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모험사의 전설 됐다, 불굴의 의지 빛난 ‘비박 Best 9’
조선일보
오영훈 월간산 기획위원
입력 2021.06.12 05:19
미국 모험 전문 블로그 <어드벤처저널>에서 세계 모험사를 통틀어 전설적인 비박 9선을 선정해 발표했다. 극한의 환경에서 위기에 몰린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넘어 생존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관철해 낸 역사적 사건들이다.
1. 1953년 낭가파르바트의 헤르만 불
독일-오스트리아 원정대에서 정상 등정에 나선 헤르만 불. 다른 대원은 속도가 느려 도중에 돌아섰다. 불은 계속 치고 나가 홀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다. 8,000미터 봉우리 14개 중에서 초등자가 한 명인 유일한 사례다. 정상에 오른 시각은 저녁 7시였다. 하산 중 크램폰 한 짝을 떨어뜨려 속도가 느렸다. 보온 의류도 산소통도 없었다. 결국 불은 피켈에 의지해 선 채로 밤을 보낸 뒤 이튿날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캠프를 출발한 지 41시간 만이었다.
41시간 동안 홀로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왕복하고 내려오는 헤르만 불. /한스 에르틀
2. 1963년 에베레스트의 윌리 언솔드, 톰 혼바인, 배리 비숍, 루트 저스태드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서 윌리 언솔드와 톰 혼바인은 어려운 서릉 루트를 초등해 정상에 섰다. 둘은 같은 날 사우스콜 루트로 정상에 오른 배리 비숍과 루트 저스태드를 만났다. 비숍과 저스태드는 인공산소가 바닥났다. 넷 모두 너무 지쳐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약 8,500미터 지점에서 눈을 조금 파내고 밤을 보냈다. 당시까지 최고 높이의 비박이었다. 모두 살아남긴 했으나 동상으로 손가락 몇 개를 절단했다.
(왼쪽 사진)에베레스트 서릉에 올라선 윌리 언솔드와 배리 비숍, (오른쪽 사진)196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윌리 언솔드(왼쪽)와 톰 혼바인.
3. 1967년 데날리의 데이브 존스톤, 아트 데이비드슨, 레이 지넷
1967년 2월 28일 세 명은 데날리를 동계에 초등하며 정상에 섰다. 하산 중 해발 5,000미터 즈음에서 눈보라를 피해 설동을 파고 밤을 보냈다. 눈보라가 계속돼 총 6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최저 기온은 한때 섭씨 영하 50도까지 내려갔다.
동계 데날리에서 하산 도중 설동을 파고 비박 중인 원정대원들.
4. 1975년 에베레스트 더그 스코트와 두걸 해스턴.
스코트와 해스턴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최종 정상 등반 일에는 14시간 반을 줄곧 등반해 저녁 6시에 정상에 섰다. 이윽고 달이 뜨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위험하게 내려가기보다는 비박하기로 결정했다. 오를 때 보았던 눈 굴까지 내려가 눈을 깎아 조금 넓힌 뒤 밤을 보냈다. 산소도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했음에도 동상에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9시 캠프로 무사히 하산했다.
1975년 남서벽 신 루트를 개척하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더그 스코트.
5. 1977년 바인타브락의 더그 스코트, 모 앤서인, 크리스 보닝턴, 클리브 로울랜드
이들은 파키스탄의 바인타브락(7,285미터)을 등정한 뒤 며칠을 필사의 비박을 감행하며 내려와야 했다. 스코트가 하강 중 미끄러져 절벽에 부딪히면서 양쪽 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스코트와 보닝턴은 해발 7,000미터 지점에서 식량도 조리기구도 없이 그날 밤을 보냈다. 다른 루트로 정상에 오른 뒤 내려오는 앤서인과 로울랜드가 합류했다. 눈보라가 몰아쳐 함께 설동을 파고 그 속에서 날씨가 좋아지기까지 이틀 밤을 보냈다. 이후 서봉 정상을 넘어 산의 다른 편으로 하산을 계속했다. 하강하던 보닝턴이 추락해 갈비뼈가 두 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해발 6,400미터 이상에서 총 7일의 어려운 비박을 감행한 뒤 마침내 베이스캠프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는 아무도 없었다. 등반대가 모두 사망한 줄 알고 하산한 것이다. 이에 앤서인이 아랫마을로 달려 내려가 짐꾼들을 섭외해 올라오고, 헬리콥터를 동원해 스코트를 긴급 후송한 끝에 가까스로 모두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1977년 바인타브락에서 필사적으로 하산 중인 등반가들.
