별할 수 있겠나?
옛날 문상이 빈소에 절하고 육개장에 머리 고기 먹으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웬만하면 장사까지 본다. 얼마나 있다 출상했는지 몰라도 달을 넘기는 유월장
(踰月葬)만 해도 보통이 아닌데, 서애는 영의정 지냈으니 3월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 조촐하고는 거리가 멀다.
사림파(士林派)의 청빈(淸貧)이란?
영남 사림파가 청빈했을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데,
청(淸)했을지는 몰라도 반드시 빈(貧)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영남 사람은 조선 후기 300년 동안 벼슬 근처에도
못 갔으니 청(淸)할 수 밖에 없었으나, 빈(貧)은 아닌 경우가 많다.
퇴계(退溪) 손자의 분재기는 노비 367명과, 논 1,166 마지기,
밭 1,787 마지기를 다섯 자녀가 나누는 것이었다.
그 외로 사림파의 종장들인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탁영 김일손, 회재 이언적 모두 재력이 상당했다.
그래도 후세에 지은 행장(行狀)이나 묘갈(墓碣)에는 청빈(淸貧)하였다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니, (위 내가 시비건 내용은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빈(貧)은 청(淸)에 괜히 따라 붙은 관용어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렇다고 이런 거유(巨儒)들이 거짓말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냥 스스로 검소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옛날 시골에서 부잣집도 생활은 검소했다.
서울은 사치했는지 몰라도.
영남 남인들이 조선 후기 300년 그렇게 긴 세월 정권에 소외되고도,
노론에 굽히지 않고 각을 세운, 요즘 애들 말로 꼬장을 부릴 수 있었던 데는,
실은 든든한 재력이 뒷받침 한 것 아닐까?
재사(齋舍) 뒤 산소
사진: 재사 뒷동산 손자 묘에서 바라 본 조망.
서애를 이장한 뒤 그 자리에 손자 산소를 썼다.
서애가 옮겨 간 곳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여기도 아늑한 분위기다.
이상
첫댓글 묘자리에 그렇게도 중요시하던 그 시대적 배경에서 오늘을 반추해보면라져가는 요즈음이지요
장례문화 100%
명당 평소 덕을 많이 쌓은 사람만이 차지 한다는 말도 있지요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추운날씨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