6. 1978년 K2의 짐 윅와이어
미국인 최초로 루 리카트와 짐 윅와이어가 1978년 9월 5일 오후 5시 20분, K2 정상에 섰다. 리카트는 먼저 하산했는데, 사진기로 촬영하던 윅와이어는 뒤처졌다. 헤드램프도 가져오지 않아 윅와이어는 정상에서 150미터 내려선 곳에 눈을 조금 파내고 밤을 보냈다. 수면에 미끄러지는 사고도 겪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시작되는 곳 10미터 앞에서 겨우 멈추었다. 이튿날 아침 하산을 계속했고 정상을 향해 오르던 존 로스켈리, 릭 리지웨이를 만났다. 윅와이어는 홀로 하산을 계속해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7. 1985년 시울라그란데의 조 심슨
페루 안데스산맥의 시울라그란데(6,344미터)를 1985년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가 알파인스타일로 초등했다. 북릉으로 하산하던 도중 심슨이 빙사면을 추락해 오른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45미터 로프 두 동을 연결해 예이츠는 심슨을 90미터 아래로 내렸다.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예이츠는 실수로 심슨을 오버행 절벽 아래로 매달리게 하고 말았다. 폭풍 속에 둘은 서로 대화할 수 없었다. 심슨은 두 손이 꽁꽁 얼어 로프를 타고 오를 수 없었다. 몸으로 확보를 보던 예이츠는 점차 밀려 미끄러지고 있었다. 1시간 30분간의 사투 끝에 어쩔 수 없이 예이츠는 칼로 로프를 잘랐고 심슨은 크레바스로 추락했다. 예이츠는 크레바스를 수색했으나 심슨을 찾지 못했고, 사망했을 것이라 판단해 홀로 하산해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한편 심슨은 죽지 않고 크레바스에서 밤을 보낸 후, 크레바스 옆으로 기어 나왔다. 이후 사흘을 기어서 캠프로 돌아왔다. 이들은 예이츠가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재회할 수 있었다. 심슨은 사고 후 로프 절단을 비판하는 호사가들을 향해 “예이츠는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내가 예이츠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그를 변호했다.
시울라그란데 등반 출발 직전의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
8. 1996년 에베레스트의 벡 웨더스.
1996년 5월 10일, 미국인 벡 웨더스는 가이드 롭 홀과 함께 사우스콜 최종 캠프를 출발해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고소와 자외선의 영향으로 설맹 증세를 보인 웨더스는 곧 실명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홀은 중간 지점에서 웨더스를 이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하며 다른 이들과 함께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홀은 돌아오지 않았다. 웨더스는 다른 가이드 팀에 끼어 함께 하산하게 되었는데, 이 팀도 무척 속도가 느렸다. 이 가이드는 구조를 요청하러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웨더스는 저체온증이 심해져 의식불명 상태가 된 채로 밤을 보냈다. 마지막 캠프에서 채 300미터가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튿날 아침 구조에 나선 셰르파들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웨더스를 발견했으나 놀랍게도 그는 기절했으나 살아 있었다. 몇 시간 뒤 웨더스는 정신을 차리고 혼자 걸어서 캠프로 돌아왔다.
에베레스트에서 손발과 얼굴에 심한 동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생환한 벡 웨더스.
9. 2003년 블루존 캐니언의 애런 랠스톤
미국 유타주에서 애런 랠스톤은 유타 사막의 블루존 캐니언 탐사에 나섰다. 탐사 도중 비좁은 협곡으로 떨어지면서 팔이 바위틈에 끼고 말았다. 그는 팔이 끼인 채로 다섯 밤을 버텼다. 기온이 내려가고 물도 부족했다. 결국 스스로 팔을 잘라냈고, 13킬로미터를 걸은 끝에 마침내 구조될 수 있었다. 이는 <127시간>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됐다.
협곡의 바위틈에 팔이 끼어 스스로 팔을 절단하고 생환한 애런 랠스톤.